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조의 부흥기(1724~1800)를 지나서 망해가던 조선의 역사에서 큰 획을 그었던 일은 동학농민혁명 즉 갑오농민전쟁이었을 것이다. 정말 오래 전에 한참을 공부한 주제이지만 아무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들의 전쟁은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공격으로 패배한 우금치 전투의 안타까운 결론이 눈에 선하기 때문에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찬란하든 비참하든 모두 역사를 자세히 알아야겠지만 즐겁게 살고 싶기에 우울한 패배의 역사는 멀리 하고 싶다. 심지 굳고 성격 강한 사람들은 역사의 어떤 부분이든 잘 소화해 내겠지만,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지는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다. 그래도 손이 갔으니 신기한 일이다.
저자인 이이화와 우윤의 여는 글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들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이야기를 읽고 반가운 마음에 법을 찾아 보았다. 아주 간결했다. 이 법을 토대로 유족 등록과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약칭: 동학농민명예회복법)
제1조(목적) 이 법은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國權)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란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를 말한다.
2. "유족"이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자녀·손자녀(孫子女) 및 증손자녀·고손자녀를 말한다."
책에서는 갑오농민전쟁의 배경에 민씨 정권의 도를 넘는 부정부패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무일농원 바로 앞의 천여 평 밭도 민씨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이렇게 개인 소유의 땅은 몰수가 가능한데, 타인에게 매도되었거나 법인 명의로 변경된 땅은 여전히 민씨 후손들에게 부를 제공하고 있는 모양이다. '남이섬'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친일파 민영휘의 손자인 민병도가 세운 '주식회사 남이섬' 의 땅이라고 한다. 드라마 때문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관광지이고, '나미나라공화국'이라는 이름도 묘한 느낌이 들어 왠지 기분이 좋지 않다. 민병도는 친일인명사전에 예비후보로 등록되었다가 빠졌다고 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親日反民族行爲者財産의國家歸屬에關한特別法)은 러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광복 이전까지의 친일행위로 축재된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것에 대한 법령이다. 그러나 선의의 목적으로 취득했거나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취득한 경우에 대해서는 예외이다." (위키백과 중에서)
"민영휘(1852년 5월 15일 ~ 1935년 12월 30일 )는 일제 시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성황후(민비)의 친척 조카. 친일반민족행위에 관한 특별법 제정 이후 민영휘 역시 대상자로 지목되었으나, 이미 재산의 상당수가 '주식회사 남이섬' 등으로 법인화 되어버려서, 개인 명의 재산과 법인 명의 재산을 물리적으로 구별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70억원 정도만 환수되었다고 한다. (중략)
애초에 문제가 된 건 남이섬 설립자 민병도가 아니라, 민병도가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확정된 민영휘의 직계 자손으로서 유산 대부분을 상속했고, 그에 기반해서 조성된 재산이 남이섬이라는 것이 문제다. " (나무위키 중에서)
"(친일파 민영휘는) 1894년 2월 병조판서로 (중략) 그해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앞장서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5월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군대 파병을 요청했다. 6월 일본군과 손잡은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면서 바로 실각해서 탐학했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임자도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탈출하여 청나라에 도피했다가 1895년 7월 사면되고 11월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 다시 탐학죄로 교동군에 10년 유배형을 받았지만 5월 특지로 풀려났고,1909년 12월 일진회가 발표한 ‘합방청원서’에 경쟁하기 위해 총리대신 이완용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민연설회 총대위원으로 참여했다.
1910년 1월 일진회의 ‘합방성명서’에 찬성을 표명하기 위해 조직한 국민동지찬성회 고문, 3월 이완용·조중응(趙重應) 등이 주도로 합방찬성운동을 벌이는 정우회(政友會) 총재, 6월에는 국민협성회(國民協成會)의 합병실행추진 조직인 한국평화협회 발기총회에 참석해 찬성장으로 위촉되었다. 국권피탈에 앞장선 대가로 병합 직후인 1910년 10월 일본 정부에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았다. 같은 해 4월 사단법인 조선귀족회 부회장에 선출되어 1912년 4월까지 재임했다. 1912년 2월 한성은행 감사역 임기가 만료되었고, 8월 한일은행 두취(頭取)로 선출되어 1920년 12월까지 활동했다.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반성을 하고 사과해도 시원치 않을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재산 지키기에 매우 열중하여 부끄러움 없이 소송에 나섰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나라도 열심히 연구해서 모든 재산을 환수하고 싶지만 즐거운 일이 아니어서 이런 소식으로만 만족한다.
"친일파 민영휘의 후손들이 '국가의 재산환수는 부당하다'며 제기한 친일재산 국가귀속 결정 취소 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부장판사 김의환)는 14일 민씨의 후손들 20명이 "당시 민영휘는 압박에 의해 친일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친일재산조사위원회)를 상대로 제기한 친일재산국가귀속결정취소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내렸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친일행위는 민족과 국가에 대한 중대한 반역행위로 이에 따른 재산 환수는 정당하다"며 "민씨는 일본으로부터 자작작위를 수여받았음에도 이를 거부·반납하지 않은 사실이 인정되므로 친일파로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날 민씨의 후손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해 제기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도 "친일행위는 중대한 반역 행위로 소유해선 안 될 재산을 국가가 환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 (뉴시스 2008년 8월 14일 기사 중에서)
"권력을 잡은 민씨들은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고 나라의 안위는 관심 밖이었다. (중략) 민씨 집단은 돌이킬 수 없는 향락과 사치를 추구하며 전대미문의 탐욕적인 돈벌이에 빠졌다. (중략) 민씨들은 감사와 유수를 해마다 바꾸고 한 달에 한 번씩 인사행정을 단행하며 그때마다 몰려오는 전국의 부민들에 참봉이나 도사, 감역 등을 팔아넘겼다. (중략) 해마다 10여 차례씩 과거를 실시하였고, 합격여부는 기부하는 돈의 액수로 결정하였다.
(중략) 처음에는 이렇게 벼슬을 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벼슬을 팔아넘기다가 나중에는 돈 있는 사람을 물색하여 억지로 벼슬을 떠넘기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중략) 19세기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수탈당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기본 생존권마저 박탈당하는 시대였다. 그들은 이제 앉아서 죽음을 당하느니 차라리 일어나 무언가를 하다가 죽기를 바랐다." (25~8쪽)
길고 긴 추석 명절이 끝나고 돌아왔다. 갑오농민전쟁을 읽다 보면 현대의 농민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자유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살고 있는 서민들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이유는 착취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공산품과의 비교 열위로 인한 부등가 교환이 농촌 빈곤의 원인이 될 수는 있지만 소규모 자영농이 아니라면 대부분 3만평 (10ha) 남짓 농사를 짓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수익을 내고 있다. 아, 안타까운 옛날이여.
"일본은 자국의 식량 부족분을 메우려고 조선의 쌀을 마구 사들이는 한편, 자국 내에서는 다섯 배 이상 폭리를 남기면서 장사하였다. 일본이 1877년에서 1882년까지 수입한 쌀의 양은 6,400톤이었으나 이후 수입량이 급격히 늘어나서 1891년 한 해에만 무려 5만 6천톤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실려나갔다.
(중략, 소작농들은) 먹고 남아서 쌀을 파는 것이 아니라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서도 팔아야만 하는 딱한 사정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쌀을 팔았다. (중략) 이른바 '입도선매' 방식으로 봄에 미리 수확고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돈을 치르고 가을에 쌀을 몽땅 훑어가기까지 했다." (37~8쪽)
고부군수 조병갑은 만석보라는 저수지 밑에 새로운 보를 쌓아 추가로 수세를 거두고,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면제한다고 하다가 농민들이 개간하여 수확을 하면 세금을 물리는 등 악랄한 착취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서울에서는 '자식을 낳아서 호남에 가서 벼슬하게 하는 것이 소원'(92쪽)이라는 동요가 유행했을 정도라고 한다. 재물을 얻기 위해서라면 양심과 도덕을 팔아 먹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관리들이 쓰레기처럼 넘쳐났으니, 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고,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모든 일들이 정조 사후 100년에 걸친 세도정치라는 부도덕한 관리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나라를 보존하려면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예방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일 것이다.
당시 외무대신이던 개화파 김윤식은 진주에 주둔하는 일본군에게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마치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우리 민족을 학살했던 그 방식인데, 어이없게도 그 방식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친일파 관료였던 모양이다. 분통이 터질 일이다. 철천지 원수 왜놈들과 김윤식의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 왜놈 군대에 보낸 김윤식의 글을 보자.
"동학의 비도들은 상놈, 천인, 종놈, 하급의 구실아치와 몰락한 양반 종자의 부랑분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략) 동학 비도를 5명 이상 숨겨주고 있는 마을은 그 동네 백성을 먼저 처형하거나 유배시켜야 하며 접주를 숨겨준 마을은 그들을 모두 죽이고 10명 이상을 숨겨준 마을에는 동학비도든 아니든 그 집을 소각하고 접주와 동학 비도는 가차없이 죽인다는 법을 만들어야만 동학 비도를 모두 제거할 수 있을 것이며 민국이 태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163~4쪽)
민란이든 변란이든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백성들이 개혁을 요구하면 심사숙고하여 받아들여야 하는데, 청국군이든 왜놈 군대든 무조건 끌어다가 싹쓸이 해 버리고 영원무궁토록 사리사욕을 채우고 싶어했던 것이 19세기 말 우리 관리들이었다. 참담한 일이었다. 외국군대에 의존해서 나라의 안위를 지키려고 하는 것은 곧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 둘 일이다. 좌수영을 지키고 있던 김철규가 쓰쿠바호 함장에게 쓴 편지다. 읽고 있기가 부끄럽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니 다시 옮겨 적어 본다.
"비류들이 창궐하여 수천여 명이 성밖을 포위하고 있으므로 적에 대항할 수가 없어 정병을 골라 파견하여 하루 속히 섬멸하도록 삼도 통제사에게 제보하였습니다. 귀함에 미안하오나 우리 좌수영이 힘이 약함을 특별히 생각하시어 쓰쿠바 군함이 방금 우리 수영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으므로 구호의 요행과 동학군의 섬멸을 바라와 이에 조회를 합니다." (178쪽)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특별법의 결의대로 부패한 봉건체제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에 맞서 결사 항전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다. 그 역사를 공부하는 데 참담한 마음이다. 어떻게 해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할 수 있을까. 최후의 1인까지 화끈하게 싸우다가 죽었다. 아닌데.
-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 / 이이화 우윤 지음 /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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