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쭤린은 일개 비적들의 우두머리에 불과하고 사람들을 착취하여 사욕을 채우는 군벌 나부랑이로 생각했었다. 찐빵 장수에서부터 사창가 심부름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는 그에게도 선생이 있었다. 툭하면 학생들을 두들겨 패는 것을 보고 장쭤린은 쇠몽둥이를 휴대하고 다녔다. 선생이 때리면 쇠몽둥이로 머리통을 날려 버리기 위해서. 그 말을 들은 선생은 장쭤린을 총애했다고 한다. 그 후로 그의 인생은 바뀌어 북양정부(1912~28)의 마지막 국가원수가 되었다.
"(선생의 장쭤린에 대한 평가) 글공부와 도박장은 상극이다. 두 가지를 동시에 열중하는 것 보니 싹수가 있고, 인물도 멀끔하다.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내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 나도 네 일이라면 견마지로를 다하겠다." 사숙 선생은 장쭤린에게 말 치료법을 익히라고 권했다. (그 기술을 토대로 장쭤린은 동북왕이 되었다.)" (11~12쪽)
열차 한 량의 수박을 선물받고 열차 한 량 분량의 아편으로 답례하는 등 그의 대범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1차 대전에서 패한 독일의 크르푸가가 운영하던 병기창용 기계를 구입하라고 보낸 부하가 구입자금 모두를 도박에 탕진하고,
"도박장에서 자금을 날렸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도박에 도가 통한 듯합니다. 득도한 선인들의 기분이 어땟을지 짐작이 갑니다. 여한이 없습니다. 황푸강에 투신하겠습니다." (22쪽) 고 하자, 장쭤린은 득도한 부하를 갖게 되었다며,
"빨리 100만원을 들고 상하이에 가서 한린춘을 만나라. 반은 도박에 쓰고 나머지 반으로 기계를 구입하라고 해라. 강물에 뛰어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라. 감기라도 걸리면 도박장에서 판단이 흐려진다." (23쪽) 고 말한다.
"다시 도박장에 간 한린춘은 본전의 네 배를 따자 손을 털었다. 딴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기계 구입에 사용했다. (중략) 어처구니 없는 얘기 같지만 '중국의 크르푸'라 불리던 선양병공창은 이렇게 탄생했다." (23쪽)
3권을 건너 뛴 4권에서 다시 시안사변과 장쉐량의 이야기가 나온다. 연애를 할 나이는 지났지만 연애를 해야 할 아들과 손자들에게 참고가 될 것같아 기록을 남긴다.
"장쉐량이 먼저 쑹메이링에게 다가갔다. "만나서 반갑다. 세 번 태어나도 이런 영광은 없을 거다." (중략) 장쉐량은 여자들 앞에서 잘난 척하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본인은 잘 몰랐지만 엄청난 장점이었다. 이날도 쑹메이링에게 그간 여기저기 다니며 실수하고 망신당한 얘기만 늘어놨다. 쑹메이링은 연신 배꼽을 잡았다. (중략) 국수도 한 그릇만 시켜서 나눠 먹었다. 장쉐량이 가끔 덜떨어진 소리를 해도 그냥 웃기만 하며 재미있어 했다." (41~2쪽)
장쉐량의 육성은 더욱 대단하다. 이런 인물을 중국 정치를 배우면서도 몰랐다는 것이 부끄럽다. 인생의 스승은 반드시 살아있는 실물의 스승만은 아니다. 기록으로 남겨진 사언행 일치의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스승일 수 있다. 아이들에게 항상 스승을 찾으라 재촉하지만 현실에서 사언행 일치의 스승을 찾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는가. 누구나 그렇했을 것인데, 이런 정도의 인물이라면 정치적 스승이 되고도 남는다.
"(장제스가) 쑹메이링에게 다섯 번 거절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조강지처와 이혼하고 일본까지 쫓아갔다니, 정말 흉악한 사람이다. (중략) 국가 지도자라는 게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것 같아도 별게 아니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만 있으면 된다. (중략) 장제스는 인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항상 노예를 구하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중략) 장제스는 적과 동지를 구분 못 할 때도 많았다. 공산당에게 대륙을 빼앗기지 앟았더라면, 측근에게 쫓겨났을 확률이 높다. 훌륭한 아들이 있어, 타이완에 나와서 정신 차리다 보니 죽어서도 험한 꼴은 당하지 않았다. 1936년 시안에서 장제스를 죽여 버리자는 사람이 더 많았다. (중략) 나는 쑹메이링을 과부로 만들 수는 없었다. (중략) 그간 우리는 말을 함부로 했다. 나라가 망하려면 언어가 먼저 망가지는 법이다. 모든 단체가 합심해 평화를 쟁취하고,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기 바란다." (43~6쪽)
페르시아와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둔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주도권을 잡기 위해 맹렬하게 싸우다가 그리스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세계사의 그늘에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다가 겨우 역사에 등장한다는 것이 경제위기다. 천하대세는 흩어지면 뭉치고, 뭉치면 반드시 분열한다고 하는데, 지옥과 같은 폭력과 살육을 전제로 한 분열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혹자는 그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지혜가 탄생했다고 하는데, 그 지혜가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했다. 지혜의 즐거움을 세상에 던져주었을 뿐이다. 중국 현대사도 다르지 않았다. 분열을 멈추려면 언제나 공동으로 헤쳐 나가야 하는 문제가 던져져야 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를 찾는 것이 어렵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두 집단이 연합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밀월기는 잠깐이고 뭔가 될 듯하면 분열 조짐이 일어난다.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서로 상대방 탓하며 목에 힘줄을 세운다. (중략) 황푸군관학교도 설립 초기에는 편이 갈리지 않았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추천을 받고 입학한 학생들이었지만 네 편 내 편 따지며 몰려 다니지 않았다. (중략)문제는 저우언라이였다. 정치부 주임 저우언라이는 친화력이 남다른 타고난 선동가였다. (중략) 순식간에 전체 학생의 30퍼센트가 공산당 입당을 자원했다. 군관학교의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은 조직체도 결성했다. (중략) 편이 갈린 학생들은 학내에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밥 먹다 말고 밥그릇을 집어 던지는가 하면, 몽둥이까지 동원해 난투극을 벌이는 경우가 허다했다. (중략) 그래도 특징은 있었다. 훈련받을 때나 지방 군벌들과의 전쟁터에서는 전우애를 발휘했다." (121~3쪽)
2차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위험 요소로 생각한 것은 장제스 뿐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종전 후에는 분위기가 바뀐다. 중공이 중국대륙에서 국민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나찌와 파시스트의 침략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는 전사들이 소련과 중국의 사회주의 전사들이었기 때문에 경계심이 덜 하다가, 주적들이 사라져버리고 중공이 중국대륙을 장악하자 위협을 느끼면서 자본주의 세계는 냉전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시안사변으로 이룩된 2차 국공합작 기간 중인) 1941년 1월, 중공이 주축인 항일 게릴라 부대(新四軍)를 국민당 측이 공격했다. 그럭저럭 유지되던 국공 관계가 최악에 이르렀다. (중략)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국민당의 반공을 지지하지 않았다. (중략, 미국은) "내전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지원하는 무기를 반공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영국 총리 처칠도 가만있지 않았다. (중략) "통일전선이 원만히 이뤄진 것을 축하한다.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희망한다." 장제스는 코쟁이들이 협박한다며 노발대발했지만 반공 정책을 거둬들였다." 173~5쪽)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 대한 이야기로 돌려진다. 그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만주국이 죄악 덩어리였다. 마치 먼 전설처럼 느껴지는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 일본이 중국을 지배하기 위해 교두보로 삼아 선점했던 만주국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우리 현대사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다.
"푸이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나도 피해자다. 어디를 가나 일본의 감시를 받았고 출입도 자유롭지 못했다. 일본 군부가 무슨 악행을 저질렀건 나와는 무관하다"며 결백을 굽히지 않았다. (중략, 푸이에게) 숙정과 토벌, 집단학살의 현장을 보여주자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일본인에게 저항하다 희생된 동북항일연군의 기념관은 참관한 날은 실성대곡했다. (중략) 내 죄가 얼마나 큰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특히 조선인 이홍광의 활약은 나도 기억이 난다. 만주국은 죄악 덩어리였다." (252쪽)
중국과 북한과의 특수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알아둘 만하다. 이미 역사가 되어버려서 김일성이 서 있던 자리에 그의 손자는 더 이상 서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 오랜 기간 중국 지도부는 기댈 곳은 북한 밖에 없었던 시절을 기억했고, 국민당군에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해 준 김일성을 마오쩌둥은 '일국의 지도자'로 '예의를 갖춰' 대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지안을 거쳐서 방중하는 김일성을 영접하기 위해 집안까지 마중을 나가서 영접할 정도로 각별한 대접을 했다고 한다.
"국민당 군대가 진주하기 전이었지만 (중략) "중국 공산당에 대한 소련의 지원은 한계가 있다"며 중공 휘하 동북민주연군(동북항일연군의 후신)의 선양 진입을 모른 체 했다. (중략) 국민당 대군이 동북으로 몰려들었다. 소련 홍군은 동북민주연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도시에서 나가라. 상부의 지시다. 철수하지 않으면 탱크로 밀어버리겠다." 거의 명령조였다. "공산당 군대가 다른 나라의 공산당 군대를 탱크로 밀어버리겠다니, 말이 될 소리냐"고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중략) 북만주에서 승기를 굳힌 국민당군은 창춘과 지린을 점령해 동남과 남북을 차단했다. (중략) 동북민주연군은 혼란에 빠졌다. (중략, 김일성은) 현재 중국 혁명이 곤경에 처해 있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모른체할 수 없다. 보관 중인 무기와 탄약을 파악해라. 10만 명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무상으로 중국에 지원하겠다. (중략, 북한에서 보내 온 무기를 받자) 각목과 화승총을 무기랍시고 들고 다니던 전사들은 날이 샐 때까지 춤추고 노래하며 광란의 밤을 보냈다. (중략) 1946년 10월, 중국 국민당은 김일성의 제안에 의해 장백산 일대에 근거지를 마련한 동북민주연군과 일전을 준비했다. (중략) 국만당군 주력 8개 사단이 네 차례에 걸쳐 린장 지역의 동북민주연군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린바오가 (중략) 지휘한 동북민주연군은 국민당군의 끈질긴 공격을 저지하며 국민당군을 괴멸시켰다." (281~298쪽)
중국인 이야기 4권의 마지막 부분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외교관들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난다. 중국은 당당하다. 오랜 기간 동안 반외세투쟁, 항일투쟁, 비적 토벌, 내란 등의 시련을 거치면서 스스로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당당함이 과연 얼마만큼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중국인 이야기 4권 / 김명호 / 한길사(2015년 3월)
'사는이야기 >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들은 어떻게 돌아갔을까_페르시아원정기_150825~151001 C594 (0) | 2015.09.01 |
---|---|
과연 그럴까,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_150823~0828 (0) | 2015.08.25 |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구나_중국인 이야기 2권_150816~150823, 일 (0) | 2015.08.18 |
신경숙의 표절_150622, 월 (0) | 2015.06.22 |
우리의 마음은 밭이다_화,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_150610, 수 (0) | 2015.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