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크라테스의 변명
참으로 무심한 세월이 50년을 넘겨 지나갔다. 언제 철이 들었는지 알 수 없으나 가볍게 철든 10살 때부터 시작해도 약 40년 동안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그 소크라테스를 읽는다. 어차피 그는 저술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그를 기록한 플라톤을 통해서다. BC 399년의 일이다.
"법정에서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28세의 젊은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지 얼마 후 그의 변호 연설의 일부를 이 책과 같은 형식으로 발표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변호 연설 속에서 자신의 행동과 삶을 관철하고 있는 사상을 힘차게 역설하고 있다. 즉, 그는 무엇보다도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진정한 지(智)에 이르는 길은 무지의 자각 위에 서서 지혜를 힘써서 구하고,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검토하면서 사는 데에 모든 철학적 사상의 근본이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해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일흔 살의 소크라테스를 고소했나. 원고의 변호를 맡은 아뉘토스와 그의 사주를 받은 밀레토스다. 아뉘토스는 피혁업자 출신으로 펠레폰네소스 전쟁(BC 431~405) 후 나타난 30인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정치 재건을 위해 노력한 유력한 정치가다. 그런데 그가 왜 그랬을까.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친구이기도 했던 사람이다. BC 423년에 아테네에서 최초로 상연된 연극 '구름'의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가 오래된 고소인으로 소크라테스에 의해 적시된다. 왜?
"소크라테스는 범죄자이다. 하늘 위의 일과 지하의 일을 탐구하고, 이치에 닿지도 않는 약한 이론을 억지로 주장하며, 또 그러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고 있다." (15쪽 / 소크라테스가 정리한 아리스토파네스를 비롯한 아테네 사람들이 자신을 잘못 이해 한 내용)
자연철학자들이 관찰을 통해 별의 운동과 일식을 비롯한 자연 현상을 예측한 일은 탈레스 이래로 오래된 일이다. 이야기에 의하면 탈레스는, 올리브 수확양이 많을 것을 예측하여 미리 올리브 기름 짜는 기계를 전부 임대해 두었다가, 풍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기계를 빌리려고 했을 때 비싼 값으로 재임대를 하여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가 돈을 번 이유는, 자신이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하고 연구하는 것이 탁상공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에 의해 모든 자연현상이 생겨난다고 믿은 것과는 달리 자연철학자들은 자연현상을 해석하고 예측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적 사고의 선구자들이었다. 그러니 자연철학자들의 연구는 신을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 고발되었다.
자연철학자들과 함께 여러 소피스트들도 활동했다. 교묘한 화술과 논증으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이었다. 소피스트들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아지자 '소피스트(智者)'라는 말은 존경의 의미가 아니라 비난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 역시 대화와 논증으로 사람들의 무지함을 일깨웠으니 다른 소피스트들과 구분되어 인식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 시기는 이미 아테네의 퇴조기였기 때문에 옥석을 구분할 수 있는 시민들의 지혜가 부족했었을 것이다. 지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들이 아테네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으니, 지자 중의 지자인 소크라테스를 상징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구름'이라는 희극이 상연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구름'을 가르킨다. 이 희극이 처음 상연되기 훨씬 전부터 소크라테스는 '구름' 중의 인물과 같은 사람으로 일반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구름'에 나타난 소크라테스는 엄격한 문법가이자 자연학자로서 여러 기상 현상들을 자연과학적으로 설명하고, 그 현상들을 지배하는 제우스 신의 세계 지배를 부정하고, 약한 이론을 억지로 주장하(여 강한 이론이 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청년들에게 악영향을 주는 위험한 소피스트로 다루어지고 있다." (16쪽 각 주)
소크라테스는 놀랍게도 자신이 '지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신을 증인으로 세운다. 그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시작한, 아테네에서는 멀고도 먼 델피에까지 가서 만들어진 정말 멋진 이야기다.
"만일 제가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지혜가 어떤 종류의 지혜인가에 대해 여러분이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을 내세우려 합니다. 그 증인이란 델포이(Delphi)의 神입니다." (19쪽)
소크라테스의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찾아가서 '소크라테스 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를 물었고, 신탁은 없다고 답하면서 고소 사건을 포함한 모든 문제가 (그리고 모든 소크라테스의 적이) 생겼다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한다. 스스로는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한 소크라테스가 신탁의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부정하기 위해서는 뭔가 확실한 증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테네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던 정치가, 변론가, 시인, 예술가들을 만나서, 그들이 자신 보다 지혜롭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들이 자신보다 지혜로우니 신탁이 틀렸다는 것을 여러 사람 앞에서 증명하고 싶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과 그들의 추종자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그들과의 문답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지혜롭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토론에서 무지가 드러나며 명예가 실추된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사악한 소피스트라고 중상모략하면서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는 지금까지도 신의 명령에 따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우리 나라 사람이건 다른 나라 사람이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그를 찾아가 그의 지혜를 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지혜로운 자가 아닌 경우에는 저는 신을 도와 그가 '지자'가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나라의 일이나 집안의 일에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어 몹시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그것도 신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26쪽)
소크라테스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무지를 알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의 무지를 깨달았을까.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이집트의 영향을 받아서 영혼이 인간의 몸과 별도로 존재하며, 삼천년에 한 번씩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추측하고 있었다. 독특하게 아낙사고라스는 영혼도 하나의 물질 운동이라고 말했다가 불경죄로 쫓겨났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던 데모크리토스는 주류는 아니었다고 한다. 어쨌든 소크라테스는 매우 쉽고도 분명한 논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모르는 것을 두렵고 불행한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꼭 무지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본능이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그것을 깨닫게 해 주어 한 번 겪어 보라고 해도 모르는 세계에 덜컥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 자신을 포함해서. 그렇지만 불의를 저지르고 사사로운 욕심을 앞세우며 거짓을 말하는 것을 죽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맞는 말일 것이다. 불의와 욕심과 거짓은 확실히 나쁜 것이므로 불확실한 죽음 보다 훨씬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지혜롭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인지 아닌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죽음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죽음을 최대의 불행으로 생각하여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알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무지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이점에서도 저는 제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만일 제 자신이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지혜롭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저는 저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에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일 것입니다." (38쪽)
소크라테스는 덕을 말한다. 양혜왕을 만나 '仁義'를 이야기 한 맹자가 떠오른다. 그들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맹자는 인의와 왕도정치를 말하고 그것이 어떻게 부와 명예와 강력한 국가와 전국시대의 통일과 백성들의 행복과 왕에 대한 충성으로 이어지는 것인가를 길게 설명한다. 맹자와 그의 제자들이 편집한 맹자의 첫번째 장인 '양혜왕장구'는 아래와 같이 시작된다.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으로서 BC 371년에 태어나셔서 BC 289년 경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자처럼 주유 천하를 했고 학자로서 오래 오래 장수하셨다. 소크라테스가 죽고 동양에서 맹자가 태어났다. 혹시 너무도 위대한 영혼이라 삼천 년이 아니라 삼십 년 만에 환생한 것은 아닐까. 패한 전쟁으로 피폐해진 아테네는 소크라테스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불경죄로 죽였지만, 전국시대의 왕들은 특히 양혜왕은 맹자의 사상을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왕도를 옳은 것으로 여기고 높이 대접하였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전국시대의 절대군주제를 넘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孟子見梁惠王, 王曰 叟不遠千里而來 亦將有以利吾國乎. 孟子 對曰,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맹자가 양혜왕의 초청을 받아 만난 자리다. 왕은 불원천리하고 찾아와 주신 맹자를 보자 기뻐하며 '우리 나라에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 맹자께서는 거침없이, '하필이면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답하였다.
"저는 惡으로 알고 있는 일은 피하되 善일지도 모르는 일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제가 할 수 있는 한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결코 중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당신은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많은 돈과 명예와 지위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지혜와 진리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어떻게 하면 영혼을 가장 완전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데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당신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중략) 여러분 중 누군가가 '나는 그런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라고 주장한다면, 그를 놓아주지 않고, 묻고 또 물으며 검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가 德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덕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될 때에는 저는 그가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하찮은 일로 생각하고 있으며, 가장 하찮은 일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일을 젊은이이건 늙은이이건, 우리 나라 사람이건 외국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할 것이며,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저와 가까운 종족이므로 더욱 강조할 것입니다." (40쪽)
이러다가 전부 베껴쓰게 생겼다. 매우 쉽고 재미있으면서 감동적이니 멈출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기록해 보는 것은 큰 기쁨이니 어찌 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열정과 사랑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나를 죽이신다면, 그것은 저를 해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러분 자신을 해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중략) 저를 죽게 할 수도 있고 추방할 수도 있으며, 시민권을 박탈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략) 그것을 저에 대한 큰 악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악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략)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으려는 것이야말로 커다란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아테네 시민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지금 이렇게 변명하고 있는 것이 제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神으로부터 받은 선물인 저를 죽임으로써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지금 이러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나를 사형에 처해 버린다면 나와 같은 사람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41쪽)
철학하는 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지혜를 쫓는 일을 그만두면 살려주겠다고 시민들이 제안한다 하더라도 결코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고 소크라테스는 선언한다. 그러면서 그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승자독식과 패자말살의 그 처참한 정치행위에 대해서.
"만일 제가 정치에 관여했다면 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것이며, 여러분을 위해서나 제 자신을 위해서나 아무런 유익한 일도 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실을 말하는 것에 대해 화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이나 그밖의 대중들에게 반대하고, 많은 부정과 불법적인 행위가 국내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중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고자 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잠시나마 목숨을 보전하고자 한다면, 공인이 아닌 개인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43쪽)
비록 재판의 결과가 훌륭하지는 못했지만 아테네의 재판은 대단히 흥미롭다. 500명이나 되는 재판관 앞에서 진실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주고 받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재판관에 의한 정의로운 심판을 중요하게 여겼다. 500명이나 되는 재판관들에게 사실과 진리를 전달함으로써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신이 재판관들에게 그런 의무와 책임을 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쌓여 있는 지혜와 정의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쌓아진 것이 아니라 수만년 동안 수많은 지혜로운 사람들에 의해 쌓여진 것이고, 신에 의해 전해진 것이므로 그런 진리와 정의를 배반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악한 행위라는 것이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은) 훨씬 사소한 소송 사건으로 싸울 때에도 눈물을 줄줄 흘리며 가능한 한 많은 동정을 얻기 위해 자기의 자식들과 친척들과 친구들을 많이 동원하여 재판관들에게 호소하고 탄원했는데, 저는 어쩌면 사형 판결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전혀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의 그런 태도 때문에 불쾌해지고 화가 나서 저에게 유죄 표를 던지는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중략) 그동안 저에 대한 평판이 있어 왔지만 그중에서 '지자'라고 불리는 것과 불의에 참지 않는다라는 것 등에 비추어 볼 때 제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제 자신을 위해서도 여러분을 위해서도 국가 전체를 위해서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중략) 명성을 얻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중략) 재판관에게 애원하거나, 그 결과로써 무죄 판결을 받아 석방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실을 말함으로써 재판관을 설득시키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재판관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누구를 두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판관은 자기의 기분에 드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 없이 법률에 따라 재판을 하겠다고 신에게 맹세한 것입니다. (중략) 그것은 .... 신의 존재를 믿지 말라고 가르치는 셈" (49~51쪽)
500명의 재판관 중에서 280명이 소크라테스가 유죄라고 평결을 하자 형량을 결정하기 위해 한 번 더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듣는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보상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그가 요구한 보상은 프뤼타네이온이라고 하는 곳에서의 융숭한 대접인데, 이곳은 외국의 사절이나 공훈을 세운 사람, 올림피아의 우승자들을 환대하기 위한 건물이라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 스타는 대접을 잘 받은 모양이다. 그들만큼 철학자들도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이다.
"저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먼저 당신 자신을 돌보시오. 당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德과 지혜를 추구하시오. 국가의 이익을 돌보기보다는 국가 자체를 돌보시오. 이것이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할 때 준수해야 할 순서요.'라고 설득시키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 일을 해 온 사람이 받아야 할 대가는 무엇이겠습니까?" (53쪽)
소크라테스는 썩어서 몰락해 가는 아테네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노력했으므로 보상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오랜 동안 쌓여 온 중상모략으로 편견에 사로잡힌 재판관들을 단 하루에 불과 몇 번의 변론으로 설득하기는 어려우니 자신이 낼 수 있는 돈만큼의 벌금이라면 내겠다고 했다. 그것은 은 1므나로 하루 일당 정도의 돈이었다고 한다. 이 때 친구들이 나선다.
"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곳에 있는 저의 친구인 플라톤과 크리톤과 크리토불로스와 아폴로도로스가 30 므나의 벌금을 내겠다 제의하라고 저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에 대한 보증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30므나의 벌금을 제의합니다.
(다시 투표를 실시하여 360표가 찬성하여 소크라테스의 사형 판결이 확정된다.) (57쪽)
어처구니 없는 결과이다.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지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준법정신을 강조하면서 독배를 마시지 않았다. 아직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다면 '변명'에 나오는 이 부분을 읽어 보시라고 해야겠다. 그는 법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부정하고 모독하지도 않았고,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것이 아닌데, 아뉘토스를 비롯한 그의 적들이 그에게 누명을 씌워 재판에 회부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가 죄 없이 떳떳하기 때문에 죽음 조차도 그를 비굴하게 만들 수 없다고 말하며 죽는다. 떳떳하게 죽는 것이 신 앞에서 훨씬 행복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비굴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살아 남기보다는 저의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전쟁터에서 무기를 버리고 추격해 오는 적 앞에 무릎을 꿇고 애걸하면 죽음만은 면할 수도 있으며, 그밖의 위험에 처했을 경우에도 살아 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려고만 한다면 죽음을 면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략) 죽음을 피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惡을 피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惡은 죽음보다 발걸음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는 늙고 발걸음이 느리기 때문에 그 느린 것[죽음]에 붙잡혔지만, 저를 고소한 사람들은 영리하고 발걸음이 빠르기 때문에 그 빠른 것[惡]에 붙잡혔습니다. (중략) 만일 여러분이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여러분의 사악하고 부정한 삶에 대한 비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방법으로 비난을 막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며 훌륭한 일도 아닙니다.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훌륭한 방법은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이 가능한 한 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중략)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우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저는 죽음으로, 여러분은 삶으로,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神만이 알고 계십니다."
(63쪽 / 소크라테스의 변명 끝)
그림 출처 : 다음블로그 '마담의 뜨락' 중 [서양고전] 2강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만나다 중에서
영혼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죽을 때 “내가 사랑한 것은 알키비아데스와 철학뿐이다”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스스로 철저한 애지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소크라테스는 수많은 청년들과의 철학적인 토론을 좋아했다. 라파엘로(Raffaello)의 <아테네 학당>에는 토론에 열중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대머리에 들창코의 외모로 알려진 소크라테스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다. 왼편에 투구를 쓰고 있는 청년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군인이며 정치가인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강한 윤리관과 예리한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소크라테스 역시 알키비아데스의 준수한 외모와 지적인 소양에 매혹되었다. 두 사람은 연인으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라 철학적인 측면에서 오랜 기간 영혼의 교감을 이어갔다. 그 옆에 모자를 쓰고 경청하고 있는 인물이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역사 저술가인 크세노폰(Xenophon)이다. 그리고 그 옆에 녹색 옷을 입고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다.
- 박홍순 [미술로 보는 서양철학사] 중-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5526
2. 크리톤
소크라테스의 오랜 친구라고 하더니 과연 훌륭하다. 나이 일흔에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일 것이다. 크리톤을 통하여 감옥에 갇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의 의연함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크리톤 : 차마 깨울 수가 없더군. 내가 자네처럼 이렇게 큰 괴로움을 당하고도 자네처럼 태평스럽게 잠을 잘 수 있으면 좋겠네. 난 자네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네. 그래서 자네의 괴로움을 줄여 주기 위해 꺠우지 않았네. 자는 자네가 평생 행복한 마음가짐을 하고 있다고 항상 생각해 왔지만 이러한 고통 속에서도 그토록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다니." (71쪽)
"크리톤 : 자네는 나와 그밖의 다른 친구들의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염려해서 탈출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략) 우리는 자네를 이 감옥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위험은 기꺼이 감수하겠네.
소크라테스 : 하긴 그것도 염려가 되기는 하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닐세.
크리톤 : (중략) 자네를 위해서라면 나의 돈을 전부 써도 상관없네. (중략, 피타고라스학파인) 테베 사람 심미아스라네. 그리고 케베스를 비롯하여 그밖의 많은 사람들이 자네를 감옥에서 구출하는 일이라면 아낌없이 돈을 내려고 하네." (76쪽)
소크라테스는 고집장이다. 자신의 이성이 옳다고 판단하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사형집행을 하루 앞 둔 지금 크리톤을 비롯한 그의 친구들과 함께 감옥을 벗어나 도망치는 것이 과연 옳바른 일인가에 대해 검토할 것을 제안한다.
"남들의 의견은 무조건 존중할 것이 아니라, 그중에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되는 몇몇 가지만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리고 사람의 의견을 다 존중할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의 의견만을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략) 운동 연습을 하면서 장차 그것을 자기의 직업으로 삼으려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 견해를 존중해야 하겠나, 아니면 의사나 트레이너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겠나? (중략) 그는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도 전문가 한 사람의 견해를 따르고 행동하며 음식도 그의 충고에 따라 먹어야 할게 아닌가? " (78~81쪽)
논점은 두 가지다. 탈출이 옳은 일인가와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위를 해도 되는가. 후자는 결론이 나와 있다.
"이것도 우리에게 움직일 수 없는 진리인지 잘 생각해 보게. 우리는 단순히 사는 것을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 말일세. (중략) 탈출하는 것이 옳다는 분명한 근거가 있다면 탈출하기로 하세. 그렇지만 옳지 않은 일로 결정이 내려진다면 탈출하지 않겠네. (중략)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하더라고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처럼 악으로써 보복을 해서는 안 되네. 어떤 경우에도 악을 행해서는 안 되니까 말일세. (중략)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네. (중략) 남이 나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해서 그 보복으로 그에게 해를 입힌다는 것은, 자기를 방어하는 올바른 자세가 아님을 우리의 논의의 전제로 삼아야 할 걸세." (82~84쪽)
그러면서 국법과 국가를 의인화하여 혼자 묻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도저히 대답하지를 못한다.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고 있다가는 그가 탈출하는 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는 논증을 해낼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의 고통스러움에 소크라테스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새로운 대화 상대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의인화된 국가와 국법이다.
민혁당이나 인혁당 사람들이 유신헌법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과 소크라테스의 죽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크라테스는 고문 당하지 않았고, 이 재판에 대해 알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참여하여 증언할 수 있었으며, 적당한 수준의 형벌도 선택할 수 있었고, 법률이 그것을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유신헌법은 피의자들을 고문했으며, 폐쇄된 재판정에서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배제한 채 판결을 내렸다. 더욱 문제인 것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재판관들은 스스로의 양심과 신이 주신 권한에 따라 판결을 내리지 못했을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고 권력과 명예와 부의 그늘 속에 숨어있다.
"(국법이 말하기를) 자네가 아버지나 주인에게 욕을 먹었다고 해서 (중략) 매를 맞았다고 해서 아버지나 주인을 같이 떄릴 수는 없을걸세. (중략, 국법이) 자네를 처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네를 처형하려고 할 경우, 자네도 국법과 조국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중략) 이번 재판에서도 자네가 원했다면 사형 대신에 국외 추방의 형벌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며, 자네가 지금 이 나라의 동의 없이 행하려는 것을 허락받고 행할 수도 있었을 걸세." (87~90쪽)
어떤 사람이 태어난 나라에서 오래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사람이 그 나라에 복종하고 그 나라의 법률에 복종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지중해의 시대이고, 많은 도시국가들이 나름대로 번성하면서 서로 활발하게 교류했고, 언어 소통에도 문제가 없었으니 혹시 가능한 일일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런 전제 아래 소크라테스는 국가와 법률에 복종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고 주장한다.
"자네는 우리에게 동의하고 약속한 것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가? 그 동의나 약속은 강요된 것이 아니며 자네가 속아서 한 것도 아닌데 말일세. (중략) 그 약속이 자네에게 옳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70년 동안이나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는 시간의 여유가 있었네. (이 부분의 이야기기는 소크라테스에게는 참일 것이다. 그는 악한 것은 행하지 않고 선한 일은 반드시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 무일) (중략) 자네 자신이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나라인 테베나 메가라로 간다고 하더라도 소크라테스, 그 나라에서는 자네를 국가의 역적으로밖에 대해 주지 않을 걸세. (중략) 왜냐하면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국법을 파괴하는 자는 젊은이들과 무지한 사람드를 파멸로 이끄는 자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일세. (중략, 다른 나라로 탈출해 살아간다면 그곳의 사람 중의 하나가) 당신은 이미 노령으로 여생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가장 소중한 국법을 어기고 목숨을 건지는 데만 급급하였는가. (중략) 자네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자네는 악을 행한 자로서가 아니라 고난을 당한 자로서, 법률의 희생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희생물로서 순결하게 죽는 것일세. 자네는 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국가와 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들에 의한 누명을 쓰고 떠나는 걸세." (91~94쪽)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아테네의 시민들과 법률을 사랑했고, 아테네를 국가로서 부모 자식보다 사랑하였다. 그래서 국가에 해가 되는 일이나 법률이 정한 행위를 파괴하지 않으려 했다. 지혜로운 사람이 사랑했던 아테네와 아테네의 시민들과 아테네의 법률은 과연 어떠했던 것일까. 부럽기 그지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친구는 좌절한다. 자신이나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옳다고 느끼면서도.
"크리톤 : 아! 소크라테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크리톤. 신의 뜻에 따르고 신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가도록 나를 내버려두게."
(크리톤 끝)
3. 향연
도입은 아폴로도로스의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된다. 열렬한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로 알려진 그가 아리스토데모스라는 소크라테스의 흉내를 내고 다녔다는 사람으로부터 오래 전의 일을 듣고 친구들에게 전하는 방식이다.
"자네들이 묻고 있는 일에 관해서는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네. (중략) 내가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고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날마다 애쓰게 된 지 아직 3년이 채 못 된다는 것도 모르나? 그 때까지 나는 사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스스로 대단한 인물인 것처럼 행동했으나 사실은 지금의 자네와 마찬가지로 누구보다도 못난 사람이었지. 무슨 일을 하든지 철학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말일세." (103~4쪽)
게다가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겪고 있는 곤란함에 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아폴로도로스 : 철학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나 자신이 말하건 남의 말을 듣건 거기서 얻는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나에게 큰 기쁨을 주기 때문일세. 그러나 (중략) 자네와 같은 부자들과 장사꾼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불쾌해지네. 그리고 사실은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굉장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 보면 내 친구인 자네들이 불쌍해서 못 견디겠네.
친구(글라우콘) : 여전하군 그래, 아폴로도로스. 늘 자기 자신과 남을 비난하는 것 말일세. 자네는 소크라테스만 빼놓고는 누구나 다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 자네 자신부터 말일세. 난 자네가 어떻게 해서 '미친 놈'이란 별명을 듣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네에게 어울리는 별명일세." (105쪽)
소크라테스의 기행도 펼쳐진다.
"소크라테스는 옆집 현관으로 들어가셔서 그곳에 그냥 서 계세요. 제가 불러도 들어오시려 하지 않습니다. (중략) 그냥 내버려 두게. 그게 그분 버릇이야. 그분은 가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엉뚱한 데로 가서 넋을 잃고 오래 서 계시곤 한다네. 곧 오실 걸세. 그분을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두게. (중략) 여기 제 곁으로 오세요. 선생님의 몸을 제 몸에 닿게 하여 저 집 현관에서 선생님의 머리에 떠오른 지혜로운 생각을 나누어 주세요. 선생님은 찾고 있던 지혜를 발견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냥 거기를 떠나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108~9쪽)
미남자였던 비극작가 아가톤이 아테네에서 열리는 디오니소스의 제사때 상연된 연극 경선에서 우승하여 그의 친구들이 모여서 축제를 벌이는데, 전날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 오늘은 술을 먹는 대신에 에로스를 찬야하는 연설을 하기로 제안하면서 이 이야기는 펼쳐진다. 변론의 아버지로 불리웠다는 파이드로스가 제일 먼저 연설을 한다.
"나는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 사람에게는 자기를 진실하게 사랑해 주는 자를 얻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훌륭하게 살려는 사람들에게 지침이 되어야 하는 원리는 좋은 가문이나 높은 지위나 부귀나 그밖의 어떤 것도 아니고 오직 사랑입니다. (중략)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사랑받고 있는 사람보다 더 신에 가까우며 신들을 기쁘게 하기" (114쪽)
소년에 대한 사랑을 여자에 대한 사랑보다 위대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여자의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고, 육체에 대한 사랑은 영혼과 지혜를 사랑하는 것과는 달리 돈과 권력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모양이다. 아가톤을 사랑했과 소피스트에 심취해 있던 파우사니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바치는 사람은 지혜나 그밖의 다른 덕을 증진시켜 줄 수 있고, 소년은 그것을 자기의 교육과 지혜를 위하여 얻고자 할 때, 이렇게 두개의 법도가 서로 맞아떨어질 때 - 오직 이 때에만 소년이 상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며, 이밖에는 절대로 아름다운 것일 수 없어요." (126쪽)
딸꾹질이 시작된 아리스토파네스를 의사였던 에뤼크시마코스가 콧구멍을 간지럽혀 재채기를 하게 하면 멎게 된다고 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의사답게 인간을 비롯한 만물에 관심을 갖고 에로스를 설명한다.
"에로스는 단지 아름다운 소년에 대한 사랑으로서 인간의 영혼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밖의 많은 것들에 대한 사랑으로 다른 사물 속에도 존재하며, 생명 있는 모든 동물의 체내에도, 땅 위에 자라는 모든 식물 속에도 존재합니다. (중략) 절제와 정의로 좋은 일에 마음을 쓰는 에로스야말로 가장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온갖 행복을 마련해 주며 우리로 하여금 평화스러운 사회를 가질 수 있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보다 높은 신들과도 잘 사귈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132쪽)
재채기로 딸꾹질이 멎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한다. 달에서 태어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양성인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 다운 상상력인지 알 수 없으나, 양성인이 뛰어난 능력으로 신들에게 대항하자 제우스가 모든 인간을 두 동강이로 쪼개어 지금과 같은 반쪽 짜리의 인간 무력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의 몸이 둘로 갈라져 버렸으므로 모든 반쪽들은 각기 자기의 다른 반쪽을 그리워하고 다시 한 몸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중략)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고 융합하여 두 몸이 한 몸으로 되고 싶다고 생각할 거예요. (중략) 그래서 온전한 것에 대한 욕망과 그것에 대한 추구가 에로스라고 불리는 겁니다." (136~9쪽)
아가톤의 연설에 이어 소크라테스로 연설 차례가 넘어오자 이야기는 급격히 변화한다. 그는 아가톤에게 묻는다. 에로스는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인가. 에로스는 사랑의 대상을 욕구하는가. 에로스는 자기에게 모자라거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인가. 아가톤과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이런 결론을 내려 버린다.
"에로스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지 추함에 대한 사랑은 아니겠지? (중략) 그렇다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이 모자라며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세. (중략)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이 모자라며 좋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니 에로스는 또한 좋은 것들도 모자라겠군." (153~6쪽)
에로스의 탄생을 소크라테스와 디오티마의 대화 속에서 설명하는 플라톤. 자전거 짐받이에 다는 가방을 페니아(Penia)라고 하는 이유를 비로소 알았다. 그것은 가난과 궁핍을 뜻하는 말로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다는 뜻이다. 풍요를 뜻하는 포로스가 페니아에게 잉태하게 하여 태어난 것이 에로스며 아프로디테의 종이 되었다고 한다.
"무지의 가장 나쁜 점은 아름답지도 선하지도 않고 총명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그는 이런 것들을 욕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지 않는 것을 추구할 리는 없으니까요. (중략)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지혜로운 자와 지혜롭지 못한 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에로스도 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혜란 가장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에로스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필연적으로 애지자요, 또 애지자이니까 당연히 지자와 무지자의 중간에 있는 거예요.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출생의 내력 때문입니다. 즉 그가 지혜롭고 부유한 아버지와 가난하고 무지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163쪽)
그리고 사랑이란, '좋은 것을 영원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모든 사람이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영원히 소유하여 행복해 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죽지 않는 것을 좋은 것과 더불어 욕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중략) 사랑은 또한 죽지 않음을 목표로 한다. (중략) 그것은 오직 출산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중략) 이런 일이 직식에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중략) 만물이 본성상 자기의 지식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죽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 모든 정열과 사랑이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 169~171쪽)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책을 읽어버려 어느덧 이곳까지 왔는데, 머리 속에 남는 것이 없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오늘은 책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다. 벌써 한 달이 흘러버렸다. 흘러버린 시간 속에는 장구와 쇠를 멋지게 치려는 연습 시간도 있었고, 자경농이 되기 위해 가슴을 졸이며 애를 쓴 시간도 있었으며, 악보를 마음대로 조정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평화롭고 정의롭게 하는 정책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시간도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나를 남기려고 하는 것이다.
"(디오티마가 소크라테스에게) 인간의 명예심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세요. (중략) 그들이 유명하게 되고자 하여 '그리하여 불후의 명성을 영구히 쌓아올리기 위하여' 얼마나 지독한 노력을 기울이며, 또 이를 위하여 자기의 자녀들을 위해서 하는 경우보다 얼마나 더 온갖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되어 있으며, 또 얼마든지 돈을 쓰며 고난을 견디며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가를 똑똑히 보세요." (171쪽)
"육체적으로 생식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여자에게로 다가가 거기서 성적 본능을 불태워 자식을 낳아 이로써 죽지 않음과 기억과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생식 능력이 있는 사람들도 또한 있습니다. (중략) 정신이 잉태하고 출산하기에 마땅한 것은 무엇입니까? (중략) 그건 지혜와 온갖 덕이에요. 모든 창조적 시인들, 그리고 독창적이라는 평을 듣는 예술가들이 이 부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지혜는 나라와 가정을 다스리는 일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자제와 정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172쪽)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나 그밖의 훌륭한 시인들을 바라보고는 그들이 그토록 훌륭한 자식들을 남겼음을 부러워할 것입니다. (중략) 당신의 나라에서는 솔론(Solon)이 그의 법률을 만들어 냄으로써 존귀하게 여겨지게 된 겁니다. (중략) 그리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많은 전당이 세워졌지요. 그것은 그들이 그와 같은 훌륭한 자식들을 낳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육체적으로 낳은 자식들로 인하여 이렇게 존경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습니다." (173쪽)
결국 소크라테스는 파이드로스로부터 시작해서 아가톤까지 모든 사람이 정의하고 축복한 에로신 신에 대해 완전히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에로스 즉 사랑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사랑의 한 부분에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하나의 전체로서 바라보도록 하여 다시는 노예처럼 한 가지 것에 얽매여 한 소년이나 한 인간이나, 혹은 어떤 한 가지 일에 집착함으로써 그 하나의 아름다움에만 빠져드는 좁고 너그럽지 못한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중략) 이 세상의 개개의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출발하여 저 최고의 아름다움을 향하여 위로 올라가되, 마치 사다리를 올라가듯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 또 두 개의 아름다운 육체로부터 모든 아름다운 육체로, 그리고 아름다운 육체들로부터 아름다운 일과 활동에로, 아름다운 일과 활동으로부터 아름다운 학문에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아름다움(절대적 아름다움)만을 대상으로 하는 완전한 학문에로 나아가 마침내 아름다운의 완성체(아름다움의 본질)를 알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75~6쪽)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박수 갈채를 보냈지만 아리스토파네스만은 무슨 말을 하려 했네. 소크라테스의 말 가운데 그의 연설을 풍자해서 한 말(사랑이 두 쪽으로 나뉜 인간이 서로의 잃어버린 한 쪽을 찾아가려는 욕구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네."
그리고 술 취한 알키비아데스는 에로스를 찬양하는 대신에 소크라테스를 찬양하겠다고 한다.
"페리클레스나 그밖의 뛰어난 웅변가들의 연설을 들었을 때, 나는 그들을 훌륭한 연설가라고는 생각했지만 지금 말한 것과 같은 감동은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으며, 또 내 영혼이 뒤흔들린 적도 없고 내가 그의 노예가 된 것처럼 생각되어 화가 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있는 이 마르쉬아스(소크라테스)는 빈번히 나를 그런 상태에 빠지게 했으므로 나는 지금의 내 생활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전쟁터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만 어떤 곳에서 우리가 포위되어 식량 없이 지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 때 아무도 이분만큼 잘 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중략) 그는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술을 마셔야만 할 때에는 아무도 그분을 당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그는 그 추운 날에도 늘 입고 다니던 외투만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으며 맨발로 얼음 위를 걸어갔는데 신발을 신고 걷는 다른 병사들보다도 더 잘 걸어갔어요. (중략) 그 때 나는 부상을 당했었는데 아무도 나를 구해 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만이 나를 버리지 않고 나와 나의 무기를 구해 주었습니다. (중략) 대화술이 너무도 기이하여 요즈음 사람이나 옛사람을 막론하고 아무도 그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185쪽)
그리고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다가 잠이 드는 것으로 '향연'은 끝나 버린다. 아름다움과 에로스를 찬양하기 위한 향연이 있었는데, 에로스를 안다는 당대의 시인과 변론가와 의사와 시인들의 지식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뒤집어져 버리고 만다. 에로스는 아름답지도 좋지도 않으면서 영원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고, 어느 하나의 아름다움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모든 아름다움을 사랑하다가 결국에는 아름다움 그 자체를 알아보는 영혼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쉽게 읽히면서도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변명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서 크리톤과 파이돈을 다시 읽었고, '향연'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얻은 것일까.
4. 파이돈
사형 집행을 앞두고 소크라테스의 발목에서 쇠사슬이 풀리자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쾌락이란 참 이상 야릇한 거야. 쾌락은 그 반대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고통과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야. 이 두 가지 감정은 동시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없으면서도 그중 하나를 추구해서 얻으면 반드시 다른 하나도 얻게 마련이거든. (중략) 쇠사슬에 묶여 발이 아프더니 그 고통이 가시자 쾌감이 뒤따르는군." (212쪽)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인간의 보호자이며 인간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이 부르기 전에 자살하는 것은 내 소유의 소나 당나귀와 같은 짐승이 내 허락없이 죽는 것과 같이 노여워할 일이며 벌을 받을 일이라 생각했다.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다. 노예제도를 자연스러운 사회제도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리스인들이라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신과 인간의 관계도 인간을 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지혜로운 철학자로서의 모습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그런 기본 인식 속에서 그의 모든 사유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전제가 잘못된 인식이 과연 올바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어쨌든 철학자들이 늘 추구하는 죽음이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아주 쉽게 이야기 한다.
"죽음이란 것이 있다고 믿는가? (중략) 그건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이 아닐까? (중략) 철학자가 먹고 마시고 하는 쾌락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생각하나? (중략) 철학자는 본능이 요구하는 그런 것들을 경멸하지 않을까? (중략) 그는 가능한 한 육체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영혼 쪽으로 향하겠지. (중략,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인 쾌락을 모르는 삶은 가치없는 삶이며 그런 것들에 무관심한 사람은 죽은 바와 다름 없다고 생각하네. (중략) 육체가 지혜를 얻는 데에 참여할 때, 육체는 지혜를 얻는데 방해가 되겠는가, 도움이 되겠는가? (중략) 영혼이 육체와 더불어 무엇을 탐구할 때마다 영혼은 육체에게 속을 것이 뻔하니 말일세. (중략) 참된 실체가 드러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유 속에서가 아니겠는가? (중략) 이런 점에서 볼 때 철학자는 육체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또 철학자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떠나 홀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지 않겠나? (중략) 사물의 참된 본질을 육체의 다른 감각 기관으로써 파악한 적이 있는가?" (221쪽)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는 그리스 철학의 주류를 따르면서 모든 감각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영혼의 사유를 통해 참된 진리를 찾아나서는 것이 철학자들이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는 이유라 생각하는 것이다. 결론이 어떻게 내려질지 알 수 없지만 이 부분을 읽으며 떠오르는 것. 지금까지 죽은 철학자가 설파하는 참다운 진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까. 성경도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의 이야기고, 불경들도 부처님께서 생전에 설파하신 것들이다. 살아서 이야기를 해야 사람들에게 지혜가 되고 진리가 되는 것인데, 죽어서 얻은 지혜와 진리를 가지고 우리의 영혼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산자들의 세상에는 지혜를 쫓는 사람만 있을 뿐이고, 진리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무언가를 순수하게 인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육체로부터 떠나야 하며 오로지 영혼만을 사용하여 사물 그 자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중략)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불가능한 일이며 우리가 죽은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중략) 죽은 후에야 비로소 영혼은 육체로부터 떠나 홀로 있게 되며, 그 때까지는 영혼은 완전히 육체를 떠나 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가능한 한 육체와 관계를 맺지 않고 (중략) 육체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나면 우리는 순수해질 것이며 (중략) 오염되지 않은 모든 순수한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중략, 철학자란) 일생 동안 가능한 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해 왔던 사람(이기에, 중략)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저 세상으로 떠날 걸세. 왜냐하면 그는 오직 저 세상에서만 순수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세." (223~225쪽)
드디어 궁금하던 부분을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영혼은 육체가 죽으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만물이 서로 상반되는 것의 통합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음양이론과는 다르다. 모든 것이 자기의 반대되는 것에서 나왔다고 하는 것이 논증의 핵심이다. 과연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만일 소크라테스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세포분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과연 이런 방식으로 증명을 했을까.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의 결합에 의해 생성되어 나온다. 식물은 씨앗에서 동물은 수정란에서. 그러면 최초의 생명체가 중요하게 된다. 신이 창조한 것인지 카오스에서 분리되어 나온 것인지, 빅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만일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로부터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육체는 썪어서 없어졌으니_무일) 우리의 영혼은 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략) 산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으로부터만 태어난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영혼들이 저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는 것일세. (중략) 이 문제를 인간과 관련지어서만 생각하지 말고, 동물 전체와 식물 전체, 생성하는 모든 것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기로 하세. (중략) 커진다는 것은 전에는 더 작았던 것이 더 크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나? (중략) 상반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즉 그것들은 모두 그것들과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나왔다고 말일세. (중략) 서로 반대되는 것들은 반드시 그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겨나며, 각각으로부터 반대되는 것으로의 생성 과정이 있는 것일세. (중략, 삶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삶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군요. (중략)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두 가지 생성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볼 수 있네. 그 두 가지 생성 중의 하나인 죽는 것은 우리가 확실히 볼 수 있는 일이니 말일세. (중략,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죽는 것에 반대되는 생성을 인정해야 하지 않겠나? (중략)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다가 거기서 되돌아온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될 걸세. (중략) 모든 것이 결합되기만 하고 분리(결합의 반대되는 것_무일)되는 일이 없다면 아낙사고라스가 말한 것과 같은 혼돈 상태가 닥쳐올 걸세. (중략) 다시는 생명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면, 결국은 모든 것이 죽고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될 것이 아닌가?" (231~234쪽)
'想起說 : 배운다는 것은 이미 알았던 것을 상기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이야기 하면서 다시 한 번 영혼의 불멸과 생명의 회생을 증명하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메논'에서 기하학을 전혀 모르는 소년과의 문답을 통해 2배의 면적을 가진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는 본래의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함으로써 상기설을 증명했다고 한다. 음, 메논을 또 읽어보고 싶구나. 상기설에 대한 논증은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想起한다면, (중략) 언젠가 그것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 (중략, 애인이 사용하던 수금을 보면 애인이 생각나는 것처럼) 상기는 닮은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도 있고 닮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겨날 수도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중략) 닮은 것으로부터 생겨나는 경우 상기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상기되고 있는 것과 진정으로 닮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깊이 생각하는 마음이 생겨나네. (중략)
과연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제대로 번역되었는가. 제대로 이해했는가. 그의 이야기가 맞는가. 논증은 맞는가. 온통 의문 투성이로 책을 읽어 나간다. 알듯 모를듯. 계속해서 같은 부분을 반복해서 읽기도 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 보기도 한다.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가 말하려고 했던 핵심을 다 따라잡지 못한 기분이다. 자연철학에 대한 그의 생각도 그렇다. 자연철학은 진정한 원인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그의 논증을 다시 읽어보자.
"젊은 시절에 나는 소위 자연철학에 몹시 흥미를 가지고 알아보려 했네. 모든 사물의 원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이 부분도 번역이 이상하다. '모든 사물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으며' 또는 '어떤 원인으로 생겨났으며'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나 / 무일), 어떻게 소멸하며,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아는 것이 아주 훌륭한 일로 생각되었네. (중략) 이제 나는 하나에 하나가 더해졌을 때 본래의 하나가 둘이 된다든가, 더해지는 나중의 하나가 둘이 된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없네. 그것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에는 각기 하나인데 그것들을 합한다고 해서 어떻게 둘이 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단 말일세. 또한 나는 하나를 쪼개면 어떻게 둘이 되는 것인지도 이해할 수 없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서로 상반되는 원인이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일세. (음, 정말 알듯 모를 듯하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실체를 하나 하나 헤아려 둘이라 하고, 실체를 가진 하나를 잘라서 두 개라고 헤아린다고 하면 문제될 수 없는 논리가 아닌가. 작은 것도 하나이고 큰 것도 하나라고 할 수 있으니 숫자는 그런 것이지 않는가 / 무일 / 중략) 정신이 만물에 질서를 주는 것이며 만물의 원인이라고 하는 말이 있었네. (중략) 나는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만물의 원인을 내게 가르쳐 줄 스승을 찾았다고 생각하여 몹시 기뻐했네. (중략) 하지만 나는 얼마나 크게 실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그 책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그가 만물의 질서를 설명하는데 정신을 조금도 이용하지 않고 있으며, 만물의 질서에 어떤 타당한 이유도 말하지 않고 공기라든가 에테르라든가 물이라든가 그밖의 많은 엉뚱한 것들을 만물의 질서의 원인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279~282쪽)
소크라테스가 뉴튼의 발견을 알았다면 과연 그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었을까. 자연철학자들이 완성해 내지 못한 천체의 운동원리들은 그 한참 후에 케풀러나 뉴튼에 의해 완벽하게 해명된다. 그러면 그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을까.
"내가 내 생각대로 행동하는 것은 나의 정신에 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신이 최선의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뼈, 근육 등)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말일세. 그것은 참된 원인과 조건을 분간하지 못하기 때문일세. (중략)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어떻게 두 번째 항해를 했는지 말해 주겠네." (283~4쪽)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자연철학을 버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성공한 모양이다.
"사물을 깊이 살펴보는 데 실패한 후, 나는 나의 영혼의 눈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네. (중략, 눈으로 일식을 관찰하면 눈이 상하는 것과 같이) 감각 기관들의 도움으로 사물들을 이해하려 하다가는 나의 영혼이 소경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네. 그래서 나는 정신의 세계 속으로 피하여 그곳에서 사물의 진상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네. (중략) 아름다움 그 자체(절대적인 아름다움), 선 그 자체, 큼 그 자체, 그리고 그밖에 모든 그러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전제로 되돌아가 거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네. (중략) 영혼의 불멸을 증명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네." (285쪽)
그 자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해석을 받아들기는 어렵다. 오래 전에 '물자체와 현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복잡하기만 하지 이해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읽는 것과 비슷하다. 소크라테스는 보다 쉽게 접근하고 있지만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 이런 식이다.
"내 생각으로는 아름다움 그 자체(절대적인 아름다움) 이외에 무언가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름다운 것은 저 아름다움 그 자체에 참여하기 때문이며, 그밖의 어떤 원인에 의해서도 아닐세. (중략) 나는 어떤 사물이 아름다운 것은 오로지 그 사물 속에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움 그 자체가 들어 있거나, 아니면 그 사물이 아름다움 그 자체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기 때문이라고 확신하네. (중략) 어떤 식으로 참여하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잘 모르네. 그러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움 그 자체에 의해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나는 단정할 수 있네." (285쪽)
처음에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서 설명하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이렇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은 아니고 몇몇 단점이나 아름답지 못한 측면들도 있지만 대체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완벽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그는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표현하며, 그것은 우리가 본 적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는데도 그 개념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상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상기론이 중요하고, 상기론에 의해 영혼은 불멸하며, 인간의 육체를 얻어 환생도 가능하다는 것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거기에서 출발하여 다시 아름답다는 것과 아름다움 그 자체에 대한 논증을 하는데, '아름다움 그 자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스스로 어떻게 참여하는지는 모른다고 했으니 그것을 물을 수는 없지만 참여한다는 개념도 이해할 수 없다. 무슨 뜻인가.
계속되는 그의 논증은 어렵다. 쉽게 이야기하는데도 어렵다. 전제와 결론, 원인과 결과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런 이야기도 위의 논증에서 출발하여 나오게 되는데, 이야기의 결론은 분명하게 이해하겠지만 논증 과정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니 이것은 또 어떻게 된 일일까.
"자네는 논쟁을 일삼는 사람들처럼, 전제와 그 전제로부터 나오는 결론들을 동시에 논함으로써 뒤죽박죽으로 만들지는 않을 걸세. 만일 자네가 진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말일세. 저들은 진실을 발견하는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관심조차 없을 걸세. 왜냐하면 저들은 자기들의 생각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영리하기 때문일세. 그러나 만일 자네가 진정한 철학자라면 자네는 내가 말한 대로 하리라고 나는 믿네." (288쪽)
저자인 플라톤도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파이돈의 입을 빌려 이 논증을 정리한다. '이데아'를 가지고. 그렇지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은 여전히 남는다.
"그들이 소크라테스의 말에 찬성하고 개개의 이데아(Idea)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밖의 모든 사물들은 이 이데아에 참여함으로써 그러한 명칭을 얻게 된다는 것에 동의하자" (288쪽)
영혼의 불멸함에 대한 그의 논증은 정말로 고개를 갸웃거리게도 하고 끄덕거리게도 한다.
"3이라는 수를 생각해 보세. (중략) 그것들은 홀수 자체는 아니면서 (중략) 하나의 홀수란 말일세. (중략) 반대되는 성질 그 자체만이 서로 상대방의 성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항상 내부에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들도, 자기의 내부에 있는 성질과 반대되는 성질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접근해 오면 (차가운 눈이 뜨거운 불이 다가오면 그러는 것처럼 / 무일) 물러나거나 사라져 버리네. 예컨대 3이라는 수는 3이면서 동시에 짝수가 되는 것을 견디기보다는 그 이전에 없어져 버리거나 아니면 짝수로 바뀌게 될걸세. (중략) 3은 짝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짝수의 성질을 받아들이지는 않네. 그것은 3이 항상 짝수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세. (중략) 어떤 수가 홀수일 경우 (중략, 그것이 홀수인 이유는 / 무일) 1의 성질이 그 속에 있기 때문 (중략) 육체 속에 무엇이 있기에 육체가 살아 있지? 영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중략, 홀수 속에 1의 성질이 있는 것처럼) 영혼은 자기가 들어가 있는 것에 항상 생명을 주겠지? (중략) 생명에 반대되는 것이 있나? (중략)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앞에서 동의한 바와 같이 영혼은 자신이 항상 가지고 있는 것에 반대되는 것을 절대로 받아들이진 않을 테지? (중략)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불사(不死), 즉 영원입니다. (중략)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지? (중략) 그렇다면 영혼은 불사이겠지? (중략) 죽음이 인간에게 다갈올 때 인간의 죽을 수밖에 없는 부분은 죽지만, 죽지 않는 부분은 죽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조금도 손상됨이 없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걸세" (294~8쪽)
영혼의 불멸함을 믿고 육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온갖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영혼이 육신 없이 살게 되어야 한다고 소크라테스는 논증을 하고, 그 논증을 믿는다. 그리하여 불멸의 영혼을 잘 가꾸기 위해서는 육체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전심전력하라고 이야기 한다. 영혼의 불멸함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동의하면서도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다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끄덕이면서 갸웃거리는 것이다. 끊임없이 일어나는 의구심은, 육체의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즐기는 쪽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이끌게 된다. 그렇게 해서는 영혼을 맑고 깨끗한 곳에서 아름답게 살게할 수 없다. 끊임없이 영혼과 육체, 생명과 죽음, 지혜와 덕에 대하여 탐구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마침내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이야기다.
" 육체의 여러 가지 쾌락과 감정을 이질적인 것이나 해를 주는 것으로 여겨 그런 것들을 멀리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영혼을 이질적인 것들로써가 아니라 절제, 정의, 용기, 자유, 진실 등 영혼 자신의 보물들로 치장하고 그리하여 운명이 부르면 언제라도 하데스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안심할 수 있는 것일세." (310쪽)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육체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진정한 소크라테스인 그의 영혼은 아름다운 나라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죽음에 맞서 당당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행복을 얻는 출발선에 서게 된 것을 기뻐한 것이다. 그런 그를 보내는 우리만이 슬퍼할 뿐이다.
"나는 신들에게 기도를 드려야겠네. 이 세상으로부터 저 세상으로의 여행이 즐거운 것이 되도록 해 달라고 말일세. (중략) 그는 잔을 입술에 대고 아주 태연하고 즐거운 얼굴로 그 약을 마셨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우리들은 슬픔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그가 그 약을 다 들이키는 것을 보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었는데, 그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친구를 잃게 된 나 자신의 불행을 생각해서였습니다." (315쪽)
"이것이 우리의 친구,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동시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현명하고, 가장 올바른 사람의 최후입니다." (파이돈 끝)
가슴 뭉클한 죽음, 소크라테스라는 영혼의 완전한 자유와 행복의 시작이다.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 1787년 작
그림 출처 : 교보 북뉴스 중 이명옥의 '명화읽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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