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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과학 잔혹사_샘 킨_이충호 옮김_해나무_24년 5월 1판 2쇄 ] 260502

정우현의 '나쁜 유전자'를 읽는데, 이 책을 우연히 발견했다. 끝까지 읽어낼수 있을지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해보자.

 

미치광이 세마학자scientist 클레오파트라 이야기로 글을 연다. 태아의 성별이 가능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가, 고통이 덜한 죽음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기 위해 실험 조사를 했다고 한다. 믿기지 않는다. 이 기록은 '탈무드'에만 있다고 하니 더욱 믿을수가 없다.

 

서론

 

샘킨은 나쁜 세마가 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날때부터 나쁜게 아니고, 조금씩 나빠지면서 매우 나빠진다. 

 

"악당 세마학자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나온 아테나처럼 완성된 형태로 출현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대개는 도덕의식이 서서히 마비돼가며, 고통스러운 걸음을 걷다가 어긋난 발걸음을 내디딘다. 이 세마학자들이 한 일과 왜 그들이 자신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는지를 이해하면, 현대 세마연구에서도 그와 비슷하게 의심스러운 사고를 간파할 수 있고, 심지어는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중략) 세마의 발전을 위해 도덕을 희생할 경우, 실제로는 둘다 잃는 경우가 많다. (중략) 데이터를 얻기 위해 =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이기 위해 비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오직 세마학자뿐이다." (15/18쪽)

 

1장 해적질

표본수집일까, 식민지 약탈일까

 

마야문명은 기원전 2천년 즈음, 고조선과 같은 시기에 멕시코 유카탄 반도와 중앙아메리카의 도시국가로 나타났다. 옥수수와 고추를 길렀으며, 0을 쓸줄 알았다. 천문학을 연구해 달력을 만들고, 기하학을 연구해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마야문명은 4세기 즈음에 20진법을 쓴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위치기수법을 사용했고, 필요한 곳에 조개껍질 모양의 0을 사용했다고 비문과 달력에 나타나 있다고 한다.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던 아즈텍(멕시코시티)과 잉카(페루 쿠스코)는 13, 4세기에 나타난 문명이다.

 

카페체는 마야어 아 킴 페취에서 나온 땅이름으로 뱀이 사는 물웅덩이다.
* 아 : ~의 / 킴 : 뱀 / 페취 : 물웅덩이, 진흙탕을 말한다.

 

로그우드는 콩과식물로, 로그우드의 펄프는 마야문명에서 오래도록 짙은빛의 염료로 써왔는데, 스페인의 침략을 받아 유럽에 전해져 가죽의 염료로 사용되었다. 인디고 역시 콩과식물에서 얻은 청색의 염료다.

 

 

 

마마니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인류에게 기나나무를 선물해 말라리아를 이기게 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그는 나라를 배신하고 죽어야 마땅한 죄를 지은것일까? 글쎄, 광물들은 어쩔수 없지만 식물은 골고루 나눠가지고 키우면 좋지 않을까. 많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기나나무를 빼앗겨 가난하게 된것은 가슴아픈 일이다.

 

지금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약 천억명이 살아왔다고 미말한다. 아메리카에서의 사룸도둑질은, 기나나무-고무나무-홍차로 이어지고, 아시아에서 대량 재배하여 유럽으로 가져갔다. 페리윙클(항암제/vinca)도.

 

이 장은 잔혹한 세마학자를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유럽의 식민지 노략질을 매우 쎄게 비판하고 있다.

 

"모두가 탐낸 자원 중 하나는 기나나무의 계피색 껍질에서 얻는 약인 키니네(퀴닌)였다.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물과 함께 마시면 (중략) 말라리아를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지금까지 살았던 1080억 명의 사람들 중 약 절반이 모기가 매개한 질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말라리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 불행하게도 말라리아는 전 세계의 재앙인 반면, 기나나무는 남아메리카에서만 자랐다.

 

유럽 국가들은 기나나무 씨를 훔치기 위해 식물학자로 위장한 비밀 요원들을 남아메리카로 보내기 시작했다. 이 공작은 결국 헛수고로 끝났다. 키니네를 많이 함유해 가장 소중하게 여긴 종은 안데스산맥의 아주 가파른 산비탈에서 자랐는데, 그곳은 1년 중 3/4은 짙은 안개에 싸여 있었다. (중략)

 

마침내 기나나무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 사람은 볼리비아의 인디언 마누엘 마마니였다. (중략) 마마니는 1865년에 씨를 몇 자루 수확한 뒤에 얼어붙은 안데스산맥 고원지대를 넘어 약 1600km를 걸어 그 일을 의뢰한 영국인에게 갖다주었다. 그 대가로 마마니는 500달러와 노새 두 마리, 당나귀 네 마리, 총 한 정을 받았다. 그리고 궐석 재판에서 조국을 배신한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탐욕스러운 그 영국인은 나중에 씨를 더 구해오라고 마마니를 다시 정글로 보냈다. 마마니는 체포되어 밀수 행위로 기소되었다. 감옥으로 끌려간 그는 물과 음식도 제공받지 못하고 심한 구타를 당했다. 2주일 뒤에 풀려나긴 했지만, 심한 신체 손상을 입어 똑바로 서지조차 못했다. 당나귀는 몰수되었고, 마마니는 며칠 뒤에 죽었다.

 

(중략) 아시아의 기나나무 조림지는 남아메리카의 토착 기나나무산업을 위축시켰고, 결국에는 완전히 망하게 해 그곳 주민들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45~6쪽)

 

튜더왕조의 엘리자베스는, 프라이버티어들의 노략질을 허락했다. 그런 노략질들을 바탕으로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너뜨린다(1588년/임란때 이순신이 왜놈들을 바다에서 물리친것과 비슷한 시기다). 튜더 왕조의 앤여왕(1702~14)은 스페인-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같은 전략을 사용한다. 앤은 승리하고 지브롤터를 얻지만,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어서 독일의 조지 1세가 하노버왕조를 열어 오늘에 이른다.

 

여러번 프라이버티어 선장으로 임명된 댐피어는 고아출신 해적 세마학자였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력이었다. 다윈의 비글호 항해에도 큰 영향을 미친것으로 알려졌다.

 

"댐피어는 여전히 훌륭한 항해사 (중략) 선원들이 괴혈병으로 쓰러지자, 댐피어는 배를 칠레 앞바다의 후안페르난데스 제도로 향하게 했다. 섬에 접근할 때, 그들은 해변에서 두발로 걸어다니는 털북숭이 짐승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 짐승의 정체는 알렉산더 셀커크라는 선원이었는데, 조난을 당해 (중략) 4년 4개월 4일 동안 그섬에서 염소를 사냥하고, 야생 양배추를 씹어먹고 (중략) 댐피어 일행은 그를 구조해 영국으로 데려갔다.

 

대니얼 디포는 그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로빈슨 크루소』를 썼다. (중략) 조너선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 (49쪽)

 

2장 노예무역

흰개미집 연구자의 자금조달방법

 

노예무역을 바탕으로 한 삼각무역이 세마연구의 보급기지였다.

 

"말을 잘 듣지않는 노예도 상어밥으로 던져지거나 혹은 더 심한 처벌을 받았다. 1720년대에 노예들의 선상 반란을 선동한 두 사람에게 세 번째 사람을 죽이고 그의 심장과 간을 먹게 했다.


그렇다면 왜 세마학자들은 이 끔찍한 여행에 동참했을까? 그것은 바로 접근성 때문이었다. (중략)

 

삼각무역에 종사하는 배편을 제외하면, 아프리카나 아메리카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은 전무했다. 그래서 연구를 위해 이곳들을 꼭 방문해야 하는 세마학자는 노예선을 타고 갈 수밖에 없었다. 현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음식과 보급품, 현지 운송, 우편 등을 노예상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중략) 노예선 선원들에게 채집을 대신 해달라고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배에 승선한 외과의는 세마 배경이 어느 정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선원들이 노예를 팔고 보급품을 구입하는 일을 하는 동안 해변에서 자유시간을 많이 누렸기 때문이다." (61쪽)

 

* 삼각무역 : 총과 생산 제품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싣고 가, 거기서 노예를 싣고 아메리카로 간 뒤, 염료와 의약품 원료와 설탕을 유럽으로 실어가던 형태의 무역 

 

누군가에게 천만원을 후원하고 나중에 여건이 되면 천만원을 돌려받는다. 괜찮은 일이다. 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원을 받은 사람은, 돈만 있으면 뭔가 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어려운 조건이 붙어있기는 하다. 스미스먼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후원금도 하늘로 날아갈수 있었다. 그것까지 생각하니, 투자가 아닌것도 아니었다.

 

"스미스먼의 주요 후원자 세 사람은 이 여행을 후원하기 위해 각자 100파운드(오늘날의 가치로는 1만 2000달러)를 내놓았다. 그 대가로 그들은 스미스먼이 보내는 표본들 중에서 100파운드 가치에 해당하는 것들을 선택하기로 했다. 남은 표본은 스미스먼이 따로 팔아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세마학자가 되길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같은 계약은 흔했다.

 

8년 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이론의 공동 발견자인 월리스는 말레이시아에서 이와 비슷한 채집 활동을 했다 (중략) 빈손이 된 후원자들은 스미스먼에게 투자한게 잘못된 판단이 아닐까하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63/78쪽)

 

스미스먼은 자유민의 안내와 지원을 받았고, 핼리-다윈-지질학자들-영국왕립학회도 노예무역의 네트웤을 이용해서 그들의 재정과 연구를 이

어갈수 있었다. 그들이 알려준것과 도와준것을 잘 나누어 연구를 이어나갔어야 옳았지만, 야만의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야만의 역사에 대해 모두 세마학자들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은 지나치다.

 

"혜성으로 유명한 에드먼드 핼리는 여러 식민지의 노예 상인들에게 달과 별에 관한 데이터를 요청했고, 지질학자들은 그런 장소들에서 암석과 광물을 수집했다. 왕립학회는 관측 자료를 얻기 위한 설문지를 노예항구들로 보냈고, 또 노예무역회사들에 투자하여 많은 수익을 얻었다.


천체역학처럼 고상한 분야도 노예무역의 혜택을 받았다. 뉴턴은 대체로 집에서 혼자 연구한 괴짜였다. 하지만 유명한 중력 법칙이 포함된 『프린키피아』를 쓰면서 뉴턴은 놀라운 예측을 공개했는데, 밀물과 썰물이 달이 지구를 끌어당 기는 중력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를 입증하려면 전 세계 각지에서 밀물과 썰물이 일어나는 시간과 해수면 높이에 관한 데이터가 필요했는데, 한 중요한 데이터 집단은 프랑스인이 통제하고 있던 마르티니크섬의 노예무역항구들에서 나왔다." (70~1쪽)

 

73쪽

 

언제 멈춰야할까. 나를 죽이지않는 선에서 멈춰야 한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인가? 야만스러운 마음이 일어나기 전에. 내 욕망을 채우기위해 사람이든 사룸이든 무엇인가를 야만스럽게 희생시켜야 할때. 어제 스페인의 모루차를 봤다. 덩치가 커지는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듯한 이 소. 거세된채 4년에서 8년을 키워 죽인다고 한다. 끔찍하다.

 

"1773년 중엽에 이르러 스미스먼 자신도 노예무역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중략) 시에라리온에서 노예는 일종의 돈, 즉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있는 한 가지 '상품'이었다. 그렇게해서 얻는 것에는 안내인을 얻기 위해 추장에게 지불하는데 필요한 담배와 럼주같은 상품도 포함되었다. 현지 안내인의 도움이 없이는 탐사를 진행할 수 없었는데, 그런 상황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중략) 노예를 팔기 시작했다. (중략) '노예매매에 대한 망설임이 사라졌다'라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경멸하던 제도의 일부가 되었다." (79쪽)

 

숨겨진 삶에서 참다운 삶이 드러난다. 홀로있을때 삼가기 어려운 것처럼 먼곳에서 맨앞에서 어떤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살펴봐야한다. 야만에서 벗어나 계몽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모루차와 같은 거대하고 온순한 소들도 살아야겠지만, 수백km를 이동하며 살아야하는 버팔로들도 살아야한다. 그러기위해서는 사피엔스들의 아량이 필요하다, 슬프게도.

 

스미스먼의 계획은 그의 죽음으로 실패했지만, 시에라리온에 프리타운은 세워졌다.

 

"스미스먼은 시에라리온에 흑인 자유인을 위한 농업식민지를 세우려고 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다. (중략) 이 식민지에는 아메리카 독립전쟁때 영국 편에 서서 싸운 노예들도 포함시킬 예정이었다. 수백 명의 남녀가 참여하겠다고 서명했는데, 그중에는 단순히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 곳에서 살길 원한 혼혈부부 수십쌍도 있었다.

 

(중략 / 스미스먼이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바람에 이들의 정착을 돕지 못하자) 석달 동안 그중 3분의 1이 죽었다. 결국 현지 추장이 남은 사람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판잣집을 불태움으로써 헨리 스미스먼이 이루고 싶었던 거대한 속죄의 꿈은 재가 되고 말았다.


(중략) 1786년 초에 스미스먼은 시에라리온 식민지에 대한 자신의 원대한 구상을 소책자로 썼는데, 스웨덴의 광산공학자 칼 바스트룀과 식물학자 안데르스 스파르만이 그것을 읽고 (감동을 받아 여행을 하던중 / 중략)  프랑스인이 노예를 수출하던 세네갈의 항구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목격한 참상에 경악했다

 

(중략)  이들은 노예를 값싸게 확보하기 위해 프랑스인이 펼치는 악마같은 술책도 폭로했다. (중략) 두 경쟁 부족에게 무기를 팔고는 양자사이에 전쟁을 부추겼다. 결국 전쟁 끝에 한 부족이 다른 부족사람들을 포로로 잡으면, 프랑스인이 재빨리와서 포로를 사갔다. 

 

(중략) 노예 제도를 대놓고 비난하길 망설였던 사람들도 갑자기 노예제도 폐지 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중략) 아프리카인이 큰 역할을 했다. 올라우다 에퀴아노와 아프리카의 아들들 Sons of Africa(노예에서 해방되어 런던에서 살면서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노력한 아프리카인- 옮긴이) 같은 해방노예들이 생생한 증언을 했고, 1790년대에 아이티에서 결국 성공한 노예 봉기의 여파로 영국 국민은 자국 정부가 도대체 무엇을 지지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오랫동안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외로운 싸움을 벌여온 퀘이커교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85~8쪽)


3장 시신도굴

해부학자들의 위험한 거래td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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