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노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아내도 친구도 없다. 그에게는 오래 전에 작은 친절을 베풀었던 어린 아이가 있을 뿐이다. 평생토록 함께 한 고기잡는 일이 그의 늙고 말라버린 손과 어깨를 힘겹게 누르고 있을 뿐이다. 지독한 외로움 조차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몇 가지 추억을 떠올리며 힘들고 고단한 싸움을 한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사 일 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다. (중략) 매일같이 빈 배로 돌아오는 노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소년은 마음이 아팠다." (9쪽)
"(노인에게 다섯 살 때 처음 고기잡이를 배운) 소년은 침대에서 낡은 군용담요를 가져다 의자 등받이와 노인의 어깨 위에 잘 펴서 덮어주었다. 노인의 어깨는 특이했다. 몹시 늙긴 했지만 아직 강인해 보이는 어깨였다. (중략) 제가 살아 있는 한 할아버지가 끼니를 거르고 고기 잡는 일은 없을 거예요." (20쪽)
"생각만큼 힘이 세지 않을지도 몰라. (중략) 하지만 난 요령을 많이 알고 있지." (25쪽)
물고기를 잡지 못한 지 85일째 되는 날에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는 큰 바다로 작은 배를 타고 나간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와 사흘 동안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편안하게 쉴 수 있기 위해서 다시 또 이틀 동안의 외로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노인이 겪어내는 5일 동안의 낚시 여행은 참으로 지겹고도 숨막힌다. 소설 속의 묘사는 대단하거나 다정하거나 현명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길기만 하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그가 돌아와서 침대에 누웠을 때 변한 것은 날자 뿐이었다. 노동의 허망함을 이야기 한 것도 아닌 이 소설 속의 세부 묘사에는 어떤 아이디어도 없다. 있는 그대로의 서술이다. 기자생활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헤밍웨이 소설의 특징이라고도 하는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아름답지 않고 건조한지 신기할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졸음이 쏟아질 정도는 아니다. 적당하게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에 주욱 읽혀지지 않아서 자꾸 묵혀두게 된다. 반납시간이 자꾸만 다가온다. 전자책도 대출하면 자동 반납시간이 정해진다.
소년의 보살핌 아래 깊이 잠든 노인은 평화를 얻는다. 이 소설 속에서 중간 세대는 거의 비중이 없다. 세대는 그것 자체로 변증법이다. 맞붙은 세대는 서로 거부하며 발전을 이끈다. 한 단계 떨어진 세대는 서로 포용하며 평화를 이끈다. 인간의 숙명인 모양이다.
노인은 거대한 물고기를 잡았다는 만족감에 머물지 않고 새로이 장비를 꾸려 바다로 나가기를 기대하며 평화로운 사자들의 꿈을 꾼다. 여리지만 끈질긴 노인의 의지는 인간의 힘든 삶에 대한 묵은 애정이다. 최고의 어부이지만 오래전의 이야기고, 능력은 있으나 거둔 것은 없다. 남아있는 것은 뼈대만 앙상하여 쓰레기처럼 버려질 것 같은 쓸쓸하고 애잔한 모습들 뿐이다. 그래도 아름다운 꼬리 지느러미를 갖고 있다.
"할아버지께 배울 게 많으니 어서 빨리 나으셔야 해요. 그래서 저한테 모든 걸 다 가르쳐주셔야 해요. 그래서 저한테 모든 걸 다 가르쳐주셔야 해요. 대체 얼마나 고생하신 거예요?
많이 고생했단다." (132쪽)
"티뷰론(스페인어로 상어라는 뜻. 특히 서인도 제도와 중앙아메리카 근처에 사는 크고 사나운 상어를 가리킴)입니다. (중략) 상어가 저렇게 멋지고 아름답게 생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줄 미처 몰랐어요." (133쪽)
큰 감동이 없는 잔잔한 이 소설 보다도 노벨상 수상자 헤밍웨이의 인생이 더욱 흥미진진했다. 그는 화려하고도 불행했다. 운동과 사냥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예술을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어린시절은 행복하게 보냈을 것이다. 어린 헤밍웨이에게 여자아이의 옷을 입히곤 했다는 그의 어머니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었을까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말년까지 잘 사신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한복을 입으나 양복을 입으나 한국 사람이고, 여자 옷을 입히나 남자 옷을 입히나 그 아이는 헤밍웨이이니 문제는 없다.
1차세계대전이라는 살육전쟁이 벌어지자 스무살의 나이로 운전병으로 참전했으나, 두 달 만에 포격으로 중상을 입고 밀라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으나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게다가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마음의 상처까지 입게 된다.
불과 스물 셋의 나이로 여덟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사귀면서 소설 쓰기와 출판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파리에서의 7년은 매우 행복해 보였다. 두 번째 결혼을 해서 플로리다로 이주했을 때 우울증을 앓던 아버지가 권총자살을 하여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좋은 친구였던 피츠제럴드와 오랜 시간 싸우게 된 것도 그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을 것이다.
대공황의 혼란기에 첫사랑이었던 아그네스를 주인공으로 한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쓰면서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긴 것으로 보인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이주하여 세 명의 아이들과 청새치 낚시를 하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면서 아프리카를 여행하기도 하는 등 삼십 대 중반에 평화롭고 여유로운 가정을 잘 이끌어 나간다.
2차대전의 살육전쟁이 시작되기 전후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면서 세번째로 결혼을 하고, 중국과 아시아를 여행했다고 한다. 살육전쟁이 나자 다시 참전하여 쿠바해안에서 독일 잠수함을 수색하는 일을 했으나 2년여 동안 아무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전쟁을 끝냈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다.
그후로도 권총 오발사고, 자동차 전복 사고, 두 번의 비행기 추락사고, 네 번째 결혼, 퓰리처상 수상, 노벨문학상 수상 등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극도로 건강이 나빠져 1961년에 엽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알코올 중독, 고혈압, 편집증 등으로 그의 오십대는 죽음으로 가는 피곤하고 괴로운 여정이었다고 할 것이다.
헤밍웨이의 일생은 20세기의 역사다. 두 번의 살육전쟁과 미국의 번영, 개인의 명예, 자유연애, 가족의 위기, 부부관계의 해체, 창작과 휴식 등 20세기 인류가 걸어 온 길을 그대로 걸어왔다. 그의 가정은 불우했지만 명예는 드높았고, 비겁하지 않게 전쟁에 임했으며, 쿠바를 사랑함으로써 평화에 기여했다.
-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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