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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그 노인네가 정말 기막힌 작품을 썼어_부활 1권_톨스토이

음악 취향을 봐도 그렇고 책에 대한 취향도 뭔가 old한 느낌이 든다. 산울림과 김광석, 한마음, 서편제 등등의 음악 레파토리는 요즘 세대들과 접점이 별로 없다. 아이유가 리메이크한 너의 의미라는 노래는 산울림 노래 중에서 덜 선호하는 노래이니 이것 또한 소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도서관 서가를 돌다가 톨스토이의 부활이 작은 책으로 예쁘게 만들어져서 두 권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분명히 읽기는 읽었는데 무슨 내용이었지. 다시 읽자, 비록 OLD 하지만.


"그 노인네가 정말 기막힌 작품을 썼어" (1권 표4)


막심 고리키의 평은 짧고도 강렬하면서도 재미있다. 그의 말처럼 문체는 부드럽고 묘사는 세세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긴박감이 없는 듯 하면서도 일일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다음 장면이 궁금해진다. 참 잘 쓴 소설이다. 내용은 이제 다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세세한 내용들은 완전히 새롭다. 19세기 말을 살다간 대문호 톨스토이의 역작을 그림 보듯이 샅샅이 읽는 재미를 느껴 본다. 날이 완전히 가을이라 선선해서 기분까지 좋다.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을 보전하려는 분들의 열정과 관심은 훌륭하다. 다만 너무 과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기업체 노동자와 자본가들과 세금으로 먹고 사는 관료들의 거만한 윤리의식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다면 균과 벌레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도시인들의 과도한 욕심도 크게 작용하여 수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났다. 도시인들의 무지도 해소되어야겠지만 자연주의자들의 과도한 사랑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톨스토이도 산업혁명의 후폭풍이 어지간히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점잖지만 강력하게 말한다. 인공물과 자연물이 잘 조화된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본다.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수십만 명의 인간들이 넓지도 않은 땅덩어리에 빽빽이 모여 살면서 그 땅을 황무지로 만들고, 생명체라고는 그 어떤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돌더미로 뒤덮고, 돌더미 사이로 풀이 비집고 나오면 닥치는 대로 뽑아버리고, 석탄과 석유를 마구 태우고, 나무를 베어내어 금수(禽獸)들이 떠나게 만들었다." (11쪽)


19세기 사람들의 야만성은 톨스토이를 지치게 한 것이 틀림없다. 지구 위에 희귀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지성을 갖춘 정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없어 보였을 것이다. 특히, 짜르 체제의 러시아에서는 더욱 그랬었던 모양이다. 그때보다는 분명히 나아졌지만 2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갈 길이 멀다. 1년에 열 명 정도씩 올바르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네흘류도프처럼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큼의 진보가 이룩된 것으로 본다.


"그전에 자신의 정신적 자아를 진정한 '나'라고 여겼던 그는 이제 건강하고 활기 넘치는 동물적 자아를 자신의 '나'로 간주했다. 이 모든 끔찍한 변화는 그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신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쉽게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동물적 자아를 따르지 않고, 거의 모든 일을 그 반대편에 서서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중략) 신과 진리, 부와 가난에 대한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꺼내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의 말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심지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했다. (중략) 그가 좀 절제할 생각으로 낡은 외투를 입고 술을 줄이면 사람들은 기이하고 유별난 교만이라 여겼고, 서재를 화려하게 꾸미거나 사냥에 큰돈을 쓰면 모두들 그의 취향을 높이 사며 때로 고가의 선물까지 보내왔다. (중략)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작은 영지를 농민들에게 나눠주었을 때 어머니와 가족들이 경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친척들은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1권 78~9쪽)


네흘류도프의 들뜬 사랑의 열기에 희생된 카츄샤는 사생아를 낳고, 아이를 죽게하고, 창녀로까지 전락하는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데다가, 살인누명까지 쓰고 법정에 서게 된다. 운명의 장난으로 배심원으로 참여하게 된 네흘류도프는 참회와 회피의 길 위에서 방황한다. 죄 지은 사람들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그 고통. 톨스토이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집요하게 서술한다. 특히 이 부분의 서술이 재미있다.


"네흘류도프는 그의 내면에서 고개를 들기 시작한 참회의 마음에 아직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이 만남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것이고, 이 순간만 잘 버티면 인생을 망치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마치 방바닥에 똥을 싼 강아지가 된 것 같았다. 화난 주인은 목덜미를 잡고 똥냄새를 맡아보라며 들이민다. 강아지는 깽깽거리며 최대한 멀리 뒷걸음질쳐서 달아나 어떻게든 자기가 저지른 짓을 잊으려 하지만, 완고한 주인은 강아지를 놓아주지 않는다. 네흘류도프는 자신이 저지른 비행과 자신을 움켜쥔 주인의 강고한 손길을 느끼긴 했으나 아직 그 일의 의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1권 122쪽) 


네흘류도프는 결국 참회의 길을 걷기로 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로 흉내내지 못할 길로 들어서는데, 톨스토이는 그의 앞길을 축복한다. 제발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을 나타낸 것이리라. 진정으로 참회하는 사람도 드물고, 무엇을 참회할 것인지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아테네의 등에이기를 원했던 소크라테스가 세계인의 스승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참회가 필요한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방바닥에 똥을 싸 놓고도 그저 멀리 뒷걸음질 치는 사람들로 가득한 것이 세상의 참모습이다. 시리아 내전, IS 테러, 우병우, 홍만표, 김정주, 박수환까지 매일 리스트는 늘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매일 조금씩 낳아지고 있으니 살만한 세상이다. 


"현실의 자아와 이상적인 자아 사이의 간극이 아무리 커도 그것이 깨어난 이상 불가능한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를 얽매고 있는 이 거짓을 꺠부수고 말리라. 모든 것을 인정하고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행하리라. (중략) 하느님 아버지, 절 도와주시고 인도해주소서. 제 안에 깃드시어 온갖 추함을 씻어주소서! (중략)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자니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은 선한 동시에 추악한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정신적인 존재가 드디어 눈을 떴음을 알리는 기쁨의 눈물이기 때문에 선한 눈물이며, 자기 자신의 선량함에 감동해서 흘린 자화자찬의 눈물이기 때문에 또한 추악한 눈물이었다. (중략) 좋다! 정말 좋아. 오,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그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60~2쪽)


고리키의 찬사가 있었지만 교회 쪽에서는 '부활'에 대해 분노하여 톨스토이를 파문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내용 때문이었을까. 사랑과 포용, 용서와 화해를 중요시하는 교회도 역린을 건드리면 참지 못한다. 삼위일체라든가 부활, 성모에 대한 것 등. 이렇게 톨스토이는 역린을 건드린다. 실제로 이 부분은 굳이 넣지 않아도 되는 죄수들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였는데도 두 장에 걸쳐 자세하게 묘사한 것을 보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당연하다. 종교 개혁의 태풍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셀 수 없는 살육이 괜히 일어난 것은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미사에 참석한 그 누구도 정작 예수는 여기서 행해진 모든 행위를 금지시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중략) 포도주와 빵을 놓고 신성모독적인 마술을 행하는 것을 금지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략) 성당에 모여 기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혼자 고독 속에서 기도하라고 명했다. 예수는 성당 자체를 부정했는데, 자신은 성전을 파괴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며 (중략) 사제의 신앙심을 굳게 해준 것은, 지난 십팔 년간 종교의식을 주관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아들을 중학교에, 딸을 신학교에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13~4쪽)


톨스토이는 매우 강렬하게 주장한다. 소설이라는 특성을 마음껏 살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펼쳐낸다. 사람의 선함과 정의로움에 호소한다. 이런 호소에 응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마음으로 공감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특히 왜곡된 관념으로 자신의 부정의한 일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마슬로바가 죄수라는 처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오히려 매춘부로서의 처지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자부심에 가까운 만족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중략) 누구든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선 그 행동이 중요하고 훌륭하다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런 인생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그런 생각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어 있다. (중략) 재산을 뽐내는 부자는 결국 약탈자이고, 전력을 자랑하는 사령관은 결국 살인자이며, 권력을 과시하는 정치가는 결국 압제자가 아닌가? (중략)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생관이나 선과 악의 개념을 왜곡하는 이들의 행동은, 우리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234~5쪽) 


큰 잘못을 저지르고 용서를 구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진심을 담아서 용서를 구하고, 행동으로 보이고, 피해자의 공감을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반성하는 듯한 모습으로 마음의 평화와 내세의 구원을 얻으려는 것은 위선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전두환과 이순자의 당당함이 떠오른다. 어차피 그들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행동으로 반성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오직 존재하지 않는 신만이 그에게 죄를 물을 수 있으니, 그들은 얼마나 당당할까. 신은 계실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 결혼해 달라는 네흘류도프에게 카츄샤가) 당신은 날 이용해 구원받고 싶은 거야. (중략) 날 이용해 현세의 쾌락을 맛보더니 이번엔 내세의 구원을 얻으시겠다? 네 그 안경, 기름기 잘잘 흐르는 네 추악한 낯짝도 혐오스러워. 가, 가버려! (중략) 그는 이제야 자신이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정확하게 알 것 같았다. 만약 그가 속죄하려 애쓰지 않았다면 평생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256~8쪽)


용서받는 입장에 서는 것이 좋을까, 용서하는 입장에 서는 것이 좋을까. 두 사람이 겪어온 길을 돌아보면 당연히 용서받는 입장에 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심이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네흘류도프의 길을 가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아이까지 잃어버리고 비참한 상황에 빠진 카츄샤의 길은 너무 힘겨워 보여서 더더욱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결국에는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편안한 길을 택해야 하는 이 참담한 이기심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두 사람의 길을 모두 걷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삶을 살아야겠다. 그래야 정말 행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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