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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이러다 눈 속에 갖히는 것이 아닐까_흉노제국이야기 3_151203

부직포를 걷어내고 흙을 받아서 밭을 높이는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한 달째 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전혀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벚꽃잎처럼 쏟아져 내리는 눈발에 길이 막혀가고 있다. 10cm는 이미 넘어서지 않았을까. 부천에 가야 하고, 장인어른 문병도 해야 하는데.

 

중국인들의 학문하는 자세야 훌륭하겠지만 얼마나 학계의 검증을 거쳤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든다. 죽간자료, 기록, 유적 등등 수많은 자료가 있겠지만, 그 자료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우리나라 연구자들에게는 문호를 개방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한자를 자유자재로 이해할 수 있는 민족이 한민족 말고 지구상에 누가 있는가.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재미있게 읽는다.

 

"전쟁의 신 마르스의 아들이 세운 로마는 (부흥했고, 중략) 군사력을 장악한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가 동맹을 맺어 '전 삼두정치'를 펼쳤다.  (중략) 이 세 명 중 유독 크라수스만이 뚜렷한 공을 세우지 못했다. (중략) 크라수느는 탐욕스럽고 인색하여 전쟁 중에 얻은 전리품을 혼자 독점했고, (중략)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후(BC 71년) 마침내 콘술(집정관)에 취임했다. (중략) 그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파르티아(중국에서는 안식국이라 불렀다.) 원정을 결심했다. 알렉산더 대왕에 견줄 만한 빛나는 공로를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중략)

 

파르티아군은 적을 유인하는 전술을 택했고 (중략) 뜨거운 불볕더위에 목마름과 피로를 견디지 못한 로마군이 지쳐갈 무렵 파르티아의 병사들이 사방에서 달려 나와 그들을 공격했다. (중략)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왕과 대면하여 담판을 짓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의견이 계속 충돌하자 파르티아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들더니 크라수스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중략)

 

오직 크라수스의 장자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만이 6천여 명의 군사들과 함께 죽음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었지만 그 뒤로 그의 군대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중략) 차마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로마인들이 어쩔 수 없이 파르티아 동쪽 변경 지역으로 갔을 거라고 주장했다. (중략)

 

강거왕은 파르티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들에게 살 곳을 마련해 주었다. 그 후로 이들의 세력이 조금씩 커지고 인구가 2만명이 넘어서자 사람들은 젊은 사령관을 선출했는데 모두 그를 '로마 왕자'라고 불렀다. 질지가 강거로 가서 로마 왕자와의 만남을 청하자 당시 동방의 문화를 동경하던 로마인은 질지를 반갑게 맞이했다. (중략) 중국 감숙성 영창현 초가장 향루 마을에 여간촌이라는 곳이 있다. (중략) 이 마을에는 4백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대다수가 유럽인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중략) '여간'이라는 말은 한나라인이 로마제국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139~146쪽)

 

중국지도 http://sisareport.com/wp-content/uploads/2014/01/%EC%A7%80%EB%8F%844.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