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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Hinduism이 아니라 사나타나 다르마다_바가바드 기타 1_140203

제3


지혜가 담긴 문장이라지만 이해하기 힘든 화두다. 세 번을 읽으며 고민하다가 이렇게 바꾸었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결코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행동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즐길 수 없으며, 단순히 행동을 포기함으로써 그 자유를 얻는 것도 아니니라." (562쪽)


사람은 결코 정치행위를 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즐길 수 없으며, 단순히 정치행위를 포기함으로써 그 자유를 얻는 것도 아니다. 정치는 사회와 마찬가지로 시민을 둘러 싼 환경이다.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치 행위를 통해 건강한 몸처럼 정치를 만들어 놓으면 된다. 그러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산소처럼 정치가 사람을 살리면서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설명을 하고 있으나 아무리 읽어 보아도 과장과 생략이 심하여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감각의 지배에서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행동을 통해 세상에 기여하는 것이 깨달은 사람들의 일이라는 것이라고 하니 현재의 모든 나의 행위를 하는데 큰 위로가 되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 또한 떠 올리지 말고 행위하라고 하니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가는 것이 아득하기만 하다. 그래도 이 말은 중요하리라.


'나의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무너지고 만다.' 


이 말의 앞에 이 말을 덧붙여야 무일의 삶에 위로가 될 것이다. 


'일의 열매인 돈과 명예와 권력을 위하여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일을 해라.'


"만일 내가 나의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모두 무너지고 말 터인즉, 그러면 내가 곧 혼돈의 원인이요 인류의 마지막이 되리라. 깨닫지 못한 자들이 일에 집착하면서 행동을 하듯이, 오, 바라타여, 깨달은 자들은 인류의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 어디에도 집착하는 일 없이 행동하느니라." (564쪽)


간디의 해설은 사나타나 다르마에 대한 기본 지식 없이 이해하기는 힘들다. 농한기의 여유로 백과사전을 넘나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글자 그대로 읽으려니 지루해지고는 한다. 힘들면 마치 잠언처럼 하나의 구절이나 하나의 문단에 주목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대가 없이 노동하는 사람에게 위안과 힘이 되는 말이다. 철학은 역시 고단한 사람들의 벗이다. 


"손에 들어온 먹을 것을 사회에 (중략) 먼저 바치는 사람들은 죄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죄악일 뿐이다." (144쪽)


유튜브를 뒤지다가 도올 선생이 '인도를 만나다'라는 강연이 올라왔기에 1편부터 듣기 시작했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다 보니 불교의 원류인 사나타나 다르마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동안 묵혀두었던 바가바드 기타를 다시 폈다. 싯다르타가 혁명적으로 변화시킨 진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깊은 진리야 알 수 없겠지만 알아가려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이 깨달은 자 싯타르타 부처가 중생들에게 마지막으로 바랬던 일이다.

 

간디는 육체노동의 핵심으로 물레를 돌려 실을 뽑는 일을 했다. 그것이 가장 신성한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아니라 세계를 위해 기여하는 일이라고 했다. 현대의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의 육체 노동에 대한 찬사를 들어보자. 간디를 존경한다고 해서 그의 모든 생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미 충분하게 정신노동에 종사한 사람이라면 왜 인간에게 육체노동이 절대적이고, 그 노동을 통해 세계에 기여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수도자로 추앙받는 많은 종교인들도.

 

 

"순결을 지키고 모든 악한 욕망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스스로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우리처럼 많은 욕망에 시달리지 않는다. 머리는 좀 둔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너쁜 욕망에 잡혀먹히느니 차라리 머리가 둔한 게 더 낫다. 유식한 사람들이 없어도 세상은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노동을 거부한다면 세상은 곧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중략) 그런 노동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이 바로 농사다. 따라서 농사야말로 우러러 받들어야 할 '야즈나'다." (143쪽)

 
간디는 말한다. 지도자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비록 사상의 자유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생각에서 우러나오는 말과 행동이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 세계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질 수 있어야 지도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자신을 간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용기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문명화되기 전까지 우리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짐승인 것이다. 우리가 만일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전적으로 선을 추구하는 데 바쳐질 것이다. (중략, 지도자로서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한, 나는 그대들에게 아무것도 보여줄 게 없다. (중략) 제발 나의 부족함을 참아주고, 내가 죽은 뒤에 그대들이 나의 연약함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기 바란다. 오늘 내가 확고하게 서지 못하는 이 무능력은 나의 본성의 한 부분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대들에게 보여줄 의무가 있다. 그것은 그대들에게 갚아야 할 나의 빚이다." (162쪽)

 

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긴박한 현실에서 깊이 생각하고 고민할 일이다. 누군들 폭력을 좋아하겠는가. 몸에서 흘러 나와 버리니 문제다. 입술과 혀를 제어하여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하듯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손과 발을 제어해야 폭력을 막을 수 있다. 간디의 정의는 분명하다. 그 분명한 정의에 따라 역사를 되짚어 보고 폭력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과 비폭력이라 이름 붙여진 것들을 숙고해 볼 일이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의 목을 치는 행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 속에 있는 것이다. (중략) 만일 환자의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면 의사가 그 수술에서 쾌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동기는 환자를 돕는 것이다. 의사뿐 아니라 환자도 다리를 절단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의사가 각종 칼과 란셋을 써서 자르고 찌르고 해도 그것은 결코 폭력이 아니다. (중략) 세상사람들 모두가 악한이라고 보는 사람을 죽이는 행위도 폭력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죽인다 해서 세상이 더 행복한 곳이 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그를 죽이는 사람들이 진실로 그의 행복을 위하여 죽이는것 또한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한 인간이 온 세계를 파멸시키려 하고, (중략) 그 인간을 그가 저지르려고 하던 폭력으로 가차없이 없애버릴 수 있다. 그러면 그 뒤로 세상에 더 이상 폭력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180쪽)

 

 

 

제1장과 2장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15시간이 남는데도 시간은 부족하다. 길고 지루한 책이지만 충분히 읽어낼 수 있을 텐데 진도가 잘 나가지를 않는다. 그리미가 도서관에서 새로운 소설책을 빌려다 주는 바람에 시간은 더 길어진다. 과연 읽어낼 수 있을까. 오늘(2월 11일) 아침 한겨레 신문에 간디에 대한 글이 있어서 읽게 되었다.  천민들과 함께 스스로 화장실을 청소했다는 내용이 큰 위로가 된다. 매주 두 개의 화장실을 청소할 때마다 이제 간디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의 위대한 영혼에 나도 한발짝 더 다가서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간디는 부인과의 섹스나 음식을 철저하게 절제하는 금욕을 실천 (중략) 그는 자신에 대해 서릿발처럼 철저했던 반면 자기가 서 있는 위치와 다른 곳에 서 있는 이들, 특히 약자에게 인자하고 관대했다. (중략) (간디가 가장 오래 살았던) 세바그람(아슈람)에 사는 639명 대부분이 '불가촉천민(흰두교 카스트시스템에서도 제외된 천민)'이었는데 그는 불가촉민을 '하리잔(신의 자녀)'으로 부르며 <하리잔>이란 신문을 발간하고, 마을 우물물도 사용하지 못했던 하리잔들에게 아슈람 우물물을 개방하고, (중략) 그는 당시엔 하리잔만이 했던 화장실 청소를 해 다른 카스트의 분노와 반발을 사기도 했다." < 한겨레신문 2/11자, 조현의 통통통>

 

간디는 기타의 내용을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싸움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해석을 받아들여 명확한 선과 악의 싸움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확인하면서 읽어나가야겠다. 그런데, 기타를 역사논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그의 주장이 궁금하지만 일단은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이자 흰두교의 경전이라는 것으로 알고 가자.


"'기타'는 역사논문이 아니다. 그것은 사촌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두 본성, 선과 악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5쪽)


태국 여행 출발 전에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읽다가 '불완전한 삶이라도 네 삶을 사는 것이 낫다'라는 멋진 문장을 접했다. 너무 지루하고 졸려서 읽으려다 처박아 둔 '바가바드 기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문명은 아시아의 문명이고, 들은 풍월로도 우리가 훨씬 이해하기 쉬운 문화인데, 서양의 불쌍한 여인이 읽었던 책을 선비인 무일이 읽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경쟁심이 작용하기도 했다.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위대한 영혼 간디도 9개월 동안의 해설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많이 하게 된 계기가, 스무살 때 영국인 친구들로부터 함께 읽자는 권유를 받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도 산스크리트어나 인도어로 된 책이 아니라 에드윈 아놀드가 번역한 영어책으로.


결정적으로 책을 다시 손에 잡은 것은 이번 여행의 영향이다. 여행 준비를 하면서 태국의 유적들과 앙코르 왓의 유적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대부분 흰두교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며, 경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이며, '마하바라타'의 일부가 '바가바드 기타'라고 한다. 그것들을 챙겨 볼 생각은 나지 않아서 그냥 여행을 떠났는데, 주변이 온통 그 전쟁 이야기들 뿐이다. 수십년 동안 수 백만명을 동원하여 이룩해 낸 필생의 예술품들이 한낱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비슈누의 이야기 뿐인가. 정말 의문이 들었다.


그저 그런 이야기이며 감동도 주지 못하는 전쟁 이야기인데, 도대체 왜 이런 엄청난 작업을 해야만 했을까. '기타'를 읽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시작되었다. 그것으로 부족하여 몇 권 더 읽어야 할 것이다. 어쨋든 시작은 책장 안에 크게 자리잡고 있으면서 가장 많이 먼지를 머금고 있는 '바가바드 기타'가 될 것이었다.


성경을 모두 읽었다고 해서 성화가 가진 아름다움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몇 독특한 그림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경전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의 문명이 반드시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한계를 분명히 알고 이야기 읽기에 돌입한다. 비폭력을 부르짖은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철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대서사시라고 했던 것을 읽으려고 한다. 제발 끝까지 읽을 수 있게 재미있으면 좋겠다.


"오, 크리슈나여, 나의 피붙이들이 서로 마주보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보자니, 사지는 늘어지고 입은 마르고 몸은 떨리고 머리카락은 곤두서고 '간다바(활)'는 손에서 미끄러지고 살갗은 화끈거리고 마음이 울렁거려 더 이상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나이다.


(중략) 비록 저들의 지성이 탐욕에 짓밟혀, 가문을 파멸시키는 게 악행인 줄 모르고 친구를 미워하는 게 죄악임을 모른다 해도,


(중략) 왕국을 차지하려는 탐욕 때문에 우리는 지금 피붙이를 죽이고자 전쟁을 벌이는 커다란 죄악에 빠져 있나이다.


(중략) 전쟁마당 한복판에서 이렇게 말한 다음, 아르주나는 활과 화살을 내던지고 마음이 깊은 슬픔에 잠겨 전차바닥에 주저앉았나이다." (제1장 557쪽)


대서사시의 주인공 아르주나는 이렇게 한탄하며 이 전쟁의 쓸모없음을 말한다. 맞다. 도대체 이런 동족상잔의 비극을 왜 해야 하는 것일까. 한반도의 남과 북만이 문제가 아니다. 지구촌 곳곳에 퍼져 있는 지구인들 모두 한 형제인데, 지성을 짓밟아 버린 탐욕에 사로잡혀  전쟁을 벌여야 하는 것일까. 누군가 전쟁을 일으켜 빼앗으려 한다면 그에게 모든 것을 주고 전쟁을 회피하는 것이 답이 아닐까. 지성이 마비된 친척과 친구들을 보는 아르주나처럼 그렇게 평화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사르타나 다르마(흰두교 : 만신론적 일신교) 최고의 신인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는 이런 아르주나를 설득하여 전쟁에 나서게 할 모양이다. 악한 자들은 전쟁을 좋아하지만, 파괴를 부르는 전쟁에 동의할 선한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사람들 이야기에 육화된 신들이 등장하면서 이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임을 분명히 한다. 신의 기록이라고 우겨대는 것과는 달라서 호감은 간다. 우기지 않게 되면 관대함도 가까이 두고 있을 것이다.


"오, 아르주나여, 그대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실의가 명예롭지도 않거니와 그대 머리 위 천당문을 닫아버릴 그 위태로운 생각이, 어디에서 그대에게 왔더란 말인가?" (제2장 557쪽)


동족상쟁의 전쟁에 대한 회의가 천당문을 닫아버릴 정도의 악행이라고 신은 주장한다. 드디어 논쟁의 시작인 모양이다. 아르주나가 과연 크리슈나에게 설득당할 수 있을까. 아니, 아르주나가 아닌 농부는 크리슈나의 논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신들의 신이 되는 영광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아르주나를 크리슈나는 이렇게 무지르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한 사람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없다. 나와 다른 악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있는 나의 악한 마음에 동정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가 결국 악의 지배, 감각의 지배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오, 이렇게 이해하니 받아들일 수 있겠다. 나는 그렇다치고, 이 생각을 인간세상에도 적용한다면 모든 악인은 가차없이 불태워져야 하는 것이다. 정말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스리 크리슈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나이다. 오, 바라타여. 그대는 제법 지혜로운 말을 했으되, 슬퍼할 것 없는 자들을 위해 슬퍼하는도다. 지혜로운 사람은 산 것들을 위해서도 죽은 것들을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느니라." (제2장 558쪽)


이 책은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것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마하트마(위대한 영혼) 간디가 1926년 세바그람 아슈람에서 해설한 것을 번역한 부분과 '기타'의 원본. 앞의 것은 두 사람의 충실한 필기자가 기록했다고 한다. 짧은 서문을 읽고 바로 뒤쪽의 원본으로 갔다. 사나타나 다르마(힌두교)의 기초도 모르며 무작정 간디의 해설을 읽다가 원본은 손도 대지 못하고 포기한 지난 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1, 2, 3장을 주욱 읽어 나가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단순한 이야기니 술술 잘 넘어간다. 물론 제2장은 매우 어려운 이야기들이 전개되고 있어서 전부 이해하려고 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달관한 스님들의 선문답 같은 말들이려니 생각하고 술술 받아넘겼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저 멋있게만 느껴지고 깨달음이 없었다. 3장까지 읽고 나서 간디의 해설로 돌아가 보았다. 그는 2장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제2장의 마지막 열아홉 줄은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겨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열아홉 줄 속에 '다르마'의 알속이 다 들어 있다. 거기에는 최고의 지식이 구현되어 있다. 그 열아홉 줄에 담겨 있는 원리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최고 수준의 지성이 번뜩인다. 아니 그 자체가 높은 목적을 위하여 단련된 지성이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지식은 경험의 결실이다." (11쪽)

 

최고의 지식은 경험의 결실이다. 경험은, 행위하고 생각하고 말하고 반성하고, 다시 말하고 행위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 등등의 복합체이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체다. 경험이되 한 사람의 경험은 아니다. 모든 인간들이 경험한 것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지식이다. 


이해가 되고 감동을 받아 간디처럼 위대한 영혼을 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최소한 위대한 건축물들을 보며 다리 아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수준까지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여행비가 아깝지 않아서 꼭 한 번 더 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으면 좋겠다. 멋있는 말들이 계속되지만, 그 말들을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경험의 축적인 지식이 말로 표현된 것이겠지만, 말은 말일 뿐이다.


"감각이 대상에 닿으매 거기서 차가움과 뜨거움, 즐거움과 괴로움이 오고 가며 잠깐 머무느니라. 그것들을 참아 견디어라. (중략)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 어지럽거나 흔들리지 않는 어진 사람, 그 사람만이 영생불멸에 이를 수 있느니라." (제2장 558쪽)


신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아직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논리는 수긍이 가지만 신의 존재가 믿어지지는 않는다. 논리가 맞으면 그 논리가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째서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일까. 역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감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4대 종교의 하나인 흰두교의 믿음도 영성이 없는 사람이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도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너무 강해서 그렇기도 하다.


"비존재는 결코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고,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느니. 진리를 보는 선지자들에 의하여 이 둘의 비밀은 보여졌도다." (제2장 558쪽)


아트만은 신인가 아닌가. 기타에서 계속 언급되는 '이것'은, 인간개체의 어느 국면과도 일치되지 않는 개인의 자아라고 책 뒤에 정의해 놓고 있다. 그것이 신인가. 내가 증명할 수 없는, 그들은 증명하지만 그 증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트만. 영원불멸의 아트만에 대해 이야기하며 슬퍼하지 말고 계속 싸우라 한다. 싸우고 싶지 않겠다. 피할 수 없는 것은 뉘우치지 말라고 한다.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뉘우치지 말아라. 그래, 있을 때 잘 하고 살면 뉘우칠 일도 적을 것이다. 다른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트만을 위해 슬퍼하며 울 까닭이 없다.


"영원하고 불멸하며 측량할 수 없는 분의 체현인 이 육신들은 유한하도다. 그런즉, 싸워라. (중략) 이것(아트만)을 살해자로 생각하는 자와 이것이 살해될 수 있다고 믿는 자는 둘 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로다. 이것은 죽이지도 않으며 죽임을 당하지도 않느니라. (중략) 사람이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듯이, 몸을 입은 사람도 낡은 몸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옮겨가느니라. 


(중략)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고 죽는 것은 반드시 태어나느니,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것을 뉘우쳐서는 안 되느니라. 모든 존재의 태어나기 전 상태는 명백하지 않고, 중간상태는 명백하고, 죽은 뒤의 상태는 다시 명백하지 않느니라. 오 바라타여, 슬퍼하며 울 까닭이 무엇이랴?" (제2장 559쪽)


약간 머리가 복잡해져서 위키백과를 찾아보았다. 흰두교에 대해서는 소를 신성시한다는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모든 내용이 새롭다. 워낙 강력한 유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 때문인지 흰두 문명은 참으로 멀고 먼 문명이 되었다. 


"마하바라타는 라마야나, 바가바탐과 함께 인도의 3대 고대 서사시 가운데 하나이다. 비야사가 저술한 이 서사시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서사시이기도 하다. 고대문학의 중요한 유산이며, 인도인들에게는 종교적으로나 철학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마하바라타의 제6권 <비스마파르바>의 일부인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교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


마하바라타는 "위대한 바라타 왕조"라는 의미이며 더 넓게는 "위대한 인도의 역사"로도 번역할 수 있다. ("바라트"는 인도 정부에서 사용하는 자국의 공식 명칭이기도 하다.) 총 20만 개가 넘는 운문, 250만여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마하바라타는 이후 인도의 문학과 문화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인도 사람들은 흔히 "세상의 모든 것이 마하바라타에 있고, 마하바라타에 없는 것은 세상에도 없다"고 말한다. 비야사는 왕들과 영웅들의 이야기에 인도의 신화를 함께 엮어 넣었으며 이야기의 전개를 통해 힌두교의 기본 교의인 다르마(법)와 카르마(업), 아트마(책에서 이야기 하는 아트만으로 해석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무일), 모크샤(해탈) 등의 의미를 설명한다. 이 때문에 마하바르타는 영웅 서사시의 면모와 함께 경전으로서 지위를 갖는다." (위키피디아)


갑자기 튀어나오는 영생 불멸의 아트만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앞으로의 논리적인 읽기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아르주나를 비롯한 모든 등장 인물들이 아트만이라는 것인지 아트만의 몸이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슈누는 크리슈나이기도 하다. 인간의 몸뚱아리를 뒤집어 쓴 이것(아트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모든 지혜로운 선지자들이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모르겠다. 동정녀의 몸에서 신이 태어났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신화 즉 이야기다.


그것을 전제로 하여 즉, 죽는 것이나 사는 것이나 추운 것이나 더운 것이나 즐거움과 괴로움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다음의 논리를 전개한다. 전제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의 괴로움 따위는 그저 무시해 버린다. 다시 앞으로 가서 간디의 해설을 들어 보아야 할 모양이다. 참자. 2장 다 읽을 때까지 만이라도. 


갑자기 아르주나가 괴로워하는 전쟁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의로운 전쟁이 되어 버린다. 아니다. 간디의 해설에 따르면 이 서사시에는 선악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 아르주나를 중심으로 한 선한 세력과 전쟁을 일으켜 선한 세력을 해하려는 악의 세력이 있다. 악에 대항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니 의로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을 지키기 위해 치르는 전쟁은 모두 의로운 전쟁이 되는 것인가. 전쟁 그 자체를 반대하면 안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크리슈나가 하고 있다.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독립전쟁이다. 의로운 전쟁이니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역사는 독립군을 때려 잡은 일본군과 만주군 장교 출신들이 정권을 잡고 그 후손까지 명예롭게 잘 사는데, 독립군의 후손들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다. 경험이 곧 최고의 지식인데, 이 경험에서 우리는 의로운 전쟁에 참여할 명분을 찾을 수 없다. 차라리 전쟁 자체를 반대하고 싶다. 이런 의문을 크리슈나는 단칼에 잘라내 버린다. 현실이 아닌 논리로 잘라내는데 받아들여야 하는가.


"다시, 그대가 피할 수 없는 그대의 임무를 보아라. (중략) 만일 이 의로운 전쟁에서 싸우지 않고 그리하여 그대의 임무와 명예를 포기한다면, 그대는 죄를 짓게 되느니라. 세상은 그대의 불명예를 두고 끝없이 되풀이하여 말하리라. 명예를 아는 사람에게는 불명예가 죽음보다 더 고약한 것이로다. 


(중략) 죽임을 당하면 하늘을 얻을 것이요 승리하면 땅에서 즐거움을 누릴 터인즉, 쿤티의 아들 아르주나여, 일어나서 싸우기로 결심할지어다." (제2장 559쪽)


열매(결과)가 좋으면 행위도 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벌어지는 어리석은 행동들이 참 많다. 부자가 되면 좋다고 해서 내 가족의 행복을 방기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짓은 삼가야 한다. 열매는 바람직한 행위로 얻는 건전하고 맛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선악도 초월하라고 했으니 이것 또한 초월해야 하는가. 선악을 초월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의로운 전쟁이라는 것도 초월해야 하니 모든 전쟁이 다 같은 것이다. 순환논법에 빠질 위험이 크다. 


"행위만이 본분이요 그 열매는 아니니라. 행위의 열매를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행위를 피하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중략) 행위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행위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니, 초연한 태도에 들어 안도할지어다. 결과를 바라고 행동하는 자야말로 한심한 자들이니라. " (제2장 560쪽)


마지막 열아홉줄이 다가오니 집중해 보자. 아르주나가 제2장에서 거의 마지막일 것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니까 인간다운 질문을 던진다.


"오, 크리슈나여, 안정된 지혜를 지니고 초의식 상태에 잠긴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나이까? 그는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앉고, 어떻게 걷나이까?" (제2장 561쪽)


이 질문에 대한 엄청난 답을 기대하지는 말자. 그냥 동어반복이다. 어떤 개념을 정의한다는 것은 비슷한 것을 나열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엄마, 아빠, 아이들로 구성된 것을 말한다고 하면 동어반복이다. 그래도 이것은 분명해지기는 한다. 그러나, 아르주나의 의문에 대한 크리슈나의 답은 어느 것도 분명해 지지 않는 동어반복이라 답답하다.


"사람이 자기 마음에서 생겨나는 모든 갈망을 물리치고 오직 '아트만' 한테서만 스스로 위안을 찾을 때, (중략) 마음이 슬픔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에 치닫지 않는 사람, 정욕과 두려움과 분노로부터 벗어나 있는 사람 (중략) 눈앞에 선이 나타나든 악이 나타나든 기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의 깨달음은 확고부동이니라.


(중략) 감각의 대상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제2장 561쪽)


어떤 답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것을 답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한다. 아트만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서 희노애락에 초연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끊임없이 초연한 사람이라고만 답한다. 마지막까지 이렇게 답한다.


"갈망을 품어 기르는 자가 아니라, 강물로 채워지면서도 결코 흘러넘치지 않는 대양에 모든 강물이 스며들어 없어지듯이, 자기 안에서 모든 갈망이 없어진 사람, 그 사람이 평화를 발견하느니라. (중략) 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자는 죽는 순간에도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도다." (제2장 562쪽) 


중요한 제2장의 마지막 열아홉줄이 다 끝났는데도 현실의 욕망과 갈등 속에서 벗어나라는 말만 하고 있다. 왜 동족상잔의 전쟁이 의로운 전쟁이고, 왜 그 전쟁에 참여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살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지 않고 있다. 나의 감각을 통제하여 모든 감정에서 초월하여 싸워라. 그러면 최고의 가치인 평화를 얻고 브라만이 된다는 것이다. 설명은 있지만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이 없다. 간디의 해설로 돌아가 보아야 하는 모양이다. 내가 읽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다. 그럴리 없겠지만.


간디의 해설로 돌아왔다. 뭔가를 설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타의 원본이 잘 해석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냥 원전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디의 해설은 현장감이 있어야 잘 이해되는 해설이다. 식민지 상태, 계급 갈등, 종교 갈등, 가난 등등. 간디도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기타>는 잠언집 형식으로 구성된 책이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순간이 순간으로 옮겨지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유식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략) 수드라와 방기<쓰레기 청소를 하는 불가촉 천민> 그리고 여자들을 위해서,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계급을 위해서 씌어졌다." (53쪽)


기타는 독립된 서사시가 아니다. 흰두교의 3대 고대 서사시 중의 하나인 <마하바라타> 제6권 중의 일부다. 마하바라타 전체를 읽지 않으면 앞뒤 맥락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꼭 그만큼 간디의 해설이 필요하다. 크리슈나가 왜 이 전쟁이 위대한 전쟁이라고 했는지를 간디가 설명한다. 악의 세력인 두료다나에 의해서 일으켜진 전쟁이고, 악을 일소하기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 악의 세력에 친척과 친구들이 있다고 표현된 것이다. 악마들이 일으킨 전쟁을 회피하여 선한 사람들을 재난의 구렁텅이에 빠뜨림으로써 자신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간디는 화장실 청소에 비유하고 있다. 전쟁이든 변소청소든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말인 모양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변소청소를 직업으로 삼으면서 이것은 방기들이나 할 일이라고 말한다면, 스리 크리슈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너는 자신의 다르마를 배신하고 있다고. 그리하여 너는 명예를 잃게 되고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너에 대하여 나쁘게 말할 것이라고." (60쪽)


간디는 종교인이다.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도 종교에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종교를 벗어난 위대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인들은 절대 진리가 그들의 종교라고 믿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간디는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고 종교인이다. 다른 무엇이 아니다. 


신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모든 불가해한 일이 신의 논리에 의해 편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일도 행복하다. 무지하지 않다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믿어도 믿지 않아도 행복하다. 늙어서 사는 일이나 죽는 일이 너무 두려워 필요하게 되면 믿게 될 지도 모른다. 사람 사는 일이니 알 수 없다.


간디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쫓는 자들은 결코 신앙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참 재미있는 일은 종교지도자들 주변에는 언제나 부와 권력과 명예가 높은 사람들이 들끓는다. 예쁜 여자들까지도. 그들은 신을 믿는 사람들일까 아닐까.


"오늘의 정치판은 선이란 찾아볼 수 없고 온통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중략) 소용돌이치는 세상에서 신앙을 지닐 수만 있다면 우리는 세상에 봉사할 수 있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으며 큰 위험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68쪽)


이제까지 벌어들인 수십만 루피에 만족하지 않고 내일 또 수십만 루피를 벌어들이고 싶어하는 자, 오늘 '마하트마'로 행세하면서 훗날에도 그렇게 대접받기를 희망하는 자, 이런 사람의 마음은 온갖 잡념과 환상으로 어지럽혀져 있다. (중략) 그런 사람은 결코 신에게 몸을 바칠 수 없다."  (72쪽)


또 살짝 지루하고 답답해서 위키피디아를 뒤져 보았다. 힌두교와 브라만 때문이었다. 먼저 힌두교. 놀랍다. 영어로 만들어 놓은 단어라고 한다. 처음 알았다. 사나타나 다르마. 이것을 외워야겠다. 외워지기는 했는데 금방 또 잊어먹을 것이다. 흠.


"힌두교(산스크리트어: सनातन धर्म Sanātana Dharma 사나타나 다르마, 영어: Hinduism)는 남아시아에서 발생한 종교로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에서 널리 믿어지고 있는 종교이다. 힌두교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를 칭할 때 힌두교라고 하지 않으며, 영원한 다르마라는 의미의 사나타나 다르마(Sanātana Dharma)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힌두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다음 가는 세계의 큰 종교이다(신자수는 2005년 9억 4천만명). 힌두교의 발생은 고대 인도의 종교 사상인 베다에서 비롯되며, 베다의 사상은 기원전 15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다는 종교로서 그리고 글로서 오늘날 남겨진 문학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힌두교는 여러 신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 다신교적 일신교(택일신교 또는 일신숭배)로서, 교주(敎主) 즉 특정한 종교적 창시자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사나타나(Sanātana)는 영원하다는 뜻이며 다르마(Dharma)는 법(法) 또는 법칙으로 번역된다." (위키피디아)


이어서 브라만과 아트만, 그리고 다르마. 엄밀히 말해 브라만 계층은 브라만을 구하지 못하면 브라만이라 할 수 없다.


"브라만브라만(Brahman)은 우주의 진리 또는 우주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힌두교의 최상위 목표는 '참된 나'인 아트만이 '우주의 진리'인 브라만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의 가장 상위계층을 브라만이라고 칭한 것은 이들이 스스로 우주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자신들의 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트만 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며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생명을 목숨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숨쉬는 생명 아트만(산스크리트어: आत्मञ्,Atman)은 '나'를 말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윤회하는 삶에서 지금의 나는 '참된 나'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윤회를 거치는 동안 내가 쌓은 업(Karma, 業)에 의한 것이다. '참된 나'는 윤회의 과정에서 계속하여 존재하여 없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나라는 생명의 본질'을 뜻한다.


다르마 다르마(Dharma)는 법(法)으로 번역된다. 이때 '법'이 의미하는 바는 우주에 존재하는 영원한 법칙이기도 하며 모든 생명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본질을 말하기도 한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에 의한 각 신분의 다르마는 브라만의 지혜, 크샤트리아의 용맹, 바이샤의 근면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한 삼계급설과 유사하다." (위키피디아)


불교의 윤회설이 불교의 기원인 힌두교 아니 '사나타나 다르마'에서 나온 것을 알았다. 불교는 사나타나 다르마 중의 하나로 베다를 신의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교라고 한다. 아트만이 윤회의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나의 진정한 실체라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도를 깨닫기 위한 인도의 수행자들이 자기 몸을 학대하는 수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었는데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바로 이것 감각의 제어 때문이었다.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이 우리 몸의 감각과 감각의 대상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감각에 빠지게 되면 신을 만날 수가 없다고 한다. 감각을 제어할 수 있고, 희노애락에 빠지지 않을 때 아트만을 만나서 영생불멸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감각 중에서 가장 강하고 고통스러운 것이 괴로움이기 때문에 육체를 학대하며 도를 닦는 것이다. 단식도 마찬가지다. 부처님도 단식을 하시다가 위가 나빠지셨고 공양받은 음식이 잘못되어 이질에 걸려 팔십세의 나이에 입적하셨다고 한다. 머리는 북쪽으로 향하고 오른쪽으로 누워 두 발을 모으고.


"자기정화를 위하여 단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금식을 하는 동안 우리의 유일한 욕망은 신을 뵙고자 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식욕이 그 길을 가로막고 서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 힘을 약하게 만들어야 한다. (중략) 식욕을 재갈 물리기 위하여 우리는 음식 먹기를 중단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한테 먹을 것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90-91쪽)


어려운 일이지만 목숨 걸고 열심히 노력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감각을 제어하는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간디는 말한다. 글쎄다. 하여튼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사람인 위대한 영혼의 말씀이니 믿어야 할 것이다.

 

"인간의 감각을 제어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을 가끔 듣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략) 감각을 제어하는 데는 세 가지가 반드시 구비되어야 한다. 첫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우리의 감각을 복종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이 신념은 세상사람들이 모두 반대해도 끝까지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이어야 한다. 셋째, 음식은 육신을 지탱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의 감각을 부추기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육신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중략) 그 누구도 대상에 대한 감각의 즐거움이 쉽게 빨리 깨어질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중략)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굶어죽을 각오까지 한다면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되어 있다. 열 번 스무 번 실패를 거듭한 뒤에야 마침내 그는 이길 것이다." (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