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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일단 우리가 사랑하자_의자놀이_120905, 수

책을 사기는 샀으나 읽지 않으려 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잡문도 쓰다쓰다 지쳐버리고

대금도 불다불다 팔이 아파서

하릴없이 펼쳐 들었다.


역시 안 보는게 좋았다.


그들은 살기 위해 

기억의 저편으로 밀어둔 기억들을

살기 위해서

다시 끄집어 내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것은 삶이라고 여겼던 죽음을,

죽음이라 여겼던 삶으로 바꾸는 과정만큼

어려웠을 것이다.


외상후스트레스 증후군.

평화로운 가정이었다면 그런 상처들이 있다 하더라도

의사나 상담가의 도움을 받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힘 있는 가족도

마음을 열고 들어주는 친구나 동지도 없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폭력이 그 답인 모양이다.

사실 제일 무서운게 전쟁과 폭력이다.

방어를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무자비하게 행해지는 전쟁과 폭력은

인간을 동물보다 못한 신세로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육사는 참으로 대단한 분이다.

그 모진 고문에도 연약한 시인이 한 번도 굴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매에 장사없다고 폭력은 너무 두려운 것이다.

폭력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정혜신 : 해고당한다고 다 죽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전쟁과 거의 동일한,

아주 무자비한 폭력 진압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어요.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도 병들어요.


공지영 : 그러니까 왜요?



쌍용차의 죽음을 해결하기 위한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던 모양이다.

제법 길었던 그 시간에 우리는,

각자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살아 온 우리들에게

22명이 죽어가면서 계속 살려달라고 외쳤다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죽음이 드문드문해지자 삶의 광장이 열렸고,

죽기 전의 그들이 있었다.


"더 이상의 죽음은 안된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를 향해 해야 하는 말일까?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누군가에게 끔찍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자랑스러운 업적이 된다.

이 엄청난 간극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48년을 살았는데도 말이다.


이 진압 전체를 기획, 지휘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은

얼마 전 인터뷰에서

경찰 수뇌부가 위험하다며 반대하던 컨테이너 진압을

자신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허가받았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들은 왜 그날 지붕 위에 섰을까?

어쩌자고 가마솥처럼 찌는 공장 안에서

77일을 버텼나?


꼭 그래야 했을까?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걸까?


공적자금 투입으로 살아난 기업을 민간에 매각하여

투입된 공적자금을 회수하는 과정에 대해

신자유주의 정책이라며 극도의 증오심을 보이는 것은 문제다.

이 부분을 지식인들에게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작은 공감이라도 얻어낼 수 있을까?


산업체의 국유화로 문제를 풀려는 접근 방식은 틀렸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사회를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다.

기업은 기업으로서 존재하게 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는 대안이 될 수 없다.

또다른 비극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모든 자본에게 적대적으로 살다가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적어도 백년 안에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자본주의 현실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자본을 최대한 노동의 협력자로 이끌어야 한다.


당시 노동자들은 두둑한 보너스도 받았다.

만일 당시 자동차를 국유화했더라면

오늘날의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라는 유령에 홀려 있던

정부와 관료들은 이렇게 잘 되는 회사를

팔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기술유출에만 몰두했다는 상하이차는 

쌍용자동차를, 

안진회계법인에 의해 5,177억원이라는 손상차손을 받게 하여

부채비율 168%의 괜찮은 회사를 561%가 넘는 부실회사로 1년만에 탈바꿈시키고,

삼정회계법인에 의해 2,646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아낸다.


그리고, 상하이차가 쌍용차를 매각하는 주간사 컨소시엄에

삼정회계법인과 매쿼리가 선정되어 매각을 성사시키고 수수료를 챙긴다.

자본은 이렇게 끊임없이 부지런하고 꼼꼼하게 움직인다.


노동자들은 열심히 성실하게 일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무관심하게 살았다.

정치가 세상을 좌지우지 한다는 사실을 너무 몰랐다.

노동자도 세심하게 정치에 충실해야 살아갈 수 있다.


노동자는 너무 큰 공룡이라 병도 쉽게 들고

너무 큰 벌떼라 패가 나뉘기도 쉽다.

그 약한 고리가 결국 이 비극을 당하게 한다.


아무에게도 이런 답답함을 털어 놓을 수 없는 현실을

우리 스스로 잉태하고 말았다. 너무 불행하다.


돈이 없어서 우리는 그들을 보냈다.

그냥 보낸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독과 절망 속에서 말이다.

22번째 자살자까지 아무도 유서가 없다.


자살한 한 노동자의 휴대전화에서는

모든 이름과 전화번호가 지워지고

'어머니' 세 글자와 어머니의 전화번호만 남아 있었다.


책을 다 읽어 보아도

쌍용차 노동자들이 왜 그렇게 오랜 동안 극한의 파업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해고를 막기 위해서?

해고는 살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쌍용차는 회생 가능한 유망기업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정부와 파업을 무기로 과연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파업은 협상의 무기이지 폭력에 저항하는 무기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것은 협상을 하기 위한 것이지

자본이나 공권력과 전쟁을 해서 이기자는 것은 아니다.

 

 

절반의 노동자가 구조조정되었다고 해도

파업은 신중하게 운영되었어야 한다.

파업하는 노동자를 물과 식량과 위생시설이 없는 곳에 방치한 것은

동료 노동자들의 책임 방기다.


차라리 그 시간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을 위해 일감을 찾고

서로 격려했어야 했다.

가카와 자본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들은 이미

수많은 노동자의 지지를 받아 공권력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

절대로 그들의 돈벌겠다는 의지를 꺾지 못할 것이다.

우리 손으로 뽑아 놓은 대통령이고 국회의원들 아닌가?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생을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다.

정말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언제든지 일할 수 있는 사회이다.

인간은 비겁하지만,

그래서 언제나 배신자들이 판을 치게 되지만

언제든 일할 수 있다면 훨씬 덜 비겁해 질 것이다.


이 직장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삼성에서든 기아에서든 중소기업에서든 농장에서든

언제든지 노동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한 돗자리에서 같이 식사를 했던 노동자 가족들이

쌍용차 파업을 계기로 이제는 서로 원수가 되었다고 한다.


왜 이래야 할까?


신중하지 못한 파업은 정부와 자본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반목과 불신을 조장하게 한다.

스스로를 사지로 몰고 가는 행동은 안된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절반이 나가야 한다면 누군가 먼저 손을 들거나 제비라도 뽑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서로 미안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격려해야 할 것이다.


파업을 할 때가 있고

적당하게 물러나야 할 때가 있다.

파업은 노동자 혁명의 수단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가장 강력한 협상의 수단이다.

공구를 만지던 거친 손으로 쇠파이프를 든다고 해서

공권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노동자는 현명해야 하고

다치지 말고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공지영, 의자놀이 / 휴머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