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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천국/발칸 크로아티아 여행

스플리트의 가슴 아픈 사진들과 신영복 _160116

우리는 참 사치스런 사람들이다. 세상에는 단돈 천원이 없어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이 많다. 비현실적이기는 하지만 광고를 통해 보는 그 비참한 삶의 모습들은, 여유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삶을 절제하지 못한다. 어제 남긴 닭 삶은 국물에 밥도 말아 먹고, 누룽지도 끓여서 배가 터지게 식사를 마친 후에 스플리트 구경을 나선다. 바람이 매서웠다. 5분 정도 걸어 나왔을 때 카메라의 배터리를 충전해 두고 그냥 나온 사실을 깨달았다. 숙소를 다시 다녀와야 했으나 잘 먹고 잘 잤더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대리석이 반들반들 윤이 나는 거리를 내려오다가 사진 전시회가 열리는 곳을 발견했다. 집 떠난지 30분도 넘고 해서 몸도 따뜻하게 할 겸 들어가기로 했다. 문을 열자 마자 딱 시선을 끄는 놀라운 작품. 수십명의 전사들이 놀란 눈으로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그곳에, 시리아의 소년이 장난인듯 눈을 감고 엎드려 있다. 당당한 군화가 그의 시신을 향해 있다. 이 끔찍한 사진에서 차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곳에는 신도 현자도 없었다. 전쟁광들의 시대. 지옥을 떠났으니, 어디선가 소년은 천국을 발견했을 것이다.


또 한 장의 사진. 맨발이 거친 돌밭을 걷는 모습. 이런 돌밭에 맨발로 나서는 이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이런 가시밭길을 걷게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 것일까. 신은 인간보다 엄격해서 더욱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믿고는 있지만 끊이지 않는 이런 비극들을 앞으로도 얼마나 더 보아야 할까. 그리고 그 비극은 우리나 우리 아이들의 일이 아니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아래 세 장의 사진은 하나의 파노라마 사진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시관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사람 높이의 패널로 전시된 이 사진은 숨을 멎게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시리아의 비극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미안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차가운 날씨지만 성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멋진 거리에는 사람들이 넘쳐 난다. 억센 아줌마들이 제각각 자기의 멸치와 숭어(또는 청어 ??), 고등어(??)를 앞에 두고 열심히 말을 건다. 영어까지 섞어가면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한다. 아침만 아니라면 무엇이라도 사서 들고 돌아다니고 싶었는데, 하루 종일 비린내 나는 생선을 들고 다닐 자신은 없었다. 작은 규모의 생선시장이지만 삶은 치열하다. 오히려 죽음이 더 평화롭다.


성벽 바깥에는 채소와 과일 시장이 열렸다. 오늘이 주말이라 벼룩시장까지 열려 있어서 멋진 구경거리가 생겼는데, 날이 차갑다 보니 사람들이 흥을 내지는 못한다.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고수 한 줌이라도 팔아 보려고 열심인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릿하다. 먹고 사기 위한 몸부림일 수도 있겠지만 애써 키운 농작물을 하나라도 쓸모있게 순환시키려는 고단한 몸짓이 아닐까. 남는 것은 자연 속에서 사그러져도 그만일테지만 말이다.







시장 앞의 바에 들렀다. 다리도 아프고 추워서 쉬기 위해서다. 바에서는 금연이라는 표지판이 있어서 들어갔는데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솔솔 들어온다. 그래도 이곳이 제일 깨끗하겠다 생각하고 앉아서 카푸치노 두 잔과 핫초코 한 잔을 주문했다. 아픈 허리도 어느 정도 풀고 달콤한 우유 거품도 열심히 마시고 있는데, 이런 주인 양반이 카운터에서 담배를 퍽퍽 피워댄다. 흠, 어쩐지 아까 이곳이 이 근처에서 제일 깨끗한 카페라고 했더니 쓴 웃음을 짓는 것이 이상했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그래도 손님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전부 해야 6개의 의자 뿐이고, 그 중 셋을 우리가 차지하고 앉아 있었으니. 손님은 한 명씩 들어와서 맥주 한 병을 마시고 나가곤 한다. 안녕.


블라츠 섬의 유적을 발굴 복원하는 사진전이 열리기에 춥고 다리가 아파서 들어가 보았다. 참 아름다운 사진이었다. 어제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보았던 산골 마을의 모습이 바로 저것이 아니었을까.


지하 궁전은 인당 30쿠나(5,400원)인데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아, 별로였다. 그래도 2,000년 전 사람들의 노고로 만들어진 곳이니 영광스러운 일이다. 한 모퉁이에서는 묘목 시장이 한창이다. 50에서 100쿠나니까 그리 싸지는 않지만 몇 개라도 사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잘 키우지는 못하지만 혹시 강인한 생명력이 있어서 살아만 준다면 좋은 추억을 줄테니.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었다. 아드리아해를 바라 보며 부드러운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춥지 않았다. 거참 맛있네. 내일부터 꼭 하나씩 사 먹어야겠다. 16쿠나.


성내를 돌고 돌면서 과거와 현재가 잘 공존하고 있는 성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다리도 아프고 추웠다. 집에 가고 싶었으나 그리미가 더 돌아다니고 싶다고 한다. 허리도 아플텐데. 피자집에 들렀다. 따뜻한 안쪽 공간에서 숯불 화덕에서 피자를 굽고 있었다. 게다가 금연 공간이어서 공기도 맑았다. 피자 한 판과 럼 펀치, Thick lemon 쥬스를 시켰다. 허 참. 다들 한 판씩 붙들고 먹는 피자를 우리는 셋이서 간신히 먹을 수 있었다. 짜기도 하지만 입맛이 한 판을 소화하는데 어려움이 크다. 럼 펀치는 매우 강렬했다. 황홀하지는 않았지만 독하고 향긋하다. 55쿠나. 2쿠나를 팁으로 더 내려놓았더니 매우 고마워 한다. 가만 있자, 보스니아에서는 음식도 저렴했었는데, 팁을 한 번도 주지 않았네.


한참을 쉬면서 내일부터의 일정을 논의했다. 시간을 줄여서 부다페스트를 가거나 저 윗쪽의 로빈까지 둘러보고 올 것인가가 핵심이었다. 더 많은 것을 보는 것도 좋지만 여유 있는 일정이 좋다는 것에 모두 동의가 되어서 섬도 가지 않고, 자다라와 플리트비체를 거쳐 자그레브까지 여유 있는 6일을 보내기로 했다. 이제 자다르의 숙소만 알아 보면 된다.


성 안팎의 작은 골목길을 더 구경하다가 마리얀 공원을 오르기로 했다. 작은 골목길에 3, 4층의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서 관광객을 맞으며 잘 들 살고 있는 모양이다. 주로 3층의 공간에 걸어둔 빨래줄에는 속옥과 겉옷이 마무 걸려 있다. 아무 무늬가 없는 하얀 속옷들이 많은 것을 보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사시는 곳이 아닐까 짐작된다.









4시가 다 되어 갈 것이라 예상하고 산을 오른다. 어제 설명을 듣기로는 15분이면 오를 수 있다고 해서 여유있게 20분이면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틀렸다. 건장한 크로아티아의 젊은이들에게는 가능한 일이지만 나이 든 코리언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저 멀리 해가 지는 것이 느껴지는데 정상은 보이지 않고 노을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찌된 일일까. 이 멋진 바다의 노을은 볼 수 없는 것일까. 사실 그리 초조해 할 일도 아닌데. 석양이나 일출이나 그리 대단한 광경은 아니다. 그런데도 매번 큰 기대를 한다. 발걸음은 자꾸만 빨라지지만 정상은 멀고 눈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래도 간간이 바닷가 마을의 멋진 모습을 건질 수는 있었다.


석양은 그런데로 좋았다. 흔한 그 모습 그대로 좋았다. 바다로 떨어지는 해는 멀리 깔려있던 구름 덕분에 볼 수 없었다. 자다르로 미루면 된다. 발걸음 가볍게 다시 도시로 내려온다. 콘줌에 가서 다시 닭을 사서 된장국에 감자와 함께 넣어 끓인 뒤 포도주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좋은 하루였다. 오늘도 15,000보를 넘게 걸었다. 중간에 휴식을 잘 취하면서 걸었더니 피로는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리미의 등은 매우 아파 보였다. 심한 바람에 모자가 날렸어도 즐거운 하루였다.


자다르 숙소를 예약하느라 한 시간이 넘게 부킹 닷컴을 뒤졌다. 눈이 아프고 피곤하다. 다행이 일기를 쓸 정신이 생겼다. 신영복 선생님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젊은 교수들과 즐거운 말년을 보내시는 모습이 보기에 흐뭇했었다. 작은 운동장에서 축구도 열심히 하시고, 글씨도 강의도 열심히 하셨다. 무엇인가 도움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부드러운 한학자이면서 만민평등의 경제학자와 한 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한학자이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동학을 창시했던 최제우와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 문득 생각이 든다. 박정희 유신 정권의 폭력만 아니었다면 좋은 학문적 업적을 낼 수 있었던 분이었을 것이다. 은은했던 유머가 그립기도 하다. 고문과 폭력이 없는 행복한 세상에서 많은 현자들과 즐겁게 사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