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에는 대추야자와 치즈, 터키쉬 딜라이트를 안주로 해서 포도주를 실컷 먹었다. 잠이 부족하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 날인가. 뭔 여행이 이렇게 빨리 끝나지. 한 달이었는데. 노는 시간 한 달과 일하는 시간 한 달이 다른 것인지, 삼십 대의 한 달과 사십 대의 한 달이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두바이에서의 일정은 형과 형수가 다 안내해 주시니 '와아~', '네~에', '아니 ~' 하다가 끝나는 것 같다. 잘 놀아야 한다. 피날레를 잘 장식해야지. 한 달 동안 짐 속에 쳐 박아 둔 수영복을 꼭 쓰고야 말겠다. 파묵칼레에서 한 번 쓰기는 했지만 무겁게 들고만 다닌 것은 억울하다.
두바이는 요즘 거대한 오프로드 자동차들이 유행이라고 한다. 바퀴가 산만한 덩치큰 닷지들이 시내 고속도로를 활보한다. 잘 닦인 도로에서 무슨 스릴을 느낄 수 있을까. 리무진이 아닌데도 버스 길이마큼이나 긴 짚도 있다. 두바이의 부자들은 차 바꾸는 것을 볼펜 바꾸듯이 한다고 한다. 쓰다가 싫증이 나면 차길에다 내다 버리고 페라리다 롤스로이스다 그런 것들을 다시 사서 끌고 다닌다. 잘만 주우면 평생 여행비 나오겠다.
두바이의 왕실과 정부가 시민들에게 주는 혜택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곳은 물이 귀한 만큼 물값이 비싸다고 한다. 해수 담수화 설비를 거쳐 만들어낸 물들이 각 가정과 공장, 정원으로 공급되는데, 두바이 시민들에게는 무료로 공급하고 외국인들에게는 물값을 내게 하는데 석유값 보다 비싸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모든 교육은 무료다. 힘들게 외국에 가서 공부할 필요 없도록 미국의 유명한 대학들의 두바이 캠퍼스를 유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유수의 학자들을 초청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다. 공부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최고의 시설에서 최고로 공부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공부하려는 학생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두바이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면, 경제자유구역을 제외한 모든 구역에서 무조건 현지인 스폰서와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지분도 외국인은 51%를 넘지 못한다고 하니 사업의 결정권이 두바이 시민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결국 두바이로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은 실질적으로 두바이 시민에게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노력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이 나라의 시민들이다. 무지하게 행복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무지하게 부럽다는 생각은 든다. 정신 차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겠지.
버즈 알 아랍은 겉에서만 보는 호텔인지 출입이 까다롭다. 현관 안쪽의 아름다운 아가씨들과 달리 출입구 쪽에는 건장한 아랍친구들이 경찰복 비슷한 옷을 입고 투숙객이나 용무가 있어서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호텔 내부로 출입시키지 않는다. 하기는 겉모양이 아름다우니 굳이 내부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관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기다란 의자가 재미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가기는 하지만 앉아보니 다를 바 없는 소파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두바이의 도시계획을 프랑스 사람들이 했고, 많은 빌딩들이 외국의 건축가들에 의해 설계되었다. 아랍인의 창조력이 사라져버린 것같아 안타까웠다.
관광용으로 만들어 놓은 전통시장도 한바퀴 돌아보았다. 중세의 아랍 상인들의 가게들처럼 나무로 지어진 가게들이 높은 천장 아래 주욱 펼쳐져 있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로 만들어진 상점들이 편안하다. 역시 우리는 나무를 사랑하는 민족이다. 인공 수로인지 레스토랑들을 둘러싸고 긴 강이 흐르고 있다. 이 강은 오염을 방지하려고 기름이 아닌 전기로 충전하는 관광배들이 달리고 있었다.
팜 쥬메이라의 인공 모래섬도 달려보았다. 전망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꼭대기에서 인공의 아름다움도 촬영을 했어야 했는데, 휘황찬란한 장식들에 현혹되어 이 호텔, 저 호텔을 옮겨 다니며 눈요기만 실컷하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수족관은 정말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일상이 되어 버린 두바이 시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멀리 바다도 보이는데 아무도 수영하러 가자는 사람이 없다.
점심을 먹기 위해 돌아온 숙소에서 얼른 수영을 하자고 우주신을 꼬셨다. 그래도 겨울인지라 물이 제법 찼다. 물밖으로 나와 햇볕아래 누우니 이번에는 얼굴이 뜨겁다. 한 삼십 분 우리만의 전용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수영을 끝내고 났더니 그리미가 인도네시아에서 온 도우미들과 함께 미역국으로 점심 준비를 해 두었다. 이 때까지는 참 좋았다.
점심을 먹고 두바이 전통 시장이 있다는 곳으로 택시를 타고 갔다. 시장 골목에는 이곳도 배낭여행자들이 충분히 머물 수 있는 저렴해 보이는 숙소들이 제법 있었고,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보였다. 그동안 우리가 다녔던 빌딩 숲들은 전세계 부자들의 놀이터이고 이곳은 그래도 우리와 눈높이가 맞는 골목이다. 바로 옆 블럭은 두바이의 금시장이 있다고 해서 잠깐 돌아보고 이리저리 빈둥빈둥 구경을 다녔다. 두바이에 대해 공부해 온 것이 하나도 없으니 무슨 이야기가 잠들어 있는지도 모른채 여행의 마지막 날을 아쉬워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빌딩 숲과는 달리 오가는 사람들도 매우 적어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는 말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시장에서 다시 쇼핑센터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 보기로 했다. 지상철이니 두바이의 멋있는 풍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두바이에서 차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우미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평균 100만원 내외의 급여를 받고 있어서 버스를 이용하거나 걸어다닌다고 한다. 저녁에도 마찬가지인지 기차역 안은 우리가 전부다. 더돔의 수족관을 다시 한 번 보면서 기술의 위대함에 놀랐다. 자유를 잃어버린 물고기들에게는 너무 미안했지만.
마지막 만찬으로 부른 배를 더 늘어나게 했다. 터키와 그리스에서는 하루 세 끼를 다 챙겨먹지는 않았다. 호텔의 조식 부페로 충분히 배를 불린 후에 돌아다니면서 간단하게 배를 채우거나 과일이나 과자로 간식을 먹고 저녁식사를 잘 차려 먹는 것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이곳에서는 안정된 숙소에 한식을 먹을 수 있으니 식사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밥을 먹고, 저녁에는 포도주와 안주로 더욱 배를 불렸다. 여행 마지막에 그동안 굶주렸던 배가 호강한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그다지 아쉬울 것이 없을 듯하다.
짧았지만 의미있었던 만남을 뒤로 하고 배웅나온 형과 작별을 고했다. 여행의 아쉬움을 달래기도 전에 마지막 고비가 있었다. 잘 먹고 잘 돌아다니던 우주신이 갑자기 배가 아프고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점심 시간에 수영을 했던 것이 원인이었던 모양이다. 터키에서 두바이로 넘어 오면서 제대로 잠을 못 잔데다가 부지런한 형 때문에 늦잠도 자지 못하고 밤늦게까지 걸어다니고 뜨거운 햇살과 에어컨 바람 사이를 수도 없이 돌아다니다 보니 몸살이 난 모양이다. 준비해 간 몸살약을 먹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 거대한 몸집을 무릎팍에 누이고 잠을 재워야 했다. 비행기 안에서 기내식도 맛있게 먹고 영화도 편안하게 볼 생각이었는데.
공항에 도착하자 우리나라는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겨울을 피해 떠났으나 겨울을 끝내지 못하고 우리 땅에 돌아왔다. 지난 몇 년 너무나 추운 겨울이었다. 중국으로 제주도로 터키로 두바이로 아무리 겨울을 피해 다녀도 겨울은 끝내 피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우리나라, 생동감이 넘치는 사람들이 가득한 나라, 식민지와 전쟁과 군화발을 이겨내고 만들어 낸 이 나라는 얼마나 소중한가. 소중하지만 기대할 것도 없이 올해도 매우 추울 것이다. 또 겨울을 피해 도망을 가 보겠지만 끝나지 않는 겨울을 한탄하며 돌아올 것이다.
우주신이 벌떡 일어났다. 추운 겨울이지만 내 땅에 돌아오니 힘이 나는 모양이다. 우리가 이뤄놓은 것은 겨우 우리만 즐기고 끝났지만 이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봄은 자자손손 잘 가꿔 나갈 것이다. 모든 불결함이 눈에 덮여 보이지를 않으니 그나마 속이 편안하다. 맹인처럼 더듬더듬 따뜻한 집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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