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는, 전자의 존재 때문에 전체 모습의 관측이 불가능하고, 양성자-중성자-전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쪼갤수 없는 물질의 구성입자도 아니다. 원자는 분자의 구성성분이고, 여러 종류의 쿼크와 전자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1828년에 식물학자 로버트 브라운은, 꽃가루가 공기중과 물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봤다. 꽃가루에 날개가 달린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활발하게 움직일수 있는 것일까?
"1828년 식물학자인 로버트 브라운은 물에 떠있는 꽃가루 알갱이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현미경을 통해 관측하였다. 꽃가루 알갱이들의 크기는 대략 1㎛(또는 1천㎚)여서 광학현미경으로 관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라운은 이 끊임없는 움직임이 뭔가 생명현상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다.
먼저, 꽃가루 알갱이들이 사룸현상을 지속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밀봉한 용기 속에 충분히 오랫동안 넣어두었다가 실험을 했으나, 여전히 꽃가루의 끊임없는 운동이 관측되었다. 다음으로 브라운은 사룸현상과 관계없는 그을음이나 심지어 스핑크스의 돌가루를 가지고 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그 결과,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움직임을 관측하였다.
여러 번의 실험을 통해, 같은 온도에서 같은 크기의 알갱이들은 (이런 알갱이를 지금은 브라운입자 또는 콜로이드입자라고 부른다) 같은 운동을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브라운은 사룸현상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자신의 초기 가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실험을 한 결과, 브라운 운동이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1) 매우 불규칙하다.
(2) 두 입자가 충분히 가까이 있게 되어도 서로 독립해서 움직인다.
(3) 작은 입자일수록 더 활발하다.
(4) 입자의 종류나 밀도와 무관하다.
(5) 점성이 적은 유체에서 더 활발하다.
(6) 온도가 높을수록 활발하다.
(7) 운동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특성들은 브라운입자와 열에너지에 의해 요동하는 유체분자간의 끊임없는 충돌에 의한 것이라는 운동론을 뒷받침해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분자운동에 의한 설명은 “어떻게 매우 작아서 볼 수도 없는 유체분자와 이보다 훨씬 큰 브라운입자와의 충돌이 브라운입자를, 관측할 수 있을 만큼,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를 풀어야했다.
또한, 분자운동론이 맞는다면, 그래서 유체분자들이 나노미터의 크기로 조밀하게 놓여져 있다면 충돌을 하지 않고 갈 수 있는 거리도 대략 나노미터 정도인데, 여기에 초속 수백미터에 달하는 분자의 빠른 속력을 고려하면 각 분자들은 매초 1조번씩이나 충돌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이렇게 빠른 미시 현상을 관측할 수 있는가? 이 또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중략) 물질이 뭔가 작은 입자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가설은, 아인슈타인이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명확하게 연결시켜줌으로써 비로소 가설이 아닌 세마science의 사실로 자리바꿈하게 된 것이다. ‘물질이 입자들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이 ‘빛도 마찬가지로 입자로 이루어졌다’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도록 한 밑거름이 되었다." ( 상대성이론 100주년 특집 '브라운운동과 원자론(2005)' 중에서 / 이공주복 (이화여대 물리학과)
그리고 거의 80년 후인 1905년, 아인슈타인이 브라운운동을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논문의 첫번째 의의는, 원자의 존재에 대해 인정하지 않았던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의의는, 통계역학의 신뢰도를 높였다고 한다. 이 논문의 이름. Über die von der molekularkinetischen Theorie der Wärme geforderte Bewegung von in ruhenden Flüssigkeiten suspendierten Teilchen. 독일어로 발표된 논문이니, 그냥 앞부분만 알아두자. 분자운동이론에 대하여 Über die von der molekularkinetischen Theorie -
아인슈타인의 논문에 나오는 수식도 그냥 넘어갔는데, 다시 원자의 속도분포를 나타내는 맥스웰-볼츠만의 식이 나온다. 이 식을 바탕으로 아인슈타인은 꽃가루 입자가 움직이는 빈도와 크기를 계산한다. 이 계산으로 원자의 크기와 수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 위 이공주복의 논문에 의하면, 아보가드로의 수를 계산하는 방법이라고 했는데, 이 영상에서는 원자의 크기와 수를 알아낼수 있다고 설명한다. 뭐가 맞을까?
루트비히 볼츠만(1844~1906)은 엔트로피 방정식 S = k log W을 만들어 열역학을 한울의 근본 물리학으로 만든 물리학자이자 수학자이다.
볼츠만은 기체의 운동을 원자들의 집단 움직임으로 보고, 셀수없이 많은 원자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속도와 방향을 바꾼다고 생각했다. 크기와 속도같은 원자들의 상태는 통계와 확률로만 알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당시의 과학자들은 통계와 확률로 자연을 설명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리학자이자 생학자였던 에른스트 마흐(1838~1916)는, 관찰할수 없는 원자라는 존재에 의존하고 있는 볼츠만의 방정식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마흐는 세마가 가설이나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 가능한 사실을 근거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나는 원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학자들은 사려깊은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론물리학의 초기에 마흐의 영향력은 상당했고, 마흐의 생학은 논리실증주의라고 부르는 사고방식을 신봉했던 빈 학파를 형성하였고, 일종의 생학운동이 되었다. 그러나 이론과 형이상학을 비롯한 증명이 불가능한 개념을 거부했던 마흐의 주장은 심각한 비약으로 나아간다.
'수소와 산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물을 분해할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할때 필요한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마흐에게 물은 사실이었지만, 수소와 산소는 형이상학이었던 것이다. 그는 물리학에서 이론이라는 것을 완전히 배제시키고, 현상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밝히는 단순한 목록으로 된 뼈대만을 남겨두고 싶어했다.
'이론이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원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객관으로 증명할수 없지 않은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실제로 보지 않는한, 모든 증거는 조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에 어떻게 반응할수 있을까? 논리에 맞는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그 자리를 뜨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러나 볼츠만은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고, 마흐와 그의 추종자들의 주장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이론의 허점을 수정하고 촘촘하게 재정립하기도 했다. 그의 논문들은 더 복잡해지고 두꺼워졌다. 헤겔, 칸트, 쇼펜하우어 등 생학공부에 매진하여 공석이 된 생학교수 자리를 메꾸기도 했다. 제기된 문제가 무엇이든 논리를 바탕으로 한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신중했고, 쉽게 타협하지 않았다.
볼츠만은 이론을 반대하는 세마는 극도로 무기력해질 것임을 예상했다. 물리학은 단순히 관찰한 것을 기록하고, 그것들 사이의 수학 관계를 밝혀내는 것 이상이어야만 했다.
1895년 '네이처'에 기고한 볼츠만의 물리학 이론의 본질에 대한 생각
'모든 가설은 역학으로 잘 정의된 가설로부터 시작해서, 수학의 옳은 방법을 통해서 명백한 결과로 이어져야만 한다. 만약 결과가 충분히 많은 사실들과 부합되면 그런 사실들의 진정한 본질이, 모든 면에서 밝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만족해야만 한다'
볼츠만은 이론이란 진실을, 진실에 가깝게 나타내는 것이고, 세마가 발전하면 그 근사는 더욱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이 우리의 감각에 남기는 인상만으로 그 존재를 추측한다. 따라서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는 많은 것들의 존재를 추측할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세마의 가장 아름다운 승리가 될 것이다'
20세기 물리학자들은 볼츠만의 이론물리학 덕분에 중성미자, 양성자, 쿼크와 같은 입자들의 존재를 이론으로 예측할수 있게 되었다. 실험 증거는 이후에 밝혀지는 경우가 많았다.
마흐의 논리는 볼츠만같은 이론물리학자들을 많이 괴롭혔지만 아예 쓸모없지는 않았다. 볼츠만이 마흐의 논리를 격파하기 위해 자신의 이론을 더 완벽하게 다듬게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도 마흐의 엄격한 원칙이 물리학 이론을 구축하는 옳은 방법이라고 관심을 가졌다. 특수상대성이론도 어떤 면에서 마흐의 관점 덕분에 나올수 있었다.
관찰자가 따로 떨어진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을, 어떻게 인식하고 확인할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관찰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왜 시간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고 상대인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마흐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지만 문학, 생학, 예술 분야에서 명맥을 이어갔다.
볼츠만은 '절대인 것은 없고, 특히 절대진리는 없다'고 말하며, 진리는 영원히 확고부동하게 확립될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어진 물리계의 이치를 알기 위해, 그 안에 속해있는 사람이라는 물리계가 취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드러나는 거시성질을 관찰하여, 통계학이나 확률이론을 통해 미시요소들의 상태와 성질을 알아낸 세마학자이다.
볼츠만은 젊어서부터 뛰어난 학자로 인정받았으며, 자신이 받은 고통이, 마치 베토벤이 고통속에서 위대한 음악을 창조해낸 것처럼, 뛰어난 성취를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받아들였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해서 삶 전체가 불우했다는 것은 아니다.
볼츠만은 물리계를 미시입자들의 배열로 보고, 통계와 확률을 적용하여 물리계의 거시성질을 분석할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이론으로 정립했다.
에너지 알갱이를 의미하는 양자도 여기서 도출할수 있다. 막스 플랑크가 1900년에 양자론을 세상에 내놓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가 길을 찾을수 있었던 것은, 볼츠만의 시각을 이해하고 난 후였다.
아인슈타인도 볼츠만의 엔트로피 방정식을 통해 기체도 양자로 구성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광전효과와 브라운 운동에 대한 논문을 완성했다.
볼츠만은 그라츠, 하이델베르크, 베를린, 빈 등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주로 수학과 이론물리학을 가르쳤고, 원자론 논쟁이 있을때는 생학강의를 했는데, 이 강의가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에게 배우고 싶었던 사람 중에는 비트겐슈타인, 에르빈 슈뢰딩거도 있었다. 볼츠만이 떠난 후 빈은 전성기가 끝난 듯 시들해졌다고 한다.
볼츠만은 자신의 이론이 인정받지 못했음을 많이 한탄했었다. 계속되는 논쟁은 상대방을 해치기도 했겠지만 스스로에게도 피해를 주었을 것이다. 신경쇠약과 우울증으로 많은 날을 괴로워할 수밖에 없었다. 체중은 과하게 늘었고, 말년에는 시력이 너무 안좋아서 논문도 제자가 읽어줘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조금만 복잡해져도 이해의 끈을 놓아버린다. 눈에 보이는 단순하고 분명한 사실에만 열광한다. '세상이 희미하다 = 사람은 세상을 희미하게 본다'는 말에는 깊고 넓은 세마와 생학의 세계가 녹아들어가 있다.
볼츠만은 당시 찰스 다윈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해 열광하고 열심히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살아있는 사룸체는 주위의 세계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해야만 하는 물리기관이라고 생각했고, 사룸 자체가 열역학의 현상이라고 인식했다. 사룸체의 물리형태 뿐만아니라 지성능력은 물론이고, 윤리의 느낌이나 정신의 욕구도 마찬가지다. 볼츠만은 세계를 이해할수 있는 능력이 진화의 장점과 궤를 같이 하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긴 여정을 따라나서야 한다. 그 끝에는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라는 결론이 남아있을 것이다. 가끔 가다 뭔지 알겠다는 것이, 어린 시절의 기쁨을 다시 느낄수 있었으면 좋겠다.
볼츠만의 묘비 S = k log W = k ln W
https://youtu.be/r4GEyQRjAVE?feature=shar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