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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무엇이 불멸의 여신조차 거부하게 하는 것일까_호메로스 오디세이아_160416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 1권을 읽다가 책을 덮었다. 계속되는 우울한 장면이 책 읽는 재미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위인전처럼 영웅들의 헛된 이야기더라도 즐겁고 활기 찬  책들이 좋다. 활기찬 책들을 읽으면 몸에 에너지가 생기는 느낌이다. 다시 한울빛도서관에서 방황하다가 신간 오디세이아를 만났다. 천병희의 서문에 의하면 2006년에 두 번째 번역판이 나왔었는데,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다시 번역을 해서 이제 막 출간되었다고 한다. 한울빛 도서관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호메로스이 오디세이아는 우울하지 않았다. 물론 행복한 장면이 가득 채워진 것은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워야 할 정도로 비극적인 오해는 없다. 그래서 결론을 알고 있는 스토리를 즐겁게 따라갈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 같은 다신교 세계의 신앙은 모든 신을 믿되 신에 대한 경외감이 일신교에 비해 매우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는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봐도 그렇고, 호메로스의 서사시, 크세노폰의 글에 나타나는 신에 대한 경외심은 대단하다. 머릿속에 든 지혜를 토대로 하는 말조차 신에 의한 것이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텔레마코스! 어떤 것은 자네가 마음속으로 스스로 생각할 것이고 어떤 것은 신이 말하게 해주실 걸세. 자네는 아마 신들의 뜻을 거슬러서는 태어날 수도 자라날 수도 없었을 테니까." (68쪽)

 

전쟁을 통한 약탈 경제에 익숙했던 그리스 사람들로서는 자신들의 생명과 경제를 책임지는 싸움 잘 하는 영웅을 너무나 사랑했다. 그런 그리스인들도 인간 행복의 가장 기본은 가정이다. 특히, 부부의 인연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소중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다. 불멸의 아름다운 여신 칼립소가 애원을 해도, 오디세우스가 고난에 찬 귀향의 길을 선택하는 이유도, 아내와 가정 때문이 아닐까. 정확하게 그렇다고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아내와 가정으로 돌아가기 위한 험난한 여정 때문이 아닐까.

 

포세이돈의 풍랑을 간신히 이겨내고 지친 몸으로 육지에 오른 오디세우스를 돕는 나우시카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는 그의 말에서 가정의 힘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생각이 표현되어 있다. 부부간의 사랑이 가장 강한 힘이다.  

 

"존경스러운 여신이여, 그 때문이라면 화내지 마시오. 사려 깊은 페넬로페가 생김새와 키에서 마주 보기에 그대만 못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아오. 그녀는 필멸하는데, 그대는 늙지도 죽지도 않으시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집에 돌아가서 귀향의 날을 보기를 날마다 원하고 바란 다오. 설혹 신들 중에 어떤 분이 또다시 포도주빛 바다 위에서 나를 난파시킨다 해도 가슴속에 고통을 참는 마음이 있기에 나는 참을 것이오." (141쪽)

 

"신들께서 그대가 마음속으로 열망하는 것들을 모두 베풀어주시기를! 남편과 가정과 금슬지락을 신들께서 그대에게 베풀어주시기를! 부부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금실 좋게 살림을 살 때만큼 강력하고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오." (163쪽)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나온다. 그 시대까지 쌓여 온 삶의 지혜를 전하거나 피수식어를 선명하게 부각시키는데 의미 있는 것들이 많다. '기쁨 없는 장소(하데스가 다스리는 죽은 자들의 세상)' '임기응변에 능한 오디세우스' '필멸의 인간' '느린 자가 날랜 자를 따라잡는 법(헤파이스토스가 아테네와 간통하는 헤르메스를 그물로 잡았을 때 신들이 하는 이야기. 약삭빠르게 사는 삶이 결국 패배한다는 이야기)' '손님에게 친절하고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씨(열린 마음으로 도움이 필요로 하는 나그네를 대하라는 이야기. 제우스가 사람을 찾아올 때는 언제나 나그네로 변해서 찾아온다는 이야기에서 나온다)' '고향땅과 부모보다 달콤한 것은 없다' '노년이 손발을 묶었다'.

 

신을 믿는 인간에게 내세는 어떤 의미일까. 모든 신을 신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내세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면 평화롭고 행복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곳이 사악하고 음흉하고 불행한 곳이라면 다시 현세로 돌아오려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으니 그곳은 틀림없이 행복한 곳일 것이라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내세가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하의 어둠 컴컴한 곳에 영원히 묶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삶 자체가 행복이니 언제나 감사하며 즐겁게 살라는 이야기의 우회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킬레우스여, 예전에도 그대만큼 행복한 사람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오.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아르고스인들은 그대를 신처럼 추앙했고, 지금은 그대가 여기 사자들 사이에서 강력한 통치자이기 때문이오. 그러니 아킬레우스여, 그대는 죽었다고 해서 슬퍼하지 마시오. (중략) 죽음에 대해 내게 그럴싸하게 말하지 마시오, 영광스러운 오뒷세우스여! 세상을 떠난 모든 사자들을 다스리느니 나는 차라리 지상에서 머슴이 되어 농토도 없고 재산도 많지 않은 가난뱅이 밑에서 품이라고 살고 싶소이다." (286쪽)

 

저승의 모습 중에서 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 중의 하나는 탄탈로스다. 그는 연못 가운데 서 있지만 물을 마시려 하면 물이 사라져 버리고, 향기로운 열매들이 가득한 나무 아래에 있지만 그것들을 따서 먹으려 하면 바람에 의해 사라져 버린다는 이야기는 매우 비극적이다. 왜 탄탈로스가 이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끔찍한 죄였다. 그 죄의 출발은 오만함이고, 오만함을 제어하지 못하는 인간은 끊임없이 안타까워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그리스 신화의 경고이다.

 

"탄탈로스는 원래 신들에게 총애받아 올림포스에 초대되어 신들과 어울리는 특권을 누리곤 했지만, 점차 오만해지더니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내는가 하면 사람들에게 신들의 비밀을 누설하곤 했다. 또한 오로지 신들을 시험하기 위해 신들을 초대한 후 아들 펠롭스를 죽여 그 고기로 요리를 만들어 대접했다. 신들은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으나 당시 딸 페르세포네가 납치되어 실의에 빠져 있던 데메테르만이 무심코 고기를 먹고 말았다. 노한 신들은 영원한 형벌을 받도록 타르타로스에 탄탈로스를 떨어트리고 죽은 펠롭스를 다시 살려냈는데, 데메테르가 먹어 버린 어깨 부분의 살은 다시 살아나지 않아서 하얀 상아로 어깨를 메꾸어 주었다."

- 위키 백과 중에서

 

저승을 다녀 온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포함해서 모험 이야기는 환상적인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은 즐거움을 주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기도 하고,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한 매우 직접적인 사례들을 실감 나게 묘사하기도 한다.

 

두 분이 비오는 거실에 앉아 투덕투덕 말싸움을 하시며 땅콩 씨앗을 준비하고 계신다. 노년이 점점 두 분의 손발을 묶으려 하고 귀를 막아 세상일을 잊게 하시고는 있지만 팔팔한 생명을 후손으로 둔 즐거움을 만끽하게도 하시니 늙는다는 것이 힘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아킬레우스도 자신이 단명한 것에 대해 항상 슬퍼했지만 자식이 훌륭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자식의 성장이 인간 후반의 즐거움인 모양이다. 환상의 이야기 속에서 부모님과 아이들과 아내가 자꾸 생각이 난다. 부디 모두들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진도 운림산방 산책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