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헨바흐의 책을 끝까지 다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 일단 많은 책을 읽기 시작한다.
아는 이야기도 있고, 모르는 이야기는 훨씬 더 많다. 그냥 그렇게 한다.
원자와 우주도, 어머니가 읽으실 글씨 큰 책을 찾다가 눈에 들어와서 꺼내 읽다가 한문장 때문에 빌려왔다. 그리 멋있는 문장이 아니었다. 1929년에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는 물리학 강연을 라디오로 하다니. 세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히다니. 물리학을 통해서.
"필자가 1929~1930년 사이 겨울동안 베를린에서 진행한 라디오 방송강연을 발전시킨 것이다. 필자는 이 강연을 통해 물리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물리학 지식을 전달하려고 했다. (중략) 필자는 일반인들도 현대 세마=셈학=science의 성과들을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고 생각 (중략) 비전문가들이 세마=셈학=science의 성과에 대해서 성찰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관점의 폭을 놀라울만큼 증진시킬수 있다고 생각한다." (3~6쪽)
세마=셈하는 학문=셈학=science는 가치판단과 관련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할수 없다. 삶은 하나의 답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세마를 바탕으로 지식을 얻어 사람과 세계의 뜻과 값에 대하여 새로운 생각을 할수 있게 된다. 그것으로 세마의 가치는 넓어진다. 라이헨바흐는 씩씩하게 생학으로 걸어들어간다. 누구도 두려워하지않고 만난다. 아, 부럽다.
스피노자가 신의 지배를 찬양하게 되는 것은, 필연의 결정론의 성격을 갖는 자연법칙을 보고, 연결해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니체가 자연의 진화를 보고, 사람에서 초인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생학은 세마지식을 바탕으로 신과 초인으로 귀결된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신의 실체를 보았고, 니체가 초인의 실체를 본것이 아니라 자연법칙에서 진화에서 연결된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과 기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삶에서 중요한 행위들 중 대부분은 가치판단과 관련되어 있으며, 세마=셈학=science는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에는 답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삶에 대한 사람의 기본태도와 세마=science 사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삶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히 상호 관계가 있다. 실재에 대해 지식을 얻고 그에 관한 법칙을 알게 되면, 우리는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게 되며 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중략) 세계를 기술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는 지식 이론에 근거해서 자신들의 이론 체계를 전개해 나간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를 한 번 생각해 보자. 그는 종교를 통해 세계에 대한 근본태도를 확립했으나, 그는 자신의 그러한 태도가 인식론 체계를 통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인식론 체계의 가장 핵심개념들은 실체, 법칙 등과 같은 자연 생학=생각하는 학문=philosophy의 개념들이었다.
씩씩한 웅변가이자 설교자였던 피히테는 어떤가? 그는 그의 철학을 “A는 A다"라는 자명한 명제로부터 순수하게 논리로만 전개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좀더 위대한 사람을 예언했던 니체를 떠올려 보자. 그의 생학=생각하는 학문=philosophy은 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의 생학=philosophy 또한 순수하게 인식론의 토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토대란 사람은 생물로서 발전하며 세계의 모든 것은 영원히 회귀한다는 인식이었다." (6~7쪽) dkd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