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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문제는 정책이다_정도전을 위한 변명_141012~1020, 월

인터넷 기사를 보니,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늘 모임에서 "새로운 비전의 모임이나 강좌들을 만들어 인재를 축적하면 큰 조직이 될 수 있다. (중략) 시장, 의원 외에 당원들이 현장을 다니며 새정치연합이 (중략) 민생을 위한 정책을 발굴하고 끊임없이 발표해야 한다. (중략) 해결과제들의 입법화 등 (중략) 조직적으로 하면 한달 안에 당 지지율이 10% 포인트씩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동감이다. 정의로운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 수 없으며,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다. 그런 가치들을 구현하는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아이디어가 없다면 정치권력에 접근할 수 없고, 정책을 알아야 정치권력을 가질 수 있으며, 정치 권력을 갖고 있어야 정책들을 실현할 수 있다. 정도전을 읽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천재에다 덕망까지 갖추었던 충신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임금을 두 번이나 갈아치울 정도로 개혁파였지만, 체제 전복에는 반대하다 비명에 갔다. (중략) 정도전은 그 해결책을 도덕과 정치의 일치, 즉 도덕적 세력의 정치 참여와 권력 장악에서 찾았다. 천하의 근심을 짊어져야 할 선비가 홀로 독야청청하는 것은 일개인의 자족적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더러운 정쟁을 일삼는 소인당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천하의 군자들로 당을 만들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철인 도덕정치 시대의 개막을 꿈꾼 것이다." (8쪽)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무지한 자라고 말한다.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진리와 지혜를 저버린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어서 법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었다. 아테네의 법체계는 훌륭했지만, 자신에 대한 오해가 너무나 오랜 동안 축적되어서 - 그가 25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었기 때문에 - 그 오해를 풀기에는 재판 기간이 너무 짧아서 결국에는 재판관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재판에 지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많은 현자들과 즐겁게 토론하며 살 수 있음을 생각하니 기꺼이 독배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이방원의 칼날에 쓰러지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의리와 명예를 지키는 최후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테네의 부흥을 위해 오래도록 아테네의 등에(horse fly)이려고 했던 소크라테스와 민본 정책을 시행하는데 철저했던 두 사람은 죽음이 결코 두려워 할 일이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같았다.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는 자가 있는데, 이는 의리와 명예를 위해서다. 저 자중하는 선비들이 그 의리가 죽을 만한 일을 당하면 (중략, 죽음을) 피하지 않는 것은 어찌 의를 중하게 여기고 죽음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겠는가. ..... 아! 정말 죽음이 없다면 사람의 도리는 벌써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적이 항복하기를 협박할 때에 충신이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충의를 보전하겠으며, 강포한 자가 핍박할 적에 열녀가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정조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난처한 일을 당해 바른길을 잃지 않는 것은 다행히도 한 번의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25쪽 / 정도전이 왜구에 홀로 저항하다가 죽은 선비 정침에 대해 감동하여 쓴 글 중에서)

 

좋은 정책도 시의에 맞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적대관계의 단초가 제공되고 막대한 권력과 부와 명예가 걸린 큰 정치판에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반발자국 정도만 움직이려 해야지 서너 걸음 이상을 앞서려 하면 정책도 정책을 내놓은 자도 모두 위태롭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이 아테네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될 것이라 했지만, 먼저 깨달은 사람이 그 속도와 시기를 조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늦게 깨닫고 늦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정도전은 꽤 많은 것을 이룩했으나 스스로를 비웃을 정도로 정말 중요한 시기에 속도 조절에 실패했을 것이다. 완벽하게 지혜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대의 죄목을 알겠소. 그 힘의 부족함을 헤아리지 않고 큰 소리를 좋아하고, 그 시기의 불가함을 알지 못하고 直言을 좋아하며, 지금 세상에 나서 옛사람을 사모하고, 아래에 처하여 위를 거스른 것이 죄를 얻은 원인일 것이오." (45쪽 / 정도전이 거평부곡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 지은 '答田父' 중에서)

 

너무도 당연한 일인데도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있다. 함께 같은 것을 공부했는데도 생각이 다르고 가는 길도 달라지는 것이다. 배울 때는 진리와 정의에 대한 생각까지도 같은 것처럼 보였는데, 행동으로 옮겨질 때는 달라도 너무 달라 아예 반대편이 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모든 다름이 자연스러운 것인데도 그 다름이 사람의 생각과 행동일 때는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일 것이다. 배 고프고 욕심이 나고 두려움이 일어날 때, 인간은 모두 짐승과 같은 본성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자기 수양을 통해 지혜를 쌓고 호연지기를 키웠다 하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이 더 크게 작동하느냐에 따라 가는 길과 생각이 달라진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색은 13세에 성균관 시험에 합격하고 26세에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원의 회시(2차 시험)와 전시(황제 앞에서 보는 최종 시험)에 연거푸 1등, 2등으로 합격했으니 흔치 않은 국제적 천재였다.  이색이 개경에서 문하생들을 키우기 시작한 것은 원에서 유학과 벼슬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1356년경부터일 것이다. 당시 신진사대부 계열의 신세대 인재들은 원에서 선진 성리학을 흡수하고 막 귀국한 젊은 천재 이색에게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 결과 '이색 학당'은 당대 최고의 명문 엘리트 사학으로 각광받았으며, 고려 말 개혁파 유신 대부분이 '이색 학당' 출신이었다 할 정도 (중략) 정도전을 비롯해 정몽주, 이숭인, 권근, 이존호 (중략) 등 뒷날에 여말선초의 중앙 정계를 주름잡은 개혁파 정치가들이 대부분 이색 문하였으니, '이색 학당'은 개혁파의 정치학교 역할을 한 셈이다." (59쪽)

 

"성리학은 온건개혁파 유신들과 역성혁명파 유신들의 공통된 정치 이념이 되었다. (중략) '修己'의 자기 수양적 측면만이 아니라 '安百姓'의 민본주의적 측면까지 겸비한 유교 성리학의 장점이 고려 말의 폐단을 타파할 새로운 이념을 갈구하는 지식인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더구나 성리학은 유가의 이상인 도덕정치를 실현하는 데 최고 권력자인 임금의 과오를 방지하기 위해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의 '正君' 혹은 '格君'이론을 고도로 발전시킴으로써 사대부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 의지를 크게 북돋웠다." (60쪽)

 

정치는 지식인이 맡아야 할 일이다. 사리사욕이 없이 정의와 지혜를 갖춘 지식인이 필요하다. 정치를 위해서 돈이 필요한 지식인은 이미 자격이 없다. 정치가들은 언제나 최저 임금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봉사하는 마음으로 정치를 할 수 있으며, 어려운 사람들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 나갈 수 있다. 정치에 필요한 돈은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내고 사용해야 한다. 정치가가 정치에 필요한 돈까지 내가며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돈이 개입되는 순간 정의와 지혜는 사라지고 욕심과 핑계만 난무하게 된다. 돈이 필요없는 지식인만이 정치를 할 수 있다. 

 

정책을 말하는 지식인이 되어야지 야단치고 호통치기 좋아하는 사람은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해결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려는 지식인이 정치를 해야지 자신의 지혜로움을 자랑하는 무지한 자들은 정치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정치에 맞지 않는 이들 모두는 결국 월급쟁이이자 권력을 탐하는 욕심쟁이일 뿐이지 지혜롭고 정의로운 정치가는 되지 못한다. 시민들의 세금이 아까운 일이다. 신돈을 발탁해 개혁의 전면에 내세운 공민왕의 고민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해결책은 아니었다. 

 

"권세 있는 신하와 명문대가들은 친당이 뿌리처럼 이어져 있어 서로 허물을 가려주고, 초야에 묻혀 있던 신진은 감정을 감추고 행동을 꾸며 명망을 탐하다가 귀한 신분이 되면 집안이 한미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명문거족과 혼인하여 처음의 뜻을 버리며, 선비들은 유약하여 강직함이 적고, 또 문생이니 좌주니 동년이니 칭하면서 당을 만들고 사사로운 정을 따르니 이 세 부류는 모두 쓰지 못하겠다. 세상을 떠나 초연한 사람을 얻어 크게 써서, 머뭇거리며 고치지 않는 폐단을 개혁하려고 생각했다." (79쪽 / '고려사' <열전 신돈> 편의 기록)

 

재미있는 사실을 읽었다. 정도전과 정몽주와 이방원이 부모상을 당하여 관례가 아니었던 여막살이를 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357년에 이색이 우간의대부로 있으면서 3년 탈상을 제도화했으나 당시만 해도 사대부들은 여전히 100일 탈상을 관례로 하고 있었다. (중략) 정도전은 관례를 꺠고 3년 동안의 거상 기간을 완전히 주수해, 공양왕에게 "부모상에 聖人의 예절을 잘 지켰다"는 칭송을 받았다. 이름이 알려진 사대부 중에서는 정도전보다 한 해 전에 정몽주가 아버지 상을 당해 3년 여막살이를 했고, 조선왕조 창업 직적 이방원이 어머니 상에 여막살이를 한 정도다. (중략) 거상 중에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를 읽었는데, 하루 한 장 혹은 반 장을 넘기지 않을 정도로 정독했다 (중략) 유교 경전과 역사 서적뿐 아니라 제자백가와 각종 병서, 그리고 불경, 음악, 수학, 의학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전근대 지성사에 독보적인 백과사전적 학문을 이루었다." (85쪽)

 

도대체 3년상은 어떻게 유래되고 시행된 것일까.  전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일인데도 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지키려고 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사람된 도리를 지켰다는 것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여막살이를 하며 孟子를 읽거나 학문에 열중했다는 이야기가 더 솔깃하다. 그런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꼭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검색을 해 봤더니 '박승봉'님의 블로그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년상 [三年喪] (두산백과, 두산백과)

 

아들이 부모의 상(喪)에는 3년 동안 거상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아버지가 죽으면 참최복(斬衰服)을 입고 3년 동안 거상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자최복(齊衰服)을 입고 3년 동안 거상한다. 만일 아버지가 살아 있고 어머니가 죽었으면 상기를 단축하여 1년 동안 거상한다. 3년상 중에는 궤연(几筵)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여막(廬幕)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상식(上食:식사를 드리는 것)'을 올리고, 초하루와 보름에 삭망전(朔望奠)을 지내며, 밖에 나가면 영좌(靈座)에 나아가 고하고 들어오면 고하여서 마치 살아 있는 이를 섬기듯이 한다. 밖에 나가 다닐 때에는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하여 머리에 방립(方笠)을 쓰고 포선(布扇)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죽은 지 2돌이 되어 대상(大祥)을 지낼 때 상복을 벗고, 궤연을 거두고 신주를 사당에 옮겨서 거상을 마친다. 그러나 여전히 흰 옷을 입고 술과 고기를 먹지 못한다. 대상을 지낸 다음 다음 달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나서 탈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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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자녀들은 삼년상을 치르는 것을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삼년동안을 시묘살이를 하면서까지 묘를 지키면서 제사를 지내는 그 유래는 어디서 왔을까 찾아보았습니다. 논어에 보면 [子生三年然後 奐於父母之懐 父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사람의 인생에서 자식으로 태어나서 세살이 되어야 비로서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주고 점점 사람 구실을 할수 있기 때문에 자식도 부모상을 당하면 어릴적 삼년 정성에 보은의 뜻으로 삼년상을 난다라는 말입니다. 이 글은 공자의 제자의 한사람인 재아(宰我)가 당시 성행하던 3년상에 대하여 부모님의 제사를 3년씩 지내는것은 너무하고 1년이 어떻겠냐고 질문을 하자 그 질문에 대한 답의 내용입니다. 이 말이 자식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러 부모님의 은공에 보답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 지금껏 유래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하게 알아둘 것은 삼년상을 공자가 제일 처음으로 주창한말이 아니고 당시 이미 삼년상이 성행했었으며 그 삼년상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질문에 대한 답으로 한 것을 논어에 기록하여 이 말이 삼년상에 대한 유래로 정착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빈소를 차리고 아침 저녁으로 싱식을 차리고 매월 초하루(1일)과 보름(15일)에 삭망전을 지내며 밖에 볼 일이 있어서 나갈 때도 빈소에 들러 다녀오겠다고 고하며 마치 살아계신 부모님에게 하듯 정성을 다하며 삼년동안을 섬김은 물론 가족들 역시 삼년동안은 음주를 삼가고 상복을 입고 있다가 삼년이 되면 비로서 탈상이라해서 상복을 벗는 것이 삼년상입니다.

 

삼년상 [三年喪]은 세 해 동안 상중에 있는 일이다. 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의 기간이 너무 깁니다. 군자가 삼 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아니하면 예(禮)가 반드시 무너지고, 삼 년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아니하면 음악도 반드시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동나고 햇곡식이 이미 익었으며, 불붙이는 나무를 한 차례 바꾸어 사용하였으니 일 년에 상(喪)을 끝낼 만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쌀밥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 마음에 편하겠느냐?” “편합니다.”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해라! 대체로 군자가 상(喪)을 입을 때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네가 편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재아가 나가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재여는 인(仁)하지 않구나! 자식은 태어난 지 삼 년 된 뒤라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다.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적인 상례(喪禮)다. 재여도 자기 부모로부터 삼 년 동안 사랑을 받지 않았던가?” (박승봉님의 블로그 '초심으로 살자' 중에서)

 

지식인으로서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을 책임의 방기로 생각했던 정도전은 공자와 맹자의 정치사상을 실천하려 했다고 한다. 권근은 정도전을 '맹자를 계승한 분'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공자의 정의가 매우 공허하다. 멀게 느껴지는 이 말을 충분히 곱씹어 봐야겠지만 정치를 대하는 자세로 이해한다면 쉽게 받아들일만 하다. 자세와 원칙에서 나오는 정책, 이것이 중요한데, 자세와 원칙만을 읽고 끄덕이다가 어느 세월에 정책을 만들 수 있을까.

 

"자로 :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 : 내가 먼저 하고 난 연후에 남을 시키는 것이다.

 자로 : 더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공자 : 이를 지겹게 여겨 게을리 마라." (99쪽)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사람들이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청백리를 추앙하고 재산이 많은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2년에 걸친 흉년에 짚신을 들고 다니며 모은 재산을 이웃들에게 내놓고도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던 자린고비가 존경의 대상이 되는 세상이 되어야 건강한 사회다. 정도전이 서술한 도연명과 같은 사람이 그립고, 아내의 신랄한 추궁에 당당히 답하는 정도전과 같은 사람도 그립다.

 

"도연명이 넉넉한 봉록을 의롭지 못하다 하고 전원생활을 달갑게 여긴 것은 추위와 배고픔을 즐거움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술에 의탁해서 그 지조를 지켰으니 취한 것이 곧 절개가 되었다." (123쪽)

 

"(아내의 편지) 입신양명하여 처자들이 우러러 의지하고 가문에 광영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했는데, (중략)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현인군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아내의 편지에 대한 답)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온당하오. (중략) 그대는 집을 근심하고 나는 나라를 근심하는 것 외에 어찌 다름이 있겠소. 각각 그 직분만 다할 뿐이며 그 성패와 이둔과 영욕과 득실은 하늘이 정한 것이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을 근심하겠소."(122쪽)

 

임금이나 정치가나 공무원은 모두 같은 마음이어야 할 것이다. 겨우 호구지책이나 자신의 영달과 가족들의 부귀영화를 위해서 정치에 참여해서는 안된다. 그런 소인배나 장사치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정의로운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려 빈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시민이 정치의 중심인 민주주의의 시대라면 정의롭고 지혜로운 시민들이 사심없이 그런 자리들을 차지하여 빈자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 사심없이 지혜로운 정치가의 모습을 정도전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人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일 천하 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民은 지극히 약한 존재이지만 폭력으로 협박해서는 안 된다. 民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이지만 꾀로써 속여서는 안 된다. (중략)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사심을 품고서 구차하게 해서도 안 되고 도를 어기어 명예를 구해서도 안 된다. 그 얻는 방법은 역시 仁으로써만 해야 한다.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씨를 자기의 마음씨로 가지고 차마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씨로써 정치를 행해야 한다." (152쪽 / 정도전이 지은 <조선경국전>의 '正寶位' 중에서)

 

갈팡질팡하는 외교정책으로 주원장의 분노를 산 고려왕조는 명나라로 보낼 사신조차 임명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사행길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하여 나라의 안위를 보존하려는 충심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매우 위험한 임무였지만 10년 낭인 생활에 모두에게 잊혀가던 정도전으로서는 참으로 극적인 재기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오히려 임무가 어렵고 위험할수록 정도전에게는 바람직했다. (중략) 정몽주가 사행 명령을 받고 정도전을 불러 사행길을 떠난 것은 모두 하루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랫동안 쌓아온 믿음이 없었으면 불간능한 일요, 두 사람 특유의 결단력과 추진력이 아니었다면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략) 두 사람은 특유의 설득력과 친화력을 바탕으로 임무 수행에도 성공해 밀린 조공도 면제받고, 구류되었던 사신들도 돌아오게 하는 공을 세웠다." (166쪽)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 사대부들이 추진하는 개혁의 핵심은 세금이었다.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켜(무상몰수) 농민에게 식구수대로 분배하는(무상분배) 이른바 '計民收田'의 방식이었다고 하니 놀랍다. 그 방식의 유효성은 배고픈 농민이 없어지고, 세금이 잘 걷혀서 나라도 부유해지는데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실현되지 못하고 타협안으로 왕족, 전혁직 관료, 국역을 지는 백성, 각 관청 등을 분배 대상자로 한다는 것으로 조정되었다. 이 안에 대하여 정도전은 찬성했고, 정몽주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정몽주도 먹고 살만한 충신이었지 만인을 위한 충성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마저도 목은 이색, 권근을 비롯한 권력자들에 의해 시행이 저지되어 고려의 개혁은 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따라서 천하의 백성은 누구나 다 토지를 받았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빈부 격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그 토지세도 다 나라에 수납되었으므로 나라 또한 부유했다." (192쪽 /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중에서)

 

우리 동네를 보더라도 농민이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대부분 농사를 접었거나 짓지 않는 외지인들의 손에 땅의 소유권은 넘어가 있고, 임대료를 내고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다. 임대료의 수준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나 매출의 10%는 넘지 않을 것이다. 농민이 농사짓는 땅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지만 세금이나 소작료가 낮아진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성과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제 땅에서 농사짓지 못하는 농민들은 어머니인 땅을 소중히 여길 수가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1390년(공양왕 2) 1월 마침내 새로운 토지대장이 반포되었고, 9월에는 옛 전적이 불태워졌다. (중략) 방대한 양의 낡은 토지대장이 며칠에 걸쳐 시가에서 불태워지자 공양왕과 구신들은 눈물과 탄식으로 이를 바라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중략) 정도전은 과전법에 대해 자기의 원래 이상이 실현되지 못해 가난한 백성에게 골고루 토지를 나눠주지 못한 점을 크게 한탄했다." (203쪽)

 

다름은 틀린 것이 아니라 세상과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평화로운 시기에는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다가 세상이 변하는 시기에는 엄청난 폭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아무리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명심해도 어쩔 수 없이 닥치는 이런 현실에 역사를 택할 것인가 가족과 친구를 택할 것인가. 전자를 영웅이라고 하며 그 뒤를 쫓는 것도 성격이요 그렇지 못한 것도 역시 타고난 성격이다. 역시 다른 것이니 어느 하나를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성혁명파의 핵심인 정도전을 유배 보내고 (중략) 이성계의 낙마는 정국의 최대 변수로 떠올랐다. 공양왕은 내시를 연달아 보내 이성계의 안부를 묻는다면서 이성계 진영의 상황을 탐색했다. (중략) 정몽주는 원래 정도전, 이성계와 '동류'라 할 수 있을 만큼 정치노선이 일치했으나, 1391년 10월 이후로는 고려 체제를 옹호했다. 정몽주가 이성계 진영에서 몸을 뺴 고려 체제 사수로 마음을 굳히기까지는 진심 어린 고민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중략) 조준과 남은은 유배하고 정도전은 귀양지에서 그대로 처형하라는 초강경 상소다. (중략) 정몽주는 측극인 김귀련, 이반 등에게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귀양지로 가서 그들을 국문하다가 고문을 가해서 죽여버리라고 밀명을 내렸다. (중략) 정몽주는 정도전에 의해 '도덕의 으뜸'으로 칭송받던 사람이다. 그런데 30년 동지이자 오랜 친구를 음모적으로 죽여 없애려 한 것은 과연 도덕적인 일인가? (중략) 정도전이 스승 이색을 죽이려 한 것은 얼마나 도덕적인 일인가? (중략)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정도전과 정몽주 같은 인간형, 역사는 그들처럼 정치적 선이 분명한 사람들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즉, 결정적인 순간에는 친구나 사랑하는 가족보다 역사를 선택하는 사람을 그 도구로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238쪽) 

 

예나 지금이나 정치인은 도덕성과 능력을 겸비해야 하며, 모범을 보여 사람들이 스스로 따르게 해야 한다. 법치라고 하는 것은 시대에 따라 필요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지 사람들의 행위를 규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행위는 본보기를 보이는 사람을  따라 하게 되어있다. 정치인이 정직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베풀고 나라를 지키고 살면 사람들도 그렇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덕과 정치의 일치를 추구해 실천적 지식인들에게 정치를 맡기자는 것이 정도전의 구상이었다. (중략, 정도전은) 선비란 백성을 위해 몸 바치는 의인이요, 천하를 바로잡는 정치가이며, 사리사욕에 눈멀지 않는 더덕가이자, 경제, 군사, 과학, 의학 등 경세치용에도 밝은 실용주의자였다." (264쪽)

 

새로운 도읍인 한양의 거리 이름과 새로운 궁궐의 이름을 짓는 등 도시계획을 담당한 것이 정도전이었다고 한다. 술과 덕으로 부른 배를 기뻐하며 임금이 오래도록 큰 복을 받으라는 의미에서 경복궁이라 이름 짓고, 백성을 위해 언제나 부지런히 정치를 하라는 뜻에서 근정전이라 했다 하니 축복과 고언을 함께 담은 이름들이다. 그러면서 한양의 완성은 백성들의 노고이므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고 한다.

 

"[춘추]에서는 백성의 힘을 귀중히 여기고 토목 공사를 삼가야 한다고 했으니 임금 된 사람이 어찌 백성을 부리는 데서 자기의 욕심만 채우겠습니까? 넓은 집에 편안히 있게 되면 빈한한 선비를 도울 생각을 하고, 시원한 전각에 앉아 있게 되면 다 같이 서늘하게 지낼 것을 생각해야만 만백성을 저버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301쪽)

 

한나라를 세운 유방에 대해서는 고우영이 그린 초한지로 재미있게 알고 있었으나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읽는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사실들이 존재하고, 이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한다. 후덕한 인심을 베풀 수 있는 사람, 베풀기 위해 권력을 쓰는 사람은 확실히 다르다. 이런 주원장도 원과 명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 고려의 사신들을 함부로 대접했다 하니 덕이 크기는 큰데, 정략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덕을 베푸는데 있어서 나라와 민족의 담장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략적으로라도 덕을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경계가 없는 높고 큰 덕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은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여말선초에) 동북아시아 질서 변화를 주도했던 것은 중국 안휘성 봉양현의 일자무식 빈농출신인 주원장이었다. 한 고조 유방과 더불어 중국사에 단 두 번 나타난 평민 출신 황제 주원장은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는 극적인 출세기의 주인공이었다. 주원장은 17세에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뒤 탁발승으로 빌어먹으며 지내다가 홍건적의 난 때 가장 가까이 있던 곽자흥 부대에 자원입대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백성들의 재산을 일체 건드리지 않고 포로를 후하게 대하며 전사한 적병들을 위해 위령제까지 지내주는 등, 당시 무수히 일어났던 군벌들과는 질이 다른 후덕한 지도력으로 민심과 군심을 얻어 천하를 제패했다." (312쪽)

 

동북공정을 이야기 하면서도 만주의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해서 언제나 궁금했다. 발해의 멸망이 고려나 신라와 연결되지 못한 것도 아쉽고 궁금한 부분이었다. 일단 이곳에 간단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여말선초에 공민왕, 이성계, 지용수, 정도전 등과 함께 우리나라가 '萬里大國'이었다는 자부심을 가진 선비들이 많아서 요동 공략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방원의 쿠데타로 실현되지 못하고 '태조실록'에서 요동정벌운동을 부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만주 벌판에 대한 우리 민족의 생각은 위축되거나 혹은 과도한 민족주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만주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만 해도 정답이 없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7세기 중반까지 만주의 주인은 고구려(BC 37~668)였으며, 그 뒤로는 당(618~907)과 발해(698~926)가 만주를 분할했고, 10세기 초부터는 내몽골자치구 시라무렌 강 유역에서 일어선 거란족의 요(916~1125)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를 차지했다. 또 그 뒤를 이어서는 여진족의 금(1115~1234)이 요를 내쫓고 만주의 주인이 되었으며, 금의 뒤를 이어서 원(1271~1368)이 만주를 차지했다." (313쪽)

 

조선이라는 국호에 담긴 의미는 우리 민족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일이다. 일제에 의해 패망하면서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비하의 대상이 되었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유약하고 부패하며 백성들의 일상을 돌보지 않았던 한심한 국가로 인식되는 것은 친일사관에 의해 조성된 안타까운 유산이라 할 것이다. 정도전과 조선 건국에 대해 공부함으로써 그런 역사 인식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대한민국의 앞날이 밝을 것이다.

 

"조선이라는 구호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유구성과, 팔조법금의 윤리와 정전제의 이상적 토지제도를 실시했던 기자조선의 도덕문명에서 국가적 정통성을 찾겠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기원을 단군조선으로 본다면 우리 역사는 중국에서 역사의 기원으로 삼는 요순 시대와 동일한 시대에 발원한 것이 된다. 또한 단군은 천제인 환인의 손자이니 중국의 천자와 마찬가지로 천명을 받들어 개국한 나라가 된다. 그리고 기자조선의 문물제도도 중국과 동일힌 유교 문명에 입각한 것으로 중국보다 못할 것이 없으며,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의 영토가 만주 벌판을 주무대로 했던 만큼 우리나라는 원래 강대국이라는 자부심을 부여하기도 한다. 즉, 중국에 비해 역사성이나 도덕성에서 결코 뒤질 것이 없다는 문화적 주체의식이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택한 정신적 바탕이었던 것이다." (321쪽)

 

정치의 특성은 권력은 잡은 집단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런 정치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권력을 잡은 집단을 4, 5년에 한 번씩 평가하고 견제할 수 있는 많은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선거제도는 정치의 폭력성을 제거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친구가 아니면 적이 되고 마는 정치 체제는 전근대적이다. 우리의 정치 체제는 아직도 전근대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시금석이 되는 것이 바로 다른 정치집단에 대한 증오일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호감을 표시한 군주는 단 두 사람, 영조와 정조였다. 여기에 정도전을 복권한 대원군이 더 있다. 이들은 공통점은 집권 과정이 파란만장했고, 집권 뒤에는 강력한 개혁정책을 실시했다는 것이다. 반면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에게 가장 적대감을 표시한 인물은 노론 영수 송시열이었다. 조선의 가장 대표적인 우파 성리학자이자 보수파 정치가였던 그는 정도전을 거명할 때마다 꼭 '간신'이라고 하면서 폄하했다." (359쪽)

 

요동땅을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새로운 나라 명과 조선. 조선의 실정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알고 있는 명의 정보 수집 능력이 대단하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명과 한 번 붙어 보겠다며 차근차근 요동정벌을 준비한 정도전도 보통 배짱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조선으로서는 땅 문제 보다는 내치의 강화를 통해 힘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을텐데, 이성계는 한양 건설에 정도전은 요동 정벌에 지나치게 경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이방원에 의해 왕권이라고 하는 개인의 권력욕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초기 조선의 모습이 정리된 것은 아쉽다. 왕이 면서도 왕이 아닌 이성계와 신하이면서도 백성의 편에 서 있던 정도전의 협조 체제가 치국에서 평천하로 나갈 수 있었다면 더욱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주원장이 보낸 경고 공문을 보자.

 

"지금 조선 국왕 이성계가 등용하고 있는 문인 정도전이란 자는 임금을 돕는다고 하면서 무엇을 했는가? 만일 임금이 깨닫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반드시 화의 근원이 될 것이다. (중략) 임금은 살피거라. 만약 정밀하게 살피지 않다가는 앞날에 나라에 재난이 닥쳐 남의 힘을 빌리게 될 것이다. (중략) 정도전이 여기에 왔다 갈 적(1392년 겨울)에 산해위를 지나면서 사람들한테 말하기를 "조선과 명이 잘 지내면 좋겠지만 틀어지면 한판 붙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다." (370쪽)

 

안타깝지만 결론은 이렇다. 열심히 부지런히 강하게 살아야 한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이라는 대어 낚기에 정신이 팔려 어망에 뚫린 구멍으로 다 잡은 고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략) 운명의 8월 26일 밤 이방원은 자신의 수하 사병과 안산군수 이숙번의 군대를 동원, 무방비 상태의 정도전과 남은을 기습해 살해했다. (중략) 동트기 전에 대세는 기울었고 여드레 만에 이성계가 왕위에서 내려왔다. (중략) 천려를 다하여 평생토록 흐트러짐이 없었던 의인이 일실의 우를 피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하늘의 탓이 아니다. 天道는 無親라,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중략) 오히려 역사는 인의의 길을 가려는 자에게 더 냉혹한 경향이 있다." (398쪽) 

 

- 정도전을 위한 변명 / 조유식 / 휴머니스트(2014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