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 갑자기 여행계획을 생각하느라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농사일이 끝나가니 점점 여유를 갖게 되는 모양이다. 이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아파서 일 하지 못하는 농부를 대신해서 콩수확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9시가 다 되어 밭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절터에 새로 이사 온 나무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작업하는 모습을 잠깐 둘러보고 밭에 갔더니 비로소 몇 사람이 도착하여 작업 준비를 하고 있다.
이천 평이 넘는 콩밭은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지난 주말에 잘 베어져서 말려지고 있었다. 오늘은 베어진 콩들을 탈곡기로 옮겨서 기계로 터는 작업만이 남았다. 열 명의 사람들이 기계 한 대에 매달려 작업을 했다. 11월 들어 한 번도 땀흘려 일하지 않았는데, 워낙 작업이 빠르게 이루어지다 보니 땀이 흐른다. 4시간을 콩을 들어 옮기고 났더니 온 몸에 진이 빠진다. 새참도 없다.
좋은 농부는 나이가 40대 후반으로 나보다 몇 살 어리다. 내가 이사를 왔을 때 나이를 물어 보더니 살짝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자신 보다 젊어 보이는 내가 막내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었나 보다. 마을 청년회의 일원으로 온갖 심부름을 다하며 즐겁게 일하는 농부였다. 술과 화투로 휴식 시간을 보내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아서 청년회에 가입하려다가 그만 두었더니 그와 만나는 회수가 줄어 들었다. 그래도 아침 일 나가기 전에 만날 때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 봄에 이앙기를 임대하려고 열심히 알아보다가 실패할 수도 있어서 지나가던 그에게 부탁했다. 혹시 임대가 안되면 기계를 빌려 쓰자고. 그는 두 번 생각도 안하고 얼마든지 빌려 쓰라고 한다. 다행이 이앙기를 빌릴 수 있어서 그에게 신세를 지지는 않았지만 농사친구가 없는 나로서는 그가 든든한 후원군처럼 느껴졌다.
그런 그가 농사일을 끝내고 나더니 서울 병원에서 큰 병 진단을 받고 내려왔다. 아이들 셋과 성치 않은 아내와 늙으신 어머니는 그대로 인데, 그의 몸은 자꾸 여위어 갔다. 오늘도 일하는 시간 중간에 잠깐 와서는 미소 띈 얼굴로 작업하는 모습을 보더니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입맛이 없어요. 그렇게 맛있던 김치가 왜 이렇게 간이 맞지를 않는지 모르겠어요. 2주 전에 만난 그는 아직 힘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었다. 오늘은, 다른 때 같으면 가장 바쁘게 뛰어다닐 사람이, 일할 수 없는 몸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지 못한다.
비록 농사를 짓지 못해도 좋으니,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그는 사람이 좋아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많이 마셨고,
길 바닥에 쓰러져 잠들 때도 있었다.
그는 일을 좋아해서 일을 많이 했고,
피곤에 지쳐 또 술을 마셨다.
다른 누구에게 한 번도 어려운 부탁을 못하고 살았는데,
누구나 그에게 힘든 일을 부탁했고
그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니,
그는 더 이상 농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 좋으신 농부는 12월 3일 밤새 내린 눈을 바라보며 모든 세상의 짐을 내려놓았다.
다음 생은 더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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