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랜만이다. 공사중인 도서관에 가지 못한지 3주는 되었다. 내 책장을 둘러보다가 십 년 전 읽은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영웅 체게바라. 술과 피곤에 쩔었던 시절이라 졸면서 읽은 책이다. 그 때 받은 인상은 '참 재미없게 썼다'였다. 다시 읽어보자, 멀쩡한 정신과 피곤한 육체로.
체게바라를 읽으며 나는 뭔가를 찾고 있다. 감동이거나 삶의 지표를. 지금의 나보다 훨씬 일찍 죽은 그에게서 그보다 훨씬 오래 산 내가, 감동은 느낄 수 있어도 삶의 지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책장은 넘어가지만 헛발질을 하는 느낌이다. 그냥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 좋겠는데 말이다.
"학창 시절 그가 프랑스어로 된 몰리에르의 작품에서 죽음을 선고하는 마지막 구절을 여러 차례 베껴 쓰곤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교수대를 올라가는 이 장면에 이르면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비록 내가 그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한 줌의 피로써나마 프랑스 땅을 비옥하게 만들 수 있다면 나는 유린당한 민중을 위해 죽어야 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필기시험을 보는 학생 시절의 글이 기질상의 발전을 드러내 준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이 글은 참으로 시사해 주는 바가 많다. 의사이며 고고학자, 작가, 언론인, 사진가, 시인, 체스 선수, 거기에 운동까지 열심히 했던 그는 머지않아 게릴라, 국립은행의 총재, 장관, 그리고 대사직까지 수행하게 될 것이었다. 체가 다면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다만 그의 '나'는 명료하고 집요하게 바로 '우리'로 향하고 있었다." (162~3쪽)
친절에 대한 태도는 사람 나름이겠지만 절망의 밑바닥에는 친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 이런 비참한 일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풍요로운 세상을 살고 있음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체는, 젊은이들에게 또는 나에게 저들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을 찾아보지 않겠냐고 묻는다. 고개가 살짝 돌아간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두렵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 억지로 투신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부과된 노동의 고통을 즐기며 행복과 풍요로움을 즐기는 것. 그 정도로 세상에 대한 책임을 하려 한다. 사실 거짓과 도둑질만 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이다. 1951년 12월 29일에 시작된 '포데로사(power) 도스(two)' 여행기의 한 대목이다.
"생계조차 유지하기 힘든 가난한 가족들에게는 노골적인 적의가 감돌고 있다. (중략) 나는 그 노파에게 가까운 곳에 있는 빈민구호소를 가르쳐주고 이뇨제와 천식을 진정시켜 주는 가루약 약간을 처방해 주는 일 외엔 달리 해줄 게 없었다. 나는 내게 남아 있던 드라마민 몇 알마저 털어주었다. 그 집을 나서는 내 등뒤에는 노파의 감사의 말과 다른 가족들의 냉랭한 눈길이 동시에 쏟아졌다." (77~8쪽)
세상의 모든 젊은이들처럼 알베르토와 에르네스토 또한 사고를 치며 여행했다. 평범한 사람 냄새가 나는 즐거운 기억이다. 평생을 노동했던 그가 비록 젊은 시절이지만 이런 노동을 꺼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운동과 의무로서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로 육체 노동을 근본 활동으로 할 수는 없을까. 정신노동에 감정노동까지 온갖 힘든 노동이 많지만 육체 노동은 매우 특별하다. 노동을 하기 전에 힘들어서 도망가고 싶기도 하고, 노동 과정 중에 흘린 땀의 고통, 중간 중간 휴식을 취하며 느끼는 행복감, 노동 후의 해냈다는 만족감까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일으킨다.
"배삯이 없던 두 사람은 항구를 감시하는 경찰의 눈을 피해 행선지가 북쪽이었던 산안토니오 호에 몰래 올라탔다. (중략) 두 사람은 몇 시간 동안 참다 못해 고약한 냄새가 풍기는 좁은 화장실에서 뛰쳐 나왔다. 그런데 선장은 아량이 있는 사내였다. 두 사람으로부터 약속을 받아낸 선장은 에르네스토에게 화장실을 청소하게 하고 - 그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화장실이었다며 - 알베르토에게는 양파 껍질을 벗기는 일을 시켰다." (78~9쪽)
쿠바 혁명으로 가는 길은 정말 초라했다. 어떻게 승리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주욱 한 번 따라가 볼 수 밖에.
"쿠바에서는 해안으로 접근하는 일체의 시도를 막고 있었다. (중략) 피델에게도 치기 어린 모험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과 집중력이 요구되는 시기였다. 그는 '할머니'라는 뜻인 '그란마'라는 이름의 요트 한 대를 구해 왔다. (중략, 길이 13미터 폭 4.8미터인 그란마 호의) 승선 인원을 세 배나 초과하는 여든두 명을 태울 수 있도록 그란마 호를 개조 (중략) 1956년 11월 25일, 오전 1시 30분, 하얀색의 그란마 호에 마침내 시동이 걸렸다. 여든두 명의 몽상가들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중략) 머지않아 그들은 피델의 말처럼 '해방군 아니면 순교자'가 될 터였다. (중략, 천식환자였던 체는) 돌연 이마를 탁 쳤다. 자신의 약을 싣지 않았던 것이다.
(중략) 12월 2일 새벽, 그란마 호는 라스콜로라디스 해안가에 있는 벨릭이라는 늪지에 좌초되고 말았다. (중략) 선체는 수렁 안에 박혀 버렸으니 하는 수 없이 무게가 나가는 무기들은 포기해야 했다. (중략) 그란마 호의 선체를 발견한 어부의 신고를 받은 당국은 바싹 긴장했다. (중략) 대원들은 먼 거리를 와서야 겨우 그들을 찾는 지원대를 만났다. (중략) 겨우 한숨을 돌리는가 싶었더니 해안경비함정 쪽에서 갑자기 요란한 폭음이 들렸다. 이어 라스콜로라도스의 망그로브 숲위를 날고 있던 쿠바군 소속의 비행기에서 총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겁을 한 대원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배후지역인 시에라마에스트라 쪽으로 움직였다. (중략) 의사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결국 나는 탄약상자를 택했다. (중략) 총알이 난무하는 한복판에서 겁에 질린 대원들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그들의 입을 틀어막느라 안간힘을 썼다. (중략) 그나마 온전히 제대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열네 명에 불과했다.
(중략) 1956년 12월 23일 땅거미가 서서히 내릴 무렵, 피델 카스트로는 장구한 역사가 서려 있는 이 오솔길을 걸어 올라왔다. 그의 곁에는 다시 모인 열아홉 명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 앞에는 현대식 화기로 중무장한 4천 명의 군대가 버티고 있었다. (중략) 그즈음 피델 카스트로가 죽었다는 소문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까지 들려왔다. (중략) 게릴라들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믿은 군 고위층에서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 포진하고 있던 병력의 주요 부분을 철수시켰다.
(중략) 농부의 안내로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각각 이끌던 두 팀이 알토 레히노에서 극적인 상봉을 했다. (중략) 시일이 지나자 대원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농민들의 참여도 늘어 인원이 많이 보충되었다. (중략) 반군들이 라플라타 병영을 접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피델과 미국의 타임지 기자인 허버트 L. 매튜스가 만난 것이다. (중략) 피델은 적잖은 허풍을 섞어가며 자기들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 (중략, 타임지 보도) 사태의 윤곽이 더 잡혀가면 바티스타 장군은 카스트로의 반군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중략) CBS에서 파견한 제작팀이 '쿠바 밀림 속의 전사들'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다. (중략) 그 다큐멘터리는 미국 국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정치적 직감이 뛰어났던 피델은 미국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발언은 가급적 삼가했다. (중략) 그들의 활약상이 신비화 되어 유행가처럼 퍼져가기 시작했다.
(중략, 1957년 5월 체) 우리는 정부군이 민간인들에게 행하고 있는 갖은 만행을 징벌하고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중략) 고문을 일삼던 군인이나 농장 감독의 끄나풀이 바르부도들로부터 혼줄이 날 때면 농민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특히 바르부도들이 총을 놓고 커피 수확을 거들 때면 이들의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중략) 낡은 타자기를 두 손가락으로 두드려가며, 역시 낡은 등사기와 어디서 갖다주는지도 모르는 몇백 장의 종이로 체는 <엘 쿠바노 리브레 El Cubano libre>라는 지하신문을 만들었다. (중략) CIA는 모종의 지원을 반군에게 제공하면서 (중략) 피델로서는 사태를 더욱 급박하게 만들어 미국의 지원을 더 많이 끌어내는 한편 진지한 정치적 파트너를 확보하는 일이 중요했다.
(중략) 정부군의 대공세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군인들에게 게릴라들은 도무지 눈에 띄지도 않고 붙잡을 수도 없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사실 지형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는 데다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연락용 암호 덕분에 마구 고함을 질러대기만 하는 적들에 비해 훨씬 더 신중함을 가질 수 있었다.
(중략) " (198~220쪽)
체는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두 통의 편지. 유난히 이 글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 각자가 외따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점을 늘 기억하여 주기 바란다." (518쪽,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결국 이번에도 체에 대한 것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머리로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그의 삶은 언제나 우리들에게 숙제다. 쿠바의 성공만으로도 세계가 그에게 부여한 과제를 충분히 수행했는데도,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신념에 충실하려고 먼 길을 떠난 체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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