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이야기/서재

[ 축의 시대_카렌 암스트롱 ] 종교는 평화로운 삶을 추구한다_241215 el domingo, cinco de diciembre_Воскресенье, пятнадцать декабрь

1장 축의 시대 문명벨트

 

조로아스터 선과 악의 대결

 

뭇사람의 할미배들이 믿음을 갖게 된 이유는 삶 때문이었다. 사회가 평화롭게 유지되면서 잘먹고 잘살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 강한 바램을 가장 소중한 집짐승들을 죽여서 바치는 희생제로 표현했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잔치를 벌여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카렌은 드러내놓고 분명히 한다. 순수하게 물질과 세속의 욕망 때문에 희생제가 치러졌다고.

 

*할미배 = 할미+할배 = 할머니+할아버지.

 

다 좋은데, 갑자기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 새로운 믿음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할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게 궁금한데, 아직은 말이 없다. 내세의 희망을 갖게 된 멋진 민족 아리안인들은 바퀴와 말과 청동무기로 무장하면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 정복자의 삶이다. 이것을 폭력의 역사의 시작으로 봐야할까? 기원전 1500년의 일이었단다.

 

"희생제에는 실질 이익도 있었다. 희생제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의뢰했다. 의뢰자는 자신의 초대에 응하여 희생제에 참석한 데바(신)들이 앞으로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다. 환대의 행위가 다 그렇듯이 제의에 참여한 신들도 제의를 연 사람에게 똑같이 보답할 의무가 있었다. 사제는 신들에게 의뢰자의 가족, 작물, 가축을 보호해줄 의무를 상기시키곤 했다.

 

또 희생제는 공동체에서 의뢰자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신들과 마찬가지로 제의에 참석한 사람 손님들도 이제 그에게 빚을 졌으며, 의뢰자는 잔치에 쓸 가축을 제공하고 제식을 주관하는 사제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주어 자신이 재력가임을 입증했다. 종교의 혜택은 순수하게 물질과 세속의 욕망이었다. 사람들은 신들이 자신에게 가축, 부, 안전을 주기를 바랐다.

 

처음에 아리아인은 내세의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 어떤 사람들은 희생제를 많이 의뢰한 부유한 사람들이 죽은 뒤에 낙원에서 신들과 만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이런 느리고 무탈한 삶은 아리아인이 최신 기술을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기원전 1500년 무렵 그들은 카프카스 산맥 남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에 자리 잡은 발전한 사회들과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인에게서 청동무기에 관해 배웠으며, 새로운 운송 방법도 알게 되었다. 우선 소가 끄는 나무 수레를 얻었고, 이어 전차를 얻었다. 초원 지대의 야생마를 길들이는 법과 그 말들에 마구를 채워 전차를 끌게 하는 법도 배웠다. 그리고 이동의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삶은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아리아인은 전사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빠른 속도로 멀리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우월한 무기를 이용하여 이웃의 정착지를 기습하고 가축과 작물을 빼앗았다. 습격과 약탈이 가축을 기르는 것보다 훨씬 재미도 있고 이익도 많았다. 젊은 남자들 가운데 일부는 남부 왕국들의 군대에서 용병으로 일하면서 전차전의 전문가가 되었다. (29쪽)

 

고귀하고 명예롭다는 아리안들은 러시아 남부의 카프카즈 초원지대에서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 나갔다. 한참 후에 초원지대에 남았던 아리안들도 다시 한번 퍼져나갔다. 나중에 퍼져나간 그들은, 두개의 민족(두개의 언어)로 완전히 다르게 살아가게 되었다. 산스크리트와 아베스타. 산스크리트는 우리가 많이 들어 아는 인도의 고대언어이고, 아베스타어는 조로아스터의 경전에 쓰인 언어 즉 이란의 언어, 페르시아의 언어가 되었다. 조로아스터의 경전이 '아베스타'라고 한다.

 

"초원 지대에 그대로 남아 있던 아리아인은 점차 흩어져 별개의 두 민족이 되면서, 원래의 인도유럽어에서 파생된 서로 다른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한 민족은 아베스타어를 사용했고, 또 한 민족은 산스크리트 초기 형태를 사용했다." (23쪽)

 

아리안의 2개 언어중 이란 아리안어는 아베스타어다. 아베스타 경전을 쓴 말이다.
아베스타어의 주님을 뜻하는 말 아후라가  -> 아후아 -> 아훼 -> 야훼로 되어 유대민족에 전해진 것으로 짐작한다.

주님인 아후라는, 인도 아리안어에서는 너무 평화로운 신이라 거분된다. 그래서,

아후라 -> 아수라로 되면서 선과 악의 이중성을 갖는 신이지만 악마에 가까워진다.

 

조로아스터의 경전 : 아베스타
조로아스터 : 코카서스의 초원에서 쫓겨나 이란에 정착했다가 순교한 예언자
아후라 마즈다 : 지혜와 정의로서 질서를 만드시는 주님. 정의는 정해진 것이 아니라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아후라 마즈다와 데바-인드라의 결별 : 평화로운 신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 아리안들은,

전쟁과 약탈의 효율과 흥미를 쫓는 아리안들이 믿는 데바-인드라를 거부한다.

 

Bc 1200년의 일이었다. 
인드라와 데바를 믿는 약탈 아리안들은 펀잡으로 들어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문명을 대체하였다.

 

인드라와 데바는,

약탈의 아리안들의 언어인 산스크리트로 암송 추앙되었다.

 

아후라마즈다는 지혜와 정의로 세상과 한울의 질서를 바로잡으려 한다.

 

Good thinking 
Good words
Good deed 

파르시의 신조다.

 

불의 신 아그니를 중심으로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한후 
아후라 마즈다는 큰심판을 내린다. 최후의 심판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조로아스터의 시대에 끝내지 못하며,
선한 사람보다 나은, 즉 초인이 나타나서 끝낼것이다.

 

조로아스터의 열정의 이야기인 가타는,
사오샨트가 유익을 가져오는 사람으로
아후라마즈다의 군대를 이끌것이라고 했다. 

 

사오산트 -> 자이언트 -> uber manch 가 아닐까?

 

조로아스터교는,

경쟁(아곤)이라는, 조로아스터 시대의 상황을,
신들의 시대에 그대로 투영하여 선과 악의 단순한 경쟁구도와 최후의 심판으로 정리했다. 

조로아스터는 폭력과 약탈에 대해서 분노한다.

 

고향에서 쫓겨난 조로아스터는,
귀족뿐만아니라 여자와 농부에게도 설교했다. 

낙원에 갈수 있다고. 

그리고 반대자들인,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되었다.

 

게으른 사람들은, 
민주정을 잃고 독재정치를 부른다.


게으른 독재자들은, 
부지런한 시민들을 이길수가 없다.


몸과 함께 생각의 게으름도 경계해야 한다.

 

인도에 정착한 정복자 아리아인

 

 

묘하게도 불살생(아힘사)의 전통은,
약탈과 전쟁을 일삼던 아리안들이 
인도북부로 들어가며 만들어졌다.

 
역설이지만 이해가 된다. 


그들은 지배자로서
평화로운 복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아후라 바루나는 질서이며, 
피부색이 되었고, 
카스트가 되었다.


아리안이 정리한 산스크리트 베다들은,
조로아스터의 가타 문화와 비슷하며, 
시바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즉, 시바는 인도 토착문명인 
모헨조다로 하라파의 신이다.


베다의 하나인 리그베다가 문서로 기록된 것은, 
Bc 1000년 무렵이었다. 


듣고 외워서 지혜로운 이야기를 이어왔는데,
글씨로 쓰여짐으로써 
긴 글을 외우는 기억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베다는 흠하나 없이 그대로 외워지고 있다.

아직까지도.


소리는 신성한 것이다. 왜?


베다의 시들은, 
신성한 소리처럼 웅장하게 외워진다.


그 시속에는 
온갖 정보와 역사들이 가득 담겨있다.


사람들은 착각한다.


정보가 가득하기 때문에 신성한 것이었는데,
시를 읽는 소리 때문에 
성스럽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지혜와 정보와 역사를 받아들이려면, 
생각하고 검토하고 관찰해야 하는 피곤함이 있다. 


그런데, 
소리가 신성하다고 받아들이면 간단하다. 


그냥 듣고만 있으면 된다.
소리를 좋아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소리를 신성으로 대하는 것은, 
생각의 게으름으로 가는 길이다.


모든 소리를 좋아하되,
경계해야 한다.

 

 

요순우, 의로운 통치자의 시대

 

무식은 죄다.

 

우임금이 세운 상나라를 무너뜨린 주공은,

천제로부터 새로운 천명을 받아야했다.

 

여기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왜 새로운 왕조가 인정을 받는가?

 

상나라의 왕들이 부패하여 시민들을 고통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왕의 세계가 천명을 받아 누릴수 있는 뿌리는,
그들의 핏줄과 운명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할수 있었느냐에 있다.

 

bc천년 무렵에 주공이 확립한 천명의 조건이다.

 

건희석렬은 그들의 운명을 믿었다. 좋다.

그러나, 운명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조건에서만 유효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3천년이나 된 오랜 이야기를
무식해서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무식은 죄다.

무식은 파멸이다.

 

사람들은 공공선을, 사회정의를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으로 만들수 있었을까?

 

1) 먹고 사는 문제를 해낼수 있어야 삶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했다.

2) 여자들은 자식을 낳아 키우면서 자기의 피와 살을 나누었다. 그래서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3) 남자들은 어디에서 나누는 법을 배웠을까?

4) 호모 에렉투스부터 사피엔스까지 남자들은 자식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난교를 일삼는 침팬지 무리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가진 것을, 다른 누구와도 나누려하지 않았지만, 자기를 닮은 자식에게는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5) 사피엔스들은, 특히 힘있는 남자들은, 공동의 삶에서도, 약하지만, 나누면서 유지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6) 공공선은, 사회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정착했고, 나누는 행위가 정의로 받아들여졌다.

 

결론, 약탈과 폭력에 익숙했던 수컷들이, 암컷보다는 약하지만 나누는 기쁨을 배우기 시작했고,
나누지 않으려는 폭력 수컷들을 무리로부터 쫓아내어 사회 정의를 세우기 시작했다.

 

기원전 3천년, 비로소 사피엔스 무리에 공공선 = 사회정의 = 가진자가 나누는 문화가 뿌리내렸다.

 

전쟁하는 신성한 신 야훼

 

약탈과 폭력으로 바알신을 담은 야훼가 이스라엘의 유일한 신으로 점점 받아들여지고 있다.

 

 

2장 불안과 공포의 시대

 

그리스인들의 암흑시대는 가족조차 안전한 관계가 아니었다. 

조로아스터는 빼앗는자와 빼앗기는자로 나뉘었고, 야훼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신이었다.
죽음과 맞닿은 공포를 겪으며 얻어낸 것은 무엇일까? 

사랑과 평화. 지혜와 덕. 

 

흔들리지 않고 공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공포를 겪으며 살고 그 공포와 직면하도록 강요했으며, 
그런 뒤에야 다른 쪽으로 안전하게 나아가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축의 시대에 네 지역에서 창조된 종교 전통은 모두 공포와 고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들 모두 이런 고난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필수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고난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음의 필수 전제 조건이었다.” (110쪽)

야훼는 어떻게 유일신이 되었을까? 

불안과 공포의 시대에서 그가 민심을 얻은 이유는 무엇일까?
거짓말은 아니었을까?

가난한 자와 약자를 보호하라는 거짓말.
아니다. 그럴리가 없다.

야훼는, 아후라는, 조로아스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손발이던, 하늘의 말을 듣는다는 사람들과 권력자들이
달콤한 거짓말로, 뻔한 구라로 
그들 스스로를 속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짓을 말하는 그들말고는 누구도,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속지 않았고,
한번도 그들의 삶이 나아진 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말은 좀더 쓸모가 있다.
안에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한 정책.

”언제까지 너희는 불공평한 재판을 하려는가?
언제까지 악인에게 편들려는가? (셀라)
약한 이와 고아를 보살펴주고 없는 이와 구차한 이들에게 권리 찾아주며 가난한 자와 약자들을 풀어주어라.
악인의 손에서 구해주어라.

(중략)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90?~1750?)의 서문은 
왕과 힘있는 자들이 약한 백성을 억압하지만 않으면 
햇님은 모든 사람들 위에 비춘다고 선포한다. 

이집트의 왕들도 빈곤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햇님신 레가 '가난한 자들의 장관이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것은 또 훌륭한 실용 정책이기도 했다. 
부당한 사회 정책 때문에 국내에 적이 생긴다면 
외부의 어마어마한 적들을 정복해도 소용이 없었다.” (121~3쪽)

 

마지막 남은 먹을것을 나그네와 함께 나눠먹을수 있을까? 
야훼는, 아후라는 그렇게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했다. 
보증할수 있는가? 
착하고 깊은 마음이 드러난 이런 행동은 반드시 보상받는다.

 

그말을 믿는 사람들이 주변에 널려있기 때문이다. 

“시돈 지방의 가난한 여인이 가뭄 동안 마지막 남은 음식과 기름을 엘리야와 나누어 먹자, 
야훼는 그녀에 게 가뭄이 계속되는 동안 먹을 것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123쪽)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이렇게 배운다. 
이것이 사회정의, 나눔의 정의다.

하늘은 마름을 통해서만 그의 의도를 전한다. 
하늘의 도는 천자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데,
삶이 지속가능하도록 맑은 하늘과 비를 적당하게 내려주고,
아침이 오고 밤이 오며,
새들이 노래하고 물고기들이 물을 박차고 뛰어오르게 한다.

“하늘의 도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 
성스러운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유쾌한 것이었다.” (중략) 

저 바깥에서 뭔가 신성한 것을 찾는 일보다는 
이 세계를 하늘과 일치시켜 
더 신성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다. (중략)

여기 땅에서 모든 것을 하늘의 도와 일치시키는 
일상의 노력을 하면서 신성함을 경험했다. 
하늘이 더 숭고하기는 하지만, 
정치 생활의 중심은 땅이었다.

(중략) 하늘은 여기 아래에 있는 대응물의 도움 없이는 
도를 이행할 수 없었다.” (127~9쪽)

 

아트만, 내 안의 진정한 나

 

지루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는 제사의 과정이 살육행위를 중단시키는 중요한 과정이었다는 설명은 재미있다. 음식을 차리고, 술잔을 따르기 전에 향내를 잔에 축이고, 땅의 신에게 살짝 따라 들인 다음에 하늘의 조상신에게 올리는 과정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이런 과정에 몰입하다 보면, 무언가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은 확실히 없어지는 듯하다. 틀리지 않기 위해.

 

축제이며 전쟁 승리의 살육이었던 제사의식이 평화로워지는 과정을 카렌은 이렇게 설명한다. 정말 그랬다고는 믿기지 않지만, 이야기로서의 가치는 있다. 지금까지의 축의 시대는, 사실과 상상을 잘 버무린 이야기다.

 

아브라함의 아들 야곱(사람이 희생제물) -> 희생양(동물이 희생제물) -> 푸루샤(제사장 자신이 희생양) -> 예수 그리스도(모든 사람을 대신하는 희생양

 

"그 자신이 희생물이 됨으로써 희생제를 바치는 사람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한 제의 전문가는 그렇게 설명했다. 
《브라마나》는 창조신인 프라자파티를 후기 베다 찬가에 나오는 최초의 인간원형 '푸루샤(산스크리트로 '인간'이라는 뜻)와 합쳤다. 푸루샤는 세상이 태어나도록 하기 위해 신들이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 (142쪽)

 

제사에 부여하는 이런 뜻은 좋다. 오랜동안 제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의 출발은 이것이다. 물론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다짐이다. 제사장이든 제사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사람이든 좋다. 그런 제사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이유는 간단하다. 귀찮은 일은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세상이 완전함에 이르는 쉬운 길이 있는데도, 너무 똑똑해진 사람은 귀찮아서 쉬운 길을 포기한다. 그 대신에 세마를 믿는다. 세마는 어려운 것인데도 말이다.

 

"고대의 모든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베다 시대 인도인은 제의가 자연 세계에서 끊임없이 고갈되는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고 회복해야 한다 고 믿었다. (중략) 사람은 결함이 많은 미완의 상태로 태어났으며, 오직 제의에서 완전한 힘을 쌓을 수 있다." (144~5쪽)

 

길고 긴 이야기의 고갱이는 이쪽으로 간다. 아트만은 무엇인가? 그것이 자아인가?

 

아트만이 불멸의 신이 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다. 나만의 고유하고 영원한 속성은 누구에게도 대체될 수 없으므로, 아트만인 자아는 불멸할수밖에 없고, 유일무이하다.

신과 동격이다.

 

"고대에는 종교가 보통 바깥을, 외부의 현실을 가리켰다. 과거의 제의들은 신에게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목표는 가축, 부, 지위 등 물질 이익을 얻는 것이었다. 자아의 반성은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제의 개혁자들은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은 희생제의 방향을 원래 가리키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틀어, 아트만, 즉 자아의 창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중략)

 

'아트만'이라는 말은 점차 한 사람을 독특하게 만드는 그 사람의 본질인 영원한 핵심을 가리키게 되었다." (148쪽)

 

나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 그러기위해서 지식을 쌓아가는 일. 그것이 축 즉, 중심이다.

 

"인도에서 축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략) 제의와 신들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한 자율의 자아라는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냈다. (중략)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중략) 열심히 내안의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축의 시대에는 지식을 축적하는 것 또한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중략) 깊이 생각하며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깨달을 것을 요구했다. (중략) 새로운 자의식이 탄생한 것이다. 그 이후로 인도의 영적인 탐구는 외부인 신이 아니라, 영원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것은 어려운 탐구다." (150쪽)

 

3장 자아의 발견

 

분노하는 야훼의 대리자 이사야

 

지식을 바탕으로 한 깨달음의 세계(동양)와 외부의 목소리에 의해 주어지는 앎의 세계(서양 종교)는 매우 다르다. 이 두개의 길이 어디에서 합쳐지는 것일까? 어차피 홀사들은 이 두개의 길을 하나로 가질수밖에 없다. 바깥이야 어떻든 나의 길을 갖는 것이 사람이다.

 

"아모스의 경험은 앞으로 볼 인도나 중국의 축의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깨달음과는 매우 달랐다. 그는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에 사로잡힌 느낌을 받았다. 이 힘은 그의 삶의 정상질서를 헝클어놓았다. 이제 그는 자기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중략) 헤브라이의 예언자들은 신을 파열, 뿌리 뽑기, 박살내는 타격으로 경험하곤 한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 경험에는 긴장과 고뇌가 따르는 경우가 많다." (158쪽)

 

종교의 신선한 모습은 이런데 있다. 틀에 얽매어 어떤 변화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과 행동 원칙을 갖고 살아라. 멋지지 아니한가? 믿음을 저버리기 어려운 이유다.

 

"축의 시대의 영성은 우상파괴인 경우가 많다. 종교는 소중하게 간직해 온 관행이나 믿음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외려 사람들에게 전통에 의문을 제기하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할 것을 요구했다. 아모스는 신성한 전사 야훼에 대한 오래된 헌신을 뒤집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사랑하는 제의에 경멸을 퍼붓기도 했다.

 

(중략)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을 개울같이 넘쳐흐르게 하여라. (중략) 축의 시대 종교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 기본 조건이 된다. 아모스는 스스로 분노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분노를 느낀 것이다" (159~60쪽)

 

우리가 맡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이것을 써야 할까. 호세아가 한 말을 이렇게 바꿔 말하고 싶다.

 

"권력자는 '젖먹이를 들어올려 볼에 비비는' 사람과 같았으며, 시민의 목소리를 들을 때는 허리를 굽힌다." (162쪽의 수정)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 영웅들의 자기중심주의

 

암흑기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며 그리스는 폴리스 체제를 만든다. 고대의 부족협의회를 유지한 것이고, 복종해야하는 군주를 세우지 않으려했다. 여자와 노예를 제거한 모든 시민들이 귀족이 되었다. 전사이든 농부든.

 

"이제 폴리스 전체가 귀족전사사회로 바뀌면서, 농부들도 이런 경쟁정신을 갖추기 시작했다. (중략) 단결심(esprit de corps)은 없었다. 각 귀족은 자신의 운명을 충실하게 따르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모두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이 말은 모두가 서로 돋보이려고 싸우는 경쟁자들이었으며, 이것이 모든 활동의 특징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폴리스에는 자기 버리기 대신 격렬한 자기 중심주의가 넘쳐났다. 또 호전성도 내재해 있었다. 폴리스의 창조는 종종 폭력이었다. 이웃이나 경쟁자들과 싸우며 버틸 수 있는 공동체의 수립이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중략) 통합은 뿌리 뽑기, 저항, 크나큰 불행을 의미했다." (184쪽)

 

일리아스가 그렇게 위대한 저작인지는 잘 모르겠다. 오디세이아는 읽지 못했다. 트로이전쟁은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bc1,200년이라니. 이 두편의 서사시를 제외하고 모든 서사시들은 그리스신화라는 이름으로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서사시들은 수백 년 동안 변하고 발전해 왔지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일단 기록되자 영구히 고정되었다. 모든 서사시가 그렇듯이 이 두 편도 아주 오래된 자료를 포함하고 있지만, 동시에 호메로스 자신이 살던 시대의 환경을 반영한다. 호메로스는 과도기에 살았다. 암흑 시대를 끝내고 그리스에서 등장한 새로운 문명은 이제 겨우 두 세대밖에 안 지났다. 트로이 전쟁(기원전 1200년경)이 벌어졌던 미케네 시대 후기를 배경으로 한 호메로스의 긴 서사시는 새로운 문화를 낡은 문화와 결합한다. '호메로스'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아니면 심지어 두 유파의 시인들인지 결코 알 수 없을 테지만, 그 영향력이 엄청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성서라고 부르기도 했다. 거기 담긴 이상과 가치가 새로운 그리스 문화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189쪽)

 

영웅에 대해서 이렇게 시원하게 결론을 내린 글은 처음봤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앞으로 나에게 영웅은,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 희생하는, 자신을 돌아볼줄 모르는 자기중심의 떠벌이다.

 

"영웅은 명예와 지위의 문제에 시달리는 자기중심의 사람이며, 시끄럽게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자신의 존엄을 높이기 위해 전체의 이익을 언제든지 희생한다. 케노시스, '자기 버리기'는 없다. 전사가 자아의 경계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길은 살해의 엑스타시스(ekstasis)를 경험할 때뿐이다."

 

그리스 신들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필요도 있다.

 

"신들은 삶의 긴장과 역설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짝을 짓는 일이 많았다. 부부의 원형인 제우스와 헤라의 다툼은 가부장 질서에 내재한 어려움을 반영하는데, 그 질서는 대립물들의 충돌을 통하여 자신을 확인 한다. 아레스와 아테나는 둘 다 전쟁의 신이지만, 아레스는 전쟁의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측면을 대표하는 반면 아테나는 승리의 영광을 체현한다.

 

포세이돈과 아테나는 종종 함께 숭배된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으로서 원시 자연의 힘을 대표하며, 아테나는 문명의 여신으로서 자연의 힘을 길들이고 통제해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포세이돈은 말을 낳았고, 아테나는 재갈과 고삐를 발명했다. 포세이돈은 파도를 일으켰고, 아테나는 배를 만들었다. 그러나 아테나는 전쟁의 여신이기도 했기 때문에 모든 문명의 핵심에 있는 폭력과 모든 폴리스의 생존 투쟁을 반영했다.


포세이돈은 아폴론과 짝을 짓기도 한다. 그들은 각각 노년과 젊음을 대표하는데, 이 둘은 양 극단이면서 서로를 보완하기도 한다. 헤라와 디오니소스는 서로 매우 적대한다. 그러나 둘 다 광기와 연결되어 있다. 광기는 천벌이 될 수도 있고 해방의 환희가 될 수도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는 형제 사이이며 서로 균형을 이룬다. 아폴론은 형식, 명료성, 규정, 순수를 대표하며, 디오니소스는 해체의 힘을 체현한다. 델포이 신전에서 디오니소스는 아폴론의 신비하고 어두운 세계의 짝으로서 찬미되었다. 모든 그리스 신에게는 어둡고 위험한 측면이 있었다. 누구도 완전히 선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도덕성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역설을 회피하거나 세계의 어떤 부분도 부정하지 않고 함께 삶의 풍요로운 다양성과 복잡성을 표현했다. 그리스인은 새로운 종교 형식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과거의 믿음에 만족했다. 이 믿음은 축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700년 동안 살아남았다." (199~200쪽)

 

금방 잊어버리겠지만 다시 한번 신들의 이름을 그리스(로마)로 정리한다.

 

제우스(유피테르) 포세이돈(넵튠) 디오니소스(바쿠스) 아레스(마르스)

아테나(미네르바) 아프로디테(베누스) 아르테미스(디아나) 

 

춘추시대, 새로운 감수성의 출현

 

서경에 등장하는 요와 순은, 군주국이 무너지고 봉건제후들이 목숨을 걸고 경쟁하는 무법천지의 세계를 멀리하기 위한 선비들의 바램이었다.

 

숲으로 간 현자, 영성탐구의 선구자들

 

직접 무엇인가를 해서 지식을 쌓고, 행동함으로써 깨달음을 얻고, 노동을 통해서 삶을 이해하게 된다. 그것이 교육이다.

 

"인도에서 교육은 절대 사실 정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자는 어떤 일을 해서 배웠다. 만트라를 외우거나, 과제, 제의, 고행 등을 직접 해야 했다. 이것은 텍스트 공부만큼이나 중요했으며, 또 그런 공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를 변화시켜 그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211쪽)

 

출가자의 등장은, 제사의 형식과 내용을 벗어난, 신의 축복을 받는 제사장으로부터 벗어나, 숲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싸움을 벌인다. 그 싸움은 누구도 해치지않는 평화로운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지혜의 불길을 가슴 속에 간직한다. 불은, 어쩌면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힘이다.

 

"축의 시대의 새로운 영웅은 자신의 무예와 용맹을 자랑하는 영웅 전사가 아니라, 자기 내면을 탐구해 스스로 절대인 것을 발견하겠다고 결심하고 아힘사에 헌신하는 수도자였다. 출가자는 야타부타', 즉 '깨달음'을 추구했는데, 이것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는 것'이기도 했다." (216쪽)

 

4장 앎을 향한 긴 여행

 

사람 속의 정복, 우파니샤드

 

어쩌면 상상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삶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오묘한 이야기는 이야기할 맛이 난다. 뚜렷한 이야기도 좋지만, 때로는 안개속에 던져진듯한 말들이, 멋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있어서 좋다. 어차피 알아도 다 몸으로 실현하지도 못한다. 모르는 것을 붙들고 생각하는 즐거움을 누려본다.

 

"《우파니샤드》의 가르침을 따르기는 매우 어렵다. 현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논리에 맞게 입증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체계가 없고 논리는 괴상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논증 대신 경험과 환상 이야기,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경구와 수수께끼만 있을 뿐이다. (중략) 현자들은 브라모디아, 즉 경쟁자들이 브라만의 신비를 정의하기 위해 벌이는 논쟁을 감독한다. 그러나 이 논쟁은 늘 침묵으로 끝이 났다. (중략) 

 

'우파니샤드'라는 말은 '가까이 다가앉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신비주의 경향의 현자가 발치에 앉은, 재능이 있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나누어주던 신비한 지식이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221~2쪽)

 

불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산소와의 결합작용이라고 하는데, 엄청난 힘을 갖고 있다. 물질을 변화시킨다. 숯덩이로도 만들고, 고소한 음식으로도 만든다. 뜨거운 열기이기도 하고, 차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사람의 몸은 늘 일정한 열을 유지하고 있다. 몸안에 불길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전자교환이라는 작용에 의해서 나온다는 것을 안 것은 100년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아트만이, 불멸의 불꽃이며 한울을 유지하는 힘이 있다고 믿지않을 도리가 없다.

 

"비데하 왕국은 기원전 7세기 아리아 인의 확장에서 동쪽으로 가장 멀리 나간 곳에 있는 변방 국가였다. 서쪽 아리아의 땅'에 사는 브라민들은 비데하가 투박한 애송이 나라라고 경멸했다. 그러나 이 동쪽 영토에서는 여러 민족이 왕성하게 뒤섞이고 있었다. 이전에 이주해 온 인도-아리아 정착민, 이란에서 온 부족들에 인도 토착 민족들이 섞이고 있었다. (중략)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는 말하자면 불멸의 불꽃이 있다고 확신했다. 불멸의 불꽃은 전 커미(커다란 미리내 universe)를 유지하고 또 거기에 생명을 주는 불멸의 브라만에 참여하며 또 그 본질도 같았다." (224~6쪽)

 

dk

 

 

우파니샤드의 당연한 말씀. 여기에 욕망과 생각도 같이 포함된다고 한다. 역시 당연하다.

 

"사람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그가 행동하는 방식과 처신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

  행동이 좋으면 좋게 변할 것이다. 행동이 나쁘면 나쁘게 변할 것이다." (230쪽)

 

자아의 죽음은 없는, 아트만이 곧 한울universe과 하나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나에게 주입해서 세뇌시켜야 한다. 삶은 희노애락이 늘 흐르고, 그것을 바라보면 즐거움과 허무함을 같이 느낄수 있어야 한다.

 

"희생제가 하늘에서 영원한 자리를 보장해준다고 여전히 가르쳤지만, 어떤 사람들은 제의의 효과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중략) 현자들은 여러 번 완벽하게 희생제를 지내도 고통과 죽음의 이 세상으로 계속 돌아와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재생과 다시 죽음의 끊임없는 순환(윤회)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을 알고 엑스타시스를 경험하는 것뿐이었다. 오직 이것을 통해서만 이곳 아래에 있는 덧없는 것들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231쪽)

 

우파니샤드는 정말 현명한 경전이다. 정신이 몸에 의해 만들어질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중심 -> 몸과 정신 -> 몸 중심으로 나아가는, 진실로 나아가는 성취를 얻은 자료다.

 

"《우파니샤드》는 몸과 영혼을 나누지 않고, 사람을 몸과 영혼이 섞인 전체로 보았다. 우달라카는 아들을 15일 동안 굶기면서 물은 마음대로 마시게 했다. 단식이 끝나자 슈베타케투는 몸이 너무 약하고 영양이 부족해서, 구루와 함께 그렇게 자신있게 습득했던 베다 텍스트를 암송할 수가 없었다. 그는 정신이 순수한 지성이 아니며, 이 또한 "음식, 숨, 물, 말, 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아트만은 몸인 동시에 정신이었다." (235쪽)

 

서로를 위해주는 일은 나를 내려놓을수 있을 때, 된다. 내가 최고인데, 어떻게 다른 누구를 위해줄 수 있는가? 인드라 등 힘을 가진 신들조차 나를 내려놓고, 다른 누구를 위해주려는 마음과 행동이 있어야, 온갖 고통에서 나를 구할수 있다. 믿느냐? 나의 선택이다. 괴로운가? 나의 결정이다. 고요한가? 내가 가는 길이 고요한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던 인드라도 스승을 위해 나무를 하고, 스승의 불을 보살피고, 집을 청소하고, 금욕을 실천하고, 전쟁을 그만두고, 아힘사를 실천해야 했다. 현자와 신들은 공격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던 에고를 버릴 때에만 효과가 있는 영적 기술을 발견하는 중이었다." (239쪽)

 

로고스, 그리스 영웅시대를 끝내다

 

세대의 반목, 신세대를 이끌지 못하는 구세대, 이것은 세기말의 증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아무리 유능해도 한쪽 바퀴의 마차를 몰수 없고, 아무리 힘이 좋아도 한손으로 농사짓는 것은 어렵다. 세대 사이의 부조화는 이것을 말한다. 어찌해야 할까? 조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길말고 다른 길은 없다. 그것이 정치다. 이야기로 풀어서 사회정의에 대한 고끄(공감, 고개를 끄덕이다)를 이끌어내야 한다. 안된다고? 될때까지, 이야기하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기원전 8세기 말에서 기원전 7세기 초에 활동한 시인 헤시오도스(Hesiodos)는 어떤 폴리스에서는 자식이 이제 부모 말을 안 듣고, 세대간에 반목하며,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을 이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의 시는 이런 도덕 진공 상태를 메워보려는 시도였다." (241쪽)

 

모든 것이 선택이다. 홀사의 선택, 가족의 선택, 공동체의 선택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시대에 살수밖에 없는 아픔도 그대로 겪여내야 한다. 그러니 말이라도 해야한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좀 하자고. 거짓말은 그만하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도록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자고.

 

"철의 시대에는 선과 악, 고통과 쾌락을 나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등이 휠 것처럼 쉴 새 없이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었다. 모순된 감정이 모호하게 공존하는 시대였다.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철의 시대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정의의 요구에 따르거나 아니면 (중략) 죄에 빠져들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디케를 무시하면 악의 승리를 볼 것이다. 힘이 정의가 되고, 아버지가 자식에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고, 자식이 나이 든 부모를 경멸하고, 과거 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우애가 사라질 것이다." (245쪽)

 

중무장 보병 팔랑크스palanx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에게 발언권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웅이나 왕과 귀족들이 값비싼 무기로 무장하고 벌이는 전쟁에는, 시민들이 참여할수 없었다. 그런데 철의 생산성이 높아진 시기에, 그리스의 폴리스에서는 모두가 폴리스의 전사가 될수 있었다. 거기에서 발언권-시민권-주권이 생긴 것이다. 그러면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공동체의 안전을 지킨다는 공공선이다. 민주정의 판단기준은, 행동이 공공선에 기여하느냐에 달려있다.

 

"중무장 보병 개혁은 그리스를 바꾸어 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밀집 대형에서 귀족 옆에서 싸운 농부는 귀족 계급을 절대 전과 같은 눈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과거의 복종은 유지될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하층 계급들은 자신들의 조직-민회 -이 도시 정부에서 중심 역할 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무장 보병 개혁은 폴리스의 자기 이미지를 바꾸어놓았다. 이것은 평화 혁명이었다. 농민은 상층 계급을 제거하는 대신 귀족의 에토스를 채택하였고, 이렇게 해서 도시 전체가  신사 전사 계급이 되었다.


언론의 자유는 원래 귀족 영웅의 특권이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그리스군의 사령관들은 모두 총사령관 아가멤논 왕에게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힘주어 말했다. 이제 이런 권리는 밀집 대형의 모든 구성원에게 확대되었다. 새로운 군대는 다른 언어를 썼다. 로고스(logos, 대화 언어)는 호메로스와 영웅 시대의 시와 매우 달랐다." (251쪽)

 

혼란한 시대 삶의 모델, 군자

추수한 것을 모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각 지역에서 생산한 것을 스스로 소비하여 살아갈수 있게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윤은 남기되 독점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디엔가 이윤이 쓰여질 곳이 있고, 그곳에 쓰자는 말일 것이다. 이 문장이 제대로 실현되기는 어려웠겠지만, 현대 자본주의와 세금, 공동체의 관계가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사람들은 이미 3천년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천이 어려울 뿐이다. 왜? 공동체를 버리는 것이 좋겠다는 이기심 때문이다.

"함께 맹약을 맺은 우리 모두는 추수한 것을 모아들이지 않으며, 이윤을 독점하지 않으며, 죄 지은 자를 보호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자를 감추어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재난이나 참사의 피해자를 도울 것이다. 우리는 불행을 당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동정할 것이다. 우리의 친구는 모두의 친구요, 적은 모두의 적이다." (267쪽)

 

배반자를 벌할 힘이 없다면, 동맹은 동맹이 아닌 것이다. 미국이 아무리 큰소리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원했지만, 러시아에 총알 한방 날리지 못했다. 그게 동맹인가? 어리석은 푸틴과 젤렌스키는 자기 죽는줄 모르고 전쟁에 몰입한다. 둘중 하나가 죽어야 억울한 시민들의 죽음이 없게 될 것이다.

 

시리아에 평화가 찾아온 모양이다. 감격스럽다. 아사드가 처형되었는지 궁금하다. 지난 10여년의 고통을 누가 보상하겠는가? 폭군을 만난 시리아 시민들의 고통이, 지금 우리의 고통이 겹쳐져 더욱 고끄한다. 평화를 되찾은 시리아에 가야겠다.

 

"폭력이 절제에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다. 초나라가 점점 압박해 오자 과거의 제후국들은 자신들의 제의와 관습에 더 강하게 집착했다. 그들은 새로운 나라들의 군사력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교와 설득에 의존했다. 그러나 주변의 큰 나라들은 조화와 '양보'라는 이상으로부터 멀어졌다. 여러 나라가 매우 엄한 맹세로 동맹에 결속되어 있었지만, 배반자를 벌할 힘은 없다는 것을 다들 알았다. 외려 그 맹세를 지키는 나라가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268쪽)

 

책의 종교, 유대교의 탄생

모세5경을 이렇게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일단 유대교는 알아두자. 알아야 이길수 있다.

 

"신명기계 역사서 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모세오경의 마지막 권인 《신명기》부터 《여호 수아》, 《판관기》, 《사무엘 상 하>, 《열왕기 상 하》까지를 '신명기계 역사서'로 본다. 신 명기계 저자들은 북부 이스라엘 왕국과 남부 유다 왕국의 역사와 두 나라가 멸망한 원인 과 그 의미를 찾는 데 집중한다. 이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언약을 깨뜨린 것은 하 느님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하려면 하느님이 주신 율법을 충실히 따르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77쪽)

 

신명기를 한번 진지하게 읽어볼만하게 되었다. 카렌의 진지함 때문에. 어쨌든 신명기의 저자들은, 유대민족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누구의 지배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외부의 모두는 적이었다. 어리석은 것인지,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이런 불관용의 태도는 현대의 비극을 낳고 있다. 분명히 같이 멸망할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편에게 버림받은 부인의 유산을 지켜주고, 외국인 거주자(게르)의 권리를 보호하고, 노예가 6년 동안 일을 하면 풀어주어야 했다.'29) 《신명기》 저자들이 정의, 형평, 동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아모스와 호세아의 가르침을 훌쩍 넘어선다.


《신명기》 저자들의 개혁이 충실하게 이행되었다면,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 법의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다. (중략) 지나친 확신과 명료함은 잔인한 불관용에 이를 수 있다." (279쪽)

 

5장 고난의 시대

 

그래dk(to be continued like reading a testa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