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은 오랜만에 맑은 해가 뜬다. 파리의 물가는 비싸고 노동자들은 자유롭다. 100유로나 주고 들어 온 캠핑장이 아침마다 청소를 한다고 한쪽 화장실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있다. 난리다. 매일 아침 남녀 혼용 화장실이 운용된다. 어제밤에 기차역 앞의 청소부는 대충대충 쓰레기를 끌어 모은다. 저렇게 청소하고도 월급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노인 청소부의 빗질 뒤에는 사탕 껍질, 담배꽁초, 사용하고 남은 끈 등 많이도 남아 있다. 소비자의 편익은 둘째 문제고, 노동자의 노동 계획이 우선하는 것이 인정된다. 불편하지만 미소를 지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서두른 관계로 오늘은 어제 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도 9시 45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라서 그런지 루브르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뮤지엄 패스를 끊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서 표를 사느냐고 계속 묻는다. 패스는 무조건 인터넷으로 끊어 오는 것이 좋겠다. 아침의 지하철은 이제는 익숙하고 편안하다. 잠깐씩 눈을 붙이고 쉴 수 있을 정도다. 어제의 황당한 경험을 - 확인하지 않고 지하철 방향을 거꾸로 타고, 교외선 3번이 폐쇄되는 등 - 제외하고는 이 복잡한 지하철에도 쉽게 적응이 되는 것을 보면, 복잡한 서울의 지하철이 우리를 예습시킨 모양이다.
말도 안되지만 반나절에 루브르를 보아야하므로 중요한 작품만 서둘러서 보기로 했다. 제일 먼저 밀로의 비너스로 향했다. 모나리자와 함께 밀로의 비너스, 승리의 여신 나이키가 가장 인기 있는 전시물인 모양이다. 때가 타 있고 여기 저기 흠집은 많이 있지만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모나리자는 기대 이상으로 정말 아름답다. 여기 저기서 복사된 그림들을 많이 보았지만 원본 모나리자의 느낌이 가장 좋았다. 정면에서는 인자하고 귀여우면서 아름다운 미소를 볼 수 있었고, 약간 오른쪽에서는 살짝 신경질을 부리는 듯도 하고 비웃는 듯 하기도 한 모습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사람들을 십열 횡대로 정열을 시키고 한 열당 약 10초씩 그림을 감상하게 한다. 군 제대한 이후로 십열 횡대를 서 본 일도 처음이고, 그렇게 서서 그림 한 점을 보려고 기다린 일도 처음이다. 너무 좋아서 그 줄을 세 번이나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드라끄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보고 놀랐다. 미술책에서 보았던 이 그림은 매우 부드럽고 아름다웠는데, 원화는 색이나 윤곽이 모두 거칠었고, 자유의 여신도 그림책처럼 매력적인 것이 아니라 야수처럼 거칠다. 전쟁에 참여하는 여신의 모습이 거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화와 사진의 느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나이가 들은 것인지 심미안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술관을 많이 돌면서 나신의 아름다움을 예술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은밀한 욕망이 느껴졌던 예술 작품들이 이제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앵그르의 목욕하는 여인의 뒷모습이나 로뎅의 아름다운 여체의 작품들은 꽃처럼 아름다운 무엇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에서 나폴레옹은 왠지 졸렬해 보인다. 키 작은 황제 나폴레옹의 화려한 대관식은 그의 표정에서 욕심이 읽혀졌기 때문이다. 자유 인권 평등의 프랑스 대혁명에 놀라버린 유럽 각국의 귀족과 황제들은 프랑스 국내의 왕당파들을 지원하여 부르조아들과 노동자들의 반왕정 반봉건의 혁명 분위기를 잠재우려 했다. 프랑스 대혁명에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여러 나라들이 개입함으로써 한 나라의 정치 변동이었을 일이 유럽 전체를 전쟁터로 만들고 말았다.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고, 그 전쟁이 혁명 정신을 잠재우고 결국 황제 나폴레옹을 만들어 내었다.
나폴레옹은 잔인했다. 물론 그는 유럽 각국과 화해하려 했지만 영국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대불동맹이 그를 전쟁터로 끌어낸 것은 사실이다. 스페인 민중을 학살하고, 도망치는 러시아 병사들을 연못 속에 수장해 버린 것은 나폴레옹과 전쟁의 잔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며 전쟁을 부추기는 자들은 하느님의 부처님의 알라의 조상님들의 벌을 끔찍한 형벌을 대대손손 받아야 한다.
시인 바이런이 비장한 죽음을 맞이한 영웅을 기리는 희곡을 썼다. 아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위키피디아의 아시리아 왕에는 이 이름이 없다)는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는데 그가 용서한 반란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항복하는 대신에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서 그의 아내와 함께 왕좌에 앉아 죽는 것을 택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바이런의 희곡에서 영감을 얻은 드라끄르와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폭력적이고 냉혹한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림에는 여자들의 몸부림과 살육, 칼과 공포가 가득하지만 피는 보이지 않는다. 화려하게 장식된 말도 도망치지 못하지만 마지막까지 죽음에 저항하려고 한다. 이 그림은 가로 세로가 4미터도 넘는 거대한 그림으로 자유의 여신과는 달리 생생하고 강렬했다. 끔찍한 그림이지만 인상깊다.
사르다나팔루스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나폴레옹이 얼마나 더 비참하게 죽었는지 상상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냉정을 잃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권한과 책임을 가졌던 황제에 비해 유럽 대륙을 호령했다는 욕심 많은 나폴레옹은 조그마한 섬에 갇혀 남은 일생을 분노 속에서 죽어가야 했으니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졸렬한 영웅의 당연한 종말이다. 그의 욕심에 속죄라도 하듯이 나폴레옹은 이 거대하고 화려한 그림과 개선문을 남기고 죽었고, 파리는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돈을 받아내고 있다.
다윗의 승리,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루이 15세의 대관식 왕관, 안짱다리의 소년, 레이스를 짜는 여인, 지질학자, 암굴의 성모 등 사진으로만 보았던 원화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명화들 앞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서서 그림을 모사하고 있다. 더 많은 시간을 머무르고 싶었지만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하고 루브르의 분수 앞에서 고추장 비빔밥으로 만든 김밥에 된장국을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다음 일정 때문에 허겁지겁 먹어서 그렇지 맛은 정말 일품이다.
뤽상부르 궁전을 향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루브르를 돌아보느라 무거워진 발걸음으로 간신히 도착한 궁전은 이제는 모든 시민의 휴식처였다. 넓은 정원의 커다란 인공 호수가에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의자를 엉덩이에 깔고 해맞이를 하거나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하기에 우리도 자연스레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이미 사랑의 표현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팡테온은 아름다운 성당이다. 로마의 많은 성전들이 가진 아름다움과 거대함을 거의 간직하고 있다. 가는 길에 산 맛 있는 아이스크림을 미쳐 다 못 먹고 성당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내원인 듯한 아가씨가 눈을 부라리며 잔소리를 한다. 입구에 워낙 많은 사람이 있어서 그들도 우리를 보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도 성당 안으로 먹을 것을 가지고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사소한 잘못에도 정색을 하며 큰 소리를 치는 이 사람들의 과민한 질서의식이 황당하다. 성당을 성스러운 장소로 대하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다.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일본 등 소위 공공의 질서를 생명으로 여기는 나라들이 전세계에서 가장 비열하고 악랄한 짓들을 많이 저질러왔다. 대부분 집단의 광기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일상의 사소함 보다 수많은 인권과 생명을 위협하는 자신들의 이기심이 세계에 훨씬 더 위협이라는 것을 그들은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한심스럽다.
피카소미술관은 아담하고 예쁘게 자리잡은 건물이다. 스페인 대가의 국립미술관이 파리에 있다는 것이 웃기는 일이기는 하지만 프랑스에서 많은 돈을 벌었던 피카소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초기작품들에서 느껴지는 둔중하고 무거운 표정들이 해체된 영상으로 바뀌어 표현되면서 귀엽고 멋이 있는 그림들로 바뀌어졌다. 몇몇 그림들을 카메라에 담고 글과 함께 블로그에 기록해 둘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다.
퐁피두 센터는 현대 미술의 흐름을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배관이 다 들어나 어수선하고 아름답지 못한 건물의 외양처럼 현대 미술의 조잡한 독창성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 어항 속에 금붕어와 유리를 띄우고 아래에서 조명을 때려 그림자 동영상을 만들어 낸 작품만은 눈에 띄었다. 단순한 것을 응용해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센터 앞의 넓은 광장에서 케밥과 소시지로 간식을 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때로는 시끄럽게 자신을 표현하고 있었다.
저녁은 몽마르뜨르 언덕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불란서 음식을 시켜서 먹었다. 내가 시킨 음식은 아프리카 스타일의 쇠고기였는데, 나중에 음식이 나오는데 보니 생고기였다. 종업원을 불러 고기가 안전한 것이냐고 물었더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을 했다. 그러나, 감자 튀김을 싸서 먹으니 고소하고 부드럽다. 쇠고기 갈비구이는 오히려 문제가 컸다. Very Weldon으로 해 달라고 했는데도 몇 번 칼질을 하자 덜 익힌 역겨운 냄새가 올라와 먹기가 더 힘들다. 함께 나온 감자 마요네즈 묻힘은 매우 느끼해서 많은 사람들이 먹지를 못했다.
나오는 길에 7유로를 주고 우주신의 에펠탑 모형을 샀다. 그런데, 주인이 포장하는 과정에서 바닥에 떨어뜨리더니 얼른 다시 주워 들었다. 안전하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한다. 확인하지 않고 믿었는데, 돌아오는 전철에서 찬후가 확인을 했더니 밑부분이 휘어져 있었다. 이런 거짓말쟁이 장사꾼 같으니. 12시가 넘어서 캠핑장에 도착했고, 샤워를 하고 1시가 넘어서야 잠을 잘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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