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들에게 아파트는 주거시설에 불과하겠지만 농부에게는 집이면서 추운 날씨에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온실이다. 단열 처리가 잘 되어 있고, 별도로 난방을 하지 않더라도 상하좌우에서 이웃들이 난방을 해 주기 때문에 10~20도의 온도가 유지되어 작물을 키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된다. 시골의 농장에서라면 이중으로 비닐하우스를 짓고, 아침 저녁으로 전열기를 돌리거나, 독한 가스를 마시며 연탄난로를 피워야 한다. 대부분의 농가에서 겨울 농사를 포기하는 이유는 과도한 난방비용과 온도관리의 어려움 때문인데, 아파트는 이런 문제들을 완벽하게 해결해 준다. 아파트는 도시가 농부에게 내려준 축복이다.
작년 농한기에 아내와 아이들이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한가로움을 즐기다가 문득 햇빛과 온도관리가 관건이 되는 모종 키우기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베란다를 이용한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어느 농가에서도 아파트 거실에서 모종을 키운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텃밭이 된다면 모종 키우는 하우스도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곧바로 고추 모종 키우기를 시도했다. 싹트기에서 네 잎이 나는 시기까지는 잘 자라 주었다. 그러나 모종을 밭으로 옮겨 심을 때가 다 되어 가는데, 잘 자라던 고추 모가 줄기가 연약해지면서 무거운 잎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 쓰러져 버렸다. 정상적으로 자란다면 30cm 정도까지 곧게 자라줘야 하는데, 굽은 소나무처럼 휘어져서 제대로 자라지를 못한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응급처방으로 이쑤시개를 지지대 삼아 줄기를 곧게 잡아보려 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결국 제대로 된 예쁜 모종으로 키워내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휘어지고 쓰러져 처참한 모습이 된 고추 모종들을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농장의 비닐하우스 한 귀퉁이에 옮겨 심었다.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논 일 때문에 정신 없이 세월이 흘렀는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이 연약한 모종들이 땅심을 받아서 줄기를 곧추 세우더니 주렁주렁 꽃이 피기 시작했다. 놀라운 생명력이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고추 수확에 성공할 수 있었다.
작년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고추 모종을 잘 키우시는 분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어린 모를 포트에 옮겨 심고 나서 물을 너무 많이 줘서 잘록병에 걸렸을 수도 있고, 너무 따뜻하고 평온한 곳에서 키워서 웃자란 것일 수도 있다고 한다. 비닐 하우스에서 키울 때도 날씨가 따뜻한 날에는 하우스를 개방해서 바람을 맞혀야 고추모가 건강하게 자란다고 한다. 단순하지만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으면 성공을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올해는 고추모가 올라 오면 거실문을 개방하여 통풍이 되도록 바람을 관리하고, 마르지 않을 정도로 물 관리를 해 주기로 했다.
미지근한 물에 담궈 고추씨를 불리는 과정을 생략하고, 따뜻한 물에 적신 면티나 수건을 이용해서 고추씨를 직접 불려 보았다. 씨앗에 수분이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았는지 일주일 이상을 불려야 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면티에 물을 줄 때는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거실 바닥으로 살짝 흘러 내릴 정도로 충분히 부어 주었다. 물에 담궈 불릴 때보다 사나흘 정도 시간이 더 걸렸다. 시간 절약을 위해서는 기존 방법이 더 효율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작년에는 위와 같이 불려서 촉이 튼 고추씨를 모판에 흩뿌려 가볍게 흙을 덮어 떡잎이 4개 나올 때까지 집단으로 키운 뒤에 다시 포트로 옮겨 심었다. 이 때 어린 잎을 옮겨심는 작업이 매우 힘들었다. 올해는 옮겨심기 작업을 없애기로 했다. 면티에 불려 촉이 튼 고추씨앗 중에서 튼튼한 것을 골라 포트에 직접 이식하기로 했다.
50개의 포트가 있는 모종판을 사서 원예용 상토를 채운 다음에 손으로 일일이 눌러 씨를 심을 준비를 했다. 두 개를 하고 났더니 어깨가 아팠다. 일단 모종판 전체에 흙을 부은 다음 또다른 모종판으로 위에서 한꺼번에 눌러주었더니 한 번에 심을 준비가 끝난다. 단순한 아이디어로 공정 개선에 성공했다.
흙이 담긴 포트에 젓가락으로 촉이 잘 나온 씨앗들을 한 개씩 옮겨 심고, 그 위에 흙을 다시 덮어 주었다. 덮는 흙은 보통 씨앗 두께의 2~3배 정도면 되는데, 일을 빨리 끝내려는 욕심에 전체 모종판 위에 흙을 덮어 버렸더니 너무 깊게 씨앗이 묻혀 버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일주일 후에 보니 대부분의 씨앗들이 떡잎을 내었는데, 두껍게 흙을 덮었던 포트에서는 기미 조차 보이지 않고, 2주일이 지나서야 드문 드문 싹이 트기 시작했다. 쉽게 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유의해서 작업해야겠다.
면티에 불린 씨앗들은 뿌리가 1cm 가까이 길게 자란 것들도 옮겨 심는데도 아무런 문제점이 없었는데, 수건에 불린 씨앗에서는 문제가 발생했다. 수건의 섬유조직이 덜 조밀하다 보니 씨앗들이 뿌리를 수건의 실 속으로 뻗으면서 수건에 단단히 달라붙었다. 대단한 생명력이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틈새로 뿌리를 뻗어내릴 수 있으니, 거대한 바위나 콘크리트 담장에도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나무와 꽃들이 있는 것이다. 옮겨심기 위해 씨앗을 떼어내다가 소중한 뿌리가 부러지는 것들이 생기니 수건은 씨앗을 불리는데 사용해서는 안되겠다. 뿌리가 부러진 씨앗들도 정상적인 씨앗과 같이 뿌려서 촉이 손상이 되어도 자랄 수 있는 지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떡잎이 잘 나왔으니 이제는 물과 바람을 관리해 줘야 한다. 때마침 꽃샘 추위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베란다 문을 개방하기가 어려웠다. 떡잎들은 벌써 햇볕을 향해 몸을 옆으로 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하다가 매일매일 모종판을 180도 돌려 주기로 했다. 효과가 있을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날이 좋아지면 바람 관리를 할 수 있을테니 임시 방편으로 이런 방법이라도 사용해야 했다. 물 관리는 스프레이 두 통으로 전체 모종에 뿌려주는 정도로만 물을 주기로 했다. 물은 있어야 하지만 습하지 않게 관리해야 하는데, 이것은 오랜 경험으로 최적의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물관리는 몇 년의 경험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월 27일부터 일을 시작해서 3월 17일 현재 총 500주의 모종이 아파트 거실 한 켠에서 자라고 있다. 농원에서는 어머님이 전통 방식으로 500주를 키우고 계신다. 총 천 주의 모종이 과연 얼마나 많은 고추를 생산할지도 궁금하고, 두 방식으로 키운 모종 중에서 어떤 모종이 더 잘 자라줄지도 궁금하다. 결과를 보려면 따뜻한 5월의 봄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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