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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결국은 돈을 가진 그들의 힘_원.명, 곤경에 빠진 제국_C 400

통일신라 이후로 단일 국가체제를 500여 년씩 유지해 온 한반도에 비해 중국 대륙은 강력한 힘을 소유했는데도 제국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흉노로 시작해서 돌궐, 선비, 거란, 여진,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북방 기마민족의 존재는 중국 대륙을 평화롭게 놔두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대륙의 불안함은 그대로 한반도로 이어져 고려는 초기부터 전쟁을 치르느라 평안할 날이 없었고, 발해는 멸망했으며, 조선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 크나 큰 손실을 입어야 했다. 어떤 계층도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없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특별히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했었다. 원과 명의 시기에도 수많은 중국의 백성들은 가족을 그리워하며 험한 세월을 한탄해야 했고, 한반도의 고려와 조선에서도 눈물겨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런 비참한 역사를 돌아보면 독립과 내전 이후로 한반도의 평화가 지속된 속에서 60년간을 살아갈 수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강력한 제국이었던 원이나 명이 기껏 100년과 270년 밖에 유지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뒤를 이은 청나라도 230년 남짓 통일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중국 왕조의 수명은 그저 200년이면 족한 것일까. 중국의 역사를 공부할 때 보면 언제나 건국 초기의 영웅들의 싸움이 많이 거론된다. 그 후로 그들이 어떻게  중국을 통치했으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통일왕조의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런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송시대 남과 북의 분단은 국가적 위기였다. (중략) 원은 이처럼 분단되었던 남북을 통일하면서 내부의 장벽을 허물었다. (중략) 북쪽이 건조, 가난, 문화적인 후퇴로 알려졌다면 남쪽은 정반대로 인식되었다. (중략)풍부한 강우량과 따뜻한 날씨를 보유한 남쪽 지역은 농업 생산량이 뛰어나 사회 기반 시설과 교육, 그리고 문화적 생산에 더 많은 투자를 이끌어냈고, 결국 지배적인 자리로 우뚝 섰다. (중략) 남과 북을 모두 정복했던 원은 가능한 한 북방 출신을 중용하고 몽골 지배에 끝까지 저항했던 남인들을 좌절시킴으로써 남북의 구분을 더 확고히 굳혔다. (중략) 1371년 시행된 첫 번째 과거 시험에서 합격자의 4분의 3을 남인이 차지했다. (중략) 시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주원장은 과거 시험을 한 차례 연기하고 1385년 재개했으나, 북인과 남인의 합격 비율은 변하지 않았다. (중략) 1397년 성적이 우수한 진사를 가리기 위한 추가 시험인 전시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합격자 52명 전원이 남인으로 밝혀진 것이다. (중략, 분노한 주원장은) 두 명의 시험 감독관을 처형하고 다시 시험을 치르도록 명했다. 이번에 합격한 61명의 수험생은 모두 북방 사인으로 채워졌다." (75~82쪽)


저자는 비문을 분석하여 원명시기에 과거를 통해 입신양명을 이룰려던 사람이 어떻게 살아남고 자손들을 남기게 되었는지를 분석한다. 그 글 속에서 보면 한 집안이 융성하려면 적당한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한다. 오래도록 농사를 지어 온 계층의 자식들 중에서 제법 공부를 잘 했던 큰아들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집안으로서는 커다란 위기였는데, 공부 대신에 장사를 선택했던 둘째의 성공에 힘입어 집안은 안정을 이루고, 결국 시험공부를 접은 첫째도 둘째의 후원을 받아 장사의 길로 뛰어든다는 것이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일부 가족들은 여전히 근대 이전 생산력의 기반이었던 농업에 종사함으로써 세상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으면서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기록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는 비석에 상세하게 적혀 있다는 것을 보면, 참으로 독특하고 안정된 집안의 모습이었다.


명시대는 주자학과 양명학이 함께 발전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지식인이지 못했던 홍무제 주원장도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명의 위상을 드높이려 했었다. 원의 시대가 몽골 정복자 중심의 신분 질서를 중시했다면, 홍무제의 명은 인종을 초월한 중국 제국을 세운다는 전제하에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도입하여 국가 질서를 잡으려 했다. 선비들은 고고한 듯 정치행위를 하지만 사욕 채우기와 눈치 보기에 급급했었고, 국가 경제의 주력이었던 농과 공은 조세와 공물, 부역에 동원되느라 자신들의 가치에 맞게 대접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고단한 몸을 말로만 위로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라 했으니, 원명 말기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식적으로는 가장 낮은 계층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큰 힘을 가졌던 것은 상인계층이었다. 바다와 강, 운하와 산을 넘나들며 물자를 운송해서 부가가치를 획득한 상인들의 경제력은 농민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상당수의 상인들이 목숨을 담보로 이윤을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평화롭고 행복하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과거나 현재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었고, 피도 눈물도 없이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이었다.


우리나라도 조선말에 가면 신분질서가 어지러워지게 되는데, 명나라 시기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공자의 후손 중에서 선비로서 지조를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관리가 되고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남송(즉 요와 금에 의한 북송 지배 시기)과 원을 거치면서 관리가 될 수 없었던 선비들은 그야말로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이때 천한 신분이지만 부유한 상인으로부터 족보를 사겠다는 연락이 왔다. 일언지하에 거절했지만, 유혹은 너무 달콤했고 가족들에게 가해지는 온갖 종류의 경제적 고통은 가장으로서 차마 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상인에게 족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그 때 족보값으로 받은 값이 배 한 척 분량의 쌀이었다고 한다.


천한 상인은 사실 풍요롭고 귀한 삶을 살았다. 다만, 훌륭한 조상과 신분을 갖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공자 가문의 족보를 얻어 이름을 올림으로써 모든 것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후로 그들은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누군가는 장사를 하고, 누군가는 대토지를 소유하여 농업을 경영함으로써 강력한 집안으로 대대손손 힘을 발휘했을 것이다. 강력하게 살아남은 그들이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을 것이다. 시대를 흐르며 변화도 많이 있었겠지만 현재까지 돈에 의한 지배는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의 세계도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충분한 평화와 적당한 돈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시기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자기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시기가 될 것이다.


태양의 후예가 왜 그렇게 재미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로부터 위안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결국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가요 프로그램, 드라마, 영화, 스포츠 등등 다양한 문화상품이 우리 대화의 핵심 주제가 되어가고 있는 요즈음은 김구 선생이 꿈꿨던 문화대국으로 대한민국이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좀 더 깊이 있게 오랜 동안 유지될 수 있는 기반 문화를 우리가 만들어 갈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