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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내이름은 빨강_오르한 파묵_이난아 옮김_민음사_2018년 11월 2판 18쇄 ] 어둠과 어둠 사이, 눈깜사이의 빛이 삶이다_250721

이란고원을 중심에 둔 페르시아의 역사를 간단하게 줄이면, 키다리아저씨의 파산이다.

 

- 키다리 : 키루스대왕과 다리우스의 시대(bc550~bc330)를 아케메네스 왕조라고 한다. 그리스 점령에 실패한다.

- 아저씨 : 알렉산더대왕과 셀레우코스 왕조의 헬레니즘 시대(bc330~bc250)

- 파산 : 파르티아 왕국(bc247~224) 유목민의 왕국으로 동서중계무역으로 번창

- 파산 : 사산조 페르시아(224~651) 조로아스터교가 국교가 되었다.

- 이다 : 이슬람왕조의 시대로 무함마드-칼리프-우마이야왕조-압바스왕조-셀주크투르크-일칸국(13, 4세기)-사파위왕조와 오스만투르크와 백양왕조와 티무르제국(->인도 무굴제국)-카자르왕조-팔레비왕조-이란까지 이어지고 있다.

[ 무리한 우버 세일로 파스칼이 빨리갔다 ]

 

몽골제국의 일칸국이 힘이 빠지면서, 수니파 오스만투르크는 터키의 아나톨리아에서 1299년에 일어났다.
이때 페르시아에는 시아파 사파위왕조가 세력을 만들고 있었다.  

이 소설은 오스만과 사파위가 대립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사파위왕조는 큰 싸움에서는 졌지만,

오스만이 유럽의 베네치아-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딪히며 힘을 쓰고 있는 동안에

게릴라전으로 페르시아를 지배하며 맞섰다.

 

수니파와 시아파의 싸움이,

큰 세력으로 모아졌던 시기로 보여진다.

 

1591년의 겨울이 소설의 시작이고,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시작부터 흐르는 피를 서늘하게 만든다. 죽은 사람이 하늘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이야기. 커미=커다란 미리내=universe는 짙은 어둠이고, 별빛은 드물다. 우리가 사는 빛은, 지구가 햇님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누리는 기쁨이다. 눈깜사이다=눈깜짝할 사이다. 나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을까?

 

"나는 끝없는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잠시 빛을 발하며 살았을 뿐이다." (1권 14쪽)

 

제일 먼저 머리속에 남길 글은 물론 이것이 아니다. 더 좋은 글들이 있지만, 웃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고는 이 어두운 상상이 어느 밤인가 아라비아에서 읽었던 알가잘리의 『종교학의 부활』에 언급된 '결혼의 해악' 부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을 때, 같은 페이지에 결혼의 장점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적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 많은 장점들 중 오직 두 가지만 생각났다.

 

하나는 "남자가 결혼을 하면 집안일을 다른 사람이 정돈해 준다."였지만 내 상상 속의 계단이 있는 집은 전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위를 하거나, 더 큰 죄책감에 짓눌리면서 창녀를 찾아 어두운 뒷골목의 뚜쟁이를 따라가는 일에서 해방된다.”였다." (1권 100쪽)

 

웃기지만 그럴듯한 말들이=말의 놀이가 재미있다.

 

"예술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자 눈이 멀어버려서 반은 성자요 반은 노망든 노인이 되었다

(중략) 아랍의 사막에서는 눈이 아야 소피아 사원에 내리듯이 그냥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추억위로 내린다

(중략) 티플리스의 성채에 눈이 내릴때면 빨래하는 여인들이 꽃빛깔의 노래를 (부른다)" (1권 103쪽)

 

스타일과 서명, 화가의 시간과 신의 시간, 눈멂. 이 세가지가 화가의 윤리라고?

 

1) 스타일과 서명 : 그림에 들어있는 뜻이 중요하므로 대가의 전통대로 그려야한다. 서명과 화풍은 그리미=그림을 그리는 사람=painter를 드러내고, 뜻이 달라지므로 완벽하지 않게 된다.

2) 시간 : 글씨는 사라지고 그림만 남는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페르시아와 티무르제국, 인도의 무굴제국에서 세밀화가 전성기를 누렸다.

 

훌라구칸에게 바그다드에서 죽임을 당한 마지막 칼리프는 압바스 왕조의 빌라다.

 

책은 사라지지만 그림은 남는다고 생각했다. 눈으로 들어오는 감각이 쎄다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고 끝이 없을 것으로 믿는 것도 어리석다.

 

셰퀴레의 둘째는 오르한이고, 이 소설을 쓴 사람도 오르한이다.

오르한은 투르크어에서 나온 말로 오르(훌륭한, 군대, burg) + 한(칸, 우두머리)이다.

 

그림을 다루는 이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알라의 말씀=성경 또는 코란은 글로 되어있다. 글은 지식이며 정보인데, 글을 잘 다루면 좋은 나라가 될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맑은 믿음이었다. 그것이 깨어진 것이 몽골과의 싸움이었다. 싸움이라기 보다는 힘없이 큰물에 몽땅 휩쓸려버렸다. 말씀과 글=지식과 정보의 시대는 힘의 시대에 자리를 내어주고, 글이 녹아 핏물이 되어 흐른다. 산사람은 살아야한다. 무엇으로 힘을 이겨내야할까? 본것 그대로를 남기는 일=글이 아닌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부터다.

 

"(코란을 쓰는 필경사 이븐 샤키르) 시체썩는 냄새와 죽음의 절규속에서, 책에서 번져나온 잉크때문에 붉게물든 티그리스강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토록 아름다운 글씨로 쓰인 자신의 책들이 이 처참한 학살과 파괴를 제지하는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글씨를 쓰지 않겠노라 맹세했다." (1권 130쪽)

 

바다로 흐르지 못하는강. 사막으로 흩어져 버리는 강이 있다. 사마르칸트를 지나는 자라프샨강이다. 아무다리야강의 지류로서 아랄해에 이르렀던 때가 있었지만, 농업의 발달로 끊겨버리고 만다. 바다에 이르지 못하지만, 아직도 파미르의 얼눈=얼음눈=glacier이 녹아 흐르고 있다.

 

책을 읽어나가기가 어렵다. 어제도 4시간 오늘도 2시간을 읽고 있는데, 겨우 35쪽을 넘기고 있다.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문화를 알지못하기 때문에, 꽉 잠겨있는 목으로 말하는듯하다. 답답함을 풀어나가야 했다. 재채기를 하면 시원하듯이, 답답함이 한가닥씩 풀릴수록 기쁨이 밀려온다.

 

중앙아시아의 지리와 역사를 간단하게 잘 설명해준 영상. 윤성학은 흉노의 뿌리가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이고, 스키타이가 천산북로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 한나라 이후 중국과 맞장을 뜬 흉노제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흉노는 다시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가 로마를 끝장낸 훈족이 된다.  이 모든 일이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문화의 전파이며, 유목민들의 피섞기=mixed blood가 이루어진 모습이다.

 

아주 오랜 옛날에 한족과 크로아티아인의 교류가 있었을까? 있었다. 오르한 파묵이 이렇게 쓰고 있다.

 

"화가는 자신이 100년동안 그려왔던, 가늘고 위로 올라간 눈초리와 뽀족한 턱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모델을 만나게 되었다. (중략) 중국인과 크로아티아인의 혼혈인 혈기왕성한 16살 소년이었다. 이 소년을 보자마자 당시 119살이었던 그는 그자리에서 사랑에 빠져버렸다." (134~5쪽)  https://www.youtube.com/watch?v=zcJ1M9QnGt0

 

 

 

사랑이라.

 

사랑을 위해서, 책을 읽고 생각하고 뛰놀고, 돈을 벌고 명예와 권력을 챙긴다. 그러다보면 사랑은 사라지고, 권력과 명예와 돈만이 남는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없는 사랑도 만들어진다고 믿게된다. 그러면 된다.

 

아닌가?

아니다.

 

알겠는가?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1권 150쪽)

 

이 이야기를 쪼그라든 가슴으로 읽는 까닭이 뭘까?

 

1) 죽은 사람의 이야기 : 모든 것을 알고있는 죽은사람이 내 바로옆에 있기 때문이다.

2) 증거가 남는 편지, 그것도 여러 사람을 거쳐야 옮겨지는 편지 : 지켜지기 어려운 비밀을 바라봐야하기 때문이다.

3)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아이들 : 막을수없는 아이들의 생각과 입을 통해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4) 금지된 사랑으로 빠져드는, 낭떠러지에 서있는 아름다운 여자 : 위험한 아름다운 여자 때문이다.

5) 끊임없이 이어지는 거짓말들 : 거짓말은 두려움을 낳는다. 

 

لا إله إلا الله 라 일라하 일라 알라 -> 라 일라하 일라라흐 ; 알라 이외에 신은 없다.

 

긴글에서 무엇을 느끼기는 하는데, 뚜렷하지가 않다. 몸을 떠난 영혼은 자유롭다. 이글은 귀에 쏙 들어온다.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은 없고 몸만이 있을때 와아하다고(?) 무슨 뜻인가. 왜 영혼은 새와 같은가. 그저 날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땅에 묶여있지않다. 좋다. 몸은 왜 영혼을 거부할까? 몸이 이룰수 없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믿는 사람의 영혼은 하늘나라의 나무를 먹는 한마리 새다. (중략) 영혼은 새가 모이는 곳에 있다. (중략) 죽은 사람들의 왕국에서 진정한 와아=happiness는 몸이 없는 영혼이라면, 산사람들의 영토에서 가장 큰 와아는 영혼없는 몸이라는 사실은 그 누구도 죽은 다음이 아니면 알수가 없다." (2권 56~7쪽)

 

누구나 그렇다. 그러나,

앞으로 남은 짧은 더위는,
지나온 긴 시간과 같지 않기를.

 

"앞으로 남은 짧은 인생이 지나온 긴시간과 똑같기를 원한다. (중략 / 커참=커다란 참=truth은)

 

1. 마음속깊이 좋아할만한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2. 우리가 사람들을 바보취급하는 까닭은 (중략) 사람들 대부분이 바보이기 때문이다." (2권 58~9쪽)

 

더러움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 손을 씻는 일부터, 모든일이 고양이가 하는일과 같다.

 

"고양이도 우리처럼 자신의 더러움때문에 무척 바빴다." (2권 81쪽)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는 느낌이다. 시에 대한 이야기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넘치는 것들로부터 뭔가를 잡아야하는데, 잡히지는 않는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기분도 사라져버렸다. 뜻이 있을듯한 글은, 악마가 좋아하는 것을 늘어놓은 부분이다. 악마가 생각하기와 참는것을 좋아한단다. 이상하다? 아닌데.

 

이야기는 끝나가는데, 지루하기 그지없다. 심지어는 그만 읽을까 싶기도 하다. 참아야지.

 

이야기의 주제를 좁혀보면,

 

"사물이 신의 마음속의 중요성을 따르지 않고,

  우리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졌다." (2권, 317쪽)

 

원근법과 초상화라는 유럽화풍이 세밀화에 침투되어,
세밀화가 그려온, 누군지 모를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로 이어질지도 모를 실제인물의 초상화를 그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 사람들은 = 새로운 화풍을 만들려는 사람들은,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새로움을 거부하고,

그러면서 그림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는, 

낡은 생각의 사람을 죽인다.

 

이야기 앞부분에 흐르던 엄청난 긴장과 기대는, 가운데 부분에서 느슨해져버렀다.

도대체 왜 사람을 죽이는걸까?

 

엘레강스를 죽인 이유는, 

변화를 막으려 했기 때문이고,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해치려했기 때문이다.

 

에니시테를 죽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게 복잡하다.

에니시테는 변화를 일으키려한다. 그러나 주저한다.

수백년동안 세뇌된 그의 마음은, 변화를 죄라고 받아들이며 참회하려 한다.

 

게다가 그림이라는 것이 = 화풍이라는 것이 = 화가의 이름이라는 것이

영원할수 없는 = 덧없는 것이라고 믿는다.

뛰어난 그림이나 화가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수 없다는 것이다.

 

온삶을 받친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그 태도,
그 태도는 결과 변화에 대한 죄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결국 변화를 거부하는 것과 다름아니다.

 

그래서 그는, 에니시테를 죽일수밖에 없었다.

변화는 일어나야 하고,

그런 변화를 담은 책과 그림과 위대한 화가는 역사에 기록되어지고, 보존되기를 그는 바랬다.

 

그렇지만, 그런 노력으로도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고,

세밀화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책은 영원히 남아.

 

(중략) 눈으로 볼수 있는 모든것을 눈이 보는것처럼 그리니까. 그들은 그들이 보는것을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보았던 것을 그리지. (중략) 이성의 눈에 비친것과는 다르게 실제의 눈에 비친대로, 새로운 스타일로 사람을 그리는 기회를 얻게 되는걸세. (중략) 그림을 전혀 모르는 멍청이 재단사조차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겠지.

 

(중략) 우리는 못해 (중략) 자네가 빨간색으로 칠한, 사랑과 죽음의 그림들, 이 모든것이 결국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걸세." (1권 304~8쪽).

 

이글의 제목은 왜 '빨강'일까?

단서를 찾을수가 없다. 1권의 한장을 빨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1) 빨강은, 그림이든 현실이든 어디에나 있다.

2) 빨강을 보지않고도 설명할수 있는가? 빨강에 대해 말하는데, 빨강같지가 않다.

3) 빨강은 그렇다치고, 색은 그러면 무엇인가?

4) 보이는 것과 보이지않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보이는 것을, 보이지않는 사람에게 설명할수 있을까? 생김새와 길이, 무게는 설명할수 있다. 그런데, 색을 어떻게 설명할수 있을까? 생김새, 길이, 무게와 색은 어떻게 다를까? 생김새와 길이, 무게는 빛이 없어도 되는,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알수 있다. 비교할수 있다. 그러나 색은, 보지않고는 말할수 없다.

 

신은 보이지않는데도 말할수 있다. 그것은, 원래부터 신은 사람이 상상해서 만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색은 보이는것을 이름지었다. 이름이 나중에 붙었으니, 말로만 설명하기가 어렵다.

빨강은 파장이 길어서 뜨겁지않고 따뜻하다.

 

파랑색은 시원하다. 실제로 파란빛은 파장이 짧아서 빨강보다 뜨겁다. 그런데 어떻게 시원한 자유의 색이 되었을까? 파랑은 자유를 상징하는 색이고, 십자군으로 지친 병사들을 위로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색이다.

 

빨강과 파랑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 색에는 이르지 못한다. 느낌을 전할뿐이다. 색의 느낌은 지난 역사를 반영한다.

붉은피의 역사는 끔찍하고 뜨겁다.

푸르른 자유의 역사는 상쾌하다.

 

결국 뻔한 풀이로 돌아올수밖에 없다.

 

빨강은 죽음이다.

엘레강스의 죽음이고, 세밀화가들의 죽음이며, 세밀화의 죽음이다.

화가의 죽음은, 빨강색을 뒤집어쓴다.

그리고 자유의 죽음이다. 

 

'내이름은 빨강'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다.

눈멂을 거부하고 눈을 뜨고 그림을 그리려했지만,
신의 입김이 너무 쎄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지 못했다.

세밀화가들은,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나의 초상화가 그려지길 바랐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제대로 그일을 할수 없다는걸 알고 있었죠.

  (중략) 와아=happiness의 그림은 절대로 그려질수 없다" (2권 35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