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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여행은 마지막 남은 나의 일인가_잠시만 어깨를 빌려줘_이용한

태국에 관한 여행기를 더 읽고 싶었는데, 국문으로 쓰여진 책은 이제 더 이상 없다. 태국은 우리에게 환상이 될 수 없는 나라다. 모든 것이 비슷하다. 종교도 사람도 철학도 문화도 게다가 정치수준까지도. 너무 익숙하다 보니 호기심도 없고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어렵다. 어떻게든 여행의 에너지인 기대감을 축적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어려웠다. 오십대가 되어서야 처음 가보는 태국인데도 이렇게 이야기 꺼리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물론 태사랑에 정보는 넘친다. 그 정보들은 생생하고 유용하다. 감동적인 이야기가 부족할 뿐이다. 


여행이 이제는 익숙해졌다. 처음 몇 번 싸돌아 다닐 때는 모든 것이 즐거웠고 힘들었으며, 실수도 많아서 이야기 거리도 많았다. 계속해서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제는 안나가는게 이상해서 나가는 것이지 새롭고 독특한 것을 만나기는 어려워졌다. 여행의 목적이 있고, 새로운 생각을 중심으로 여행을 펼쳐 나갔으면 좋겠는데, 재미있는 여행의 주제나 형식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여행은 좋다. 모든 일상에서, 힘든 노동에서, 하찮은 자들의 위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여행도 즐겁기는 한데, 반토막 나 버린 땅덩어리가 너무 좁아서 돌아다닐만큼 돌아다녔더니 더 이상 가볼 만한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멀리 나가야 하는데, 나갈 때마다 두렵다. 언어도 사람도 환경도. 두려움 이상의 즐거움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계속해서 커지는 두려움들 때문에 언제 여행이 멈춰질지 모르겠다.


"여행은 이제 일상이고 실천이며, 실현 가능한 로망이고, 언제든 복귀 가능한 일탈이다.  (중략) 모든 생을 통틀어 오늘이 당신의 가장 젊은 시간이다. 만일 여행을 가기로 마음 먹었다면, 오늘이 바로 최적의 순간이다.


PS. '시간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고들 한다. 나는 그말을 믿지 않는다. 시간은 사람을 두렵게 만들며, 두려움은 사람을 타협하게 만든다.'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55쪽)


기왕에 하는 여행이라면 이런 수준의 여행도 하고 싶다. 말타는 것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냥 말 위에 오래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배워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다. 아시아 하이웨이를 따라서 내 고향 진도로부터 말 한 필 끌고 슬슬 세상구경하며 유라시아 대륙을 돌아다닌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여행을 가기 위해서 돈을 많이 저축할 필요없이 어디로 가고 싶다는 열망만을 담고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몽골에 도착하면 우선 말 한 필을 산다. 몽골에서는 보통 말 한 필에 50만 투그릭(한화 50만원 가량). 이제 말안장 뒤에 배낭과 텐트를 싣고, 몽골어와 한국어로 된 지도를 각각 한 장씩 사서 가고 싶은 곳으로 말을 타고 간다. (중략) 이런 식으로 여행을 마치고 울란바토르에 돌아오면 40만 투그릭 정도에 다시 말을 되판다. 1개월을 꼬박 여행해도 교통비로 나가는 돈은 10만 투그릭 정도면 해결된다." (35쪽)


여행의 두려움은 익숙한 곳으로부터 멀어지는 데서 오는 것이다. 물도 땅도 하늘도 낯설다 보니 두렵다. 그런데,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가진 것이 없으나 빈한하지 않고, 뚜렷한 목표가 없으나 살아가는 방향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행 속에서 삶의 자세와 철학을 배워야 하는 나같은 사람들은 길 떠나기가 언제나 두렵고 초조하다. 돈으로 떼우려고도 한다. 그래도 아예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적당하게 행복한 사람이다.


"어디로 가는가? 라싸로 간다. 왜 가는지 물어도 되나? 라마로서 한 번은 가야만 하는 길이다. (중략)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어떻게 해결하나? 저기 뒤로 보이는 마을에 짐수레가 있다. 거기에 내가 먹을 식량과 필요한 것들이 실려 있다. (중략) 내가 가고자 한 만큼 오체투지로 가서 올 때는 걸어서 수레까지 온다. 수레를 끌고 다시 여기까지 와야 하니까. (중략) 1년쯤 걸린다. 더 걸려도 상관없다. (중략) 차를 타고 가는 나의 라싸보다 되레 오체투지로 가는 그의 라싸가 훨씬 가까워 보였다. 그가 라싸를 멀게 느꼈다면 애당초 이런 무모한 모험을 감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69쪽)


사람들이 묻는다. 정말 농사만 짓고 사느냐고. 2년 전 귀농해서 농사만 짓고 산다고 대답한다. 무슨 돈이 되는 농사를 짓느냐고 묻는다. 쌀이나 콩처럼 우리 식구들 나눠 먹을 것만 농사짓고 산다고 대답한다. 매우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그렇지만, 지난 22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고, 사치하지 않는 가족들을 만나서 집도 있고 땅도 있다. 아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월급도 받는다. 아이들은 스스로 제 인생을 개척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더 많은 돈과 생활이 필요한 것일까.


"몽골의 아이들에겐 초원과 사막이 학교이고, 양떼와 말과 낙타가 스승이다. (중략) 언제나 부족을 느끼며 더 많이 가지려는 쪽은 우리다." (70쪽)


"PS. 역사상 그 어느 때도 자유민이 이토록 전적으로, 일이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온 에너지를 바친 적은 없었다. - 에리히 프롬" (155쪽)



그리고 지혜롭기를 원한다. 지난 50년이 힘들었다가 즐거웠지만 지혜롭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토론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지혜로울 수 없다는 말이다.


"PS. 현대 세계에는 여가라고는 거의 없다...... 그 결과 영리한 사람은 많아졌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지혜란 천천히 생각하는 가운데 한 방울 한 방울 농축되는 것인데 누구도 그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 버트런드 러셀 <런던통신 1931-1935>" (83쪽)


이런 유머도 사용해 보는 나라로 내 나라를 바꾸고 싶다. 캐나다를 여행하는 방법을 마련해 놓았다. 아마도 2011년 가을일 것이다. 우퍼로서 봄부터 가을까지 자전거로 이동하며 횡단한다. 두 번째 방법은 오늘 세운다. 2014년 1월 8일 03시 51분. 캐나다 횡단 열차와 자전거로 이동하는 우퍼가 된다. 먼저 우퍼를 받을까 내가 먼저 우퍼가 될까. 좋은 결론이 나올 때까지 꾸준하게 생각해 볼 것이다.


"캐나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속에서도 최상급 부정을 표현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한다.

'그건 국립공원관리국에서 하지 말랬잖아!'" (88쪽)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할 말이 있다. 일요일 아침에 보았던 변호인에 등장한 고문기술자를 중심으로 한 협력자들. 그들에게 과연 이런 소중한 관계가 존재할까. 불가능하다. 그들은 가장 완벽하게 짐승으로 진화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이고 딸이며,

누군가의 빛나는 첫사랑이고,

누군가의 잊지 못할 친구이자

누군가의 존경받는 선생이고 믿음직한 제자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소중한 존재이지 않은 적이 없다." (257쪽)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대상을 찾기가 어려울 뿐,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266쪽)" 순전히 경험으로만 이야기 한다면, 사랑하는 대상을 찾는 것도 어렵지만 사랑을 하는 것, 사랑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어려운 일을 힘들게 해 나가다 보면 순간 순간 행복이 찾아 온다. 그래서 사랑하면 행복하다.


기승전결이 없는 여행기다 보니 굳이 결론은 맺을 것까지는 없지만, 모든 여행의 끝은 사랑이다. 기대와 설렘, 모험과 도전, 그리고 안타까운 사랑이다.


"길에서 열렬하게 나는 인생을 낭비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가여운 사랑을 만났다.

그 사랑을 데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맨 끝장)


-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 이용한 / 상상출판(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