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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벼베기, 고단함의 기록_141027~29, 수

지난 수요일부터 계속된 단풍 휴가를 마치고 농원으로 복귀한다. 술과 여행으로 피로가 쌓였고, 책 한 권 끝내지 못해 마음이 허전한 휴가였다. 그나마 이번 주는 벼베기와 도정이라는 大事를 앞두고 있어서 지나친 게으름은 아니었다고 위로한다. 그렇게 마음을 추스리고 내려오는 데, 아리따운 아가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회원님, 콤바인 예약하셨죠? 그런데 트레일러를 예약하지 않으셨네요. 말씀드리고 제가 대신 예약해 드릴려구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2주 전에 예약할 때, 분명히 배달해 준다고 했는데. 다시 확인을 했다. 배달은 음성에서 금왕까지만 해 주는 것이지 논앞에까지 배달은 안된다는 것이다. 트랙터도 없어서 금왕에서도 가져올 수가 없다고 하니까 트랙터도 임대하라고 한다. 허참. 콤바인 반나절 작업에 20만원의 임대료와 기름값 3만원.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15만원. 음. 돈으로는 손해지만 자립자작소농으로 가기 위해서는 5만원의 수업료를 내야 한다.

 

담당자, 팀장, 음성군수 비서관까지 돌아가며 두 차례씩 읍소하고 큰 소리 지르고 다 해 보았지만 요지부동이다. 청주시를 알아 보았다. 랙카를 이용해서 원하는 곳까지 배달을 해 주는데, 운반비 4만원은 자부담이라고 한다. 단양군을 알아 보았다. 군의 트럭을 이용해서 일정이 맞으면 배달해 준다고 한다. 다시 음성군 담당자들과 이야기를 해 보았지만 규정과 형평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한다. 그나마 음성군 비서관은 군수지시사항으로 해서 콤바인 임대에 관한 규정 개선을 검토해 보겠다고 한다.

 

오전 11시부터 시작된 논쟁이 오후 7시가 다 되어야 정리가 되었다. 안된다, 규정을 검토해 보겠다. 쓰다. 사람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고 살고 있으면서도 또 한 번 좌절하고 만다. 시골에서 농사 짓고 살면 사람 설득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 역시 틀린 생각이었다. 사람은 어디에나 있었고, 그들을 설득하는 일은 계속 실패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리미는 그래도 검토해 보겠다고 했으니 완전한 실패는 아니라고 위로했다. 위로는 받았지만 효과가 아주 약했다.

 

28일 화요일 아침 9시에 출발하여 느긋하게 금왕농기계 임대센터에 도착했다. 트랙터는 있는데, 콤바인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원래 9시에 임대를 받아야 하니까 제 시간에 와 있어야 하지만 정비를 하느라 그랬는지 열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생전 처음으로 트랙터에 트레일러를 연결하여 그 위에 콤바인을 실어 5km를 이동하는 대장정을 해야 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간이 쪼그라 붙을 정도로 긴장되는 위험한 기계들이다. 사고 없이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조상님, 하느님, 부처님, 알라여 오늘 하루를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갈 있게 도와주소서.

 

 

 

트레일러는 전진할 때는 큰 문제가 없는데, 후진할 때는 가고자 하는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트랙터를 후진시켜 트레일러의 방향을 잡은 후에 다시 트랙터를 조정하여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두 번 시도해 보았다. 원리는 알겠는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 결론을 내렸다. 후진하지 말자.

 

컴바인은 금년 3월과 10월에 두 차례에 걸쳐 교육을 받았는데도 작동 장치들이 제대로 눈과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임대 담당자들로부터 다시 한 번 작동법을 들었다. 여전히 심장은 떨렸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만일 논에 물이 차서 콤바인이 빠지면 기체 상승장치를 수동으로 전환해서 기체를 상승시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배우지 않아서 논바닥에서 사투를 하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다. 작업을 할 때는 언제나 논둑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서 작업한다는 것. 그래야 콤바인을 정확하게 조정할 수 있고, 벼포기들도 밟지 않아 깨끗하게 일할 수 있다. 그 정도는 눈썰미로 알 수 있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 글쎄요. 핵심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잘못된 교육이라고 봅니다만. 속으로만 말했다. 콤바인은 논둑을 오른쪽으로 끼는 방향으로 회전하며 작업하라. 반드시 초보자들에게 알려 주어야 할 내용이다.

 

금왕지소에서 논까지는 약 30분이 걸려 이동했다. 부변속 중속, 주변속 3단으로 천천히 트랙터를 몰았다. 트레일러와 콤바인의 무게가 운전에 조금이라도 지장을 준다고 생각하면 가차없이 속도를 낮췄다. 뒤따르는 차들이 늘어나고 추월하고 늘어나고를 반복했다. 4차선 도로는 여유로웠지만 2차선 도로는 앞쪽에서 거대한 트럭들이 달려오고 있어서 불안했다. 그렇다고 사이드 미러로 트레일러가 차선 안에 제대로 따라오고 있는지를 계속 확인할 수만은 없었다. 결심했다. 트랙터의 중앙 마크를 차선 중앙보다 2cm만 오른쪽으로 유지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자. 효과가 있었다. 확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트레일러는 묵묵히 트랙터를 따를 뿐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2차선 도로도 무사히 지났다. 마지막 관문은 2미터 높이의 낭떠러지가 있는 좁은 농로다.

 

좁은 농로라고 하지만 15톤 트럭들도 지나는 길이다.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중앙 맞추기에 전념했다. 긴장된 손으로 속도를 2단으로 낮추고 악셀은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이동할 수 있도록 맞추었다.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순간 수천만원짜리 기계들을 박살내는 것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트레일러의 바퀴가 살짝 살짝 낭떠러지 끝을 밟는 느낌이다. 더욱 겁이 났지만 조금씩 낭떠러지 반대편으로 트랙터를 조정했다. 왼쪽 바퀴가 안전한 곳으로 들어서고 안전지역에 위치한 오른쪽 바퀴도 밭둑에 걸리지는 않았다. 콤바인이 탕탕 튀면서 거친 노면에서 춤을 추었지만 미끄러져 떨어지지는 않았다. 불과 500미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농로길을 걸어 걸어 들어갔다. 절 마당에 주차를 시키고 났더니 '해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었다. 11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정농께서는 논에 계시지 않았다. 콤바인을 트레일러에서 내리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 우습게 보이는 트레일러지만 수 톤이 넘는 콤바인을 너끈하게 싣고 버틸 뿐만 아니라 유압 장치가 있어서 무게 중심을 이동시키면 자연스런 경사로를 만들어 콤바인을 편안하게 싣고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콤바인을 내리기 위해서는 뒤로 아주 천천히 후진시키고, 트레일러의 유압 장치의 도움을 받아서 스무드하게 경사로를 만들어야 한다. 몸과 기계의 안전을 트레일러의 유압에 맡겨야 한다. 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도와주고 격려해 줄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 나와 기계가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해 내야 한다. 콤바인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움직임으로써 내 정신줄을 잡아 채고, 궤도 바퀴의 철컹덩 소리는 트레일러를 박살낼 것 같은 기세다. 콤바인이 뒤로 다 빠진 것 같은데도 유압은 작동하지 않고 내 몸은 공중에 떠 있어 불안하기만 하다. 그러다 갑자기 휘익하고 땅으로 곤두박질친다. 부드럽게 유압이 작동하고 있었는데, 그 짧고 느린 속도가 떨어지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느껴졌다. 무사히 콤바인을 내릴 수 있었다. 기계는 위대하고, 유압은 더 위대하다. 인간을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최고의 발명품이다.

 

트랙터와 트레일러를 분해하여 농원까지 타고 가려 했으나 연결핀이 빠지지 않는다. 무리하게 힘쓰지 말자. 시간은 많다. 두 세 시간이면 끝낼 수 있으리라. 두분이 마당을 정리하고 계셨다. 부직포 깔고 비닐 깔고 천막깔고 그물 깔고 열 두시가 다 되어 벼를 말릴 준비를 끝냈다. 점심을 먹고 쉬지도 못하고 논으로 나왔다. 한 시간이라도 빨리 끝내고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왼쪽 논둑이 똑바르게 작업하기가 좋을 것 같아서 왼쪽으로 향했다. 망했다. 첫째, 문이 오른쪽에 달려있어서 작업이 덜 될 오른쪽 논으로 작업자가 내리기가 매우 곤란하다. 둘째, 눈앞의 벼가 아니라 왼쪽 끝의 벼를 보고 작업을 해야 하니 제대로 된 작업을 할 수 없다. 오른쪽으로 돌면 운전석 앞의 벼들을 중심으로 살피며 작업을 하므로 쉽고도 정확하게 작업할 수 있다. 셋째, 벼가 깔리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작업해야지만 벼들이 콤바인의 바퀴에 깔리지 않게 설계되어 있었다. 네 번의 교육 동안에 한 번도 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눈썰미라고.

 

적어도 두 시간은 회전방향, 속도, 작업 품질을 맞추기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게다가 지난 주에 내린 비가 논을 습지로 만들어 놓아 좁은 곳에서의 회전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벼 베는 시간은 10분이고 돌리는 시간이 20분이다. 더 좁고 더 습한 흑미논에서는 콤바인을 때려 부수고 싶을 정도로 방향 조정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유압으로 기체를 상승시켜서 작업을 하는 것을 배워와서 끝까지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작업 결과는 미친 이발사가 머리를 깎아 놓은 것처럼 논바닥은 어지러웠다. 7시가 다 되었다. 12시 반부터 작업을 했으니 6시간 반이 걸렸다.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 쓰며 기계도 청소해야 했다. 7시 반. 추위와 피로와 찬물을 견디지 못하고 일단 집으로 철수했다. 우리 셋은 모두 지쳐 버렸다. 두 시간 혹은 세 시간이 7시간의 사투로 변해 버린 것이다. 살아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제 기도를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향악당에 가서 두 시간 쇠를 두드리고 왔다. 기분은 그다지 상쾌하지 못했다.

 

수요일의 아침. 찬 공기가 다 가시지 않은 8시부터 다시 콤바인을 닦기 시작했다. 한 시간을 더 닦았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다시 옷을 갈아입고 트랙터에 앉았다. 경험이 있다고 어제 보다는 덜 떨렸다. 제일 위험한 낭떠러지 농로 구간은 걷는 속도로 지나가고 2차선 도로에 접어 들었다. 부변속을 주행으로 바꾸려 시도했다. 아뿔싸. 요란한 소음이 나서 얼른 트랙터를 세웠다. 트랙터의 부변속은 주행중에는 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었다. 클러치가 있으니 언제든지 바꿀 수 있겠다고 순간적으로 잘못 판단했던 모양이다. 정지 상태에서 부변속을 주행에 놓고 다시 3단으로 출발했다. 이상없이 움직인다. 엑셀을 당겨서 속도를 조금 올렸다. 트랙터가 흔들림이 없을 때까지만 속도를 올렸다. 차선도 잘 지키면서 무난하게 이동을 하는데, 4단으로 주변속으로 올리며 가다가 오르막길에서 변속을 하지 않았더니 속도가 확 떨어진다. 오르막에서 클러치를 잘못 밟았다가는 뒤로 밀려 버릴 것같아 숨죽이고 트랙터의 움직임만 바라 보았다. 다행이도 천천히 천천히 쉼없이 올라가 준다. 이로써 모든 고비는 넘겼다. 금왕지소에서 모든 장비를 반납하고 났더니 마음이 허무해 진다.

 

찰벼와 흑미가 마당과 하우스에 쫘악 펼쳐져 있다. 좀 더 능숙하게 했더라면 훨씬 많은 양의 벼가 나왔을테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양으로 보였다. 볏짚 자르는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볏짚도 많이 섞여 들어왔다. 점심을 먹으며 인삼주를 한 컵 마셨다. 기분이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세 시간 동안 실컷 쇠를 두드렸다. 집 앞의 논도 벼베기를 시작했다. 6조식이라 작업 속도도 빠르고 논바닥이 젖어 있을텐데도 이상 없이 작업이 잘 진행된다. 흠, 내년에는 6조식으로 전체 논을 다 작업하고야 말리라.

 

저녁에 통닭과 함께 급히 먹은 소주 한 컵이 체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약을 먹을까 하다가 그냥 견디기로 하고, 유튜브에서 문화혁명에 대한 4시간 짜리 해외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잠이 들었다.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시작된 문화혁명이 수많은 중국인들을 희생시키는 비극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결론이다. 찌앙칭은 마오쩌뚱의 부인으로 문화혁명을 이끌며 정치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마오 사후인 198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무기로 감형되었으나 1991년 자살했다. 그녀와 4인방으로 인해 불붙었던 파괴와 살육과 혼돈의 시기는 10년의 비극이었다. 사람을 비판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자제해야 할 일이다. 비판은 살의를 불러 일으키고 결국에는 살생이 일어나고야 만다.

 

벼 베기도 고단했고, 주체도 고단하고, 문혁의 살육도 머리를 아프게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