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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농사 이야기

어, 밭일도 다 끝났구나_131121, 목

가을밤에 국도를 달리는 일은 어린시절의 가을을 만나는 기분이다.

온통 안개로 뒤덮인 이문동 철길을 지나 고개 하나를 넘으면 이문초등학교다.

부모 곁을 떠나 외할머니 슬하에서 어찌어찌 살았던 여덟살에서 열살 시절.

외로웠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잘 놀았기 때문이다.

딱지치기에 구슬치기, 고무줄총 만들기까지 누가 가르쳐 준 사람이 없어도

혼자할 수 없는 일이니 누구와 같이 했을텐데.

아마도 이발소집 아들 근호와 함께였을 것이다.


고무줄총은 동네 쓰레기통을 뒤지면 무한대로 얻을 수 있었던 고무줄로 만들었다.

동네에 작은 가발공장들이 많았었던지 가발을 만들던 찌꺼기를 잘 뒤지면

노란 고무줄을 많이 얻을 수 있었고,

나무 젓가락을 재료로 해서 고무줄총을 만들어 파리 잡는 연습을 엄청했었다.

요즘도 그 때가 기억이 나서인지 유원지에서 다연발 고무줄총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꼭 한 번은 만지고 지나간다.


샛길로 빠졌다.

등교길에 안개낀 철길을 한 발 한 발 헤쳐나가던 기억은 왠지 모르게 행복했다.

안개 속이 쌀쌀하면서도 포근했던 모양이다.

시골길을 달리는 한밤의 자동차 속에서도 늦가을의 쌀쌀하고 포근한 길이 느껴진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먹고 구름 속에 가리워진 햇살의 기운이 조금 느껴질 때

정미해 둔 맵쌀과 현미와 흑미를 자동차에 그득싣고 택배회사에 다녀왔다.

한 해 동안 애쓴 노동의 결과물들이 우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진다.

막걸리와 소주와 두부와 빵을 사서 싣고 돌아왔다.


배추밭에서는 수천께서 부지런히 배추를 뽑아 다듬고 계셨다.

여든 가까운 할머니가 찬바람을 맞으며 300포기를 일일이 다듬어 놓으시면

외발수레에 열 두어개씩 실어서 천천히 천천히 수도가로 나르는 작업을 했다. 

오후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작업이 끝났다.


늙은 호박을 넣어 끓여낸 된장국에 점심을 먹고

밭위에 펼쳐진 흙묻은 부직포를 걷어낸다. 보통 일이 아니다.

부직포 감는 장치를 하나 설치해야겠다. 


팔이 아픈 것은 둘째치고 시간이 너무 걸린다.

해가 다 넘어가고 여섯시가 되어서야 부직포를 다 걷어낼 수 있었다.

그 사이 정농께서는 감나무며 매실나무를 볏짚으로 단단히 겨울옷을 입혀 놓으셨다.

지난 3년 동안 겨울이 너무 추웠다. 거의 한 달 동안 영하 20도 밑으로 떨어진다.

무수히 많은 묘목들이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 버렸다.

올해는 나무들이 얼어죽지 말아야할텐데.


정농께서 돌아오시며 한 말씀 하신다.

밭일도 다 끝났다.


어, 그러고 보니 밭일도 다 끝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