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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관용, 우리의 형제가 말한다_121121, 수

터키 여행을 준비하면서 두려움이 점점 커져갔다. 혹시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그들의 친절에 현혹되어 속지는 않을까 등등. 이것저것 많은 책들과 카페들을 뒤적이고 있고, 이 책도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읽어가고 있다. 그러다가, 터키의 관광지에 대한 안내가 다 끝나고, 터키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비로소 책 읽는 재미와 터키에 대한 신뢰가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그들은 우리의 형제, '칸카르데쉬(피를 나눈 형제)'가 아닌가?




신뢰는 언제나 의문을 제기하면서 쌓인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묻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하나 하나 형식을 갖춰 관심을 갖고 묻고 대답해 가면 정말 좋은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일까?


"터키인들은 상대방과 인사할 때, 악수하고, 오른쪽과 왼쪽 양쪽 볼을 서로 맞대야 제대로 인사를 나눈 것이다. 양쪽 볼을 맞대고 나서는 그때부터 부모님은 잘 있는지, 아이들은 잘 있는지, 사업은 잘 되는지, 건강은 어떤지 등을 서로 묻고 대답한다. 통상적으로 볼 때 이런 질문의 대답은 다 좋다고 하는 것 같은데, 터키 사람들은 이 절차를 생략하지 않는다. (중략) 터키 사람들의 행동은 상당히 정중하고 예의 바르며 어법도 격식을 차리는 편이다."




정말 불필요한 상상이기는 하지만 터키인들이 베푸는 친절을 과연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을까? 끊임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터키어로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안되면 몸언어를 사용해서라도 기필코 손님(탄르 미사피르 : 신이 보낸 손님)을 대접하겠다는 투르크인들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가 말이다. 사실 그들의 호의를 굳이 거절하고 싶지도 않다. 가방 속에 그들의 호의에 답하기 위한 몇가지 물건들을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의 사기 행각을 구분해 내는 지혜의 눈이 무일에게는 없다. 그리하여 오로지 당하지 않기 위해 거절할 수밖에 없다. 진심을 담은 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보통 터키인이 마시는 차는 진하며 쓴 맛이 나는데, 장이 약한 한국 사람이 마신다면 금방 화장실을 가야 할 지도 모른다. 찻잔이 비자마자 주인이 금방 묻는다. 그러나 이는 의향을 묻는 것이 아니고 다음 잔을 채워주겠다는 뜻으로 주인이 금방 잔을 들고 나선다. 꼭 차를 그만 마시고 싶을 때는 차 스푼을 찻잔 위에 살짝 올려놓으면 집주인은 이제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세심한 데까지 아느냐면서 깜짝 놀라는 기색을 보인다."




무일이 가장 관심을 갖는 부분은 아무래도 노는 것과 정치다. 노는 방법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꾸준히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잘 놀려고 하는 것은 나와 가족들의 기분을 좋게 해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이고,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우리 민족이 행복해 지기를 바라고, 시민사회가 합리적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표를 하거나 SNS를 통해 발언하는 것말고는 특별하게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만나서 잘 융화해야 하는데, 그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를 조금이라도 다하겠다는 생각으로 깨끗한 농사를 지으려고 한다. 일단 농약과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화학비료는 퇴비 만드는 일이 매우 힘들게 느껴져서 아주 소량만 사용하려고 한다. 이런 생활이 무일과 가족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터키인들은 명예와 대의명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의 명예 추구를 지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명예는 터키어로 오누르 또는 나무스로 '오누루를 위해서' 또는 나무스를 위해서'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매우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뜻한다. (중략) 터키 농촌에서는 아직도 며예 살인 사건이 가끔씩 일어나고 있을 만큼 터키 사회에서 명예 살인은 뿌리 깊은 전통이 되었다."




어른들은 항상 술을 천천히 적당하게 마시라고 한다. 그렇지만 막상 술판이 벌어지면 이성은 사라지고, 원숭이에서 시작해서 사자와 돼지로까지 발전하는 것이 술판이다. 특히, 나이 많은 사람이나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주도하는 술자리는 항상 천천히 적당히 마셔야 하는 술의 원칙을 무시하게 한다. 술을 이겨내는 힘이 약한 무일로서는 지금부터라도 이 원칙을 잘 지켜나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천재와 우주신도 같은 피를 물려받았으니 술을 이겨내기가 힘들텐데, 어떻게 현명하게 강압적인 술문화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잘 넘겨 주기를 바랄 뿐이다.


"터키인들은 라크를 가리켜 '사자의 젖'이라고 하는데,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묘사하는 말이다. 라크는 용감하고 힘센 사자인 터키인들을 키우는 우유 같은 것"




주로 어른들이 계신 곳으로 우리가 찾아가야 했기 때문에 손님을 집으로 초청하는 일이 거의 없다. 겨우 1년에 한 번 친척들을 초대하는 것이 고작이다. 앞으로도 이런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못할 것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이 아니고는 초대도 받아보지 못했다. 다만, 친구 하나가 매년 한 번씩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참석하지 못할 상황이어서 안타까웠다. 술집에서 워낙 많은 세월을 보내다 보니 집안에까지 손님을 맞아들일 이유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손님에게 음식을 접대하고 갖추는 예의는 완전히 서양식이나 그들의 마음 씀씀이는 동양적으로 우리와 다를 바 없다. 터키인들에게 음식은 곧 대화를 의미한다. 큰 식당을 가더라도 시장판 같은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다. (중략) 음식을 준비한 사람에게 '엘리니제 싸을륵(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준비한 사람의 손이 계속 건강하기를 빈다)'이라고 고맙다는 뜻을 꼭 전한다."




초등학교 시절인 70년대에는 명절을 앞두고 목욕 전쟁이 펼쳐진다. 아버지나 외삼촌들의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가면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가득했고, 몸을 담그는 커다란 욕조에는 때가 둥둥 떠다니고 있어서 수시로 물을 틀어 땟물을 바깥으로 흘려 보내야 했다. 그 후로 목욕탕을 다니지 않다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10년 가까이 사우나를 다녔는데, 물도 깨끗하고 사람들도 없어서 어떤 경우에는 큰 사우나를 혼자서 차지하고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래도 자전거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해서 시원한 찬물로 샤워하는 것이 역시 최고의 목욕이었다. 뜨거운 목욕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도 하지만,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시원한 음료수를 나눠마시는 정겨운 기억도 이제는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역시 대화의 부족일까?


"로마 제국의 목욕 문화를 이어 받아 터키화된 터키 목욕탕 하맘은 단순히 몸을 씻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사교와 교제의 장소였다. (중략) 아나톨리아는 과거 실크로드가 지나간 길로 대상들이 움직인 이동로에는 '바자르'라는 시장과 '한'이라 불리는 여관, 그리고 하맘이라 불리는 목욕탕이 함께 있었다. (중략) 터키의 공중 목욕탕에는 우리처럼 나신으로 목욕을 하지 않고 중요한 부분을 가릴 수 있는 수영복 같을 것을 꼭 입어야 한다."




종교. 평화와 위로를 필요로 할  때는 폭력으로 답하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사랑이라는 감동의 뒤에 숨어서 지옥을 무기로 인간을 협박하는 집단 의식. 이슬람과 가톨릭(기독교 포함)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유교나 불교가 편안하게 다가오는 것은 만신론을 받아들이는 천주교도로서 이단으로 가는 길에 접어든 모양이다. 신이든 뭐든 하나로 통일하려는 것은 항상 무리와 억지가 따른다.


"터키의 이슬람을 이해하는 코드는 '수피즘'이다. (중략) 수피주의자들은 신과의 완전한 합일을 위한 수단으로 춤과 노래로 구성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략, 아랍어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터키 유목민들은 정통 순니파 지도자의 설교보다는 이단 수피 지도자의 설교에 정서적으로 더 끌렸다. (중략) 메블라나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으로 메블라나 종파는 모든 사람은 다 형제이며 신으로부터 받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하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사랑 가운데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다. (중략) 터키 사람들은 수피중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터키의 이슬람은 더 관용적인 면을 가지게 된 것"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모임에 가면 중년의 남자들만 득시글거린다. 얼굴에 주름이 잡혀가고, 머리가 희거나 벗어지는 것은 물론 배가 나오고 냄새까지 나는데다가 방귀까지 뿡뿡대는 남자들만의 모임. 정말 재미없다. 친구들이 보고 싶어 모임에 나가려고 하다가도 페북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모임 사진을 보고 나면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꼰대들의 모임은 재미가 없다. 그런데도 주변에는 온통 꼰대들의 모임만 존재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고보니 연말 꼰대들의 모임이 계속 준비되고 있다. 


"터키의 중소 도시나 농촌에는 커피 하우스가 많다. (중략) 커피 하우스에는 여성이 없다. 커피하우스의 오스만 시민이 여성을 받아들일 때 터키 사회의 남성우월주의도 크게 변할 것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못한 나라가, 시민의 뜻이 정치를 좌우하지 못하는 나라가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명제가 통하지 않는 나라도 있다. 한국이다. 왜? 시민들이 너무 훌륭해서 철학과 정신이 너무 뛰어나서 성실함과 의지가 상상을 초월해서 정치의 빈곤함을 메꾸고도 남는 것이다. 만일 정치가 제대로 선다면. 세상은 한국에 의해 평화롭고 번영하는 우주로 변할 것이다.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튀르키예들은.


"외잘 총리는 기회 있을 때마다 한국을 배우자고 했다. 서양만 바라보고 살던 터키가 동양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외잘 총리가 대규모 기업인과 언론인을 이끌고 1986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중략) 터키에서는 민주주의가 있지만, 한국에는 데모크라시의 'D'자가 없다고 혹평했다. 터키에서 한국형 모델은 이렇게 하여 막을 내렸다."




한민족은 참 지독한 사람들이다. 마음에서 우러나기만 하면, 파시즘에 열광하는 미친 사람들보다도 더 강력한 연대의식을 발휘하여 뭉친다. 우리가 비록 터키의 지식인들에게 민주주의가 없는 국가로 낙인찍히기는 했어도 그것은 한민족의 모습이 아니었다. 박정희의 폭력이 만들어낸 왜곡된 모습이었을 뿐이다. 민주주의 보다 더 강력한 민본주의가 우리 의식에 흐르고 있고, 민본의식의 모범이 되었던 정치지도자는 한민족을 자유롭고도 열렬하게 만들었다.


"앙카라와 이스탄불의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연도에는 대통령의 터키 방문을 환영하는 현수막들이 수도 없이 걸렸다. 터키 언론도 이에 놀라는 모습이었다. 수없이 많은 국가 원수가 터키를 다녀갔지만 한국 사람들만큼 이렇게 환영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고 보도하였다. (거슬러 올라가) 노무현 대통령이 터키를 방문한 것이다."


그의 많은 결함에도 눈물이 난다. 그가 말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


어쨋든 이 책에서 배워야 할 것.


투크크인들은 그들이 중앙아시아를 떠돌던 유목민이었을 때나

오스만 제국을 건설한 강대국이었을 때나

유럽 국가의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동양적 가치를 지키면서

다른 가치들을 포용하려고 하는 관용의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


- 터키, 신화와 성서의 무대 / 이희철 / 리수(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