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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천국/발칸 크로아티아 여행

두브로브니크의 성벽 위에서 기적처럼 날이 개다_160114

아침은 언제나처럼 초라하게 커피와 크로아상과 와인과 비빔밥으로 간단하게 먹었다. 비가 많이 내리지는 않았지만 모자를 쓸 정도는 되었다. 차를 얻어타려고 했지만 열 대 정도의 차가 모두 그냥 지나갔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마침 타야 할 6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표를 미리 사두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12쿠나짜리 버스표 3장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는 동안에도 버스는 출발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승차했다. 9쿠나(버스에서 표를 끊으면 15쿠나 / 11쿠나 2천원)를 절약해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아깝다.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서 아찔한 아드리아해의 절벽을 잠깐 보여주는 듯 하더니 올드 타운의 성벽 앞에 도착한다. 모든 사람이 내렸다. 멍하니 앉아 있었으면 못 내릴 뻔 했다.





비가 쏟아진다. 장미비가 주룩주룩. 음. 포기하는 심정으로 왼쪽 어깨를 빗물로 전부 적셔가면서 성문으로 들어갔다. 메인 도로를 걸으면서도 빗물 때문에 큰 감흥이 오지 않았다. 낙수물 받이 괴물의 얼굴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본 것이 그나마 유일한 수확이었다. 어제밤 늦게까지 정지용의 생애와 그의 시를 읽었다.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 고향을 제외하고는 다른 시들은 큰 감동을 주지 못했다. 몇 번은 더 읽어야만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이런 곳을 보지 못하고 식민시대와 전쟁의 와중에서 죽었다. 폭탄을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비를 맞으며 30여 분간 돌다가 성벽으로 올랐다. 표를 사는 곳이 없어서 그냥 올라갔다. 설마 성벽이 아니겠지. 눈앞에 아름다운 경치들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런 세상에. 비가 기적처럼 그치고 두껍게 쌓여있던 먹장 구름이 쫓기듯 디나르 알프스를 넘어서 사라지고 있었다. 바람이 약간 차가워지기는 했지만 햇살은 따사롭고 성벽은 아름답게 빛났다. 모든 것이 황홀한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져 있다.


중간쯤 되는 곳에서 검표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표를 사겠다고 했더니 아래 쪽에서 사면 된다고 한다. 오른 120, 청소년 30, 합계 270쿠나(48,600원). 너무나 많은 한국 사람이 이곳을 방문한다고 한다. TV 프로그램의 영향이라고 했더니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 매일같이 온다고 한다. 단체로 온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다. 특별히 성벽길을 따라 걸으며 보는 도시와 바다와 디나르 알프스의 복합 전경은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을 정도다. 새로 발갛게 지붕을 올린 집들이나 오래된 지붕의 기와가 여러가지 색으로 변색된 모습 모두 아름다운 것도 이곳에서 처음 발견한 아름다움이다. 시원찮은 dslr로 눈으로 본 이 아름다운 풍경을 다 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람이 제법 차지만 맨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어도 손이 시럽지 않은 것을 보면 포근한 날씨다.










점심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 몇 곳을 두리번 거렸다.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보니 120쿠나(22,000원)가 훌쩍 넘는다. 성 바깥으로 가면 가격이 저렴하겠지. 생각하고 바깥으로 나왔지만 피자 말고는 먹을 것이 없다.  20여 분을 돌아다니다가 지쳐 버렸다. 문을 연 빵집에 들어가서 고기가 든 페스츄리와 크로아상과 도너츠, 치즈가 든 페스츄리를 32쿠나(6천원)에 사왔다. 그리고 호텔 앞의 고즈넉한 벤치에 앉아서 먹었다. 따끈한 숭늉이라는 비상 식량을 항상 휴대한 덕분에 이번에도 잘 먹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보스니아에서 워낙 호강을 하고 살아서 추운 겨울 벤치에 줄줄이 앉아 빵을 씹고 있으려니 노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여행은 역시 저렴한 곳으로 다녀야 한다.



개념 없이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성벽을 오르는 계단을 발견했다. 듣기로는 성벽길 입장료가 있다고 했는데, 매표소가 없다. 아, 이렇게 들어가면 무료로 성벽을 산책할 수 있구나 생각했다. 비가 그치고 너무도 파란 하늘과 함께 멋진 경치까지 무료로 제공하다니. 기뻤다.


잠시 후, 길을 막아서는 철망이 자연스럽게 매표소로 유도한다. 학생 한 명과 어른 두 명의 티켓을 끊어야 했다. 





다시 성으로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라고 하면서 종이컵에 커피를 타 주는데, 음. 그냥 성의로 마셔 주었다. 성의 구석구석을 다시 쓸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