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바람이 매우 차가운데도 장미를 비롯한 여러 가지 꽃들이 생생히 피어 있어서 겨울 속에서도 봄을 즐긴다. 숙소 바로 앞에 작은 올드타운이 있다. 차를 타고 가도 되지만 걷는다. 학생도 거의 없을 듯한 작은 대학 앞을 지나가는데,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평화롭게 거닐고 있고, 그 길을 작고 아름다운 꽃들이 선명하게 장식하고 있다.
행복한 길을 20분 남짓 걸어서 사람들만을 위한 다리를 건너면 올드타운의 문이 있다. 그 문을 지나서 윤기나는 대리석으로 깔린 길들을 걷는다. 벌써 2주째 계속 이런 길들을 걷는 호사를 누린다. 새벽 두 시부터 울려대는 전화, 메시지, 카톡 소리에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잔뜩 올려놓은 라디에이터의 온도도 숙면을 방해해서 눈꺼풀이 까칠까칠했지만 정말 멋진 아침이다.
바다를 만났다. 하얀 교회와 푸른 바다가 조용히 눈앞에 펼쳐진다. 짙은 청색의 바다 위로 수많은 요트들이 선착장에 가득하고, 이따금씩 작은 어선들이 소리없이 지나며, 커다란 여객선도 섬을 돌아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다. 여름이면 무척이나 분주했을 바다가 매우 고요하고 평화롭다. 멀리 자다르를 보호해주는 섬이 눈앞을 가려서 멋진 수평선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아무런 바다 내음도 나지 않는 푸른 바다는 충분하게 아름답다. 두브로브니크에서 시작된 멋진 바닷가 풍경은 끝가는 줄을 모른다. 정말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일까 꿈을 꾸는 것일까.
아직도 저 위쪽으로 풀라와 로빈, 베네치아가 있는 아드리아해가 계속 펼쳐지지만, 그곳까지는 올라가지 못한다. 이제 내륙으로 길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해안까지 잘 포장된 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연주회를 하는 모양이다. 바다 오르간. 사람이 선사한 악기를 파도가 연주한다. 여행 안내서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그런 장치인 줄 알았는데, 감동적인 음악이 들린다. 재능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파도가 만들어 내는 이 음악에서 주제 음률을 찾아내어 멋진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다. 한참이나 거대한 바다 올갠 위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바다를 본다. 건너편 바다 뒷쪽에는 높은 산에서 녹지 않은 눈이 산맥을 이루어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감동으로 잊었던 허기가 아픈 발바닥과 함께 올라온다. 올 때는 좋았는데, 주린 배를 부여잡고 아픈 다리를 끌고 가자니 여간 힘든게 아니다. 아, 인간이여.
골든 게이트 아파트로 돌아와 차를 끌고 선착장으로 갔다. 올드타운은 관광지라 모든 것이 비싸니 선착장으로 가면 그래도 합리적인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주인장의 안내에 따라 차를 끌고 두 바퀴를 돌아 헝그리 아이(lungo male)로 갔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오후 1시가 넘은 외곽의 레스토랑은 규모가 제법 컸다. 2차대전 직후에 프랑스의 니차에서 음식점을 하던 증조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할아버지 때인 1960년에 다시 레스토랑을 열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내전 당시에는 문을 닫았다가 2000년에 다시 열었는데, 150석이 넘는 자리에 6명의 요리사가 음식을 준비한다고 한다. 지금은 비수기라 한 명의 요리사만 있다. 믹스드 미트 플레이트 두 개와 그린 샐러드, 맥주 한 병을 시켰는데, 투박하게 생긴 주인은 우리 가족이 친근했던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열심히 풀어 놓는다. 식사가 나오자 여름에 다시 한 번 오라며 맥주 한 병을 서비스로 더 내 놓는다.
돌아오는 길에 장이 서 있는 광장을 지났다. 잘 정비된 장터에는 오렌지, 감자, 양상치, 파, 마늘이 팔리고 있었다. 가격이 저렴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감자 몇 개, 파 한 단, 마늘 두 개, 양상치 두 개를 샀다. 어떤 할머니는 억센 모습이었고, 감자를 파시는 할머니는 덤으로 감자 한 개를 더 챙겨 주시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주신다.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안된다고 손을 내저으신다.
숙소로 돌아가 욕조에 몸을 푸욱 담그고 틴휘슬을 불었다. 정지용의 향수. 클라이맥스 부분이 잘 안된다. 20년 전 쯤에 서울역 앞 노래방에서 후배가 이 노래를 부르는데 참으로 멋졌다. 높은 라까지 올라가는 고음부도 참 잘 처리한다. 목소리로 안되니 악기로라도 구현해 보려고 여행 전부터 연습을 했지만 아직도 완성하지 못했다. 너무 고음이라 오카리나로도 소화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소프라노 오카리나를 하나 더 구입해야 할 모양이다.
4시가 넘어서 차를 끌고 다시 올드타운으로 갔다. 10쿠나 지폐를 넣었는데도 주차 요금기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4시 이후에는 주차가 무료란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크로아티아 문자로 쓰여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서 알 수 있었다. 자다르에 10쿠나의 팁을 준 것이다.
공원도 가고 멋지게 남아있는 사자상이 지키고 있는 성문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해지는 모습을 보러 바닷가로 갔다. 앞 섬으로 넘어가는 해의 여운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바다 오르간이 연주되는 바다로. 낮 보다도 훨씬 웅장한 소리가 난다. 게다가 태양전지로 충전된 전기로 바닥의 led가 멋진 조명쇼를 보여준다. 분위기에 취해 칠레산 와인(까베르네 소비뇽)을 한 병을 샀다. 24쿠나(4,500원). 황홀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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