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떠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비벼 뜨고 아이들 방에 전화를 걸어 깨우고 깬듯 만듯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면도를 했다. 오늘은 석림(스린)까지 먼 길을 가기로 했으니, 밥도 든든하게 먹고 부지런히 준비해야 한다. 아이들은 아홉시가 다 되어서야 준비를 마쳤다.
식당으로 내려가서 이제는 거의 같은 메뉴로 아침식사를 해결한다. 껍질을 벗겨놓은 귤이 왠지 신선해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 귤과 똑같이 보여서 먹지를 않았는데, 누군가로부터 굉장히 맛이 있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먹어 보았더니 당도가 높고 신선해서 새로운 메뉴로 추가되었다.
아침을 먹는 도중에 아이들로부터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리미가 오전에는 휴식을 취하다가 11시를 전후해서 시산 룽먼으로 가자고 제안한다. 모두들 대찬성.
중국으로 오는 국제선은 한국에서 예약을 할 수 있었지만, 중국 국내선은 저렴한 비행기표가 있었는데도 국제 결제시스템이 없어서 구매를 하지 못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대림역 근방에 있는 중국교포들이 운영하는 여행사를 이용하는 것이다. 다음 카페인 중국여행동호회에서도 중국 국내선에 대한 예매를 해 준다고 한다.
아이들은 방으로 가서 아마도 일기를 쓰거나 전자오락을 하고, 무일은 블로그에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잘 기억나지 않는 여행기를 올린다. 그리미는 내일 모레 갈아신을 양말을 빨고 있다. 음.... 아직도 집안의 남녀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았구나. 무일의 힘이나 경제력이 뚝 떨어지고 나서야 이 관계는 개선될 것이다.
의화국제호텔의 여행 안내원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 쿤밍지역의 영어 지도도 없다. 그냥 중국인을 위한 여행 안내원일 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한자를 써서 물으면, 중국지명과 사진, 그림을 이용해 최선을 다해서 안내해 준다. 그가 안내해 준 것을 가지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찾아가는 우리도 대단하다.
호텔 뒤쪽에 있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시산행 버스가 있다는 곳으로 이동한다. 잘못된 정보였다. 그곳에는 시산행 버스가 없었다. 인당 15위안에 시산으로 가자는 제의가 있었다. 총 60위안이니까 그리 비싸게 부른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번 버스로 이동해 보고 싶었다.
거리를 지나는 고등학생들에게 물어 보니 종합버스터미널로 가면 그쪽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이동해서 터미널로 갔더니 없단다. 터미널 앞에 공안들이 천막을 치고 앉아 치안 감시를 하고 있기에 시산 가는 버스를 물었더니 바로 길 건너편의 작은 버스를 가르쳐 준다. 1인당 5위안이면 간다고 한다.
이 버스는 현지 운남인들이 이동하는 교통수단인 모양이다. 행색이 매우 초라하여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았다. 이미 좌석이 꽉 찼는데도 작은 버스안은 사람으로 점점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안내원 아줌마가 우리를 보며 시산에서 내리니 안심하고 타라며(우리는 그렇게 이해했다), 친절하게도 목욕탕 의자를 통로쪽에 깔아 준다. 기사분의 부인인지 그냥 옆에 앉은 승객인지 알 수가 없다.
깔끔한 것은 고등학교 여학생들과 보온차병을 들고 있는 젊은 아가씨 뿐이다. 나머지 남자들과 아주머니들, 할머니들은 참 후줄근하다. 특히, 남자들의 머리는 평생을 감지 않아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하고 있다. 도대체 저런 몰골로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는지 신기했다.
난감한 상황도 보았다. 무엇때문인지 두 아이의 아버지인듯한 남자가 기사 아저씨와 안내원으로부터 심하게 야단을 맞는다. 이 아저씨도 억울한 지 무엇인가 항변을 하기는 하는데,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더 심하게 잔소리를 듣는다. 돈이 없어서 무임 승차를 해서 그러나 했는데,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는 것을 보았으니 그것도 아니다. 두 사람의 협공에 밀려 결국 우리들이 내릴때까지 그 남자는 침묵 속에서 그들의 지시대로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고 자세를 바로잡는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안스럽기만 한다. 더구나 자식들 앞에서 그런 꼴을 당하고 있는 초라한 아빠라니. 그런데도 도와줄 방법이 없다. 버스 안의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다.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덜커덩거리며 가기는 했지만 멀미는 나지 않았다. 앞에 앉은 여고생은 우리 가족이 한국인인 것이 무척 반가운 모양이다. 내릴 곳도 알아봐 주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요금이 얼마인지도 알아서 가르쳐준다. 한 시간이 못되어 시산 입구에 도착했는데,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환한 미소로 전송을 해준다. 고마운 일이다. 어쨋든 참으로 이상한 것은 관광객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고는.
시산은 여행 책자에 나와 있으니 유명한 관광지로 알고 있었는데, 이곳은 우리 동네 원미산 올라가는 입구처럼 초라하다. 산불감시원 아저씨 한 분이 한 30분이면 올라간다고 하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준다. 멀리서 케이블카가 출발하여 우리 머리 위를 지나는 것을 보면서 잠깐 망설이기는 했지만, 30분 정도의 등산으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르기로다. 아무래도 우리가 입구를 잘못 내린 모양이다.
그리미의 등산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게 여유가 있다. 꽃도 보고 글도 보고 경치도 보고 아이들도 챙기고....
우리들 곁을 동네 할아버지가 손주 세명을 데리고 오른다. 동네 아저씨도 씩씩거리며 오른다. 갈수록 동네 뒷산이 되어간다. 역시 관광지가 아닌 모양이다.
수직 경사의 시산은 사실 쉽지 않은 등산 코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든 관광객은 - 우리를 제외하고 - 케이블카를 이용하거나, 차량을 이용해 시산 룽먼 입구까지 이동한다. 오로지 동네 사람들만이 이 산길을 오른다. 우리는 그 입구까지 한 시간을 걸려서 헉헉거리며 쿤밍 주민들과 함께 올랐다.
드디어 룽먼 입구에서 40위안의 입장료를 요구한다. 가이드북에는 30위안인데 어느새 10위안이 오른 모양이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오늘의 일정은 이곳 뿐이어서 160위안을 지불하고 티켓을 끊었다. 그런데 오디오 가이드가 있었다. 순전히 중국말로. 그래서 우리는 오디오 가이드를 받지 않았다. 올라올 때까지는 분명히 현지 주민이었는데, 매표소에서는 여지 없이 외국인 취급을 받는다.
이곳은 정말 놀라운 곳이다. 老君(아마도 노자가 아닐까)에 대한 여러 가지 전설이 깃들여진 곳. 3대에 걸쳐 70여년 동안 이곳을 만들어 냈다는 전설은 마치 사실처럼 다가왔다. 화려하지 않고 정교하지도 않다.
자연 그대로의 그곳에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길을 만들고, 도교(Taoism)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사원도 암벽을 투박하게 뚫어 노군의 모습과 어미소와 아기소, 라한들, 그리고 제단과 휴식 공간까지 만들어 놓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중국에서 꽤 큰 호수로 통하는 바다처럼 넓은 텐진을 바라보는 언덕 위의 수직 절벽에 이 모든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오며 가며 한국, 중국 관광객들과 마주치며 무병장수를 바라는 현무와 거대한 남자의 상징도 구경할 수 있었다. 자유여행이 다 좋은데, 이런 관광지의 미세한 사실들은 알 수 없다. 귀동냥을 잘 해야 그런 것을 얻어 들을 수 있다. 물론 공부도 부족했다. 휴가 나올 시간도 간신히 만들었으니 이런 것을 연구할 시간이 있었겠나.
거의 2500미터까지 올랐다. 9시 반 이후로 3시 현재까지 우리는 식사를 못했다. 오늘따라 미니 핫브레이크, 소시지, 양갱으로 무장한 우리들은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며 강행군을 한다. 남들이 25위안을 내고 케이블로 오르는 편한 길을 우리는 간식 몇가지로 버티며 온몸으로 해냈다.
다시 걸어 내려 오면서 훌륭한 룽먼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또 다른 길로 깍아지른 절벽을 내려오며 멀리 쿤밍의 모습을 감상한다. 절벽에는 보라색 앵초가 소박하게 아름답게 피어있다.
룽먼 입구에 전기차가 있다. 버스정거장까지 간다기에 인당 5위안을 내고 힘차게 탑승을 했다. 불과 5분여를 내려온 뒤 다 왔다고 내리란다. 기쁨에 넘쳐 탔다가 실의에 빠져 내렸다.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할 수도 없었다. 완전히 당했다.
이런 이곳은 관광버스 또는 가이드 차량 전용 버스승차장. 지도를 보니 우리가 가야 할 시내버스 주차장까지는 아직도 4.5km가 남았다. 할머니, 아주머니, 아저씨가 동시에 달려들어 버스정류장까지 30위안에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이미 20위안에 상처받은 무일은 모든 제안을 거부하고 걷기로 한다. 달려들던 사람들이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며 내뱉는다.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틀림없이 욕일 것이다.
터덜터덜. 그리미는 무일의 결정에 힘을 실어 주고자 즐겁게 노래도 하며 열심히 걸어준다. 아이들은 중간에 다래 줄기가 한 번 즐거움을 준 것을 빼고는 힘겹지만 그저 따라준다.
70분만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다. 놀랍게도 호텔 인근인 춘쉥로(春城路)까지 한 번에 가는 51路(번) 버스가 있다. 1인당 2위안이다. 아까 그 할머니는 악다구니를 쓰듯 우리에게 버스가 없으니 당신의 미니버스를 이용하라고 했고, 호텔까지 200위안이면 안전하게 데려다 준다고 했다. 무일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불과 8위안이면 우리 숙소까지 가는 길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우리도 버스타고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버스는 곧 깨져 버릴 것같은 소리를 내며 상태가 좋지 않은 도로를 달린다. 거의 40분 가량을 쿤밍 외곽의 공장지대를 달린다. 한 번도 깨끗한 외모의 사람이 차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 시간 가까이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잿빛 쿤밍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버스 기사에게 춘쉥로를 물으니 다음 정류장이란다. 이런 고마운 기적이.....
우리 눈에 익숙한 거리의 모습인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다. 천막 속에 편안하게 앉아있는 공안에게 호텔의 위치를 물으니 정확하게 알려준다. 나중에 걸어 오면서 보니 마지막 갈림길을 반대로 가르쳐 줬다.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치는 확인했으니 편안하게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좀 크고 화려해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담배 연기 때문에 아이들이 짜증을 냈다. 음식은 잘 시켰는데, 너무 맵게 나와서 아이들이 다시 짜증을 냈다. 행복에 겨운 녀석들. 강력한 경고로 조용히 밥을 먹게 한다.
족발과 쇠고기, 감자채, 쌀밥이 메뉴인데, 내 입맛에는 그런데로 맞았지만 정말 매웠다. 그리미와 천재는 그런데로 잘 먹고, 우주신은 감자채와 김, 쇠고기로 그럭저럭 허기를 떼워 나간다. 마지막에 건더기를 다 먹고 파를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주문하면서 샹차이(향초), MSG(조미료), 설탕을 다 빼달라고 한 것이 이번에도 역시 효과를 보았다.
이번에는 계산서를 자세히 보았다. 일단 시킨 음식은 다 계산이 잘 되었고, 시키지 않은 것 중에 포장된 그릇이 1인당 1위안, 휴지가 3위안, 그리고 세금과 봉사료가 붙어서 기본가격이 76위안인데, 89위안을 계산하게 되었다. 음..... 그래도 싸다. 보통 70위안에 식사를 했는데, 20위안이 더 나온 것으로 이해가 된다. 대도시이고 큰 식당이 그럴 수 있겠구나 싶다.
아까까지는 다들 택시를 타자고 난리더니 식사를 하고 쉬고 나니 다시 걸을 마음이 생기는 모양이다. 호텔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방향을 향해 걸었다. 가다가 다시 객잔에 들어가 위치를 확인했더니 정확한 위치를 다시 알려준다.
길을 잡고 가는데 슈퍼가 하나 있어서 스프라이트, 칭다오 맥주, 고량주를 55위안에 사고, 커다란 귤을 9위안에 사서 호텔로 들어온다. 중국 여행이 무사히 잘 진행되고 있고, 아이들의 협조로 큰 싸움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고 있음을 감사하며 술과 사이다로 오늘을 축하한다.
아 고마운 나의 가족들. 시산 올레. 아마 어느 여행자도 이런 경험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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