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스플리트(Split)와 솔린(Solin)
루이보스 티의 재료인 아스팔라토스가 노랗게 핀 스플리트는 꽃이름에서 도시이름이 나왔다고 하는데, 봄부터 6월까지는 두브로브니크까지 이 꽃들이 만발하다고 한다. 달마치아 지방의 수도로 로마의 군단 도시인 Solin과 인접해 있으며, 관절염 때문에 은퇴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별장이 있는 도시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의 한쪽면은 바다와 닿아 있었으나 현재는 바다를 메워 항구를 만들어서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선 거리라고 한다. 물이 찰랑찰랑 예뻤으면 그대로 두었을텐데, 썰물 때는 개펄이 드러나는 그런 바다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인간이 괜한 헛수고를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넓이 1만평, 금, 은, 청동, 철이라는 4개의 문이 아름답고 왕과 군사들이 함께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도 궁전안에 200여 개의 건물과 3,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상태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주의할 것은 궁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잠깐 인터넷을 뒤져 발칸을 초토화시킨 유연족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야겠다. 진시황이 중국 대륙을 통일했을 때 북방에는 흉노족이 있었다. 이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이 쌓여졌고, 흉노족의 후손이라고 여겨지는 돌궐(Turk의 가차)족으로 이어져 수나라(581~618)와 대립하게 되는데, 흉노족을 이어서 북방을 차지한 유목민족이 바로 유연족이라고 한다. 이들은 돌궐족이 일어나면서 북방에서 쫓겨나 서쪽으로 이동을 하게 되고, 발칸반도의 로마제국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자세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유연(Avar)족은 402년에 통일 정권을 건립하고 우두머리 사유는 구두벌칸(丘豆伐可汗)이 된다. 흉노, 선비의 뒤를 이어 중국 북부를 지배한 민족이 된 것이다. 유연은 주로 유목생활을 하였다. 날씨가 따뜻할 때에는 고비사막 북부에 분산되어 유목을 하다가, 가을과 겨울에는 무리를 지어 고비사막 남부 지역으로 내려와 방목을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필요한 양식과 재물을 약탈하면서 생활하였다. 남북조 시대의 혼란기인 534년에 유연이 남하하여 확장하려고 할 때, 그들의 신하 부락이었던 돌궐(突厥)이 금산(金山, 지금의 알타이산)에서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546년에 돌궐의 우두머리는 군사를 거느리고 고차의 여러 부를 정복하고 유연에게 혼인을 강요하였으나, 유연의 귀족들은 그것을 크나큰 치욕으로 여기고 거절하였다. 돌궐은 이를 구실로 유연과의 종속관계를 단절하고 군대를 일으켜 유연을 공격하였다. 555년 유연의 칸은 결국 돌궐에게 격퇴되어 멸망한 후에 서쪽으로 이주한 유연인들은 대부분 다뉴브강 유역을 정복하고 정착했다고 한다.
딴 곳으로 빠진 김에 한 군데 더 들르자. 오래 전 읽고 책꽂이에서 먼지가 쌓이고 있는 '로마인이야기'를 꺼냈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다. 9권 쯤에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이야기다. 13권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목은 '최후의 노력'이다.
"284년에 황제가 되어(39살, 중략) 출생지는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영토인 스플리트 부근(중략) 부모 이름도 알 수 없고, 농장에서 일하던 해방노예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을 만큼 하층계급 출신이었다. (중략) 그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병사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중략) '남에게 맡기기'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본 전술이 되어간다. (중략, 막시미아누스는) 하층계급 출신이고(중략) 후방에서 명령을 내리는 사령관이 많은데, 막시미아누스는 언제나 전선에 있었다. (중략, 286년) 막시미아누스의 황제 승격은 병사들이 추대한 결과가 아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혼자서 결정한 일이다. 이리하여 41세와 36세의 두 황제가 혼자서 결정한 일이다." (로마인이야기 13권 21-30쪽)
저자의 해석은 그렇다 치고 사실만을 추려서 정리를 했더니 위와 같이 되었다. 양두정치(diarchia)의 두 황제가 하층계급 출신이었고, 젊었으며, 병사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오래된 길과 건물들이 유지 관리되고 이용되는 것을 보면서 받는 감동은 이런 사실들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람이 사람 대접을 받고,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모두의 미덕이 되는 사회이면서 그 미덕이 인정받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힘에 의한 거대한 건물들을 보면서 놀라기는 하지만 감동을 받지는 않는 것은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부분도 의문을 풀어야 한다. 역시 '로마인이야기'를 참고한다. 시오노나나미의 해석은 뒤로 하고, 알려진 사실들을 옮겨 본다.
"303년에 시작되는데, (중략) 공포된 칙령 (중략) (1) 기독교 교회는 모두 토대부터 파괴한다. 교회로 쓰인 곳이 개인 주택의 일부라 해도 이 조치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2) 어떤 이유로도 신도들의 모임은 엄금된다. (중략) (3) 성서나 그와 비슷한 서적, 미사에 쓰이는 기구, 십자가, 그리스도상 등은 몰수하여 소각한다. (4) 기독교도 중에서도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자는 심문을 받을 떄 고문을 면제받는 것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누려온 모든 특전을 박탈당한다. (5) 기독교도로 인정된 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할 권리를 잃는다. (6) 신도의 기부 등을 통해 축적된 교회 재산이 있었던 지방자치단체나 기독교도와는 무관한 직능 조합에 분배한다. (7) 기독교도로 인정된 자는 모두 공직에서 추방한다. (중략) 황궁 안에서 화재가 하루 걸러 두 번이나 일어났다. (중략) 지위가 낮은 고용인인들은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지만, 지위가 높은 자들은 처형당했다. (중략) 두번째 칙령 (중략) 성직자들을 체포하여 투옥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중략) 세번째 칙령 (중략) 성직자들은 로마의 전통적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강요당했다. 이것을 받아들인 자는 즉각 석방하고 거부하는 자는 즉각 사형 (중략) 이 칙령으로 사형당한 기독교 성직자는 네 명뿐 (중략) 금지령이 해제된 309년 당시의 상황에 대해 기독교 쪽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 많은 기독교도가 감옥이나 강제노역에서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2) 성직자들도 석방되어 과거의 일터(재건된 교회나, 교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독교도 공동체)로 복귀했다. (3) 신앙을 버렸던 사람도 회개하고 용서를 빌면서 다시 공동체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요구해 왔다." (로마인이야기 13권 136~142쪽)
황제궁과 마주보며 주교관을 세울 정도로 위세를 자랑했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철저했다. 탄압의 정도가 분서에서 끝나고 무지막지한 살육인 갱유까지 나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기독교도가 로마의 전통신에 대한 제의를 거부했다고 해서 처형당하는 일은 로마인들의 은밀한 보호로 이어졌을 정도로 서로의 종교에 관대한 로마 사회에서는 극히 드문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와 스플리트의 탄생도 잘 묘사되어 있다. 황제 본인이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단순히 관절염 때문에 은퇴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추측이다.
"오현제는 20년 남짓 나라를 다스린 뒤에 죽었지만 (중략) 로마황제의 일상은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격무의 연속이기 때문에 (중략) 디오클레티아누스도 죽지는 않았지만 피로를 무겁게 느끼고(중략) 제2차 '사두정치'를 떠받칠 인사도 '사두정치'체제의 창시자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서방 정제 콘스탄티우스 클로우스와 부제 세베루스,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와 부제 막시미누스 다이아. 중략) 정제와 부제를 불문하고 군사적 능력과 경험을 무엇보다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중략) 권력자는 권력에 매달릴 줄밖에 모른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찬탄할 만큼 깨끗이 퇴위하고, 니코메디아의 황궁에서 나와 여생을 보낼 곳으로 정해둔 고향에 틀어박혔다. 305년 봄의 일이다. (중략)
스팔라툼이었다. (중략) 슬라브식으로 스플리트라고 불린다. (중략) 로마제국 말기에는 (중략) 야만족이 쳐들어올 때마다 인근 주민들이 그곳으로 피난 (중략) 차츰 그곳에 눌러살게 되었기 때문에, 전직 황제가 은퇴한 곳이기는 했지만 도시는 아니었던 스플리트도 차츰 도시로 바뀌어갔다. 실제로 현재 스플리트의 옛 시가지 가운데 절반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이다. 유적이 아니라 도시 자체로서. (중략)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도 미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미의식은 대체 어디로 가버렸을까. (중략) 최고신 유피테르에게 바친 신전과 대응하는 위치에 그 자신의 묘소도 미리 만들어져 있었다." (로마인이야기 13권 131~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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