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을 6시 45분에 맞춰놓고 간신히 눈을 뜨면 도올 선생의 요한복음 영어 강해를 들으며 잠을 깬다. 이렇게 공부해서는 안되겠지만 영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니 이렇게라도 영어와 가까워지려고 한다. 영어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영어를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50년을 영어 없이 살아도 문제가 없었던 평화로운 삶이었다. 좋았지만 영어로 만들어져 있는 또다른 넓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래서 영어와 친해지려고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지식과 세상을 만나는 기쁨을 위해서. 영어 뿐은 아니다. 한문도, 중국어도, 아랍어나 그리스어, 라틴어도 마찬가지다.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고 이랑을 만들러 나갔다. 분해 조립까지 했으나 경운기를 시동하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호미와 괭이로 김장용 채소를 심을 이랑을 만들기로 했다. 빈밭의 풀을 벌써 세 번째 매면서 이랑 만들기 작업을 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답답하지만 답답해 하지 않으며, 하늘도 보고 새도 보고 꽃도 보고 그리운 얼굴들도 떠올리면서 일을 한다.
해는 비치지 않아도 일을 하면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처음에는 60cm씩 이랑을 만들며 워밍웝을 한다. 그리고 1미터, 1.5미터, 2미터까지 작업양을 늘려가다 보면 일이 막바지에 이른다. 숙달된 농부는 한심하다 할 것이다. 그런 여린 팔뚝과 심장으로 무슨 농사를 지으려 하느냐고. 농부는 먼저 자기와 가족들의 먹을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된다. 최고의 농부는 자기 식구를 먹이고 재산을 축적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농부일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부농은 기계와 농업노동자의 도움이 없이는 재산 축적이 가능한 농사일을 해내지 못한다. 결국 대농이라고 해서 최고의 농부는 아닌 것이다.
농업대학에서 받은 교육에 의하면 기계의 도움없이 사람의 몸으로 유기농업을 하기 적당한 평수는 100평에서 300평 사이라고 한다. 우리 농원은 최소의 기계와 소량의 화학비료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 인당 1,000평은 경작할 수 있는데, 연로하신 두 분을 고려했을 때, 이천 평의 농지를 경작한다면 보통의 농부는 된다고 할 수 있겠다.
오전 내내 땀흘리며 일을 해도 수천과 무일이 완성한 고랑은 고장 100미터다. 일이 있어서 읍내에 나가신 정농을 대신해 고체 형태의 토양 살충제인 보통 농약을 흙에 섞어서 뿌리는 작업까지 무일이 해야 했다. 음, 농약을 만진다. 끔찍한 일이다. 혹시나 몸에 닦거나 섭취하게 되면, 깨끗한 물로 씻어내고 해독제를 먹어야 한다고 주의사항에 적혀 있다. 김장배추나 무우는 이런 농약의 도움이 없이는 단 한 포기도 받을 수 없다고 한다. 언제고 농사의 결정권이 무일에게 주어진다면 우리 농원이 이런 농약이 굴러 다니지 못할 것이다. 무우 배추 농사도 없어질 지 모른다. 고추농사도. 농약의 도움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것은 많다. 감자, 완두콩, 강낭콩, 쥐눈이콩, 쌀, 흑미, 찹쌀, 밀, 보리, 참깨, 들깨, 녹두, 옥수수, 고구마, 상추, 토마토, 치커리, 당귀, 딸기, 어성초, 자소엽 등등. 이런 정도만 지어도 농부는 농부다. 이만원을 주고 배추 모종 네 판을 샀다. 내일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심게 될 것이다.
오후에는 참깨를 수확하기로 했다. 벌통에 개미산 처리를 하고 오신 정농과 함께 참깨를 베고 있으려니, 땀이 쏟아지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힘들다는 이야기다. 8월 들어서 휴가다 땡볕이다 비가 온다 해서 하루 여섯 시간을 꼬박 노동한 적이 없어서인지 오랜 만의 장시간 노동에 금방 몸이 농땡이를 부리려고 한다. 호흡을 고른다. 또 호흡을 고른다. 그리고 앉아서 쉰다.
참깨는 이랑 가운데 심고 양옆으로 들깨를 심어 두었다. 참깨가 바람에 넘어지지 말라고 줄로 단단히 고정해 두었다. 비닐과 부직포를 덮었지만 잡초는 무성하다. 이런 조건 속에서 참깨만 살며시 수확해 와야 한다. 오랜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원자로의 3차원 입체설계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간섭현상을 없애기 위해서다. 3차원 공간에 설치해야 하는 원자로를 2차원으로 설계해 놓으면, 시공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간섭현상이 발생하여 설계와 시공을 다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 비일비재 하게 발생하여 시공기간이 늘어나고 원전 자체의 안전성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십 억원을 들여서 3차원 입체 설계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다.
참깨를 거두는 것은 질긴 줄, 여린 들깨, 무성한 잡초, 위험한 말목, 비닐, 부직포, 그리고 참깨 그 자체 등등 온갖 얽히고 설킨 장애물들 속에서 간섭현상을 피해 작업해야 한다. 그러니 일하는 동안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이랑의 양쪽에만 있어야 하는 들깨가 이랑 가운데 갑자기 나타나 버리면, 노동에 지쳐 주의력이 산만해져 참깨인 줄 알고 그냥 베어 버린다. 그럴 때마다 신음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아이고, 저 아까운 것을 다 키워서 베어 버리는구나. 들깨인 줄 알고 조심조심 헤치고 몇 배의 노력을 들여 참깨를 베었더니 남은 것은 들깨가 아니라 들깨만큼 자라난 쇠비름이 막 꽃을 피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된장. 성질을 부리면서 낫을 휙 휘두르면 그 서슬에 멀찍이 있던 들깨가 잘려 쓰러진다. 헉 하고 또 비명이 절로 나온다. 안된다. 부동심,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과정이 바로 참깨를 수확하는 과정이다. 마트에 가면 만원 짜리 한 장으로 가볍게 얻을 수 있는 참깨 한 병. 그것이 농부에 의해 길러지고 수확되는 과정은 끊임없는 땀의 과정이며 수행의 과정이다.
비가 가늘게 내리기 시작하고 장화가 질질 끌린다. 일을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도 참깨는 절반 조금 넘게 베었을 뿐이다. 일단 거둔 참깨만 하우스 안에 가져다 말리기로 했다. 내일이라도 비가 그치면 다시 작업하기로 했다. 샤워를 하고 작업복과 양말을 빨고, 된장국에 밥 한술을 얼른 말아 먹고 향악당으로 장구치러 간다. 몸이 무거웠는데, 가락에 실린 밝은 기운이 몸의 활기를 되살려준다.
아름다웠던 지난 봄이 또한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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