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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천국/러시아여행_바이칼에서 블라디보스톡

바이칼에서 수영을 하고 슬류단카에서 가족을 만들다_170802 쓰리다 среда

루피나의 부지런함과 풍부한 레시피가 오늘 아침도 새롭고 정성스럽게 차려지게 했다. 고소한 냄새는 우리의 밥짓는 냄새와는 다르지만 당장 밥상 앞으로 달려가고 싶게 만든다. 어제 밤새 약한 비가 내리면서 기온이 잠 자기 좋은 상태가 되었다. 깊은 잠을 잤다.



예브게니가 이르쿠즈크로 출장을 가기 전에 정산을 하기로 했다. 오늘 저녁 11시까지 숙소에 머무르기로 하고 추가로 1,500py, 이틀 동안 아침 포함해서 9,100, 저녁 식사 두 번 2,800 총 사흘 동안 13,500py(27만원)이다. 매우 만족스럽다.


아침부터 이루마의 "when the love falls"를 연습했다. 첫 줄의 왼손과 오른손 연습을 따로 했다. 손목과 손가락이 뻐근하다.


11시에 집을 나서서 KFC(King Food Слюдянка) 앞의 버스터미널에서 쿨툭행 마르쉬루뜨카(маршрутка / minibus)를 기다린다. "култук вид(쿨뚝 비드)"를 물어보자 매표소의 무서운 직원은 몇 마디 하고 끝이다. 오히려 친절한 아저씨가 저쪽에 있는 정류장에서 1번(아진 один)을 타면 된다고 한다. 101번(스또 아진 сто один)이었다. 문장에 섞여 있는 숫자들은 워낙 빨리 발음이 되고 연음도 마구되니 절대 알아 듣지 못한다. 이번에도 친절한 아저씨가 해결해 주신다.













슬류댠카 비드 정류장은 생각과는 달리 마을과 조금 벗어난 오물 시장 앞이었다. 고갯길을 한참 올라가면 전망대가 있는데, 그곳까지 걸어가기는 힘들고 날이 흐려서 경관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마을 사진을 한 장 얻는 것도 좋겠지만 그냥 산책하기로 했다.


마을 쪽으로 가자는 식구들의 만류에도 포르뚜 바이칼로 길을 잡았다. 호숫가를 따라 걷다보면 틀림없이 그곳이 나타날 것이다. 무려 80km의 거리다 보니 다 걸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슬슬 걷다가 빨리 걷다가 달리다가 하면서 호숫가를 걷는다. 가는 길 내내 캠핑을 하는 러시아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장작으로 불을 피워서 음식을 만들어 먹다가 더워지면 바이칼에 몸을 담그고 밤이 되면 텐트에서 잠을 자는 식으로 바이칼에서의 휴가를 즐긴다.


두 개의 굽이를 지나서 계속 걸어가 보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날씨는 점점 좋아지고 있다. 쿨뚝에서 슬류댠카로 이어지는 환바이칼 기차길은 마을 주민들의 통행로로도 이용되는 모양이다. 한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철로 옆길을 따라서 신나게 자전거를 타며 지나간다. 슬류댠카로 간다고 한다. 짐을 꾸리면서 수영을 할 준비를 할까 말까 하다가 못하더라도 챙겨가자고 생각해서 갈아 입을 옷과 수건을 준비했다. 물 수제비도 뜨고 놀다가 다시 버스를 타러 갔다.













호숫가를 따라 걷는데, 캠핑하던 친구가 다가와 반가워한다. 선물이라면서 계급장에 달았음직한 별을 하나 선물한다. 그리고는 바이칼로 뛰어 들어 물을 한 컵 떠서 마시더니 나에게도 마셔 보라 한다. 술이 살짝 취한 듯 하여 얼른 자리를 떴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그저 보드카에 취해 행복했을 것이다.


배가 고파서 정류장 앞 오물 판매장에서 오물 구이 2개(큰 것 하나에 250py)를 사고 옆의 카페에 들어가서 빵만두 두 개와 홍차 두 잔, 레모네이드, 커다란 빵 한 개를 사서 점심 식사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구운 오물을 사서 차 안에서 그냥 서서 먹는다. 참 무던한 사람들이다. 카페 주인장 내외는 오물 사다가 이곳에 앉아서 먹어도 좋다고 한다. 그리고 트럼프는 정신이 약간 돈 것같고, 푸틴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쳐든다.


버스정류장으로 나와서 마가진에서 하드를 하나씩 사먹고 화장실을 물어보니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하는데, 아무리 가 보아도 없다. 다시 물어봐도 똑같은 대답이다. 하드 네 개 산 것으로는 화장실을 쓰게 해 줄 수 없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포취타에 들어가서 물어 보았는데도 화장실은 없다고 한다. 이곳의 화장실 인심은 매우 좋지 않다. 그동안 문제가 없었던 것은 카페와 레스토랑을 이용하면서 화장실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버스를 타고 мыс шаманскии (믜쓰 샤만스키 / '무당만'이라 번역해야 할까?)에서 내렸다. 바로 앞에서 오물을 팔고 있었다. 혹시 화장실을 쓸 수 있냐고 했더니 무섭고 단호하게 없다고 한다. 포기하고 쓰레기가 널린 길 같지도 않은 길을 따라서 환바이칼 열차들이 다니는 기차길을 넘어섰더니 커다란 모래사장과 멋진 바위 언덕이 나타난다.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득시글거린다. 물이 차서 그런지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고 담요를 깔고 누워 일광욕들을 열심히 한다. 온통 비키니 천지라서 쉽게 사진을 찍을 수 없다.


공중화장실에는 온갖 것들이 날라 다녀서 절대 이용할 수 없고, 화장실 갈 마음이 사라져 버린다.


해가 쨍하니 내려 쬐어서 언제 비가 내렸는지 모르겠다. 물에 들어간다. 이끼 부유물들이 떠단니기는 하지만 마셔도 좋을 정도로 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심장에 찬 물을 적시고 호수에 몸을 던졌다. 오래동안 수영을 하지 않아서 몸이 무겁다. 꺠끗하고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훓고 지나간다. 제법 걸어 나왔는데도 물은 가슴 아래다. 눈길을 멀리 두면 바다처럼 시퍼런 물이 넘실대고 있어서 대양을 향해 헤엄치지는 못하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해변 쪽으로 수영을 한다. 지켜보던 우주신이 옷을 입은 채로 들어온다. 춥단다.


배영이 제일 편안하다.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둥둥 떠 있으니 세상이 너무 평화롭고 고요하다. 차가운 기운이 등짝을 뚫고 들어와 뼈 속 깊이에 도달한 기분이다. 다시 해변으로 나간다. 볕을 쪼이며 몸의 온도를 높이려 하는데 하필이면 해가 구름 속으로 숨는다.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체온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바이칼호로 뛰어든다. 처음보다 훨씬 몸이 가벼워졌다.


한 시간 정도를 바이칼 물 속에서 놀았지만 이제 떠나야 한다. 아름다운 경치, 깨끗한 물, 푸른 하늘, 멋진 가족들. 더 바랄 것도 없다.












해변을 떠나 비포장 도로를 걷는데 그리 덥지는 않다. 오늘도 벌써 15,000보를 넘어섰다. 다리가 아파서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다 찌그러지는 차가 서고 "Turist" 라고 묻는다. "다, 투어리스트(예, 여행자에요)" 타라고 하신다. 200py 정도 낼 것을 각오하고 탔다. 역을 지나간다. 허걱, 그가 말한 "Turist"는 호텔 이름이었다. 정확하게 호텔 앞에 내려주고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주신다. 단체 관광객들이 이곳에 많이 머무는 모양이다.


역 앞의 대형마트에서 물과 과자와 도시락, 도시락 장라면을 샀다. 가스물이 아닌 물을 사려고 열심히 골랐지만 전부 똑같이 미네랄 워터라고 써 있다. 나중에 먹어 보니 가스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수영을 너무 했는지 허기가 진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장라면 하나를 끓여 먹었다. 맛있었다. 그러고 피아노를 30분 정도 치고, 한 시간 정도를 쉬었다. 라피나가 직장에서 돌아와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천재와 그리미가 열심히 돕는다.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히 번진다.











어제처럼 감동적인 저녁 만찬이 거의 끝나갈 때 쯤 해서 예브게니가 돌아왔다. 먼 길을 다녀왔는데도 그는 조금도 피곤해 하지를 않는다. 10시 반까지 우리 가족들에게 그가 다녀 온 2주 전의 여행을 설명하느라 신이 났다. 9시 반이 넘어서 나와 그리미는 올라왔고, 아이들은 그와의 대화를 즐겼다. 좋은 일이다.









가족들이 예브게니-루피나 부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집앞으로 나갔다. 저 멀리 어린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홍차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데, 아이들이 점점 다가와서 묻는다. 까끄 바쓰 자붓. 야 박인성. 그러자, 한 명씩 자기 이름을 말한다. 쏘냐, 리카, 알료샤, 니키타 등등.


스마트폰을 가져와서 구글번역기를 돌리며 묻는다. 몇 살이냐. 54살이다. 와. 나는 12살, 니키타는 열 살, 알료샤는 네 살, 쏘냐는 여덟 살. 자기들 나이도 다 소개한다. 나는 뺘찌 미누트라 말하고 오후에 사온 과자 봉지 하나를 들고 나온다. 순서대로 하나씩 나눠주니 공손하게 스파씨바 하는데, 욕하는 것 같지 않고 정말로 고마워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중 한 아이는 과자를 받지 않았다. 원래 과자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피아노 전공의 아주머니와 유모차를 미는 아주머니, 유모차의 아이에게까지 골고루 나눠주고도 남았다. 같이 과자를 오물거리며 구글번역기를 돌렸다.


축구와 댄스를 좋아하느냐. 축구는 좋아하지만 댄스는 좋아하지 않는다.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은 좋아한다. 따아 다다다~~~ 모든 아이들이 까르르 넘어간다.


더 먹겠다는 아이들에게 과자 하나씩을 더 주었다. 수학은 좋아하느냐. 좋아한단다. 어디로 가는가.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톡을 거쳐서 한국으로 돌아간다. 언제 가느냐. 오늘 저녁 11시에 출발한다. 아이들은 아쉬워하지 않는다. 잘 가란다.


지금처럼 이렇게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사는 것이 일생 동안 가장 행복한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아이들은 알까. 서로의 행운을 빌며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아이들이 와 하고 달려간다. 가슴이 아릿아릿하다.


10시 50분에 짐을 싸들고 내려갔다. 11시 55분 기차로 알고 있었는데, 틀렸다. 11시 37분 기차였다. 플랫폼에서 예브게니와 아쉬운 작별을 한다. 매우 좋은 경험이었지만 헤어지는 아쉬움이 너무 크다. 언젠가 그가 한국에 온다면, 한 끼 대접해 줄 수 있을 것이다.


"I gave you a piece of my sprit." 그가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Thank you so much. We've become a family!" 정말 뭉클했다.


12시가 다 되어서 올라 탄 기차는 제법 붐빈다. 3등칸 네 개의 침대가 우리 집이다. 화장실이 옆의 옆칸이라 냄새가 날 지 알았더니 다행이 나지 않는다. 러시아 사람들 냄새가 지독하다고 했는데, 우리 가족끼리 한 구역을 타서 그런지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


잠시 후 좌석 안내를 해 주었던 승무원이 네 개의 시트를 가져다 준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도 가져다 주는 것을 보면 이미 포함된 가격인 모양이다. 하바롭스크까지는 사흘 밤을 자고 나서 오후 4시 20분에 도착한다. 1인당 11만 5천원이다. 사흘 동안 45만원의 비용을 쓰는 것이니 참 저렴한 여행인 것은 사실이다. 기차의 침대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잠들기에 적당한 온도다. 이 정도면 견딜만 하다.
 
러시아어는 구개음화가 많이 일어나서 야이유예요 앞의 디나 티 발음이 지와 치로 바뀐다고 들었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슬류댠카만 해도 그렇다. 분명히 야 모음 앞의 디 발음이면 쟌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리 들어봐도 슬류쟌카가 아니라 슬류댠카다. 블라지보스톡도 블라디보스톡으로 발음하는 것으로 들린다. 데카브리스트는 지카브리스트로 발음하는 것으로 들려서 분명히 구개음화가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때 그때 다른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