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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천둥과 벼락이 내려치는 속에서도 어리석게 일하다_170824, Четверг 치띄예르그

새벽에 또 다시 비가 쏟아졌다가 아침 식사를 끝내자 그쳤다. 원래 계획은 예초기로 베어 낸 논둑은 물론이고 논가의 잡초들도 뽑아내려고 했었다. 논을 보기에 예쁘게 가꾸고 싶었다. 하면 좋고 하지 않아도 대세에 지장이 없는 일이다. 수천께서 밭으로 가서 퇴비를 뿌리고 김장용 이랑을 만들자고 하신다. 해야지요. 9시가 지나고 있었고, 비가 내릴 확률은 30%다.


두터운 구름 사이로 해가 간혹 내리 쬐는데 얼마나 강렬한지, 등짝은 불이 나는 듯하고, 체온이 올라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낫으로 퇴비 포대를 찢고 이랑을 따라 가면서 적당량을 뿌려 나간다. 다섯 포대를 다 하고 났더니 숨이 턱에 찬다. 꽹과리를 들고 그늘에 섰다. 삼채 가락 여러 가지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연습을 했다. 박자를 놓치곡 버벅거리고 늘 치던 가락으로만 자꾸 되돌아 간다.  상모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유지해야 한다는데, 박자도 느리고 일정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세 이랑 중에서 두 이랑을 다 하고 났더니 몸살이 날 지경이다. 왼손 오른손을 바꿔가면서 조절을 했는데도 깔개를 깔고 앉아 일하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아서 그런 모양이다. 허리는 예상 보다 덜 아팠고, 구름이 좀 더 짙어지고 햇살이 줄어들면서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30분은 꼼짝없이 소파에 몸을 뉘었다. 3시가 되어 간신히 몸을 일으켜 하나 남은 이랑을 마저 작업하기로 했다. 어머니의 채찍질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여든이 넘으신 어머니는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시는 것일까. 감사할 일이다. 태풍이 지나가듯 세찬 바람이 분다.

이랑의 절반이나 했을까 천둥치는 소리가 가까워 온다. 그래서는 안되는데, 10여 미터 정도 남은 이랑을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뿌려놓은 퇴비가 빗물에 모두 쓸려 내려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니 등짝이 시원해서 일 하기가 좋았다. 천둥과 벼락이 내려치는 가운데서 설마하는 마음으로 일했다. 마음은 바쁜데 허접한 호미의 손잡이가 자꾸 빠져 버린다. 빠지는 손잡이를 다시 끼워가며 일을 마쳤다. 4시다.

반장댁 논으로 흙탕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갔다가 콸콸 흘러 나온다. 완벽하게 끝장을 내는구나. 이 위기를 반장은 어떤 마음으로 넘길까. 피해를 본 논은 그의 총 경작면적의 5%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큰 비가 주된 원인이지만 부실한 사방공사로 직접 원인을 제공한 민씨네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또 다른 피해자인 낚시터는 어떻게 대응할까. 농작물 재해 보험은 가입했을까. 여러 가지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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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는 동안 윗주머니에 꽂아 두었던 안경을 분실했다. 신고는 했지만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극장으로 직접 찾아가려 했으나 마트에서 만원에 돋보기를 새로 사는 것으로 정리했다. 


택시운전사는 예술성과 재미를 갖추지는 못했다. 스토리의 완성도와 예술성에 좀 더 심혈을 기울였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도 계속 눈물을 찍어내며 보아야 할 정도로 광주시민들의 희생은 참담했다. 어째서 그 많은 가해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도 반성과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을까. 인간은 사실 개나 다름없다. 생존만 있을 뿐 참회가 없기 때문이다. 위르겐 힌츠 페터와 택시운전자 김사복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


[ 나무 위키 중 일부 ]

실제로 위르겐 힌츠페터와 헤닝 루모어가 카메라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담은 내용은 21일 저녁 나리타 공항에서 독일로 보내졌고, 22일 저녁 (중략) 즉시 보도되었다. 그리고, (중략) 그 해 9월에는 《기로에 선 한국》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방송되었다. 이 《기로에 선 한국》 다큐멘터리는 독일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가톨릭 신부들이 번역해서 국내로 들여온 이후, 언론통제하의 제5공화국 시절에 비디오로 복제되어서 은밀하게 재야에 유입되었고 성당과 대학가 등에서 상영되었다.

그리고 1987년 5월 부산 가톨릭센터에서 최초로 상영되었는데, 이 상영을 주도한 부산의 인권 변호사들이 훗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노무현 前 대통령과 문재인 現 대통령이었다. 전국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소속 신부들이 이 테이프를 몰래 녹화하여 각 소속 성당에서 몰래 상영해주었다. 주로 외부 침입이 어려운 성당 지하나 구석진 곳에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커텐까지 닫아 몇 명을 조를 짜서 침입에 대비하여 보초를 서기도 했다. 그래서, 특히 가톨릭 신자들의 상당수가 이 비디오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