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라디오에서 토막토막 들으며 궁금해 했던 소설이다. 피를 파는 것을 주제로 한 중국의 소설이라. 흠. 피를 판다는 것은 가난에 찌든 삶을 나타내는 것이니 특별한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궁금증은 불러 일으킨다. 보다 큰 호기심은 삼국지와 아큐정전 이래로 처음으로 읽는 중국 소설이라는 것이다. 대만제 무협소설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소설이 쓰여지고 읽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분명히 엄청나게 많이 쓰이고 읽혀졌을텐데 말이다. 기대를 안고 읽어보자.
시작부터 아니 글머리부터 가관이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이끌어 가려고 하는지.
"그의 이름은 '허삼관' 일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허삼관은 일생동안 평등을 추구했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결국 (중략) 불평등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단 말씀이야.'
1997년 8월 26일 위화" (10쪽)
허삼관이 첫 번째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장가를 들게 된 허옥란은 꽈배기 서시(꽈배기를 튀기는 미인)라 불릴 정도로 미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뭇 남성들의 사랑을 받았고, 허삼관을 알기 전에 한 번 몸을 섞은 하소용 때문에 첫 아들이 허씨가 아니라 하씨의 아들이라는 의혹을 사게 되고, 온 마을과 허삼관 조차 그 의혹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어쨌든 피를 팔아서 장가를 간다니 참 결혼하기 쉽다.
허옥란은 첫째 아들 일락이가 다치게 한 아이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하씨를 찾아간다. 허삼관이 자기 아들이 아닌 일락이를 위해 병원비를 마련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에 아버지라 의심되는 하씨를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깊이 없는 내용은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그러면서 그 하찮은 막말들을 휘익 뱉어내는데는 지면을 아끼지 않는다. 이런 것이 중국식 유머인 모양이다. 재미있다.
"(병원비를 마련하러 간 하옥란에게 하소용이) 어디 얘기해보쇼. 할 말 있으면 빨리 하란 말이오. 뀔 방귀 있으면 빨리 뀌고." (88쪽)
이런 식의 끔찍한 발언도 우스개 소리처럼 쉽게 뱉어낸다. 이것 또한 중국식 유머인 모양이다. 너무 황당해서 웃긴다.
"이름은 몰라도 상관없어. 얼굴만 알아볼 수 있으면 돼. 꼭 기억해라. 너희가 다 크면 가서 하소용네 딸들을 강간해 버려라." (107쪽)
하소용의 아들이라 의심되는 큰아들 일락이를 제외하고, 허삼관은 이락이와 삼락이를 불러 앉혀놓고 십년 후에 하소용의 딸들을 강간해서 복수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리고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두 번째로 피를 팔아 하소용을 대신해 병원비를 지불한다.
확실하지도 않은 일로 아내의 순결을 의심하던 허삼관이 이런 식으로 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부인인 허옥란은 그의 사랑을 고맙게 생각하여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한다. 자신을 의심하던 허삼관에 대해 이리도 쉽게 마음을 여는 것을 보면, 그녀야 말로 아무 것도 아닌 자를 진실로 사랑했던 모양이다.
"제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이생에서는 하소용 좋은 일만 해준 것도 아실 거예요. (중략) 오늘에야 제가 전생에 좋은 일을 많이 한 덕에 이생에서 허삼관한테 시집가게 됐단 걸 알았어요. (중략) 그 사람이 피를 판 것만 해도 저와 일락이를 위해서, 또 가정을 위해서 한 일이라구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피를 파는 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119쪽)
그녀의 믿음도 잠시. 자라 대가리로 놀림받던 허삼관은 젊을 때 마음에 두었던 여인과 한 차례 탈선을 하고 세 번째로 피를 팔아 그녀에게 돼지뼈다귀와 국화를 선물한다. 그렇지만 흔적이 너무 크게 남은 선물로 인해 이들의 애정행각이 들통나고 허옥란으로부터 질책을 당한다. 이 황당한 설정도 이렇게 웃긴 이야기로 넘겨버린다.
"허삼관은 허옥란에게 꼬투리를 잡힌 후로는 전처럼 성질을 부릴 수가 없었다. (중략) 사건 이후에는 허옥란의 심기에 따라 그 역할이 변하기 일쑤였다. (중략) 허삼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밥과 반찬을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중략) 이런 걸 일러 노는 건 한때고 고생은 평생이라고 하는 거라구." (145쪽)
그 후로도 허삼관의 피 파는 이야기는 계속된다. 특히, 큰아들 일락이가 죽을 고비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피를 파는 여행을 감행한다. 비루하지만 비루하지 않은 당당한 여행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자신을 위해 피를 팔려고 했을 때, 피를 팔 수 없게 된 허삼관이 가족을 걱정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모두 같아서 가족을 위해서는 제 목숨을 아끼지 않지만, 정작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아주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자각은 너무 늦다. 사람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사랑으로 키워 보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더군다나 작아 보이지만 큰 사랑을 실천해 왔던 허삼관과 같은 사람들이 보답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피를 팔아 해결했는데, 이제는 자기 피를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니...... 집에 또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허삼관은 울면서 가슴을 열어젖힌 채 길을 걸었다. (중략)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멈추고 그가 말없이 눈물을 뿌리며 걷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328쪽)
행복이란 것은 작은 기쁨이다. 작은 기쁨에 만족하고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착취하지 않고 그 행복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다면 정말 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불평등은 재산의 불평등이 아니라 만족에 대한 민감도의 불평등이 더 크다. 충분한데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 만족 불감증의 사람들에게 행복은 요원한 일이다. 반면에 수많은 허삼관들에게는 행복이 먼 나라의 일이 아니다. 허삼관들의 희생 위에서 아주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만족 불감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께서 잘 처리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뭘 먹고 싶어요?
그냥 돼지간볶음 한 접시하고 황주면 돼
뭐 다른 건 드시고 싶은 거 없어요?
다른 건 다 싫고 돼지간볶음하고 황주면 돼.
여기 다른 음식도 아주 많다구요. 자, 뭘 드실라우?
난 그냥 돼지간볶음하고 황주가 먹고 싶어.(중략)
(돼지간볶음 세 접시와 황주 한 병이 상에 올라 온 뒤 허옥란이 네번째로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묻자)
됐어. 더 시키면 다 못 먹는다구. (중략)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돼지 간볶음은 처음이야." (330쪽)
소설을 정리해 보자.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아시아의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답게 표현하지 못하면서 깊게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기뻐하면서 하루하루 즐거운 것에 감사할 줄 안다. 세상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라는 집단과의 대척점에 선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은 가족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무사히 작은 기쁨을 누려갈 수 있는 것만으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사회의 불평등에는 침묵한다.
거칠고 직접적이며 수준 낮은 유머도 좋았다. 어린 아이들이 똥 이야기를 하며 좋아하듯이 이런 유머에 아무 생각없이 웃다가 졸도하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또 다른 위화의 소설을 읽겠느냐고 묻는다면, 한 권 더 읽어보고 결정하겠다고 답할 것이다.
"(허삼관이 늙었다고 무시하면서 피를 사지 않았던 새파란 나이의 혈두에게 욕을 퍼붓는 허옥란을 보면서) 허삼관이 근엄하게 한마디 했다.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 허삼관매혈기 / 위화 장편소설 / 최용만 옮김 / 푸른숲(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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