사람들은 알까, 자신보다 공동체의 유지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2,500년전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공동체를 바로 세우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의 길이었다. 공동체가 바로 서지 않으면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은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있었다. 적재적소에 관료든 검사든 기업인이든, 인재들이 필요한 곳에 시민사회의 발전과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80년대의 부모님들이 항상 하셨던, 지금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할 때 제대로 일 해라. 그 말씀을 우리들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다시 해 주고 싶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설사 어떤 이들이 그 말을 배신하고, 자신만을 위해 살며, 거짓과 부정을 일삼더라도 말이다.
"그동안 결코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애를 썼다. 윤동주의 '서시'는 내 삶의 이정표나 다름없었다. 대학에 들어가 당초 꿈꾸었던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운동권 주변을 전전한 것도 그랬고, (중략) 항상 나를 버림으로써 사는 길을 선택해왔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왔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내 가족, 쌍둥이 아들 현재, 경재와 아내를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그 길은 반드시 찾을 것이다." (28~9쪽)
80년대 내내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으로 살았었다. 학교를 나와서 가는 길은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었다면, 나라가 잘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나라 망치는 짓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른 사람들이 그들 사이에 섞여 있다. 초췌한 얼굴로 법정에 선 사람들 말고, 더 많이 있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위법 행위만 하지 않는다고 해서 죄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정치학과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보니 이 사람들은 나와 고민의 차원이 달랐다. 나는 '어떻게 하면 내가 잘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중략) 정치학과에서는 고시를 왜 보느냐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공부한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81쪽)
삼성의 경영이 안정되어 오늘 날 초우량기업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경제를 먹여 살렸는데, 법으로 처벌받는 것이 이재용은 억울하겠지만, 얻은 것이 많으니 그까짓 감옥 생활 정도는 나라면 툭툭 털어버릴 수 있겠다. 잘한 것은 잘한 것이고, 범죄는 범죄이니까 말이다. 치열한 법리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에 관심은 많은데, 지식의 한계로 잘 따라가지 못한다. 죄 지은 만큼만 처벌받기를 바란다.
삼성의 성장과 발전에는 많은 요인이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삼성의 임직원들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다. 이재용도 장충기도 이건희도 기여한 것이 있으리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임직원들과 백혈병으로 세상을 등진 삼성의 직원들도 그들만큼 기여했을 것이다. 삼성의 협력회사들도. 자랑스러운 일이다. 삼성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범죄는 덮어져서는 안된다.
"삼성 이건희 이재용 부자에게 불법상속은 당시나 지금이나 가장 예민한 문제다. 이건희 회장의 최대 과제는 선친인 이병철 회장에서 출발한 삼성그룹을 아들 이재용에게 삼대째 안정적으로 대물림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증여세와 상속세 등을 법대로 모두 낸다면 승계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 재산도 반 토막이 난다. 이걸 피하면서 이재용에게 삼성을 고스란히 물려줄 방법이 필요했다.
이건희 회장은 이 방법을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Bond with Warrant, BW) 등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신종 채권에서 찾았다.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등 삼남매에게 100억원 정도의 돈을 증여하고, 이재용 등은 이 돈으로 삼성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와 삼성 SDS가 새로 발행한 전환사채와 신주인수권부사채를 말 그대로 헐값에 사들인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 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대주주가 된다.
(중략) 거대 삼성그룹을 통째로 인수하면서 이재용이 낸 비용은 최초 60여억 원을 받으면서 낸 증여세 16억 원 정도였다. 이에 비해 이재용이 인수한 주식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그의 재산은 현재 8조원에 달한다." (253쪽)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가슴 아픈 일이다. 이용마 기자의 분석에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명심해야 할 일들이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정치 리더가 되어서는 안되며, 정권 바뀌었다고 뒤로 물러나 내 할 일만 해서도 안된다. 부지런하게 열심히 모두가 뛰어야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의 의석을 합치면 160석이 넘었다. 진보 연대를 충분히 할 수 있는 숫자라고 생각했지만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의 보수 연대를 더 중시했다. (중략) 특히 경제정책은 경제 관료들에게 완벽하게 포위되어 기존의 재벌 중심 경제성장 정책을 답습했다. (중략) 386 정치인들은 콘텐츠가 전혀 없었다. (중략) 국정을 운영할 프로그램이 전무했다. (중략) 노무현 정부는 초반부터 정치개혁에만 주력했고, 그것도 한나라당과의 연대를 염두에 둔 퇴행적 행태를 보였다. 그 결과 여권 분열이 가속화되었다. 정권 초기 대북송금 특검이 대표적이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지만, 노무현은 한나라당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목적에 앞장서서 수용했다. (중략) 한나라당과의 관계 개선은 고사하고,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부를 더욱 혹독하게 비난했다. 노무현이 의도했던 것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 (중략) 노무현은 자꾸 한나라당과 관료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지지층을 잃어갔다.
(중략) 급기야 노무현 대통령은 한나라당에 공식적으로 대연정을 제안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지지층으로부터도 인기를 잃기 시작한 정부와 누가 연정을 하려고 하겠는가. (중략) 이제 야당으로의 정권교체는 명약관화했다. 노무현이나 유시민이 정권 말기에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였으니 급속한 민심이반 현상을 짐작할 수 있다." (290~6쪽)
지난 번 원자력발전소의 건설 재개에 대한 국민대리인단 투표는, 결과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과정은 좋았다. 국회의원들의 토론이나 공청회, 또는 정부의 의지대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이 제도를 좀 더 발전시켜서 비용이 들더라도 국가 주요 의사 결정에 확대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용마 기자는 공영방송의 사장 선거와 국무위원 인사청문회에도 이 방식을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우리가 체택한 민주주의는 대의 민주주의다. 국회에 국민의 대표를 뽑아서 이들이 정책을 결정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국민의 대표라는 자들은 선거가 있는 해에에만 국민의 종복을 자처하며 고개를 숙이고, 일단 선출되고 나면 4년 동안 국민 위에 군림한다. 이에 따라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국민대리인단 제도다. 공영방송 사장에 입후보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여야가 청문회를 실시한다. 청문회를 통해 각 호보자들이 과거에 무슨 일을 했는지, 도덕적으로 문제는 없는지, 업무능력은 갖추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국민대리인단이 지켜본 뒤 투표를 하면 된다.
(중략) 국민 대리인단은 성별, 연령별, 지역별, 학력별 비례 등을 따져 무작위 추첨을 한다. 예를 들어 101명의 홀수로 구성한다면, 여야 대표들이 사전에 추첨으로 뽑힌 101명을 면접한 뒤 자격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최대 50명까지 걸러낸다. 이들이 여야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한다. 국민대리인단은 상시적인 조직이 아니다.
(중략) 우선 국무위원 인사청문회 제도에 적용 (중략) 여야 간에 밀고 당기는 게임이나 거래가 필요 없다. 오로지 개별 후보자의 자격 여부만을 논한다. 이 경우 국민들도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의 효과를 누릴 수 있어 정치 효능감 또한 높아질 수 있다." (352~4쪽)
결국 세상의 변화는 엘리트와 대중의 관계다. 소크라테스나 맹자처럼 겸손하게 공공선을 위해 노력하는 엘리트들이 순박한 대중들과 결합된다면 세상의 발전 속도는 눈부실 것이다. 소수의 엘리트 우선주의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세상은 대중을 무지몽매하게 하고 세상을 퇴보시킨다. 인류 역사가 쌓아온 인권 자유 평등 박애 자본 기술이 그대로 기능하게 한다면 세상은 이미 유토피아다. 역사를 거스르고 인류를 거스르는 엘리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수도 없이 만들어지는 법률들이 그 기능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법치주의를 보완하는 정치와 경제로 한국 사회의 미래를 희망차게 바꿔야 할 것이다.
"혁명의 물결은 거친 파도였지만, 반동의 흐름은 우리들 의식의 저류를 따라 완강히 버텼다. 그 반동의 흐름은 혁명의 물결을 의외로 빨리 잠재우곤 했다. (중략) 민주정부가 성공하려면 국민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면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져야 한다. 말로만 민생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집권 기간 동안 국민의 경제 소득이 증가해야 한다.
(중략) 엘리트들이 장악하고 있는 의사결정 권한을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개혁이 필요하다.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 (중략) 공동체와 인간다운 삶을 목표로 한다면 가지 못할 길이 아니다." (362~6쪽)
최승호가 만든 공범자들에 출연한 이용마 기자는 왜 노조에서 탈퇴하지 않고 해직되는 고난의 길에 들어섰냐고 묻는 질문에 할 말이 없어서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명품과 여유로운 삶, 그리고 위대한 자본. 사치품과 게으른 삶, 그리고 비겁한 자본. 표현을 잘 해야 하는데, 최근 20년 사이에 앞의 표현이 득세하면서 엘리트라는 단어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 그 단어가 사라지면서 비겁한 엘리트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다시 엘리트 또는 인텔리겐쨔에 대한 숙고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촛불 시위로 획득한 민주정부를 또 다시 허망하게 잃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시위가 목표했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이용마 기자의 행복을 빈다.
-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 이용마 지음 / 창비(2017년 11월 초판 5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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