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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아름다운 초원을 포기하다_150317, 화

오늘까지 전기자전거는 220km를 탔다. 목표인 1만 km의 0.22%를 달성했다. 1%도 안되는 위치.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선녀의 옷자락이 바위를 스치듯이 그렇게 쌓여간다.

 

음성에 다녀와서 거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수천께서는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계신다. 도서관에서 사서 도우미로 일하고 돌아오신 정농과 함께 밭으로 간다. 겨우내 방치되었던 부직포를 걷는 일로 올해 첫 밭일을 시작한다. 옷을 그리 따뜻하게 입지 않았느데도 포근하다. 다섯 시가 넘었어도 해는 아직 남아있고, 날은 점점 더 따뜻해진다.

 

부직포 중에서 심하게 훼손된 것은 밭둑에 두르기로 했다. 여기저기 구멍난 시커먼 부직포를 두르고 있으니 마치 난민촌의 지붕을 덮는 것같다. 가만히 두면 쑥과 망초와 바랭이로 뒤덮일 공간이며, 그냥 두고 보면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아름다운 풀이 밭둑을 넘어서 우리가 심은 작물들 사이로 씨앗을 뿌려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땅과 사람, 자연 생태계 모두에게 이롭지 않은 제초제를 뿌릴 수도 없고, 예초기를 돌려서 일년에 네 다섯 차례 잘라주는 것도 휘발유와 톱날과 농부의 땀방울을 쏟아야 하는 것이므로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가난한 농부에게 돌아오는 것이 너무 적다. 벌써 십 이년 째 해마다 반복되는 고민이다. 올해의 선택은 부직포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푸르름으로 가득해야 할 밭둑이 난민촌처럼 흉측하게 변할 것은 가슴 아프지만 이것이 가장 자연에 가까운 조치 방법이 아닐까 한다.

 

부직포 아래에서는 아무 것도 죽지 않는다. 다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부직포가 걷히고, 해가 비치고 비가 내리면 부직포의 그늘에 묻혀 있던 온갖 씨앗들이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 새싹을 내밀 것이다.

 

부직포로 망쳐 버린 밭의 아름다움은 밭둑 너머 멀리 빙 둘러쳐진 넓은 산과 들이 대신해 줄 것이다. 고추대 마른 것과 마늘을 덮어 두었던 볏짚을 걷어내어 태웠다. 해가 지고 완전히 깜깜해지자 타고 남은 숯이 약한 바람에 반짝거린다. 붉은 빛의 반딧불이를 보는 듯 아름답다.

 

오랜만에 따뜻한 흙냄새를 맡으며 일을 했더니 몸이 상쾌하다. 역시 적당한 노동은 사람을 즐겁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