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서재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구나_중국인 이야기 2권_150816~150823, 일

광명의 어느 중국집에서 초면의 김선생님은 우리는 이름도 모르는 중국 요리들과 고량주를 시켜서 맛을 보여 주셨다. 독특한 맛이 있어서 중국 요리에 관심이 많아 조예가 깊어진 분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2002년의 봄날이었을 것이다. 10년이 훌쩍 지나 그분이 쓰신 책을 우연히 한울빛도서관의 서가에서 발견했다. 읽을까 말까를 고민했다. 총 네 권의 책인데, 1권은 없고 2권이 꽂혀 있었다. 필요한 책은 다 빌렸으니 잠깐 읽어보고 재미있으면 읽어보기로 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펼치는 순간 일어서고 싶지 않았다. 그대로 다 읽고 싶었다.

 

"진리는 하녀의 속성이 있다. 권위에 의존해야 빛을 발한다. 권위가 약한 진리는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둔갑한다. 대다수가 진리를 숭상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권위를 숭배하기 때문이다. 펑더화이는 이 점을 간과했다." (72쪽)

 

대약진 운동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현장들을 시찰하고 나서 운동을 대실패로 규정하고, 루산회의에서 할 말을 다 한 펑더화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당행위나 자살은 하지 않겠다. 농촌이 그립다. 농부가 되어 자력기식하며 살고 싶다." (104쪽)며 정계를 떠났다. 그러나, 문혁의 광풍 아래 그의 인생 마지막 8년을 죄수로 살다가 "온몸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약은 고사하고 물 한 잔 얻어 마시기도 힘들었다. 갈아입을 옷도 주지 않"은 상태로 고통을 당하다가 죽어갔다. 그에 대한 작가의 평가는 참으로 냉혹하다. '진리는 하녀의 속성을 갖는다. 펑더화이는 이 점을 간과했다'.

 

이 말은 누구의 말인가 궁금하다. 인용부호도 없고 검색도 해 보았는데, 원전이 나오지 않는다. 작가의 말이다. 작가는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또 하나의 이야기를 들이댄다. 자손이 귀한 집에 아이가 태어나자 잔치가 열렸는데, 장수하겠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 왕후장상이 되겠다 등등 많은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그런데, 제일 끝에 있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좋은 이야기를 해 버리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입을 열어 진리를 말했다.

 

"이 아이도 언젠가는 죽겠군요. (중략) 확실치도 않은 말을 늘어놓은 사람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진실을 말한 사람은 쫓겨났다." (73쪽)

 

그 사람은 펑더화이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진리는 하늘의 별처럼 빛나서 세상을 아름답게 비춰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은 권위의 하녀가 되어 힘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만 빛난다. 권위는 정의와 돈, 조작된 여론, 폭력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세상에 정의에 의해 만들어진 권위는 매우 드물다. 돈과 조작돤 여론과 폭력에 의해 만들어진 권위가, 진리가 아닌 진리로 세상을 움직인다. 그래서 권위는 이상사회로부터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니 진리도 참진리와는 한참의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고, 참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멀찌감치 떨어져 진리를 깨닫는 즐거움을 누려야 하는 모양이다. 소크라테스처럼.

 

이상주의자들의 패배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다. 공산주의자들의 근본은 이상주의자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해 주는 사례들을 열거한다. 다만, 중국의 현실에 맞는 이론을 제시하고 실천해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해 냈던 마오도 이상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펑더화이의 말대로 이상사회 건설은 실패했고, 문화혁명의 광풍 앞에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신음해야 했다.

 

"(1535년, 젊은 나이에 대법관이 되어 영국을 호령했던) 토마스 모어가 단두대 앞에 섰다. (중략) 이 냉철한 몽상가는 사유재산이 없고 섬 전체가 행복하고 유쾌한 생활을 영위하는 허무의 고향, 유토피아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다. (중략) 1824년 맨체스터의 부유한 공장주 로버트 오웬이 미국 인디에나주의 이민구 한 곳을 15만 달러에 사들였다. 사람의 힘에 의존해 곡식을 경작하는 농업공동체, 뉴하모니타운을 건설했다. 오웬이 만든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공산주의 실험장은 5년만에 수포로 돌아갔다. (중략, 카를 마르크스는) 몽상을 실현하기 위한 길을 과학적으로 천명했다. (중략) 중국도 공구와 묵적을 시발로 진시황에게 최초의 도전장을 던진 진승, 오두미도의 3대 교주 장노, 전원시인 도연명, 시인으로 더 알려진 당대 최고의 검객 이백, 청제국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어놓은 태평천국의 지도자 호수전 등 면면히 내려오는 이상사회의 계보가 있었다. (중략) 청년 마오쩌둥이 구상한  신촌은 유아원과 양로원, 상점, 학교, 농장 등이 공동으로 운영되는 표준형 유토피아였다. (중략) 960만 평방킬로미터의 대지 위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이상사회 건설의 꿈이 되살아났다. 권위와 기백과 열정으로 6억 5,000만명을 몰아붙였다." (83~85쪽)

 

잘 해야 1년을 통털어 사람들은 겨우 반발자국 정도만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움직인다. 스마트폰이 십 년도 안되어 세계를 지배했다고 해서 세상이 진보한 것은 아니다. 놀고 욕망하고 시간을 태워 버리는데 이용될 뿐이다. 스마트폰 이후로 우리는 진보된 세상을 향해 아직 다섯 걸음도 채 떼지 못했고, 시대의 늪에서 몸부림 치는 사람들이 그득하다.

 

더러운 중국, 부패한 중국, 문란한 중국이 도대체 어떻게 버텨왔을까. 사람이 매우 많다. 마구마구 늘어난다.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있어서 쉽게 굶어죽지도 않는다. 돈을 버는데는 부끄러움이 없어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되고, 부자가 되고 나면 손가락질 받지 않는다. 그런데도 뭔가 규율이 있기는 하다. 아주 가끔 그런 정책들이 있었다고 한다. '옌따 嚴打 Yándǎ'. 이것의 효과와 반인륜적인 과도한 처벌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지만 여장부 캉커칭의 태도는 놀랍다.

 

"덩샤오핑은 '다수를 소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인도주의'라며 '옌따(嚴打)', 엄하고 가혹하게 주어까라고 지시했다. 사소한 범죄지만 장차 큰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있거나 선동에 혹해 무리를 지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유맹'으로 분류했다. 유맹죄는 극형, 즉 사형이었다. 깡패, 건달, 치한, 좀도둑, 강도를 비롯해 남녀관계가 복잡한 공산당원이나 공직자 등 적용 범위가 한도 끝도 없었다. (중략) 텐진시 인민은행장 주궈허도 유맹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주궈허는 주더(항일전쟁기 팔로군 총사령관)의 친손자였다. (중략) 덩샤오핑은 집행을 비준하지 않았다. 대신 "캉커칭이 결정하게 해라. 모든 문건을 갖다 드려라"고 지시했다. (중략) 캉커칭(주더의 부인)은 여장부였다. "왕자의 범법에 대한 형벌도 서민과 같아야 한다"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28~30쪽)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서양 지식의 모태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새로운 문학들이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아무리 자세히 읽어보아도 그런 감흥과 자극을 받지 못했다. '필멸의 인간과 불멸의 신', '일이 벌어지고 나면 어리석은 자도 현명해 진다' '요절해야만 하는 영웅의 한탄' 등 몇 개의 이야기가 눈에 띈다. 나머지는 살육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중국 사람들 이야기에는 재미와 지혜와 상상력과 거북함과 뻔뻔스러움과 열정이 넘쳐난다.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술판 잡담처럼 들리는 이야기들인데도 깊이가 있고 강렬하다. 캉커칭과 같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일까. 분명히 행간에 말하려고 하는 것이 숨겨져 있을텐데 말이다. 군벌에게 참수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노력한 스구란의 이야기에서도 재미있는 문장을 발견한다. 오빠를 군대에서 출세시켜 복수를 염원했으나 현실에 안주해 버리자 남매관계를 단절했고, 복수를 해 주겠다고 하는 사람과 결혼했으나 7년째 감감 무소식이라 가출해 버린 스구란은 하늘의 도움으로 군벌에게 총탄을 날리는데 성공한다.

 

"중국 역사에는 자객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한다. 고지식하고 어딘가 좀 미련해 보이는 구석이 있으면서 의협심을 갖춘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거의가 입으로 온갖 기개를 뽐내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목숨을 초개처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을 용케도 찾아내 사지에 몰아넣고 목적을 달성한 고용인들이야말로 무서운 혜안의 소유자들이었다. 스구란은 종래의 자객들과는 경우가 달랐다." (35~6쪽)

 

이런 글도 매우 강렬하다. 이런 방식은 틀렸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일까. 그냥 받는 후원금과 작품을 판매하고 받은 돈의 차이는 그렇게도 인품의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할 말을 하고 있는 작가의 자세는, 중국을 놀이터 삼아 40년이나 놀고 나서야 비로소 책을 낼 생각을 하게 된 작가이기에, '젊어서 하지 못한 말을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마음껏 쓰고 있다'라는 느낌이다. 비판을 피하려는 것일까 비판으로 인해 되돌아 오는 반비판에 대한 두려움일까. 그의 마음이 궁금하다.

 

"(남편 사후) 그림과 시로 소일하던 허샹닝은 랴오중카이(남편)의 생전 소망이었던 농공업학교 설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중략) 개인전을 열었고, (중략) 닭을 키우고 채소를 재배해 의식을 해결하며 항일 선전활동을 했다. 장제스가 인편에 100만 위안을 보냈지만 "한가하게 그림이나 그리는 생활, 돈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기 쉽다"는 글과 함께 돌려보냈다. 허샹닝은 요즘의 일부 시민단체들처럼 사회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원금이나 후원금을 구걸하러 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뛰어난 화가였던 그는 직접 그림을 그려 판 돈으로 학교를 설립했고 부녀운동에 필요한 경비를 조달했다. 혁명가이기 이전에 고귀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16쪽)

 

인간은 잔인하다. 동물에 가까운 인간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도 인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런 인간도 사람이야'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인간이라는 말에는 경멸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잔인한 인간을 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마오가 소련에 머무는 동안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장칭은 젊은 시절 오해받을 행동을 많이 해본 사람다웠다. 쑨웨이스를 만날 때마다 모스크바행 열차에서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국가의 기밀사항이라 말해줄 수 없다." 문화대혁명(문혁)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67년 (중략, 장칭 江靑 Jiāng qīng에 의해 체포된 쑨웨이스는) 7개월간 얻어맞기만 하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략) "열 명의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한 명의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24~25쪽)

 

 

 

 

평생을 학벌의 그늘 아래 사는 인간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격변기의 일이겠지만 이런 교육 철학을 가진 사람이 있었기에 그런 사람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1928년 봄 후스는) '무위이치(無爲以治)'를 선언했다. (중략) 후스의 교육은 문리의 소통이 핵심이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소통은 학생들의 수준을 향상시킨다. 조기 전문교육은 지식의 폭을 좁게 만든다. 말하는 기계보다는 사고와 이성의 노예를 양성해야 한다." (중략) 후스는 교수들의 학력(學歷)보다 학력(學力)을 훨씬 중요하게 여겼다. (중략) 26세의 청년작가 선충원을 교수로 임용하자 학교 안팎이 술렁거렸다. 선충원은 시골 사숙에 몇 년 다닌 것이 고작이었다. 학생들보다 학력이 낮고 단 한 편의 연구논문도 없었다." (149~150쪽)

 

부정한 일이란 무엇일까. 돈으로 중화민국의 총통이 된 사람은 부정한 사람일까. 참으로 기이한 일생을 산 사람들이 중국에는 널려 있는 모양이다. 평가 불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는데, 이쯤되면 평가가 불가능하지 않을까.

 

"차오쿤은 떠돌이 옷감장수 출신이었다. 배운 건 없었지만 됨됨이가 대범하고 솔직했다. 부하들에게 인사와 재정을 공개하고, 한번 쓴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심하는 법이 없었다. (중략) 상하이의 다섯 식구 한 달 생활비가 30원이면 족할 때였다. (중략) 차오쿤은 청렴한 군인이었다. 부하들이 만들어 온 돈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10월 10일, 쌍십절 날 총통 즉위식을 하겠다."는 말만 했다. 한 푼도 남기지 말고 의원들 매수에 쓰라는 지상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중략) 의원 한 명당 500원씩을 풀었다. (중략) 선거 전에 5,000원씩을 수표로 지급하겠다. (중략) 지방에 내려간 의원을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한 명당 특별비 1만원을 추가로 지급한다. (중략) 동향이나 같은 당 의원들을 출석만 시켜라. 대가는 5,000원이다. (중략) 개표 결과 차오쿤이 480표를 얻어 총통에 당선됐다. 남방의 혁명세력을 상징하던 쑨원은 18표에 그쳤다. (중략) 장돌뱅이 시절, 귀인 상을 타고났다는 3류 창기 류펑웨이를 10만원(무일 : 다섯 식구의 200년 생활비)을 들여 부인으로 맞이한 것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화북을 점령한 일본군이 차오쿤을 괴뢰정부 수반으로 세우려 하자 "죽만 먹다 굶어 죽어도 좋다. 일본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며 만류한 것도 류펑웨이였다. 1938년, 차오쿤은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273~285쪽)

 

 

 

 

장쉐량과 쑹메이링의 이야기는 더욱 기가 막힌다. 대륙의 판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장쉐량은 1925년 6월 상하이 미국영사관 만찬에서 (중략) 쑨원의 처제 쑹메이링을 처음 만났다. (중략) 1927년 12월 쑹은 장제스와 결혼했다. (중략) 1928년 6월 장쉐량은 아버지인 동북왕 장쭤린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하자 친일세력들을 제거하고 동북의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난징 국민정부의 장제스는 북벌군을 이끌고 베이징에 진입했지만 장쉐량과의 제휴가 필요했다. (중략) 장쉐량이 베이징에 왔을 때 그를 암살하거나 난징으로 유인해 감금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은 소인이 아니다. 국가 이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장군과 친구가 돼야지 왜 제거할 궁리만 하는가"라며 장제스를 설득했다. (중략) 장쉐량은 두 달 후 동북 전역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했다. (중략) 중국의 황금 10년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이때부터 공산당 섬멸을 지휘해 장시성의 중앙소비에트 홍군 주력에 치명타를 안겼다. 장정에 나선 홍군은 옌안에 안착했다(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허덕이고 있었다). 장제스의 명령으로 동북을 일본에 내준 장쉐량은 시안에 주둔하고 있었다. 장제스는 장쉐량에게 옌안을 공격하게 했다. (중략) 시안에 온 장제스를 장쉐량은 1936년 12월 12일 밤 감금했다.

 

(중략, 쑹메이링은) 장제스를 대신해 장쉐량과 옌안에서 급파된 저우언라이와 협상했다. 내전 중지, 항일전쟁 준비, 옌안을 지방정부로 인정, 장쉐량 신변보장과 장제스를 최고지도자로 추대할 것 등에 합의했다. 쑹이 온 지 3일 만에 모든 게 평화적으로 끝났다. (중략) 시안사변이 난해하고 희극성이 강한 이유는 순전히 장쉐량과 쑹메이링 두 사람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난징까지 배웅한 장쉐량을 감금했고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타이완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호랑이를 풀어놓아선 안 된다"는 당부를 아들 장징궈에게 세번이나 했(다. 중략) 장쉐량은 "두터운 정은 골육과도 같았지만 정견의 차이는 철천지원수와도 같았다"는 대련으로 반세기에 걸친 은원을 정리했다." (319~323쪽)

 

책을 반납해야 한다. 이런 너저분한 사랑이야기도 남겨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너저분한 일을 사고 없이 정리한 리이춘의 이야기는 꼭 기억해 둘 만하다. 참으로 놀라운 중국이 아닐 수 없다.

 

"중국혁명가들의 일기, 회고록, 서간집들을 읽다 보면 좌니 우니 하며 치고받는 일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느낄 때가 간혹 있다. 혁명사와 연애사를 함께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중략) "그간 우리의 연애와 가정이 많이 파괴됐다. 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현재의 애인과 완전히 헤어진 후에 다른 사람을 사귀기 바란다." (중략) 리리싼은 매력 덩어리였다. 리이춘은 넋을 잃었다. (중략)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중략) 동생 리충더를 남편 양카이즈에게 소개시켜줬다. 둘 다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리이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중략) 리리싼은 리이춘에게 차이허썬을 잘 보살피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곤 밖으로만 나돌았다. (중략, 리리싼은) 귀국 후 리이춘이 모스크바에서 차이허썬과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리이춘은 막내동생 리충산을 데리고 리리싼을 찾아갔다. (중략) 리리싼은 리충산과 결혼식을 올렸다." (353~370쪽)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정권을 잡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와중에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 자기 몸을 던져 적진에 뛰어든 담대한 사람들은 당연히 희생되었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죽어간 사람들은 이름이 있건 없건 최선을 다한 양쪽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일까. 어느 한 쪽은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일까. 대략 보아도 우스와 주펑을 포함해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지만 중공은 중국을 통일하지 못했다. 타이완 점령 공격이 실현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 중국인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일까. 한발 비켜난 한반도에서 중국인들이 참여한 끔찍한 전쟁은 계속되었으니 그것도 아니다. 그냥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이라면 이것인가 보다. 피할 수 없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가까이 해야 한다. 

 

"1949년 8월, 우스는 국민당과 함께 타이완으로 철수했다. 중공 화동국은 적의 심장부에 잠복하겠다는 우의 계획에 동의했다. 장제스는 우를 참모차장에 기용했다. (중략) 국민당은 타이완의 중공 지하당을 소탕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중략) 억울한 사람 2,000명 정도는 희생시켜도 좋다는 식이었다. (중략) 1949년 10월 11월, 인민해방군은 두 차레에 걸쳐 진먼도(金門島)와 저우산군도의 점령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원인은 정보부재였다. (중략) 주펑은 1949년 11월 27일 타이완에 잠입했다. (중략) 우스는 수집해놓은 정보들을 담은 마이크로 필름을 주펑에게 건넸다. (중략, 정보는 전달했지만 두 사람은 체포되었고) 특별군사법정은 두 사람과 연루자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2주 후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미 7함대가 타이완해협을 봉쇄했다. 여러 명의 목숨과 바꾼 정보는 휴지로 전락했다. (중략) 중공은 적을 가까이 했다. 적과 멀리한 사람들은 싸움에서 이긴 적이 없다." (4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