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미가 읽고 한 번 이야기해 보자고 한다. 음, 중국인 이야기도 읽어야 하는데,,,
재미있게 글이 시작되고 있다. 시간에 대해서. 가장 분명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에 대해서. 시간의 형태에 대해서는 거꾸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시간을 붙들어, 시간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시간의 흐름은 인간의 생로병사 속에서, 늘어나는 주름살 속에서, 퇴락해 가는 건물의 웅장함 속에서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에게 형태를 부여한다. 그러나 시간을 정말로 잘 안다고 느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중략) 굳이 시간의 유연성을 깨닫고 싶다면, 약간의 여흥이나 고통만으로 충분하다. 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2쪽)
교육은 이래야 하는데, 우리는 조상들의 원서를 읽을 수가 없고, 중국 학자들의 기록도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원문은 읽을 수 없고 번역서를 읽어야만 한다. 아무래도 원서의 감동을 그대로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입시공부 하느라 여유가 없는 중고교 시절에 교과서나 참고서 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읽을 수 있겠는가. 권력과 자본과 지위를 차지하기 위해 요약된 것들을 너무 과도하게 추구한다. 그것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을 풍요롭게 만들었지만 결국은 근본이 약한 재벌기업을 키우게 되었다. 백년이 가도 살아있는 든든한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속도를 낮추고 좋은 글을 읽고 느끼게 해야 할 것이다.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자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중략) 상상력의 첫 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다짐하듯 확언했다. 우리의 부모들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는데, 자식들이 갑자기 유해한 세력에 노출돼버린 순진무구한 존재라고 상상했다." (22~23쪽)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분석하는 것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거나 유용한 것들을 받아들여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이야기를 듣는 즐거움도 물론 크다. 거기에 또 하나가 첨가된다면 회피다. 책임의 회피.
"우리가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중략) 책임을 전가한다는 건 완전한 회피가 아닐까요? 우린 한 개인을 탓하고 싶어하죠. 그래야 모두 사면을 받을 테니까. 그게 아니라면 개인을 사면하기 위해 역사의 전개를 탓하거나. 그도 아니면 죄다 무정부적인 카오스 상태 탓이라 해도 결과는 똑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이나 그때나 개인의 책임이라는 연쇄사슬이 이어져 있는 걸로 보입니다." (15, 26쪽)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한 번 대답해 보자. 역사란 무엇인가? 지금 나를 자극하는 앞 사람들의 삶에 대한 기록된 이야기. 평범하지 않은 모든 일탈들의 기록. 멋이 없다.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역사의 관계에 있어서, 역사가 나를 이야기가 주는 감정의 변화 이상으로 자극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서는 감동과 분노 등 감정이 일어날 뿐이다.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 (중략)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중략)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33~34쪽)
역사 뿐만 아니라 진리나 진실에 대해서도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그냥 사용한다. 영원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는 사실이 진리이고, 조작되지 않은 사실들의 집합을 진실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현실 속에서나 역사 속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서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소크라테스처럼 하다가는 끄덕끄덕 졸음만 밀려올 것이다.
"현실이 뭔지, 현실성이 뭔지, 인생으로부터 깨우치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소싯적의 한 순간이라도 그들에게 우리 같은 때가 있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투항해버린 연장자들보다는 우리가 삶-그리고 진실과 도덕과 예술-을 더 확실하게 포착했다고 믿었다." (25쪽)
삶과 죽음은 무엇일까. 삶이란 살아가는 즐거움이고, 즐거움 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있고, 그런 험한 일들을 잘 겪어낸 다음에 찾아오는 즐거움이 가장 크다. 그래서 삶은 여러 고비가 있겠지만 즐거움이다. 죽음은 원치 않는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 자살 조차도. 그런데, 삶에 대한 낙관이 없다면 결국 죽음을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삶을 영원하고 분명하게 보이고, 죽음은 순간이며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인데도 삶보다는 죽음을 신뢰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논리로 포장을 해도.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88쪽)
어제 천재를 훈련소에 데려다 주면서 시간을 떼우고 싶으면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서 한 두 줄의 문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갈 것이라고.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강렬한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남과 여를 지배해 버리는 뜨겁고 흥분되는 그 감정.
"우리 대부분에게 첫사랑의 경험은, 비록 좋게 끝나지 않는다 해도 - 어쩌면 그럴 때 더더욱 - 삶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삶의 권리를 지지하는 실체가 이곳에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그 생각도 변할지 모르는 일이고, 우리 중 누군가는 급기에 아예 단념해 버린다 해도, 사랑과 맞닥뜨린 그 첫 순간과 같은 건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94쪽)
소설의 중반 이후는 사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기막힌 반전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배반한 여자 친구와 그의 친구가 결국에 헤어지고 만다는 예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길게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소설의 끝까지 긴장감을 부여하면서 뭔가 멋진 무엇이 등장할 것이라는 기대는, 순전히 기대로 끝난다. 100쪽까지에서 작가가 제기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답을 찾는 일은 남은 50년도 결코 짧지 않을 것이다. 영원한 숙제일테니. 그런 정도로 하고 이 책을 덮는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줄리언 반스 /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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