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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남성판타지_클라우스 테벨라이트_김정은 옮김_글항아리_26년 3월 초판 ] 못난 사람의 입에서도 그럴듯한 말은 흘러나올수 있다_260721

부천에도 음성에도 책이 없어서 경기도서관에서 책을 찾았다. 영통까지 가야한다. 아, 서울에도 있겠구나. 항동작은도서관에 있다. 우리집에서 15분 거리다. 국립중앙도서관 책이음에 가입을 하면 빌릴수 있다고 한다. 가입했다. 작은도서관을 이용하려면 항동푸른도서관에 가입확인을 받아야 한단다. 확인을 받았는데, 관외거주자라 대출이 안된다고 한다. 고려대에는 연체중이다. 고척도서관은 대출중이다.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강서도서관이 제일 가까운 도서관이다. 고척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고 20분 거리에 있는 강서도서관에서 드디어 책을 빌렸다. 1975년에 나온 책인데,,,,,

 

제1장 남자와 여자

 

프로이센은 1525년에 공국으로 등장해 1701년에 왕국이 된다. 7선제후의 하나였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의 가문이 프로이센공국을 상속받아 두 지역을 합쳐서 프로이센왕국을 만든다. 프로이센공국과 브란덴부르크변경백 모두 호헨쫄레른 가문이어서 상속연합이 이루어졌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프리드리히 1세가 된다. 브란덴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기 때문에 왕국으로 독립하려면,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이 필요했다.

 

프로이센왕국은,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제국=도이체스 라이히를 만든다.

 

독일제국=도이체스 라이히의 황제들 : 프빌프빌 빌프빌 9명 (1701~1918)

 

           프1(1701~) - 프빌1 - 프2 - 프빌 2, 3, 4 - 빌1(1861) - 프3 - 빌2(1888~1918)

 

* 비스마르크 : 1862년 재상 입각 / 사회보장제도 실시 / 의회-가톨릭과 갈등하다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쫓겨난다(1890) / 베르사이유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이 독일제국으로 대관식(1871) / 빌헬름2세의 확장정책을 제어하기 위해 영국과 경쟁하지 말자고 건의했으나 황제는 거부. 빌헬름2세는 1차대전에서 패배하고 폐위된다.

 

독일제국은 1차대전 중 킬 군항에서 독일수병들의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망명함으로써 끝난다. 이때 독일은 연합국에 항복한다. 클라우스는 이 혁명이 실패했다고 말한다.

 

패전 후 독일군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대폭 줄어들어야 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온 수많은 장교·병사들이 실직 상태가 되었고, 이들이 모여 스스로 무장집단을 결성했고, 이들은 반공-반노동자를 내걸고 좌익세력(스파르타쿠스단 등)을 진압하는 데 적극 동원되었고, 독일혁명은 쓰러졌다.

 

"자서전, 소설, 체험담. 세가지를 통해 자유군단 군인들과 그들의 삶을 알아보고자 한다. 앞으로는 이들을 "군인남성"이라 부르겠다. 삶의 핵심은 바로 "백색테러"였다. 이를 소재로 삼은 소설들은 비슷하게 특정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1918년 11월 9일에서 1923년 11월 9일까지 5년간의 시간이다. 독일혁명은 쓰러졌다. 그리고 훗날 크게 승리하게 될 파시즘의 주춧돌이 놓였다. 물론 겉으로는 1924년 공화국이 승리를 거두어 안정을 누리는 듯했다." (53쪽).

 

[ 옮긴이의 말 ]

 

120쪽을 넘겨 읽다가 지겨워져서 옮긴이의 말을 읽는다. 극우 파시스트들은 달라지지 않았다. 좋아하는것과 싫어하는것이 똑같고, 찌질하게 하는짓도 비슷하다. 그래서 1918년이나 33년이나 21세기에도 그들은 언제나 같아서 알아보기 쉽다. 그렇다면 무슨 뾰족한 길이 있지는 않다.

 

"(만주 모던에 이어) 테벨라이트를 두 번째 만난 것은 온라인 극우 남성성을 통해서였다.


독일 출신의 미디어 철학자 야콥 요한센의 '온라인 청년 극우의 성차별, 인종주의, 여성혐오의 정신분석'이었다. 온라인 게시판과 소셜미디어 공간에 형성되어 존재하는 소위 남성계에 관한 연구서다. 남성계는 온라인에서 여성혐오•인종차별•극우 세계관을 구축하고 조롱과 혐오, 막말을 퍼뜨린다. 때로는 정치 세력화의 방식으로 때로는 테러리즘의 방식으로 오프라인에 튀어나와 자신과 다람을 죽이기도 한다.

 

요한센은 『남성 판타지』에서 이론분석틀을 끌어왔다. 그리고 테벨라이트는 그의 책에 통찰력이 빛나는 서문을 써주었다.

 

(중략) 덜된 사람의 비루하고 박살난 자아는 언제나 겁에 질려 있다. 그래서 자신을 혹독하게 묶어서 유지해줄 갑옷을 밖 에서 구한다. 무기, 조직, 군대, 검찰, 종교, 이념, 법률, 제도, 민족, 국가 등등 어떤 것이라도 상관없다. 홀사로는=홀로인 사람으로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단단히 뭉쳐서 총체성과 위계성으로 우뚝 서게 만들어주면 된다.

 

하나가 되어 힘을 얻으면 이들은 반드시 폭력을 휘두른다. 이들의 언어는 욕설이다. 논리는 궤변이다. 권력은 버젓이 남용한다. 힘은 옳다. 희생자가 죄인이다. 이들은 폭력을 통해서 쾌락을 생산한다. 쾌락을 마약처럼 소비하면서 비루한 자아가 일으키는 고통을 잠시 잊는다. 망각이 사라질 때면 다음 폭력이 절실해진다.

 

이런 삶은 원래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이념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이들이 급속도로 뭉치면서 발흥하게 하는 시대의 조건이 있을 뿐이다. 이들이 시대를 용케 잘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고야 마는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남성 판타지』가 보여주는 보편성이자 현재성이다." (1280~1쪽)

 

우리나라가 잘못 부르던 노래도 트리어의 김정은이 바로 잡아주려고 한다. 이게 바로 잡혀질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내고 함께 싸우자는 뜻은 올바르고, 어차피 니묄러가 만든 노래도 아니고 여러 사람들이 다듬은 노래이니, 그런줄 알고 쓰면 될것도 같다.

 

"마르틴 니묄러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고 한때 자유군단의 지휘관이었으나 은퇴 후 신학을 공부해 개신교 목회자가 되었다. 훗날 나치와 맞서다가 체포되어 8년 동안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종전 후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라는 시를 지었다고 널리 알려졌다. 바로 여기에 부분와전과 오해가 있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사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민당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니묄러는 이 글을 시의 형태로 쓴 적이 없다. (그가 순회강연에서 했던 말들이)
시의 형태로 가다듬어졌고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정치 맥락에서 즐겨 낭송되었다. 하지만 침묵하지 않는 용기와 연대의 가치는 사실은 니묄러가 뜻한 바가 아니었다.


(중략 / 니묄러는) 1920년 4월 250명의 오날=오른날개=라잍 학도병을 이끌고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노동자들을 유혈 진압하기 위해 루르지방에 용맹하게 진격했던 사람이다. 이후에도 줄곧 히틀러와 나치당을 지지했다. (중략) 당시 자유군단 문학이 흔히 그러했듯 무자비한 살인 행각을 애국애족의 자부심으로 뿌듯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니묄러가 지켰다는 침묵은 흐뭇한 무언의 찬성이 었던 것이다.

(중략 / 니묄러는) 비록 유대인이지만 개신교 목회자가 된 사람은 일반 유대인으로 다뤄서는 안된다. 즉, 일반 유대인의 배제와 핍박을 법제화한 아리안 조항은 정당하지만, 개신교회 내부에까지 적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반대의 골자였다.

 

역사학자 벤야민 치만에 따르면 니뫼러가 조직한 목회자 긴급동맹에는 7천여 명의 목사가 소속되어 있었다. 그중 최대 100명이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 목사였다. 니묄러가 연대하고자 했던 다람은 600만 명이 아니라 100명이었다.


(중략) 그는 체포된 후 다하우 수용소에 수감되었으나 독일 국민으로서 특별 수감자 자격이었기에 특별 대우를 받았다. 해군으로 복무할테니 사면해달라는 탄원서를 히틀러에게 직접 보낸적도 있다. (중략) 베트남전 및 핵무장 반대를 강하게 주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 소련으로부터 레닌평화상을 수상했다.

 

(중략)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내내 민주학생운동에 반대했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독일 국민성에 어울리지 않으며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다. (중략)


때로는 너무나 못난 인간이 너무나 절실한 교훈을 입에 담기도 한다. 입의 더러움과 말의 고귀함. 과연 어디에서 끊어지고 어디에서 뒤섞일까. 덜떨어진 사람이 빛나는 진리를 입에 담는다면, 진리가 싸구려가 되는가? 아니면 사람이 멋있어지는가. (중략)  침묵을 깨고 용기 내어 함께하라는 말은 여전히 옳다." (1284~7쪽)

 

제1장 남자와 여자(계속)

 

극우 파시스트들은 여자들을 때려잡으로 한다. 그녀들이 사람들의 50%에 이르는 힘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극우 파시스트의 가슴깊은곳에는 여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해서 그들을 무찌르려고 한다, 말이 아닌 몽둥이로.

 

"(백색여단의 지휘관을 인터뷰) '최근에 치마 속에 수류탄을 숨기고 있던 여자를 잡았습니다. 저는 여자를 총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여자가 남편이 두려워서 벌인 일이,,, 


(중략) 총살 이야기는 오롯이 거짓말이다. 수많은 여성이 치마 속에 무기를 숨겼다는 이유로 자유군단 군인의 손에 처형당해야 했다." (125쪽)

 

심장병이 있는 사람들이 늘 있듯이 극우 파시스트는 언제나 우리곁에 있고, 그들이 일어날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면, 잽싸게 일어나서 힘을 쓴다. 민주정은 늘 극우 파시스트가 자라날 너른밭을 만들어준다는 패러독스 위에서 움직인다. 그러지 않으면 민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이 "심지어 이번 세기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말을 대놓고 조롱한 적이 있다. 브레히트도 한마디 거들었다.

 

"파시즘이 안 나타났던 세기가 있기라도 했다는 듯 호들갑이다." (132쪽)

 

파시스트들이 공산주의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과 싸워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남녀의 일이 따로 있지 않다. 총을 들면 총을 같이들고, 칼을 들면 같이 칼을 들고, 아지테이션을 하면 같이 아지테이션을 한다. 사람들 중에서 50%는 파시스트들의 적이 아니거나 거의 힘없는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자들은 그렇지않았다. 그래서 더 여릿해 보이는 이들을 먼저 두들겨패고 침을 뱉는다.

 

프로이트를 들여다가 고추를 가진 멋진 여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파시스트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뜻은) 남근으로 무장한 멋있는 여성에게 거세당할 두려움을 뜻한다. 이 두려움은 너무 뚜렷하게 드러나서 무의식의 투사라거나 무의식의 두려움이라고 볼수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오히려 반대다. 이들 군인 남성은 전통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으로 숨겨야 마땅할 판타지를 절대 숨기려들지 않는다. 기를 쓰고 반드시 떠벌린다. "고추잘림의 두려움"은 뚜렷한 생각이다. 공산주의 총잡이 빨갱이 계집도 마찬가지로 뚜렷한 생각이다.

 

따라서 결론으로 군인남성들에게는 억압기제가 없거나 거의 없었다. 이들은 집단으로 정신증 = 변태 심리 구조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신의 표상 수준에서 꿈분석기법으로 말글을 분석했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다면, 정말로 억압이 존재하고 욕망=두려움이 숨겨져 있을 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다면 어떻겠는가?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148쪽)

 

정신분석의 틀로 프로이트를 가져다 쓴것은 너무 쉽게 생각한 일이다. 1975년의 일이라 어쩔수 없었겠지만,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잘못된 틀이었다. 앞으로 하는 이런 이야기도 매우 힘이없는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며 읽으면 된다. 고추떠받들기 - 고추없애기 - 아버지 죽이기 - 엄마 사랑하기 등등 모두다 헛소리다.

 

"고추로 무장한 멋진 여성에게 거세당할 두려움을 뜻한다. 이 두려움은 너무 대놓고 드러낸것이어서 무의식의 투사라거나 두려움이라고 볼수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오히려 반대다. 이들 군인 남성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무의식으로 숨겨야 마땅할 판타지를 절대 숨기려들지 않는다. 기를 쓰고 반드시 떠벌린다.

 

"거세 불안"은 의식적이다. 공산주의 총잡이 빨갱이 계집도 마찬가지로 의식적이다. 따라서 결론으로 군인 남성들에게는 억압 기제가 전무하거나 거의 없었다. 이들은 집단으로 정신증- 변태의 심리 구조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정신의 표상수준에서 꿈분석 기법으로 언어를 분석했는데도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다면, 정말로 억압이 존재하고 욕망과 두려움이 숨겨져 있을 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한 게 없다면 어떻겠는가? 무의식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148쪽)

 

프로이트는 넋빠진 사람이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펴보고 이런말을 하는가? 엄마는 창녀라고 생각하고, 아빠를 남의 손의 빌려 죽인다고, 정말 기가막힐 일이다. 정신들 차려야한다.  

"프로이트는 이를 일찍이 간파했다. 부르주아의 억압하는 도덕관념 아래서 자라난 소년은 엄빠가 침실에서 하는 행동을 죄악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어머니가 하는 짓을 창녀짓과 동일시한다. (중략) 아들의 무자비한 질투가 "빨갱이"의 손을 빌려 남편을 죽인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를 억지로 순교시켜서 천사로 만들어낸다." (172/178쪽)

 

극우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으려면, 있던 권력이 사라져야한다. 도이체스 라이히의 빌헬름2세는 폐위되었지만 네덜란드로 도망가 삶을 이어나갔다. 파시스트들은 그의 권위를 짓밟아버린다. 빌헬름을 따르던 이들이 공화정에 무릎을 꿇자 그들도 내팽개치고, 공화정은 빨갱이라고 짓밟아버린다. 이제 남은것은 파시스트들밖에 없게 되고, 그들이 권력을 잡는게 마땅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게 사람들에게 먹힌다.

 

"황제는 죽었어야 마땅했다. 항복하는 제국 육군의 맨 앞에서 죽었어야 했다." 곳곳에 원성이 높았다. 누구나 공공연히 비난했다. 황제는 죽지 않았다. 그리고 고위 장교들은 기회주의적으로 공화국을 편들었 다. 가부장들은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제 아들의 시대다." (173쪽)

 

2차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나찌가 왜 폴란드로 쳐들어갔을까? 1921년의 오버슐레지엔 사태가 그 뿌리이며, 발트해로 나아가는 폴란드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다시 빼앗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1차대전이 끝나고 영토분할이 일어났는데, 오버슐레지엔 지역은 독일계와 폴란드계 주민이 섞여 살았고, 광산과 중공업이 발달한 지역이라서 폴란드와 독일 모두가 좋아하는 땅이었다. 국제연맹에 의해 주민투표로 독일의 땅이 되기로 했지만 폴란드계 주민들의 무장투쟁과 독일 자유군단의 참전으로 다시한번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영국을 비롯한 국제연맹이 개입해서 7:3으로 영토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가져간 30%의 땅에 광산과 중공업이 85% 가까이 배치되어 있어, 독일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남겨두게 되었다. 게다가 바이마르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자유군단은 무기와 자금을 얻게 되었고, 이들은 나찌의 뿌리가 된다. 바이마르공화국은 가장 큰 적을 스스로 키워주었다.

 

연애를 할수없는 남자들만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너저분한 이야기들이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다고 프로이트를 들먹이며 분석까지 하는지는 알수 없다. 정말 할일이 없어보인다. 이런 이야기는 귀기울일만하다. 어떤 실마리가 있어서 이렇게 이야기할수 있을까 궁금하다.

 

사람을 고치는일에서 남녀의 권력다툼이 있었을까? 산파도 사라져버린 직업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응급처치를 할수 없기 때문이다. 교육을 시키지 않고 여자를 노예부리듯 하려는 야만의 잔재라고 이야기하는게 맞을듯하다. 근대의학교육이 자리잡기에 앞서서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측이 가능한데, 마녀사냥을 끼워넣는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이팅게일은 기록을 통해 감염을 막고, 감염을 막음으로써 다친사람들을 살려냈다. 그녀와 그녀의 간호사들이 예쁘고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백의의 천사들이라고 불린것이 아니다.

 

"순백의 간호부 이미지에는 좀더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최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새롭게 유럽 의학사를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민속의학" 지식을 지닌 여성치료술사가 실질 의료 현장에서 밀려나고 그 자리에 학업을 쌓은 전문남성의사가 대신하는 과정에는 수백년의 세월이 들어가야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의 하나가 마녀재판이 었다. 여성에게 남겨진 영역은 오직 산파 노릇뿐이었다.

 

(중략 / 의사들의 의혹에 찬 시선을 잠재우려는 전략이었겠지만) 등불을 든 여인에게는 의학훈련보다 인격형성이 더 중요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라는 직업 훈련에 등록과 시험을 도입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녀의 이름조차 남성의 욕망이 담긴 듯 들린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어느 어머니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간호사 또한 등록되거나 시험될 수 없다" (206~9쪽)

 

소나무도 죽을때가 되면 솔방울을 엄청나게 매단다. 소나무만이 아니라 많은 식물들이 심각한 가뭄, 병충해, 영양 부족 등으로 삶의 위협을 느끼면,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모두 쥐어짜내 엄청난 양의 꽃을 피우고 씨앗을 맺는 현상이 발생한다. 학자들은 이런 성질을 이용해 노화유도성 번식-스트레스 유도성 꽃피우기를 만들어낸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도 여러가지 터미널 인베슽먼ㅌ를 한다고 밝혀지고 있다. 그러니,

 

"프롤레타리아 청소년들은 사춘기의 고뇌를 그리 무겁게 느낄틈이 없었다. (중략) 물질생활조건이 나쁠수록 생식기는 더 자유로워진다." (219쪽)

 

이런 헛된 물음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어쨌든 사랑을 의심하는 순간 사랑은 깨져버린다(돈키호테 중에서). 깨진 사랑은 깨진 유리와 같아서 되돌릴수 없다. 깨지않고 닦아내야 한다, 아닌듯한 무언가를. 그래도 뭔가 물음을 던져야할때가 있기는 할것이다. 그때는 물어야한다. 너는=너희들은 나를 사랑하는가?

 

"생활이라는 전쟁에는 몸의 힘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마 제일 힘든 것은 가족들의 끝없는 다른 요구를 만족시켜야 하는 피곤함일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로서 홀사의=인디비듀얼 삶은 없다. 결국 자신을 보살피는 법도 잊고 기계와같은 도구가 되어버린다. 마치 로마시대의 노예처럼 권리조차 없는 물건 취급을 당하고, 스스로도 자신을 물건인듯 느낀다. 그나마 최고로 팔자 좋은 여자의 삶이 이렇다. 정식 직업도 없다. 독일=모든 여자들의 처지가 이렇다!" (220쪽)

 

232쪽에서 이 장의 읽기를 마친다. 프로이트를 분석틀로 해서는 아무것도 찾아낼수 없다고 본다.

 

 

제2장 홍수, 육체, 역사

 

이런 기록은 남겨둬야한다. 하나뿐이 실마리겠지만, 그래도.

 

"붉은 파도"는 무장 노동자 단체였다. 1920년 3월 19일 카프폭동에 맞서서 에센급수탑을 탈환했던 사람들이다. 급수탑 을 점거하고 있던 46명은 민병대와 보안경찰이었으며 카프폭동 동조자였다. 에센 급수탑 쟁탈전은 (중략) '붉은 군대'의 끔찍한 만행을 웅변하듯 보여주는 전형으로 활용되었다. 오늘날에는 오히려 편파역사서술의 대표사례로 거론된다.

 

포위된 카프 폭동군은 백기를 들긴했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노동자군에게 사격을 가했다. 내부로 추가 저항가능성을 둘러 싸고 의견 불일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법정 기록으로도 확인되었 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과 얼마전까지 에센급수탑에는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이름을 "공산당 테러'의 희생자라고 기록한 추모안내판이 걸려 있었다. 베르톨트가 "붉은홍수"에 희생되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것만은 아닌 예외 경우다. 그는 정말로 하르부르크 노동자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나 상황이 충분히 밝혀진 것은 아니다.

 

한가지는 확실하다. 협상을 요구하다가 죽은 것은 아니다. "베르톨트의 부하들"이 무기를 내려놓은 후 "그 유명한 총격"이 가해졌다고 한다. 총을 쏜 사람이 누군지는 고의로 누락했다. 곧 이어진 혼란의 와중에 베르톨트와 군인 몇 명이 사망했다. 노동자들이 정말로 "엄청난 대중"이었다면 더 많은 희생이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잘로몬이 상황을 묘사했던 것처럼 노 동자와 군인이 무차별로 뒤얽혀서 구분이 안갔을 것이다. 베르톨트의 "강철여단"은 현역 쿠데타 세력이었고 공화국을 전복하 려고 베를린으로 향하던 중이었다는 점을 밝혀두는 게 좋겠다. 노동자들도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베르톨트의 부하들은 군중에게 발포한 적이 있었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면 노동자들의 자제력은 놀라울 지경이다." (345쪽)

 

알을 품는 일은, 
젖을 먹이는 일과 비슷한 희생을 받아들여야지만 되는일이다. 

젖을 먹이는것은, 
자신의 피와 살을 나누는 일이다.

알을 품는 새들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자기를 지키는 일도 잊어버린다.

자기지키기와 먹이활동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신의 피와 살을 희생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포유동물이 젖먹이기를 바탕으로
사랑이라는 느낌이 만들어졌듯이,

파충류와 조류에서 알을 품는 일로도
사랑이라는 느낌이 만들어질수 있다.

공룡은 알을 낳는다. 
알이 부화하려면 어미가 알을 따뜻하게 품어야한다. 

공룡들도 과연 알을 품어서 새끼를 부화하게 했는가?
혹시 거북이처럼 따뜻한 모래속에다 낳아두기만 했을까? 

그렇다. 

일부 공룡들은 오늘날의 새처럼 
자신의 몸으로 직접 알을 품어 부화시켰다는 
화석 증거가 발견되었다.

그러므로 사랑은, 
어찌보면 그리 놀라운 느낌이 아닐수 있는,
삶에서 만들어지는 그저그런 느낌일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에 놀라워하는것은,
사랑이 아니라면 삶이 있을수없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느낌이 오지 않아서 이렇게 줄여봤다.

 

1) 부르조아의 시대에 무의식은, 기계와 같은 생산력을 갖고 온갖 생각들과 망상들을 만들어낸다.

2) 부르조아는 직접 피해자는 아니지만, 깊이 감춰진 의식에서 두려움을 갖고 있고, 두려움은 커지고 있다.

3) 기계를 만든 부르조아는 괴물이 아니지만, 괴물같은 기계를 써서 부유하게 되었고, 스스로도 괴로움을 겪고 있다.

4) 욕망덩어리 이드를 현실에 알맞는 자아로 바꿔나가야 하고,

     원리원칙만을 따르는 수퍼에고의 답답함을 부드럽게 풀어줘야한다.

5) 프로이트만으로는 안되고, 욕망-흐름-들끓음-억압과 함께 멋있는 여자=섹슈얼리티와의 싸움을 파헤쳐봐야 한다.

 

클라우스가 쓸데없는 짓을 또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 잘했으면 좋겠다.

 

"부르주아의 말글관행에서=랭귀쥐에서 기계 및 메커니즘과 관련된 모든 말들에는, 실제 기계와는 오히려 반대되는 부정가치평가가 담겨있다. 움직임이 기계와 비슷하다면 그것은 의식이나 관심없이 그냥 움직인다는 뜻이다. 기계처럼이라는 말은 죽어있거나 혹은 감정이 없다라는 말과 동의어다.

 

하지만 서커스를 보는 부르주아는, 저글링 묘기의 기계같은 동작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기계같지만 정신이 결여된 것이 아니라 모아진 정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기계처럼 페달을 밟는 자전거경주 선수의 움직임은 스포츠 중계자에게서 아름답다는 말을 듣는다. 자전거라는 기계가 자전거 경주 선수의 능력과 수행력을 이끌어내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어떤 기계는 매우 쓸모있게 제작되었을 뿐 생산하지 않는다. 스포츠 쇼, 달 착륙, 전쟁, 여가 활동 등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공장기계, 치과환자를 위한 기계, 산부인과 의자 등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제 의미심장한 결론이 도출된다. 생산 영역에서는 사람과 기계의, 사람이 만든=사만의 대립과 갈등이 부각된다. 결코 기계의 책임은 아니다. 오히려 기계에 자금을 조달하고 설계하고 제작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즐거워야할 생산과정을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린 책임 / 무일).

 

(중략 / 그러나 어쨌든) 기계가 괴물이다(괴물이 아닌데,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괴물을 창조해낸 자본가는 괴물이 아니다.

 

부르주아 사회의 말글 및 사고방식에서 보이는 '기계처럼'에 대한 부정은 자본주의 생산과정에서의 기계부정에 해당된다. (중략) 노동자와 기계 사이의 적대는, '자아=부르조아의 자아'와 '자아의 무의식이 일으키는 생산력'과의 적대와 정확히 같다.

 

이 적대는 부르주아의 일원으로 남으려면 이러저러한 '자아'가 되라는 사회의 강제를 통해 부과된다. 부르주아의 공포는 자신의 계급에 어울리는 사회의 요구를 더 이상 충족시키지 못하면 노동자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부르주아의 자아는 무의식과 직접 접촉할까봐 두렵다. 그리하여 기계에 매달리는 저주를 받을까봐 두렵다.


후기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공식화했다.

 

"이드가 있던 곳에 자아가 들어서야 한다."

 

(중략) 프로이트는 '자아가 들어서는것'을 자아발달과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중략) 자아/이드/ 초자아 구조가 완결된 사람은, 흐름과 욕망기계가 안정되어 말라붙은 무덤과도 같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추측을 덧붙이려고 한다. 추측은 앞으로 증명하도록 하겠다. 무의식의 물과같고 기계같은 생산력에 맞서려는 싸움은, 여성에 대한 싸움이라는 형식으로 구체화된다. 결국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맞서려는 싸움이다.


(중략) '욕망의 흐름들속에서 용암과 물'을 느끼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냥 흐르게 두는 사람들을 살펴볼 것이다. 다양한 큰땅=콘티넨탈과 사회에서 온 작가들의 글에 나타나는 어떤 흐름을 살펴본다. 독자들과 한동안 떠내려가다가 뭔가 본질인 것을 마주치게 되기를 기대한다.
(중략) 물이 있는 곳에 욕망은 흐른다.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375~7쪽)

 

고갱이인데 알수가 없어서 뿔뿔이 흩어본다.

 

1) 군인남성은 자아가 녹아내려 = 의식이 나가버려, 이드가 발동한다.

2) 지킬박사는 약의 도움을 받아 자아를 지키며 하이드라는 지킬박사 속의 격량속으로 내려간다.

3) 세마학자들은=사이언티슽들은 언제나 선을 넘어버린다.

4) 자연과학연구의 모순은, 사람의 자유를 신처럼 받들면서 사람을 얼마나 일하게 할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5)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을 왜 기관없는 몸=보디 위ㅈ아웉 오건ㅈ라고 했을까? 자본주의 생산체제에서 사람의 몸은 생산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였다. 도구인 몸이 제대로 생산을 해내려면, 눈-코-입-손-발 등의 기관들이 제대로 작동해 주어야 한다. 도구로서의 몸을 거부하기 위해서는 결국 기관들이 없어서 생산활동에 참여할수 없는 몸이 되어야한다.

6) 탈영토화는, 자본주의 생산체제에 갇혀버린 몸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7) 재영토화는, 자본주의 생산체제를 넘어서려는 나에게 권력을 주어 스스로 일하고 감시하게 한다. 많은 돈이 주어지면서 나는 자본주의를 위해 뛴다. 그럼으로써 이드를 실현하는 새로운 생산과 멀어지게 된다.

8) 스스로 욕망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연루되는 사람은, 자신의 이드에 충실함으로 탈영토화를 추진하는 자아이지만 자본주의체제의 재영토화에 포섭된 사람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 창조주를 거스르지 못하는 사람일 뿐이다.

 

 "스티븐슨은 하이드 씨에게 악마마음의 움직임을 또렷한 의식으로 경험하고 즐기도록 내버려둔다. (중략) 마지막에 뛰어든 죽음의 악마같은 바다는 마치 자유의 바다처럼 느껴졌다.

 

군인 남성의 텍스트에서는 안과 밖이 만나 경계가 무너지면 곧바로 의식이 나가버리고 환각과 같은 상태로 진입한다.

지킬 박사는 자아로서=자아를 지키며 내면의 격랑 속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윙거, 샤우베커, 드빙거의 폭발은 자아를 녹여버리는 전쟁의 도움으로 스스로 일어났다.

군인 남성들은 흐름에 의해 촉발되었다.


지킬 박사의 상태는 이들보다 한단계 전이다. 커다란 차이는 분열이다. 몸바깥과 몸의경계가 함께 단단한 총체성을 이룬다. 사회현실을 생산하는 흐름들이 유동적으로 분할된 부분 대상의 임시 체계에 더 이상 담기지 않는다. 내면의 격랑은 이제 죄악스럽게 느껴지질 않는다. 악마의 마음은 본래 내안에 들어있었으나 문제없이 잘 막혀 있었다.

 

꼭 하필 과학자들은 "내면"의 경계를 넘어 중대한 발견을 해버린다.

그리고 언제나 선을 넘어버린다.

 

뭇사람의 역사에서 유례없는 속도로 자연과학이 이론과 실천의 발전을 이루던 시대에 문학계에서는 모든 것을 멸망시키는 세마학자가=사이언티슽이 등장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세마학자들이 지식과 발견의 욕망에 사로잡혀서 선을 넘을까? 어떤 터부를 깨뜨리게 될까?


세마연구의 터부는 언제나 사람이다. 사람자신, 특히 사람의 몸그것을 실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신념은, 이 지점에서 세마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자유능력이 불가침의 비밀로 남겨져야 한다고 믿는다. 한편 착취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은 허용된다.
이는 모순이다.

 

한편으로는 자본의 원시축적과정이 있다. 사람의 생산가능성의 한계를 풀어버려서=사람을 기계에 맞춰 끊임없이 일하게 하면서, 돈-상품-노동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노동자들과 유럽밖 토착사람들의 피땀으로 추진력을 얻어낸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의 욕망이 펼쳐지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사회의 과정이 있다.

 

들뢰즈와 과타리는 탈영토화를 말한다. 기관 없는 육체에서 벌어지는 욕망 생산의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재영토화가 일어난다. 새로운 생산 가능성이 사람의 새로운 자유를 빼앗으면서 지배를 새로이 확립하려고 폭력을 쓰려는 시도다. 우리는 부르주아 역사의 재영토화 과정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중략) 


일단 재영토화 작업은 사람을 기계의 지배자로 만들어낸다. 스스로와 사회의 격랑을 조종하고 조작하는 주체가 된다. 이는 반동의 기획이다. 이러한 행동의 객체는 바로 스스로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동안 생산은 막힌다.

 

자동으로 돌아가는 기계음을 듣는 자, 스스로 욕망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연루되는 자, 새로운 계급이 낡은 계급을 착취하는 시대에 새로운 계급이 되려는 자. 이 모두는 죽음의 무리이며 악마다. 지킬 박사이며 프랑켄슈타인이다. (중략 / 이런 이야기는 많은데)  탈출 마술을 하려다가 구속 기계에 갇혀 죽는 젊은 마법사의 이야기도 있다. 창조주가 하시는 일을 넘보지 마라. 창조주는 곧 자본가일 것이다." (387~8쪽)

 

사람이 가지는 느낌들은 삶을 지키는데 좋은 것들이다. 비록 그것들을 삶을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줄타기를 하듯 비틀비틀 서있기만 한다면, 욕망들은 삶을 지켜내는 힘이다. 이드를 굳이 쓰려면, 자유에 대한 욕망 = 삶에 대한 욕망이라고 쓰면 될것이다. 그게 사룸=라잎들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너무 쓸모없어서 자꾸 버리려고 애써야한다. 그러다보면 잊혀질 것이다, 화석처럼 꼭 있어야할 어떤 구석에 살짝 남아있겠지만.

 

"후기의 프로이트는 이드가 있던 곳에 자아가 들어선다고 말했다. 역으로 자아가 있던 곳에 이드가 들어선다. 달리 표현하자면, 댐이 있는 곳에 흐름이 몰려든다. 우리가 인용한 시인들은 이드라는 말은 회피했다. 낯선 발상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혹은 굳건한 바위 같은 자아와 거세의 절벽 개념에 집착한다거나, 흐름을 혼돈이나 범람과 동일시하지 않았다. 이들은 후기 프로이트와는 달리 이드를 자유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했던 사람들이다." (396쪽)

 

삶은=사룸은 무엇을 바라는것일까? 돈은 신과 같지만 신과 같지않게 바라는것을 이루게 해준다. 그래서 돈을 따라다니는 것인데, 돈을 따르다보면 바라는게 뭔지를 잊어버린다. 무엇을 바라는지는 날마다 적어봐야한다. 바라는게 바뀌어도 된다. 바라는것을 이루고 새로운 것을 꿈꿔야한다. 바라는것이 돈이라면, 가만히 생각해봐야 한다. 머리속에서 돈이 사라지고 새로운 꿈이 생길때까지.

 

"아메리카는 끝없는 기회의 나라라는 말은 이제 무한하게 돈을 벌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렸다! 접시닦이에서 시작해 사업주가 되다라는 슬로건이 사실이 아닌 이데올로기라서 슬픈 게 아니다. 욕망할 만한 것이 고작 접시닦다가 사업주로 출세하는 것뿐이라는 게 더 큰 문제다." (399쪽)

 

0) 흠없이 뛰어난 어머니를 = 마리아를 머리속에 그리며 이루어지는 여성숭배는,

1) 모든 여성에게 그것을 강요한다는 뜻에서 억압이다.

2) 마리아가 되지 못한 모든 여성은, 덜떨어진 여성으로 다루어진다는 뜻에서 깔보기다.

3) 여자를 남자와같이 볼수 없다면, 0)과 1)과 2)에 따라서 결국 깔볼수밖에 없다.

4) 남자는 주변의 남자와 비교하는것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여자들은 있을수없는 = 머리속에서 만들어진 여자와 비교되어짐으로써, 이땅위에 있을수 없게된다.

 

가톨릭의 성모는 엄마의 죄없는 모습이며, 죄없는 엄마로부터 위로받는 남자들을 써먹기 위해서 거듭거듭 받들어진다.

 

"이는 특별한 형태의 여성억압이자 특별한 형태의 여성비하다. 과잉 숭배를 통한 억압이다. (중략) 과잉숭배는 여성 의 육화된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달성된다. (중략) 여성에게 헌사를 바치는 지배자 남성에게도 사실은 실제 여성이 필요 없다. 1400년대 이래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완벽한 천상의 여성상 베아트리체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녀는 없어야만 오히려 작동되는 여성상이다.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헌신은 겉으로는 친여성이지만, 본질로는 가톨릭교회의 성모 숭배가 세속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417~8쪽)

 

아무래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는데, 딱 한문장이 빠져있었다.

 

1) 앞에서 다가오는 앞면은 사랑이 아니라 싸움이라는 오래된 경험때문이었다. 여자는 본능으로 앞에서 다가오는 사람을 두려워한다. 연약한 위장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2) 배를 까고 누워도 성교의 자세가 나오지 않아서 남자의 폭력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지나친 주장이다. 항복했고 얼마든지 자세를 바로잡을수 있는데도 폭력을 행사한다고. 그렇다면 항복의 자세가 엎드린 자세라는 말인가.

 

"페렌치는 성교에 폭력이 침입한것이 이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모건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남자가 여자와 정상위로 성교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고 주장한다. 아직까지 여자는 발정기를 주기적으로 겪고 있었지만, 질의 위치가 바뀌어서 후배위로 접근하는 것이 불편해졌다.

 

다른 포유류에게서는 폭력과 결합된 성교가 발견되지 않는다. 다른 동물에게 성교는 짧고 간단하고 쾌락적이다.
사람은 어쩌다 그렇게 쉽고도 간단한 과정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배배 꼬이고 엉망진창인 성교를 하게 되었을까?

 

아마 암컷들이 앞으로 달려드는 수컷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모건의 추측이다. 앞으로 덤벼들다가 결국은 "뱃속 내장을 뽑히는 꼴"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암컷은 저항했지만 수컷들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서 암컷을 바닥에 쓰러뜨리곤 했다. 암컷은 겁에 질려서 항복의 신호를 보내고 복종 의사를 표현하지만 수컷은 놓아주질 않는다. "같은 종에 속하는 개체가 명백하게 항복하고 방어를 멈췄는데도 계속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428쪽)

 

도저히 지겨워서 안되겠다. 439쪽까지 읽고, 3장으로 건너갔다 와야겠다.

 

제3장 군중과 적들

 

갇혀있는것 = 틀에박힌것 = 규칙을 지키는것을 좋아하면서도 억눌린 욕망이 마구 날뛰는것이 허락되는 전쟁. 글쎄. 전쟁은 이런게 아니다. 땅과 돈 따먹기다. 전쟁의 실행자에게는 땅과 돈과 명예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싸움터에 서있는 사람에게는, 삶이 바람앞의 촛불처럼 되면서, 아무것도 막을수없게 된다. 짐승인 그것, 그냥 미쳤다고 보면 된다.

 

"핏줄로 전해지는 짐승의 유산이 아우성치는 한 전쟁은 이어질 것이다. 군인 남성은 전쟁을 바란다. 전쟁만이 허락하는 것이 있다. (중략) 남성이 자신의 낯설고 미개하고, 짐승같은 내면에 집어삼켜지지 않으면서도 다시금 합일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렇다. 오직 전쟁만이 죽어버린 내면을 살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전쟁은 재탄생이다. 그의 죽은 욕망이 군중으로 부활한다. 욕망이 풀려나면 세상에는 새로운 형태의 삶이 생겨난다. 바로 죽음이다." (657쪽)

 

코드화된다는 말은,

 

1) 암호화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잘 보이기 때문이다.

2) 어떤틀로 규격화된다는 말인가? 여성스런 군중으로 코드화된다는 말은, 진압하기 쉽고 가지고 놀수도 있는 군중이라는 말이다.

 

어떤 틀을 뒤집어씌운다고 보는것이 좋다. 뒤집어씌우기는 상황에 따라 마구 바뀐다. 여성스럽다가 짐승같다가 무서운 병같다가 막을수없는 전염병이 되었다가. 군인남성이 생각하고 싶은데로 마구 바뀐다. 코드화는=뒤집어씌우기는 사실을 보지 않으려하고, 사실을 볼 필요도 없다. 군인남성이 지금 느껴지는데로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다. 죽여버리거나 내팽개쳐버리거나와 같이 내맘대로 = 총을가진 권력자인 군인남성이, 맘대로 해도 되는 대상으로 뒤집어씌우기를 하면 된다.

 

"군중은 여성, 짐승, 혹은 성병 등과 여러가지로 결합하며 코드화 된다. 하지만 여러가지 코드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강도가 모두 같은것도 아니다. 여러가지 상황이 다양하게 결합된다. 군인 남성에게 상황이 위협으로 다가올수록 코드화는 더 강렬하게 작용한다.


대도시 환경에서 전무하거나 혹은 미약한 수준으로 무장한 대규모 가두 시위대와 대치하는 상황이라면 군인은 대개 손쉽게 진압할 능력이 있다. 이런 경우 군중은 "여성성"과 결합되어 코드화된다. 여성스런 군중 뒤에는 거세하고 살해하는 남성괴물이 숨어 있다. 여자들이 가하는 위협의 강도는 미미하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664쪽)

 

리비도는 서로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성행위로 나아가는 깊은 사랑이다. 그런데, 이게 과연 리비도와 맞아떨어지는가?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고, 폭력의 기쁨만이 있다. 여성이 들어갈 틈은 없고, 사랑의 마음조차 손사레를 치며 멀리한다. 그래야만 힘센 나를=군인남성을 지킬수 있다고 굳게 믿기때문이다.

 

"과연 이성애 혹은 동성애 개념이 작동할 여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군인 남성이 다람과 맺는 리비도 가득한 사람관계는 오직 정신이 나간 채 황홀경에 빠져서 저지르는 폭력 행위뿐이다. 그것마저 대부분 닫혀있는 남성들 사이에서만 벌어진다. 이런 행동이 벌어지는 기관은 오직 닫혀있는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곳이다. (중략) 여성이건 혹은 남성이건 다른 사람과 몸의 사랑을 나누려는 욕구라는 의미로서의 섹슈얼리티는 이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709쪽)

 

파시즘을 이겨내기 위해 파시즘에 반대하는 것만으로는 논란과 혼란이 커질수 있다. 파시즘이 할수 없는일을 해야한다.

 

1) 파시즘이 계급을 나누고 차별한다면 -> 계급을 없애고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야하고,

2) 파시즘이 여성을 나누려한다면 -> 여성과 함께하는 삶을 마련해야하고,

3) 파시즘이 순수와 통일을 강조하면 -> 서로 다른것과의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줘야하고,

4) 파시즘이 총통을 말한다면 -> 민주를 말하고, 우리의 헌법을 말할수 있어야 한다.

 

"오르가슴을 한 사람에게 주어진 감각이라고만 이해하면 안된다. 이 개념은 해체되어야 한다. 오르가슴은 다람을 경험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을 다양하게 경험하면서도 똑같은 지위로 대하는 경험이야말로 우리를 비파시스트로 해방시켜줄 수 있다. 안티파시즘은 단지 정치입장일 뿐이며, 삶에서 파시즘을 제거하는 의미는 그리 크지 않다." (765쪽)

 

1) 병사들의 힘있어 보이는 행진에 = 싸움이 벌어지면 쓸모없는 일에 힘을 얻고

2) 앞뒤 따질것없이 내생각과 같은 생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있다.

 

그들은 모두 쉽게 동지가 되어버리는데, 우리곁에 늘 있을만큼 있다. 깃발-계몽-단결이라는 거듭되는 메시지로 이루어지는 히틀러의 연설은 함께할수 있는것들을 비벼넣는다. 그리고 눈빛 = 눈빛을 마주친듯한 경험 = 착각. 뭘 이렇게 쓰고있는지 모르겠는데, 끊임없이 쓰고 있고 = 참으며 읽고있다. 아, 시간이 아깝다.

 

"대부분의 증언에서 총통이 실제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저 깊은 감화를 받을 뿐이다. 드디어  빛을 만난다 : 미칠 듯한 열광에 사로잡힌다. 이들은 모두 연설이 자신의 감정에 끼친 영향만을 증언한다. 가장 중요한 경험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청중과 하나된 듯한 느낌이다. 이들은 고양된다. 행복감과 완결감을 느낀다. 연설자가 외치는 말은 이미 다 안다. 모두 오랫동안 남몰래 품어온 생각이다.


모두의 뇌리에 자주 떠올랐던 사상이다. 차마 입밖에 내어 말할 수 없었을 뿐이다. 비로소 내 마음을 정확하게 알아준다. 완전히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략) 삶에 다시 의미가 생겼다." (785쪽)

 

관상이든 눈빛이든 사주든 모두 같은데 =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데도, 무엇을 말해준다고 믿는다.  

 

"같은 편으로 태어난 자들을 알아보려면 눈에 참된 광채가 담겼는지 보라" (805쪽)

 

제4장 남성육체와 백색테러

 

틀을 갖고 읽어야 하는데, 그럴 여유도 없고, 뭘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100쪽에 이르는 글쓴이의 후기나 읽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마지막에 이르렀으니, 조금만 더 읽고.

 

젖니를 뽑아내어 어른을 만든다. 기괴하다. 그런데, 그 어른이라는 사람의 기쁨은 명령받은대로 할수있는 능력을 갖춘것이란다.

 

"이빨 요정이라 하는 치과의사가 활짝 벌린 신참의 입에 집게를 들이민다. 불쌍한 녀석들의 입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젖니를 차례로 억센 솜씨로 몽땅 뽑아낸다. (중략)

가끔은 자유롭고 싶은 가당찮은 욕망이 솟구치지만 옳은 방향으로 뜻을 세우면 분쇄할수 있다. 명령받은대로 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멋대로 방종하는 즐거움보다 두배는 더 즐거운 일이다.

 

(중략)군인 남성은 심지어 가족의 결속에서도 풀려났다. 이제 그는 다른 형식으로 기능한다. 어머니가 다정함을 퍼붓는 것은 딱 질색이다. 잘로몬은 새로운 기계의 일부분이다. 뭔가 다른 종류의 쾌락이 흐르는 기계다. (중략) 스스로의 기쁨을 추구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기쁨을 준다." (824~6쪽)

 

군대가 만들어내는 잉여가치가 나라다. 군대라는 기계는 독립할수 없다. 나라에, 마치 탯줄처럼 연결되어 에너지를 보급받아야한다. 그러니 군대는 국민의 군대가 아니라 나라의 군대가 될 위험에 빠져있다. 국민의 군대가 되려면 외줄타기를 해야한다.

 

군대기계와 같은 나라. 완벽한 나라.

 

1) 자연상태가 아니라 기계인 나라

2) 사회계약이 아니라 나라의 강제가 먹히는 나라

3)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순종이 아름다움인 나라 (833쪽)

 

[ 끝으로 덧붙여_초판 후기 ]

 

아들이 대학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으로 마저 읽는다.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다시 뒤로 왔다.

 

사람의 욕망을 분석틀로 삼아 파시즘을 분석하려고 한다. 이게 될까? 욕망은 들쑥날쑥하다. 있던것도 없어지고 없던것도 나타난다. 폭력으로 사랑받는 파시즘의 매력. 그렇다면 어떤 많은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 그렇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모두 파시즘을 지지했을까, 바이마르공화국에서? 공화정과 민주정이 넘치는 시대에? 다.

 

"(파시즘 분석틀인) 정치우선론과 경제우선론 모두가 놓치고 있는 세번째 근본측면이 있다. 바로 역사과정에서 행동하는 사람의 욕망과 생명력이다. 본연구는 바로 이점을 다루려고 한다. (중략) 본 연구는 파시즘 권력 장악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중략) 1933년에 빌헬름 라이히는 왜 그렇게 많은 대중이 독일공산당이 아니라 나치당에 표를 던졌는지 묻는다. 스스로의 경제이해관계를 위해 이성으로 통찰했더라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파시즘 추종자들이 비이성이라는 암묵 혹은 대놓고 비난을 하는 것은 이 연구의 의도가 아니다

(중략) 특징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모종의 이론의 기대에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현상이다. 현상이 뜻하는 바는 파시즘이 엄청난 매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돌격대가 되고 국가사회주의자가 되고 나치당 추종자가 되는 것에서 쾌락을 느꼈다. 이해관계 따위는 상관없었다. 열광에는 냉정한 계산이 필요 없다. 파시즘의 매력 그 자체가 문제다. 파시즘의 매력은 애초부터 폭력에 이끌리는 매력이다

(중략) 애초부터 파시스트가 톡까놓고 표현했던 것은 바로 폭력 충동이었다. 1933년 파시스트가 권력 장악에 성공한 결과로 폭력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폭력은 파시즘 승리의 전제 조건이었다.  스스로 벌인 쾌락의 폭력축제, 즐거움을 주는 폭력행사 그 자체를 이해하고 싶었다.

 

특정 파괴성이 특정 남성에게 안겨주는 심리 생리학의 이득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1172~4쪽)

 

누군가=무언가를 미워하고 폭력을 사랑하는 남성들은, 언제든 파시즘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들은 또한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가 아픈게 가슴아프다.

그들의 글에서 그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 그게 기본감정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군인남성)문학을 의도로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설령 작가가 분명한 의도를 갖고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파시즘 문학도 마찬가지다. 다른 문학이 그렇듯 파시즘 문학도 단순한 프로파간다 기능으로 환원될 수 없다. 파시즘 문학의 실체는 특정 신념을 유포하려는 프로파간다 생산이 아니었다. 오히려 파시스트의 증상 보고서에 가깝다. 글쓴이들이 겪었던 비정상 상태와 욕망을 설명한 환자기록이다. (중략)


파시즘 문학이 증상보고서라는 표현은 임의의 비유가 아니다. (중략) 국가의- 보수의-파시즘의 문학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삶을 질병 상태라고 이해하며 표현했다. 군인남성작가들은 병든 독일을 염려했으며, 곧 다가올 제국에서 건강을 회복하길 갈망했다.

본 연구는 이러한 기본감정을 인정하고 현실로 받아들인다. 섣부른 비판 개념을 덮어씌우지 않으려 한다. (중략) 문학을 현실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글에 담긴 내용을 말한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아니다. 


말한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정신분석학이 특히 유용하게 쓰인다. 말한 내용의 정서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 다. 말한 내용은 역사과정의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중략) 본 연구의 목적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조작을 폭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군인남성들이 현실과 맺는 특정한 관계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글쓰기가 지닌 특정한 방법에 접근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1187~8쪽)

 

[ 남성판타지 후기 2018/19 ]

 

ㅇ"앞으로 몇년을 쏟아부어서 대학 교직으로 이어지지도 않을 박사논문을 써야 할까? (중략) 그저 대학 도서관에 소장될 학위 논문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글에 삶을 담아 대중에게 선보일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내 삶에서 비롯된 말투와 글감을 학위 논문 껍데기에 담아낸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고? 느슨하고, 학술같지않다라는 평가를 듣는 『남성 판타지』의 글쓰기가 어쩌다가 즉흥으로 그리된 것이 아님을 이해해주었으면 해서다. 수십 년간 쌓여온 말글살이가 당대의 삶 그리고 사람관계와 결합된 결과였던 것이다.

 

(중략) 내책은 비학술의 언어방식 때문에 사랑받았고 또 욕을 먹었다." (1200쪽) K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