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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분노를 노래하라_호메로스의 일리아드_150629

1987년 오늘. 유격 조교에게 대들었다고 이름표를 뜯겨 고통스러운 유격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단비와 같은 소식이 내렸다. 정부의 특별담화를 보기 위해 TV 앞에 집결하라는 소리였다. 더 이상 기합을 받지 않아도 되어 푹 쉬었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4.13 호헌조치를 철회하고 직선제로 개헌한다는 노태우의 6.29 선언이었다. 6월 항쟁의 성공으로 내가 얻은 것은 유격장에서의 자유였다. 시민들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되찾았다.

 

28년이 지난 2015년의 오늘. 그때를 떠올리며 한가롭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 : 트로이의 왕가인 일로스(Ilos)의 노래라는 뜻 / 영어로는 Iliad)를 읽는다. 그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그리스 민족을 통칭한다 / 무일)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들을 하데스(제우스의 형제로 저승의 신 / 무일)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제1권 25쪽)

 

'명예롭게 살기를 원했던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지옥으로 보낸 것은 그의 분노 때문이었다'는 것을 노래하겠다. 현대인들은 화와 분노를 가라앉혀 긍정의 에너지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BC 9세기의 시인 호메로스는 분노를 노래한다. 왜 분노를 노래할까. 

 

아킬레우스는, 테베를 정복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가멤논에게, 아폴론을 모시는 사제의 딸인 크뤼세이스를, 아폴론에게 되돌려주듯, 그녀의 아버지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보내는 대신에 아이디어를 낸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아름다운 여자 노예 브리세이스를 자신이 데리고 가겠다고 한다. 두 사람이 싸우려고 할 때 아테네 여신이 나타나 아킬레우스를 말린다. 세 배, 네 배의 보상을 약속하면서. 여신의 부탁으로 물러섰지만 실의에 빠진 아킬레우스는, 어머니인 바다의 여신 테티스에게 자초지종을 말한다. 아들의 낙심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는 제우스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여신 테티스를 사랑했지만 그들 사이에 태어나는 아기가 제우스 자신 보다 위대한 힘을 갖고 태어난다는 예언 때문에 가까이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랑스런 그녀가 애원을 하니 거절이 불가능하다.

 

"아버지 제우스여! (중략) 내 아들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그 애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요절할 운명을 타고났나이다. 하거늘 지금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이 그 애를 모욕하여 그 애의 명예의 선물을 몸소 빼앗아 가졌나이다. 그러니 그대가 그 애의 명예를 높여주소서." (제1권 45쪽)

 

그리스인들은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승리하는 것을 큰 명예로 알았다. 청동기로 무장한 야만의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 명예에 대한 보상으로 전리품이 지급되는데, 그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노예로 부릴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가멤논은 아름다운 여인을 아폴론 신에게 빼앗기고 대신에 아킬레우스의 노예를 차지한다. 명예의 보상을 빼앗긴 아킬레우스가 이런 모욕을 참은 이유는, 아테네 여신에게 복종하여 세 배, 네 배의 보상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병장수하지 못할 운명으로 태어난 것도 억울했던 아킬레우스로서는 답답한 일이었다. 최고의 행복인 무병장수는 못할지언정 명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이 그와 그의 어머니인 테티스의 바람이었는데, 왕에게 자신의 노예를 빼앗겨 버렸으니 모욕을 당한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슐레이만의 발굴에 의하여 기원전 1,250년 경에 실재했다고 여겨진다. 흑해 연안의 풍부한 밀을 필요로 했던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밀을 무기로 하여 막대한 부를 쌓아가던 트로이를 9년간의 전쟁 끝에 제압하게 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에 맞서 9년을 버틸 수 있었던 트로이의 저력도 대단하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서사시는 기나긴 전쟁을 불과 며칠 동안의 이야기로 집대성한다.  

 

전쟁의 시작은, 메넬라오스의 아름다운 아내 헬레네를 트로이의 멋쟁이 파리스 알렉산드로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납치해 간다. 아내를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이 9년 간이나 이어지고, 일진일퇴의 지루한 대치 끝에 두 나라는 협약을 맺는다. 더 이상의 희생을 치르지 말고 전쟁 원인의 두 당사자인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대결로 헬레네 문제를 정리하고 평화를 되찾자는 것이다.

 

아름다우며 보물을 많이 갖고 있는 헬레네는 생명과 부의 상징이다. 두 영웅의 대결 결과에 따라 밀을 비롯한 부에 대한 관리권이 정해지게 되었다. 전쟁이 두려워 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정당한 이유로 전쟁을 그만둘 수 있다면 모두가 환영할 일이었다. 서사시는 결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제우스와 헤라와 아테네와 아프로디테의 개입으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결투에서 패배하여 목숨을 잃게 된 파리스를 아프로디테가 구하고, 아테네의 부추김을 받은 트로이의 판다로스가 메넬라오스를 화살로 암살하려 하자(실패했지만) 협약은 깨어지고 만다. 안타까운 일이다.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들의 개입으로 인간의 평화가 깨진 것이다. 과연 전쟁은 신의 의도일까. 아니다.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전쟁의 참상을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이 없기 때문에 호메로스는 신들의 변덕에 모든 원인을 돌려 버린다. 그래야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을 그나마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안다. 신을 대체하는 것이 거짓이다. 이라크의 대량살상 무기가 그 거짓의 예다. 평화를 깨고 전쟁을 부추기는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된다.

 

전쟁이 시작되자 백전노장은 병사들을 이렇게 배치한다. 전쟁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이렇게 배치되어 살아갈 것이다. 군집을 이루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이런 배치 상태를 면할 수가 없다. 몇몇 운명에 맞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위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원하는 곳에 따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백전노장) 네스토르는 먼저 말과 전차와 함께 전차병들을 정렬하고 나서 후미에 용감한 보병들을 많이 세워 전쟁의 울(울타리/무일)이 되게 하고, 그중간에 겁쟁이들을 몰아넣어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싸우지 않을 수 없게 해 놓았다.

 

네스토르는 먼저 전차병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들의 말들을 꼭 붙들어 뒤죽박죽이 되지 않게 하라고 일렀다. "누구든 자신의 말 모는 솜씨와 용기를 믿고 혼자 앞으로 달려 나가 트로이아인들과 싸우려 하지도 말고 뒤로 물러서지도 마시오. 그렇게 하면 그대들이 약해질 테니까." (제4권 119쪽)

 

2권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양쪽 진영의 군대들을 소개한다. 그 규모와 역사를 소개하는 데 내용은 매우 지루하고 생소하다. 전투가 시작된 후에는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나 패배하여 죽은 사람들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호메로스의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죽은 자나 산 자나 모두에게 소중한 사람이었고, 모두가 중요한 역사를 살았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쟁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비극이니 반대한다는 생각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죽어가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인간은 필멸할 운명을 가지고 있으므로 죽음을 거스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전쟁을 막아서 생명을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중 한 부분을 옮겨 보자.

 

"메게스는 안테노르의 아들 페다이오스를 죽였다. 페다이오스는 서자였지만 고귀한 테아노가 남편을 기쁘게 해 주려고 친자식들 못지않게 정성껏 길렀다. 이름난 창수인 퓔레우스의 아들이 가까이 다가가 날카로운 창으로 머리의 힘줄을 치자, 청동이 이빨 사이를 뚫고 나가며 혀뿌리를 잘랐다. 그래서 페다이오스는 차가운 청동을 이빨로 깨문 채 먼지 속에 쓰러졌다." (제5권 132쪽)

 

전쟁은 매우 잔인했다. 왕자의 미인 아내가 원인이 되었든 부와 생명의 원천인 밀이 문제였든 전쟁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만든다. 전쟁은 그냥 전쟁이 아니라 살육전이다. 아무 죄가 없는 민간인들은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은 현대전에 와서야 비로소 생긴 것이리라.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살육전은 전쟁을 더 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데, 결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목숨을 구걸하는 아드라스토스를 포로로 잡으려 하자 아가멤논이 메넬라오스에게 / 무일) 어찌하여 저들을 이토록 염려해주는가? 트로이아인들이 너의 집에서 그토록 착한 짓을 하던가? 그들 중에 아무도 우리 손에서 갑작스러운 파멸을 면치 못하게 하라, 어머니가 뱃속에 품고 있는 사내아이조차도. 그런 사내아이도 역시 면치 못하게 하라! 그들은 묻어줄 사람도 없이 그리고 흔적도 없이 모두 한꺼번에 일리오스(트로이/무일)에서 없어지게 하라" (제6권 169쪽)

 

아가멤논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아킬레우스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보내고 사과했다. 그런데도 아킬레우스는 그가 믿지 못할 사람이라며 전쟁에 참여하기를 거부한다.  

 

 

능소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