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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너는 똥지게를 질 수 있겠니_노동없는 미래_170320

작년에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에게 완패를 당한 후에 노동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마침 그리미가 책을 몇 권 샀다. 그 중 한 권이 '노동없는 미래(팀 던럽 지음 엄성수 옮김 / 비즈니스맵)'이다.


2년 전에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하이패스가 확대되면서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일자리가 점점 없어지고 있고, 걱정이 되어 친구는 하이패스를 달지 않는다고 한다. 훌륭한 자세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하루 8시간을 반평도 안되는 공간에서 돈을 주고 받는 일을 계속한다고 생각해 보라. 과연 그것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노동하는 것일까. 그것도 최저임금을 간신히 맞추는 그런 급여를 받으면서 말이다. 일자리가 줄어드는 문제는 있지만 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은 되도록 빨리 없애는 것이 문명시대에 어울리는 정책이고, 기술개발의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 봐, 너는 똥지게를 지고 똥을 풀 수 있겠니? 그런데, 이 책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한 달에 3만원이면 죽어가는 아이도 살릴 수 있다는 월드비젼의 광고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깜짝 놀랄 일이다. 오늘(3월 21일)은 검찰에서 소환조사를 하는 날이다. 야만의 시대에서나 통하던 제왕의 칼을 휘두른 혐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한 세기는 더 지나야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도 이런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기계를 때려 부셔야 생존권이 보장될 것이라는 러다이트 운동의 현대판이 아니라, 우리 삶을 바꿔놓을 놀라운 기술 수준에 대한 기대일 수도 있다.


"우리가 만약 일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기술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용한다면, 그리고 우리 사회를 그 기술들을 중심으로 조직화한다면, 우리는 일주일에 10시간만 일하는 멋진 삶을 살 수도 있고 (중략) 이 책은 로봇들이 가까운 지평선 위에 모습들을 드러내는 순간에도, 우리에겐 그 로봇들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를 결정할 선택권이 있다고 주장한다." (17~8쪽)


독한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도 논에 나는 풀들을 제거할 수 있으면 수확도 많아지고, 환경도 깨끗해질 뿐만아니라 농부의 삶의 질도 올라간다. 그래서 우렁이농법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런데, 노동시간은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농부들이 남는 시간에 다른 일을 찾아서 하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생각보다 강한 인식이다. 여유있는 삶을 부러워하면서도 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현재다. 그러나, 과거에는 생계와 관련된 일은 노예나 하층민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공적인 활동에 대한 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그 당시의 사람들(더 정확히는 시민들)은 노동이나 생계 수단과는 다른 그 무언가에 자신들의 개인 정체성 등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또 자유인과 무관할 수도 있는 행동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런 저급한 노동이나 생계 수단들이라 믿었다. (중략) 불멸성을 갖는 가치는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에서 자기 동료들이 다 지켜보는 속에서만 실현될수 있다." (32~3쪽 / '일의 과거' 중에서)


이런 생계 활동이 사회활동인 경제활동으로 바뀌는데는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의 공이 컸다고 한다. 물론 그들의 이론이 정교하여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매우 오랜전부터 장사나 농사, 기술로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인식의 억압은 있었지만 몸과 마음으로 경제활동의 중요성은 두 경제학자들 이전에 확립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잉여 가치라는 이론을, 그러니까 어떤 개별 노동자든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생산해낼 수 있다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노동은 그것이 아무리 천하고 하찮은 호구지책이라 해도, 노예들이나 하는 활동이라는 인식을 뛰어넘어 단순한 개인적 생존 차원을 넘어선 유익하고 생산적인 일로 격상되었다. 이걸 잊지 마라. 일과 노동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구분에서 노동은 그저 인간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었다. " 35~6쪽 / 일의 과거)


그래서 고대인들은 일은 자기가 하고 노동은 노예와 약자들에게 넘겼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대에 이런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노동과 일은 구분되지 않으며 공적이며 사적인 활동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게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동포들은 김정은 독재 아래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 부모님과 조상들이 피땀 흘려 만들어 놓은 이 땅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일의 과거에 대한 결론은 이렇다.


"(한나 아렌트) 우리는 지금 노동 없는 노동자들의 사회, 그러니까 사람들이 할 일이 없게 되는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쁜 것도 없을 것이다. (중략) 나는 지금 만일 기술이 일부 사람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노동과 일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없게 될 거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아마 시민으로 산다는 것과 직업을 갖는다는 것을 동일시하는 노동관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48~9쪽 / 일의 과거)


사람들은 과연 노예를 부리려는 욕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말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에서. 노동, 사랑, 감정 등등 자기 중심의 모든 것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노예이다. 그것이 로봇과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된다. 아마도 꿈을 꾸는 것일게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로봇은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대체할 것이다. 하이패스가 요금소 노동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듯이. 현재의 노동에서 중요한 것은 일이 없어졌을 경우에 사람들은 억지로 '엉터리 일'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누고 즐길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갖기 위해서. 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재벌이 되기 위해서. 관점의 차이가 매우 클 것이기 때문에 잘 다루어야 할 주제다.


"일하는 시간을 대폭 줄여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각자 자신의 프로젝트와 즐거움, 비전, 아이디어를 추구하게 하는 대신, 우리는 행정 분야는 물론 서비스 분야를 늘려왔다. (중략) 자신들이 하는 일이 '엉터리'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실제 일하지 말고 일하는 것처럼 보이게만 하라는 압력이 있다는 걸 잘 아는 사람들, 그래서 실제 필요한 일을 하기보다는 일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중략) 세계적인 관점으로 넓힌다면, 현대 노동 시장의 핵심적인 요소가 점점 늘어가는 과잉 인구이며, 그 과잉 인구에 속한 사람들이 갈수록 더 공식적인 경제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82~3쪽 / 일의 현재 중에서)


시민들의 일자리 상황을 보면 매우 좋지 않다는 것을 저자도 잘 알고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문제는 항상 있었던 것이기에 무시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의 영역이니 기술의 영역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일까.


"2013년 이후의 국제노동기구(ILO) 통계 수치들 (중략) 전 세계 34억 명의 노동인구 가운데 6% 즉 2억 400만명이 실직 상태 (중략) 약 8억 3,900만 명이 공식적인 빈곤 노동자(하루 소득이 2달러 미만) 계층에 속하고, 무려 48%의 사람이 '취약한 고용 상태'에 있는 것으롤 여겨진다. 마이클 D. 예이츠는 이는 곧 약 15억 명이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략) 5세에서 17세에 이르는 아동 노동자가 1억 6,800만 명 (중략) 때로는 자기 부모들에 의해 '임대'되어 도시 안에서 노예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 부모들은 주로 소작농들로 무려 20억 명 (중략)" (85~6쪽 / 일의 현재)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일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능력자 또는 실패자로 손가락질 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일의 현재를 보면 여전히 엄격한 직업 윤리가 작동 중이고, 일자리를 갖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으로 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도덕적 의무이기도 하다." (88쪽 / 일의 현재)


기계와 컴퓨터는 과연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 아차피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서 다들 그럴싸하게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자신은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식으로 논의가 이루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이 일자리를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기 때문이다. 반평 공간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동전들과 씨름을 하더라도 살아있는 동안에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조금 다르지만 죽기 직전까지 일하고 싶다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다만,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은퇴하고 쉬는 것이 아니라, 중년의 시기에 좀 더 젊고 힘이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다가 즉, 내 시간을 나와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온전히 쓰면서 살다가, 그럴 기운이 없어졌을 때 남들도 다 하는 일을 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젊어서 놀고 일하다 죽는다는 것이다.


"옥스퍼드 마틴 스쿨의 연구원들은 미국 내 전체 일자리의 47%는 앞으로 20년 안에 사라질 위험이 아주 높다는 보고서를 발표 (중략) 자동화와 로봇 공학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기술 발전은 꼭 일자리를 없애는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 사람을 급여도 적고 천한 일 속으로 몰아넣는 역할도 한다" (95~6쪽)


일자리가 새로이 창출된다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퓨 리서치센터에서 2천 명의  전문 기술자들에게 설문 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기술의 발전이 일자리를 줄인다는 의견과 늘인다는 의견이 50:50으로 나왔다고 한다. 한 두 사람의 천재에 의해서 결론이 날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면 아직 기술과 일자리의 미래는 알 수 없다. 데이비드 오토는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기존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확실하지만 미래에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을 갖고 있다.


"자동화는 실제로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다. 그러나 (중략) 전문 평론가들조차도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정도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또 자동화와 노동이 상호 보완 작용을 하면서 생산성을 높이고 수입을 증대시키고 노동 수요를 늘린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102~3쪽)


이야기는 반복되고 있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그런데, 할 듯 할 듯 하면서 하지 않고 있다. 마치 탐사 보도를 보는 듯한 느낌. 무엇인가를 보여줄 것처럼 하지만,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지 못해서 이리저리 비슷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궁금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어려풋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 것같다.


"로봇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인가 하는 의문 속에 갇혀 있지 말고, 일의 미래에 대해 더 나은 사고방식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130쪽)




세상은 정말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모양이다. Gig Economy. 임시로 사람을 고용해 일을 추진하는 것이라. 연주자에서 출발해 디자이너, 컨설턴트까지 다양한 직종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이라 한다. 헤드 헌팅도 적응이 잘 안되는데, 긱 경제라니. 페이스북, 우버와 부킹닷컴 같은 경우도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gig economy의 하나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기업들은 통상적으로 기업들이 부담하는 위험과 비용(각종 보험에서 재고 관리, 의료비, 임금, 휴일 급여 등)을 거의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 긱 경제에서 일하려면 노동자가 자기 돈으로 재고를 사고 (중략) 노동자가 보험료도 내고 각종 규제 문제도 처리하고 고객도 직접 상대해야 한다. (중략) 이 기업들은 아주 거대한 공급 시스템(비용은 여기서 부담) 위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올라앉아, 스스로 엄청나게 많은 사람(돈을 여기서 범)과 연결하고 있다." (146~7쪽)


"제대로 보수를 못 받고 있거나 능력 이하의 일을 하고 있거나 취업하지 못한 노동자들이 없다면, 대부분의 긱 경제 애플리케이션은 대규모로 운용될 수 없다. (중략) 착취당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단 하나, 착취당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중략) 긱 경제 애플리케이션들을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고용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168쪽)


도시에서의 일자리는 스스로 던져 버렸고, 돈을 받는 일자리도 원하지 않는 단순노동만 남아 있어서 내가 원하는 일자리는 없다. 농부로서의 자리도 점점 위험해진다. 지금처럼 저렴한 비용으로 트랙터와 이앙기를 빌릴 수 없다면 농사를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대농이든 농협이든 작목반이든 대규모로 운영되는 농장 중심으로 농업체제가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 가지 전제 조건(보편적일 것, 적절할 것, 무조건적일 것 / 누구에게나 충분한 돈을 무조건 준다)을 모두 충족시키는 보편적 기본 소득제도가 있을 경우, (중략 / 사례들에 따르면) 받는 돈을 대부분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며, 기본소득제도로 인한 안정감 속에서 더 열심히 일하려 하고 심지어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 하기도 한다." (191쪽)


실현 여부에 관계없이 이상 사회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폭력이 동반되지 않는 날이라 매우 흥미롭다. 룰라 대통령 시절의 브라질과 유니세프를 통한 인도에서의 기본소득 실험은 즐거운 사례였다. 이런생각이 들었다. 일단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매월 50만원을 지급하고 18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에게 역시 매월 50만원씩을 지불하는 것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실험을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예산 부담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대상 인구를 2천만명으로 계산하면 10조/월이고 연간 120조원이다. 대한민국 예산의 1/4이다. 과연 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제도는 노동자에게 '하든가 말든가' 식으로 제시되는 열악한 일을 거부할 선택권을 줌으로써 노동자와 고용주 간에 새로운 힘의 균형을 잡아주기도 한다. 그리고 현재 여성들이 하는 집안일 등은 공식적인 경제가 그 덕을 보고 있으면서도 실제로는 그 영역 밖의 일로 배제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데, 기본소득제도는 그런 여성들에게도 소득을 보장해준다." (197~8쪽)


책의 끝부분에 다 와 가지만 계속 서문에서 던진 주제의 반복이거나 논증이다. 미래 예측이므로 확실하지는않지만 일자리는 줄어들고 있고, 생산은 과잉일 정도로 충분하며, 일에 대한 성스러운 관념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일자리 부족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모두가 일을 할 수 없으니, 일을 한다는 것은 일부 사람에게 내려진 복이다. 그러나 세계인의 50%가 실업 또는 하루 2달러 미만의 급여를 받는 노동에 종사하며 삶을 유지해 가기에는 세상은 너무 풍요롭다.


"기술 때문에 십중팔구 일자리들이 사라지게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불안정한 고용 문제가 발생하게 될 세상에서, 사람들이 (중략)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일자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점점 가당찮은 생각이 되어가고 있다. 현재의 우리 직업윤리를, 그러니까 일자리를 갖는 것을 인간의 품위나 도덕적 정직성과 연결 짓는 윤리를 계속 유지한다는 건 시대착오적이고 또 잔인한 짓이다. (중략, 사람이) 남아도는 잉여 인구인 상황에서" (223쪽)


2013년의 갤럽 조사에서 겨우 13%의 사람만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좋아했다고 한다. 70억 인구 중에서 35억이 노동을 할 수 있는데, 이 중에서 17억은 실업상태에 있고, 오직 4억명 만이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그래서 완전실업, 탈노동의 시대를 제안한다. 


한국에서 농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농업자본가와 농업노동자로 대체되었다.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봄이 되어 수많은 인력업체들이 아시아 각국에서 온 노동자들을 농업자본가의 논밭에 뿌려 놓으면 농사가 시작된다. 농업 노동이 기계에 의해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노동이 필요한데, 고용된 농부는 더 이상 없다. 이 상황이 개선될 수 있을까. 안될 것이다. 더 많은 농업 노동자들이 한국으로 와야 하고, 그들의 임금은 점점 오르게 될 것이다. 농업에서만큼은 기계나 인공지능으로 노동이 대체되기는 매우 어렵다. 아예 식용 알약이 개발되어 농업 자체가 사라지는 상황이 되기 전까지는. 그래서 농업노동에서 해방되면 행복할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정말 백 평 정원에 꽃과 나무만 취미로 키우고, 알약을 먹으며 사는 세상이 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다.


적게 일하고 기본소득으로 생존과 번영의 문제가 해결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똥지게를 지는 힘든 일은 기계나 로봇이 대신해 주고, 전쟁도 없고 질병도 없는 그런 세상이 한 백년 후 쯤에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먼 미래의 이야기 말고, 지금의 시대는 적게 일하며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이미 그런 낙원을 살고 있다. 당신도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일의 의미를 바꿔야 한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다만, 생활이 보장되는 기본소득이라는 또 하나의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사람들이 그것에 빠지게 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세상은 정말 눈꼽만큼씩 변하고 가끔 거꾸로 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