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무서운 이야기들은 사실이다. (중략) 사람들은 보통 죽음은 삶의 끝이지 일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중략) 나는 삶과 죽음을 별개의 것이 아닌 점진적인 소멸 과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본다. 근본적으로 삶은 소멸의 과정이다. (중략) 죽음을 미래의 안전하게 분리된 사건으로 보는 것은 오류다. (중략, 자신의 삶을 끝낼 것을 허락해 달라고 했던 늙은 퇴역 군인에게) 카이사르의 대답은 '지금 그대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가?'였다." (41~42쪽)
제일 첫 문장에 주목한다. 잔인한 사실을 드러내는 것. 수년 전 칠순에 다다른 장모님이 큰 수술을 앞두고 있을 때, 여러 차례에 걸쳐 두 분을 위로했었다. 수술은 잘 될 것이고, 문제없이 회복되실 것이라고. 그래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걱정과 연민으로 좌절하고 계시는 장인어른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사셨어요. 이제 살만큼 사셨어요."
30대를 채 살아보지 못한 동생 인재의 죽음으로 삶과 죽음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엉뚱한 곳에서 '커밍 아웃'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무서운 이야기다. 누구나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한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크다는 것은 잘 안다. 어쩌겠는가. 삶이 고통스럽지 않도록 이겨내고 잊어야 한다. 괜한 말을 했나.
"사탕 가게 앞에서 온갖 사탕을 침을 흘리며 하염없이 바라보는 어린아이가 있다고 생각해 보자. 이때 하나님이 옆에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얘야, 언젠가는 이 가게의 사탕을 모두 살 수 있단다.'
'정말요, 하나님?'
'그럼, 정말이지. 그런데 그때가 되면 아마 사탕이 먹고 싶지 않을 게다. 그게 바로 인생이란다!' (47쪽)
내일도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 하나의 사탕을 먹고 싶은 욕망이 있다. 욕망은 순간이다. 채워진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채워지지 않은 것은 영원히 기억된다. 모든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시점이 온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하지 않을까. 기억되지 않은 실현된 욕망을 추억하며 행복하게 살고, 기억되는 실현되지 못한 욕망을 목표로 하며 노력하는 것이 인생이다. 모두가 행복한 과정이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에 따르면 자유로워지는 것은 필요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중략, 그는) 육체와 정신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했다. (중략) 나는 나 자신과 이런 대화를 나눈다. '104번가 모퉁이까지만 가서 좀 걷자.' 그러나 이 '나' 또는 '너'라는 것이 도대체 누구이고 무엇인가? 누가 누구에게 허락을 한다는 말인가? 힘이 드는 것은 육체이지 정신이 아니다. (중략) 분명 내 육체에게 허락을 하는 주체는 정신인 것 같다. 그리고 내 정신이 육체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중략) 데카르트식 이원론은 인간을 물질적 육체와 비물직적 정신의 전혀 다른 두 가지가 결합된 것으로 본다. (중략, 젊음이) 육체와 정신의 차이를 없애주는 반면, 장거리 달리기의 자유는 그 차이를 더 강화시킨다." (49~52쪽)
늙는다는 것은 소멸의 과정에 들어갔다는 것이고, 잠이 많아져서 대지와 자꾸 가깝게 누우려는 것은 죽음이라는 과정과 친숙해지려는 인간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고, 마음 먹은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은 하나였던 정신과 육체가 영원한 이별을 하기 위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합일체라는 것인가. 원래 정신은 육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인데, 한 번 만들어졌다가 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과 함께 발전하면서 존재하다가, 육체가 소멸해 버리면 갈 곳을 잃어 어딘가를 떠돌다가 소멸해 버리는 것일까.
대뇌의 활동성이 보장된 상황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정신이다. 대뇌의 활동성은 심장의 피 공급이 좌우한다. 심장의 활동은 위장의 음식 흡수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위장은 일을 해서 만들어내는 먹을 거리에 의해서 움직여진다. 결국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있어야 정신은 존재할 수 있다.
"사람들이 반복적인 리듬에 박자를 맞출 때, 뇌에서 활성화되는 부분은 좌측 전두엽과 두정엽, 우측 소뇌이다. 뇌의 활성화 부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주파수이다. (중략, 40Hz의) 감마파는 집중이나 의식적 경험과 같은 고도의 정보 처리에 가장 중요한 파장이라고 많은 이들이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정보를 통합하는 감마파의 역할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중략) 감마 주파수를 조절하면 '전두엽 세포 간의 정보 흐름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전두엽은 사유와 같은 고차원적 인지 기능에 관여하는 뇌의 부위이다. (중략) 뇌는 습관의 피조물이다. (중략) 뇌에서 활동은 연관 관계를 통해 확장된다. (중략) 사유의 역사를 슬쩍 둘러만 보아도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본질적으로 같고 보통 성공하지 못하는 생각들을 하고 또 하는 것을 볼 때 연관시키는 뇌의 특성은 확연히 드러난다. (중략, 뇌가 풀려난다면) 생각은 익숙하지만 헛된 길과 막다른 골목을 뒤로 하게 되고, 새롭게 펼쳐지는 정신의 너른 사막에서 빛나고 청정한 사유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중략) 보통 신체에 공급되는 총 에너지의 20% 이상을 소모하던 뇌는 오놀런이 말하는 저소모 모드로 바뀐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나를 잊는' 초월의 상태이다. (중략) 달리기가 제대로 될 때, 나는 이 뛰는 심장 속에서 사라진다. 생각이 멈추고 사유가 시작되는 이 지점." (82~8쪽)
습관에 의해 마구 떠오르는 '생각'과 새롭게 떠오르는 '사유'를 구분하고 일상 생활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습관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각인 사유가 필요하다고 한다. 사유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뇌가 에너지 저소모 상태가 되었을 때 생각의 습관이나 연관현상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런 저소모 상태를 만드는 것이 명상이나 달리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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