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란 무엇일까?
육체가 속박되고 짐승처럼 길들여지다 버려지는 인간의 탈을 썼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일까? 그리스와 로마인들의 여유로운 생활을 뒷받침한 사람들일까? 어렸을 때부터 무수히 보아 온 영화 때문에 너무나 친숙하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다룬 소설을 읽기 시작한다.
노예들은 전쟁과 노예사냥이라는 폭력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노예를 둘러싼 관계가 어떻게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 노예를 부리려는 끊임없는 욕망이 혐오스러울 뿐이다. 전성기의 아테네나 로마가 그랬던 것처럼 노예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군림했던 주인들의 삶도 다른 형태로 피폐해지고 쇠락해 갈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과거에는 이곳에 1만 5천 명의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1천 명의 노예와 안토니우스님의 가족이 살고 있는 거죠. 농부들은 빈민가와 로마의 뒷골목에서 썩어가고 있습니다. (중략) 이제 우리는 노예들의 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의 토대이고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소화가 되지 않고 위에 탈이 난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생각을 한다. 생각의 결과로 수많은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이지만, 쓸데없는 생각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옥이다. 지옥을 생각해 낸 지배자들은 지옥의 고통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다. 삶도 고통스러운데, 죽어서까지 지옥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면 얼마나 두렵겠는가. 지배자들은 지옥을 말하면서 다수의 침묵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다. 그 침묵과 동의의 뒤에 새롭고 더한 지옥이 계속해서 만들어진다. 단순하고 꼭 필요한 것이 기괴하게 변하면 지옥이다.
"책과 설교에 기독교의 지옥이 나타나기 전에, 그리고 아마 그 이후에도 인간들이 본 적이 있고 실로 잘 알고 있는 지옥이 지상에 있었다. 인간으 본래 스스로 먼저 창조한 것에 대해서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무엇이 지옥일까? 단순하고 꼭 필요한 생활의 활동이 기괴한 것으로 변할 때, 지옥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전쟁에 패했다고 해서,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돈이 없다고 해서, 권력이 없다고 해서, 부모가 노예였다고 해서 노예가 된다고 하면 어떨까? 그렇게 만들어진 노예는 무엇을 할까?
"목에 쇠사슬을 걸고 사막을 가로질러 (가는)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인간에게는 끝없는 세월 동안의 노역만이 있을 뿐이다. 젊음도 없고, 중년도 없고, 노년도 없다. 오직 영원한 노역뿐이다. (중략) 그들을 인간이 아닌 어떤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외부적 힘이 있었고, 그로 인해 인간이 되고 싶은 욕망과 필요성이 점점 사라지게 되는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란 극한의 상황이 두려운 것은 고귀한 생명들이 헛되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장면을 무수히 목격하다가 스스로도 그런 상황에서 죽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정의로운 목표가 언제나 존재하지만, 전쟁은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막을 수 없다면, 정말 비겁한 일이지만 도망치고 싶다. 다른 인간을 죽여야 하는 것은 사람이 해서는 안될 짓이다. 검투사들의 싸움을 보면서 사람들이 흥분과 즐거움을 느꼈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광기다.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면, 칼과 창과 총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보며 환호하는 사람도 똑같이 미친 사람이다. 최소한 미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
"트라키아인은 오금의 힘줄이 끊겼고, 얼굴과 두 손과 몸통과 다리를 칼에 베였으며, 흐르는 피가 그의 발 아래 모래밭에 엉겨 붙고 있엇고, 그 피와 더불어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중략) 당나귀는 피에 절고 골수가 뚝뚝 떨어지는 시체를 끌고 신속한 보조로 경기장을 돌았다. 로마인들은 이 광경에 환호했고, 귀부인은 흥겨워하며 수 놓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인류사를 관통하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면,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은 평화롭지 않은 것에 기여할 수밖에 없다. 세상이 점점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기는 하다. 10년 전보다 세상은 훨씬 평화롭다. 앞으로의 10년이 평화로울 것이기 때문에 어떤 결정을 내려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평화를 지향하지 않는다면,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거부하려 하지 않는다면, 자유 조차도 평화를 깨게 될 것이다. 스파르타쿠스가 그것을 보여준다.
"자유는 그를 취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이 포도주처럼 온몸을 뚫고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다. 자유롭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중략) 숨을 곳도 기어들어갈 구멍도 없었다. 세계를 바꾸어놓아야만 했다."
노예들은 억눌린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로 노예로 살아간다. 노예는 열등한 인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폭력과 공포가 그들을 인간 이하의 상태에 머물게 한다. 노예를 부리는 주인은 그러면 우월한 인간일까. 아니다. 그는 폭력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존재다. 현대에도 노예들을 구경하고 싶다면 잘 들여다 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폭력과 공포와 그리고 돈이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고대의 노예들은 그들의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을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근대 이후의 노예들은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사실은 이탈리아 대부분의 노예들이 스파르타쿠스에게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노예들에게 그런 기질이 있다면 노예들이 우리보다 100배나 많은 이곳 농원에 이처럼 앉아 있을수 있겠습니까? (중략) 스파르타쿠스에게 합류했던 노예들은 최고였고, 가장 거칠고, 가장 절박한 노예들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바리니아는 그라쿠스 의원의 선의에 힘입어 알프스 산중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스파르타쿠스라고 이름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스파르타쿠스인 농부와 결혼하여 많은 아이들을 낳고 행복하게 살다가 삶을 마감한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과 자식들은 다시 또 로마의 강력한 조세 정책을 거부하다가 농민항쟁을 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스파르타쿠스는 억압자에 대한 반군으로 끊임없이 역사 속에 기록된다고 한다.
힘 있는 누군가는 끊임없이 많이 가지고 적게 일하려 하고, 몸 부지런한 누군가는 아주 작은 것을 가지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살기를 원하는데도 그러지를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누군가는 폭력을 동원하다가 결국은 죽고 만다. 살고자 하는데 자꾸만 죽게만 되는 것이 안타깝다. 해결책은 예나 지금이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억울하게 죽어가는 숫자가 정말로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스파르타쿠스의 시대에 4년 동안 수만명이 죽었으니 말이다.
노예들이 없으면 결코 삶은 여유로울 수 없다. 내 삶이 매우 여유롭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이다. 정당한 대가와 인간의 존엄을 지켜주도록 하려면 내 삶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 없다.
작은 자유를 가진 생명과 사랑이 소중하다. 권력이 없어도 큰 돈이 없어도 된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한다면 인간은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최소한의 조건으로 충분하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실천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우리 가족만이라도 소박한 삶, 노동하는 삶으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
- 소설 스파르타쿠스 / 하워드 패스트 / 미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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