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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인작대전이라_중국인이야기 1권

얼마나 인기가 있는 책인지 한울빛 도서관에서는 1권을 빌릴 수가 없다. 세상에 많은 곳을 돌아다녔어도 도서관보다 좋은 안식처는 없다는 현인의 말처럼 이 책은 도서관에 오는 즐거움을 준다. 다행이 음성까지는 아직 명성이 알려져 있지 않은지 1권이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서 얼른 빌려왔다.


1958년 중국공산당은 해괴한 전투를 벌인다. 기아에 허덕이는 중국인들의 식량과 생활 문제는 어디에 원인이 있을까를 따져보다 일어난 해프닝인데, 해프닝 수준이 거대하다. 기아는 쥐, 참새, 파리, 모기 등 4해(四害)가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중에서 식량 문제는 참새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동물학자들에게 참새를 멸종시켰을 때 나타나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쟁이 벌어졌다.


"베이징시는 '참새 섬멸 총지휘부'를 신설했다. 디데이는 1958년 4월 19일이었다. (중략) 새벽 5시 총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온갖 구호와 표어가 적힌 깃발들이 각 진지에서 솟아올랐다. (중략) 베이징 시민 300만 명이 동시에 투입된 인간과 참새의 전쟁, '인작대전(人雀大戰)'의 서막은 인류가 수천 년간 치러온 그 어떤 전쟁보다도 장엄하고 요란했다. (중략) 첫날 참새 8만 3,249마리를 사살했다. 죽거나 포로가 된 참새들을 가득 실은 차량들이 베이징에서 가장 넓은 창안가를 누볐다. (중략) 이듬해 봄 전국의 논밭에 예년보다 많은 해충이 발생했다. 도시도 예외가 아니었다. 골목과 가로수에 벌레들이 들끓었다. (중략)충 피해에 대한 보고가 전국에서 올라오고 과학자들의 연구결과가 계속 발표되자 마오쩌둥은 참새를 복권시켰다. 대신 바퀴벌레가 '4해'의 한자리를 차지했다." (16~8쪽)


한 농민의 탄원에서 시작된 인작대전의 참담한 결과는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한 나라의 정책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는 것이구나. 멀리 갈 것도 없다. 북한의 수공으로 서울이 물바다가 된다며 온 국민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만든 '금강산댐'이나(전두환과 부역 토목공학자들) 수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시행한 4대강 사업의 결과물들(이명박과 부역 건설업자들). 똑같이 흉물스럽게 썩어가고 있는 그것들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만 하는 나와 대한민국의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은 그나만 옛날 이야기 아닌가. 우리는 21세기까지 이런 일이 벌어지는 데도 시민들은 당하고 만다. 인작대전으로 누군가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으니 차라리 순진무구해 보이기까지 하다.


인작대전으로 시작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은 노동력 저하와 대기근으로 4천 만명의 중국인들이 기아 속에 죽어가야 했다. 4천 만명이라면 대한민국 전체, 허걱. 사태의 심각함을 알고 헤쳐나간 사람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었다. 자본주의적 착취도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착취유공론'을 펼쳐 나간 중공 최대 공산당 전략가 류사오치는 이 위기를 극복해 냈다. 원유 생산량이 늘어나 자급이 가능하게 했고, 의료, 보건, 위생망 구축도 순조로웠으며, 식량 생산도 정상화되어 자립자강이 가능한 상태로까지 회복되었다고 한다. '흑묘백묘론'과는 달리 도저히 양립할 수 있을 것같지 않은 '착취유공론'. 다시 생각해 보면 변증법은 상호대립의 산물이다. 착취를 통해서는 삶의 질을 개선하는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좌파 이론이 오히려 편견일 수 있을 것이다. 음, 유연한 사상은 정말 위대하다.


사회주의 이상 사회의 실험은 언제나 실패했고, 그 실패의 위기를 극복한 것은 언제나 자본주의 경제 방식이었다. 나와 가족을 지키려는 인간 유전자의 위대한 보호 본능이 사회의 큰 문제까지 해결한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제공하는 이상사회가 행복한 사람들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상사회는 사람들을 타락한 지옥으로 유도할 뿐이다. 더 이상 공산 사회주의 실험을 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의 확대 발전을 기반으로 여유로운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그것으로 도움이 꼭 필요한 사회의 약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이상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이다. 


공산당 초기에 이미 류샤오치는 이것을 간파했고, 일부 이론가들이 이념병을 극복하고 정말로 사람사는 세상에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게 한 것이 오늘날의 중국을 가능하게 했다. 그런 위대한 정신의 효과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마오쩌둥은 자신의 권력에 금이 간 것을 느끼고 불안해했다. 그래서 택한 책략은 '무산계급문화대혁명(문혁)'이었다. 인민은 먹여 살렸지만 마오를 위기에 빠뜨린 류샤오치에게 문혁의 칼날이 겨누어졌다. 류샤오치는 자녀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비장하고 숭고하며 자유로웠고 청렴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엥겔스처럼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라. 5대양을 떠돌며 전 세계를 보고 싶다. 나는 평생을 무산계급으로 살았다. 너희들에게 남겨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62쪽)


일흔이 넘은 나이에 갖은 수모를 당하며 은행 금고에 연금되어 있다가 죽었다.


네 권의 중국인이야기를 읽으며 부러움과 함께 의문이 들었다. 지혜의 말이나 다양한 인물들로 보면 한반도의 우리도 결코 중국에 뒤떨어지지 않는데, 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없을까. 한학, 근대철학, 항일독립운동의 역사 등 무엇하나 뒤질 것 없는 찬란한 역사 속에서 우리의 이야기들은 전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분단과 전쟁으로 모든 것이 통제되고 조작되는 속에서 자유로운 이야기들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고종 이후 백년 동안의 역사는 너무 단촐하다. 아니면 이야기꾼 김명호와 같은 사람에 의해 정리되지 못한 것일까. 차라리 그랬다면 좋겠다. 언젠가 분단이 극복되고 나면 자유로운 이야기꾼에 의해 한국인 이야기가 정리될 수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제발.


1937년 일본군에 의해 북경과 텐진이 점령되면서 중국의 대학들은 쿤밍으로 옮겨가 임시로 '시난연합대학'을 설립한다. 교수와 학생들이 스스로 장정을 하면서 중국의 곳곳을 둘러보고 무엇을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중국과 중국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든 연합 학교다.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훌륭한 대학시설에 가슴 아파하지 않고 '대학은 큰 건물이 있는 곳이 아니라, 큰 학자가 있는 곳'이라는 정신으로 대학교육을 했다. 전시 난리통에 인재 양성을 위해 분투한 중국인들의 큰 정신이 느껴진다. 건물만 요란하고, 공무원 시험준비에 만 바쁜 우리의 대학 현실이 안타깝다. 시난연합대학도 장졔스 정부의 교육정책과 확실한 대립각을 세웠던 모양이다.


"(교육부의 교과과정과 교재의 통일 등을 거부하며) 대학은 교육부의 일개 과가 아니다. 훈령대로 한다면 교수는 교육부의 직원과 다를 바 없고, 교과과정을 교육부가 정한다면 부장이 바뀔 때마다 창조와 개혁을 들먹이며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모른다. 연구를 진행할 수 없고 학생들에게 혼란을 준다. 바꾸기만 하면 좋아진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109쪽)


이 대학은 8년간 임시로 운영되어 3,300여명을 졸업시켰고,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비롯한 수많은 과학자들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간절한 마음을 가진 대학자들과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하는 영재들이 대학을 대학답게 만든다. 가장 좋은 직장을 선택한 교수와 가장 좋은 직장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로는 좋은 대학을 만들 수 없다.


시난연합대학의 교수들은 빨래비누와 도장, 빵(딩성가오(定勝糕) 등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교수들에 의한 대학 자치를 실천한 교수들에 의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중 한 인물인 류원덴의 학자로서의 높은 자긍심을 드러내는 일화가 또한 재미있다. 류원덴이 안후이 대학의 총장을 맡고 있을 때 좌파 학생들의 소요가 일어났었던 모양이다. 시찰차 들른 장제스가 소요를 일으킨 학생들을 공산당원이라며 처벌을 요구했다고 한다.


"대학에는 교수와 학생만이 있을 뿐이다. 누가 공산당원인지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총사령관이라면 부하들이나 잘 통솔해라.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은 총장인 내가 책임지고 처리한다. 완전 훈계조였다. 대노한 장제스가 질책하지 류가 발끈했다. 장제스의 코를 손가락질하며 '어디서 일개 군벌 따위가 ....' 라는 말을 내뱉는 동시에 한 손을 들어 따귀를 후려칠 태세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장제스의 경호원들이 황급하게 류원덴을 끌고 나갔다." (116쪽)


 최고 권력자 장제스를 일개 군벌로 취급해 따귀를 올려 부치려던 대학자는 총장직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실력이 되니까 그런 자긍심을 갖고 있었겠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맡은 일에 그 정도의 자긍심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까울 정도로 휙휙 지나간다. 그만큼 이야기가 재미있다. 리스쩡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의화단 사건이 진압되고 북경이 연합 8국에 의해 유린되는 것을 보면서 프랑스로 유학을 결심한 인물이다. 이 사람이 프랑스에 가 보니 우유와 치즈는 입에 맞지 않고 고향에서 먹던 두부 생각이 간절했다고 한다. 중국으로부터 40여 명의 농민들을 모집해 오고, 프랑스인 70여 명을 고용해 두부 사업을 시작했는데, 엄청난 돈이 벌렸다고 한다. 그 돈을 이용해 리스쩡은 청 왕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쑨원의 혁명자금을 대고, 파리에 야학을 개설하여 농민들에게 서구의 과학을 공부시켰다고 한다. 그가 전개한 근공검학 勤工俭学 qín gōng jiǎn xué 운동은 1910년부터 10년간 17차례에 걸쳐 3천 명의 가난한 중국 청년들을 프랑스에 건너와 공부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근공검학은 리스쩡이 꿈에도 생각 못했던 결과를 초래했다. (중략) 저우언라이, 차이허썬, 리리싼, 덩샤오핑 (중략) 등 당대의 전설적인 혁명가들을 배출했다. (중략) 프랑스 유학생들의 행동과 의식구조를 보면 장차 중국 노동계급의 중심인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미국 유학생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성장할 날도 머지 않았다. 두 패거리 간의 싸움으로 중국은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들 것이 확실하다. (중략) 모든 원인은 혁명과 전혀 상관없는 두부였다. 두부를 처음 발명한 사람은 한 고조 유방의 손자였던 유안이었다."  (122~141쪽)


공산당의 실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할 수 있으나 현실에서의 공산당은 열린 마음이 없는 폐쇄체제다. 1946년을 전후한 무렵 중국의 지식인 추안핑은 국민당과 공산당을 비교해서 정확한 실체를 밝혀 놓았다. 통찰력을 갖춘 말이다.


"공산당은 민주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반민주적인 정당이다. 공산당과 국민당은 별 차이가 없다. 공산당의 주장은 당주(黨主)이지 민주(民主)가 아니다. 국민당 통치하에서의 자유는 많고 적고의 문제이지만, 공산당이 집권한다면 자유는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변할 것이 분명하다." (158쪽)


추안핑이 발간한 '관찰'이라는 잡지는 1948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폐간되었다. 1956년 마오쩌둥의 지시로 민주세력의 기관지인 '광명일보'의 새로운 편집인으로 추안핑이 취임하는데, 68일만에 공산당의 '당천하 사상'을 비판하다가 쫓겨난다. 그는 부인과도 이별하고, 양 두 마리와 함께 산속에서 버섯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문혁 초기에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현실 정치에서 힘을 갖는 것은 결국 국민당 아니면 공산당이었으며, 두 당 모두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식은 결코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 굽히지 않는 대나무처럼 외롭게 그렇지만 자유롭게 살다 간 그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언론의 자유와 법치에 의한 인권보호를 중요시했던 자유주의 교육가 후스는 전족을 한 문맹의 여인 장둥슈와 결혼한다. 평생을 장제스의 쟁우로 살았던 그에게는 삼종사덕(三從四德)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내용이 참으로 재미있다.


"부인이 외출할 때 꼭 모시고 다녀라.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라. 부인이 아무리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해도 맹종해라. (三從) 

부인이 화장할 때 불평하지 말고 끝날 때까지 기다려라. 생일을 절대 까먹지 마라. 야단맞을 때 쓸데없이 말대꾸하지 마라. 부인이 쓰는 돈을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四德)" (181~2쪽)


장제스는 첫부인인 마오푸메이와의 사이에 장징궈를 낳았다. 17세때 모스크바 중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중국공산당원이 된 장징궈는 1927년 국공합작을 깨고 공산당 척결에 나선 아버지 장제스를 자신과 공산당의 적으로 규정하며 맹렬히 비난했다. 혼란스러웠지만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그는 훌륭한 청년당원이었다. 장제스가 코민테른 극동지역 책임자들을 체포하자 소련은 장징궈와 이들을 교환하자고 제의했지만 거절당한다.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친다.


"장징궈는 농촌으로 쫓겨났다. (중략) 장징궈는 온종일 밭을 일궜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자지 않았다. 결국 병으로 쓰러졌다. (중략) 며칠 만에 기력을 회복한 장징궈는 또 밭으로 나갔다. 장징궈는 농민들의 존경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략) 이번에는 공장 중의 공장이라 불리던 시베리아의 우라마시 중기계창으로 보냈다. 장징궈는 이곳에서도 성실하고 얼굴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뭐든지 시키면 다 해냈다. 부공장장으로 승진했고 '중공업일보'의 주필도 겸했다." (193~4쪽)



중국인이야기에는 그런 중국인들을 다루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대단한 애국자들이 많이 나온다. 중국이라는 나라에 기여하는 중국인이 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었는데 말이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입으로 망신창이가 되었고, 내전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가난한 나라였으니, 인재들은 성공하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왔더라도 일신의 안위나 돌보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94세까지 80년 동안을 그림을 그린 화가 예원량도 그 중 하나다. 속되지 않으려 노력했다는 예술가의 자세가 놀랍다.


"예원량은 국제무대에서 입상한 최초의 중국화가였다. 몇 차례 개인전으로 수중에 돈이 들어오자 이탈리아, 독일, 스위스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니며 명화 원작들을 임모하고, 미술서적과 크고 작은 석고상들을 수집해 선편으로 쑤저우미전에 보내기 시작했다. 중국인 주방장들 덕에 끼니를 해결하며 3년간 단벌로 버틴 결과 1만여 권의 미술서적과 500여 좌의 석고상을 보낼 수 있었다." (355쪽)


하나의 중국을 지향하는 것은 모든 중국의 정책이었다. 국공내전에서 패하고 미국의 경제 군사 지원을 받으며 타이완으로 건너 온 국민당의 장제스도 하나의 중국이라는 생각은 같았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타이완을 보면, 원주민들은 하나의 중국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국공내전으로 서로를 원수로 여기고, 무수한 살륙이 행해졌는데도 중국은 하나다라는 의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미국의 군사개입을 배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한다. '하나의 중국'이라는 생각이 과연 분열 70년을 극복하고 극적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진먼다오와 샤먼 사이의 포격전이 계속되자 미국은) 중공 측에 정전회담 개최를 요구하고, 타이완의 장제스에게는 진먼다오에서 철수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중략, 진먼다오에 대한 포격은 내전이라며 미국과의 정전회담을 거부한 마오쩌둥은 생각했다) 국공 양당 간에 얽힌 일들은 풀기가 수월하다. (중략) '대륙과 타이완을 완전히 분리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에 함께 대처하자는 마오의 의중을 파악한 장제스는 국민당 선전공작자 회의를 소집했다. '진먼다오와 샤먼 사이의 포격전은 중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연속이다. (중략) 해안 양안에서 무장 대치를 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주권에 관한 한 마오나 장의 입장은 항상 일치했다. 두 사람 모두 분열은 잠시일 뿐 통일은 필연이라는 역사관의 소유자들이었다." (382~402쪽)


중국과 미국의 관계는 국공내전, 2차대전, 한국전쟁, 진먼다오 포격전, 베트남 전쟁, 캄보디아 전쟁, 이라크 혁명까지 결코 소통이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두 나라는 서로를 대국으로 인정하며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중국은 당면한 경제개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손잡는 것이 필요했다. 미국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였을까. 미국과 유럽을 보호하려면 소련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미 양국은 22년간 공식적으로 왕래가 없었지만 (중략) 프라하와 바르샤바에서 대사급 회담을 중단한 적이 한 해도 없었다. (중략) 15년간 136차례 담판을 벌였지만 합의를 본 사항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중략) 그래도 양국 지도자들은 판을 깨지 않았다. (중략 / 1970년 6월)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 부부를 초청했다. (중략, 에드거 스노를 만난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닉슨이 온다면, (중략) 이야기를 하다가 뭔가 성사가 돼도 좋고 안 돼도 좋다. 싸워도 좋다. (중략, 파키스탄 대통령이 비밀리에) 미국 국민들은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중략) 1971년 7월 1일, 700년 전 중국을 찾은 마르코 폴로의 이름을 딴 '폴로계획'의 막이 올랐다. (중략) 키신저는 48시간 동안 베이징에 체류하며 17시간을 저우언라이와 대좌했다. (중략) 일찍이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을 희망했다는 사실을 안 저우언라이 총리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대표해 닉슨 대통령이 1972년 5월 이전 적당한 시기에 중국을 방문해달라고 초청했다." (404~24쪽)


좋은 아이디어로 돈을 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들을 내가 지불한 가치 이상으로 팔 때만이 가능하다. 내가 사는 것들이 내가 내어 준 가치 보다 더 많은 가치를 안겨 주었을 때도 가능하다. 이런 거래를 양심에 거리끼지 않고 꾸준히 행할 수 있어야 돈 버는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돈 버는 것이 힘들다. 양심이 자꾸 나를 건드린다. 개처럼 벌었으면 정승처럼 쓰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힘들다. 개처럼 벌었으니 이미 나는 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승이 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했던 중국인들이 꽤나 나타난다. 멋있는 일이다.


"장징장은 파리에 '통운공사'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중국인이 프랑스에 세운 최초의 무역회사였다. 중국의 골동품, 도자기, 차, 비단 등을 취급했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돈이 들어왔다. 뉴욕과 런던에도 지사를 설립했다. (중략) 싱가포르에 가던 중 쑨원이 같은 배에 타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중략) 혁명이 아니면 중국을  구제할 방법이 없다. 돈이 필요할 때 연락해 달라. (중략) 한 번은 쑨원의 거사 자금을 급히 마련하느라 파리에서 잘 나가던 찻집을 헐값에 매각하기도 했다. 쑨원이 사용할 곳을 설명하려 하자 "동지간에는 묵계가 있어야 한다"며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협객이 있는 한 혁명은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 혁명당원 사이에 나돌았다." (484~5쪽)


20세기에 태어난 어떤 혁명가도 장징장과 같은 혜안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 그는 쓸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마음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은둔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맑은 정신을 쓰려고 하지 않은 장제스와 같은 정치지도자들의 지혜롭지 못한 오판과 사욕 때문이기도 하다.


"(장징장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장제스에게 당권을 물려주고 본격적인 중국건설에 나섰다. "건설이 따르지 않는 혁명은 정치불량배들이나 하는 짓이다." 이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중략) 국민정부가 수립되자 장징장은 ‘건설위원회’를 조직했다. 서호박람회를 개최해 항저우를 관광도시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시발로 국가건설에 착수했다. 각지에 발전소를 건립했고 자원 확보를 위해 탄광들을 개발했다. 강남철도와 회남철도도 건설했다. 국제전화를 처음 개통시킨 것도 그였다. 1928년부터 10년간 ‘황금 10년’을 연출했지만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됐다. 장제스는 건설보다 공산당 소탕이 우선이었다. 장제스의 처남과 동서를 비롯한 새로운 세력들이 경제위원회를 만들어 명분을 앞세운 트집을 걸기 시작했다. 장징장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났다."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혁명의 홍보를 맡았던 궁펑의 일대기도 좋았다. 문혁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 나이 든 궁펑이 병든 모습으로 스러지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다고 했던 저우언라이의 심정이 공감이 간다. 


중국인이야기 네 권을 모두 읽었다. 모든 지혜의 말들과 허접한 유머와 영웅들의 사심이 총집결되어 있는 책이었다. 좀 더 어린 나이에 이 책을 읽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순수한 이상과 실천, 명예와 욕심, 삶에 대한 의지, 돈을 쓰는 방법, 사랑과 우정 등등 다뤄지지 않는 주제가 없다.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반드시 읽었으면 한다. 받아들이는 것도 각자의 방식이 있겠지만 갈림길의 기로에서 자기의 길을 택하게 하는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글들이 많을 것이다. 


- 중국인이야기 1, 김명호,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