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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더 리더_베른하르트 슐링크_김재혁 옮김_이레_2009 초판 19쇄 ] 유대 이스라엘은 학살자들이다_240927

이 소설은 읽을 필요가 없다.

꼬마의 눈으로 한나의 일생을 그린 소설이다.

단순한 소설인데도, 정리하기가 힘든 것은,

소설이 어려워서도 아니고,

청소년 성착취 때문도 아니다.

 

유대인 혐오 범죄에 대한 참회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유대인들의 아랍인에 대한 혐오범죄에 대해

아무런 처벌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갑갑하다는 생각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어려운 것은,

모든 잘못의 원인인 문맹과 무지로부터 해방된,

한나의 해결책이 자살이라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수십에서 수백명을 죽음에 이르게했다는 죄책감이

얼마나 클지를 상상하기는 너무 어렵다.

그렇더라도 죄에 대한 벌이,

깨달음의 벌이,

죽음이라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죽음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묻어버린다.

문맹으로 표현된 무지가,

한나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무지에서 벗어나 앎의 상태로 간 한나는,

더 나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사회와 꼬마의 배신 때문이다.

사회의 배신은 이것이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가야할 가여운 소녀들을 위해

한나는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을 했다.

비록 한달이었지만 고통스런 노동에서 벗어나도록 도운 일.

그런데, 사회는 이렇게 묻는다.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그게 더 좋은 것이었을까요?" (150쪽)

꼬마의 배신은 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10년 동안 책을 읽어준 꼬마가,

그녀를 만나서 한말은 이것이었다.

한나는,

꼬마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사랑을 받지 못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당시에는,

 내가 당신한테 책을 읽어주던 그 당시에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느냐는 거예요.” (247쪽)

유대인들은 소수자였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이 고리대금업을 하고,

끼리끼리 뭉쳐다니며 그들만의 신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21세기의 유대 나찌가 되었다.

한나는 모두에 의해 범죄자의 대표로 죽임을 당했다.

모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한 과정으로,

한나라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한나의 죽음 이후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그녀의 무덤만이 남고,

죄의식에서 벗어난 다른 모든 사람들은

한나가 아닌 유대인들만을 기억하며

아무일 없는듯 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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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광기가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살륙 전쟁이 계속되는 시기다. 2차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런 시대를 살았지만, 남의 일이라 띄엄띄엄 인식되는, 처참한 비극이 80년 동안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슐링크는 법률가이다. 슐링크와 같은 법률가들이 우리나라의 헌법을 포함한 모든 법들을 손질해주면 좋겠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법률을 이해하고, 누가 읽더라도 같은 뜻으로 이해할수 있게 만들어줄 것같다.

 

우리나라의 법들은, 법률가들만의 언어와 문장으로 선언한다. 주권자인 시민들이 그들 주위에 없고, 법률들과 그 해석자들은 시민 위에 군림한다. 성경의 해석을 독점하던 로만 가톨릭은 결국 부패했고, 내부에서 분열했으며, 지금은 죽는날이 다가오기 전에는, 성경의 해석권을 독점한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려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법률들이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갈아 엎어야 한다.

 

슐링크는 쉬운 언어로 분명하게 자신이 하려는 말을 전달한다. 단문으로 잘 끊어서.

 

독일의 법률가들이 이렇게 된 배경에는, 몽테스키외의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는 시민들이 재판관을 선출해서 판결을 해야 잘못된 판결을 막을수 있다고 했다.

 

"시민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민이 직접 재판관을 선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중략 / 재판권은) 시민 가운데 선출된 사람들이

(중략) 법정을 만들어서 행사해야 한다." ('법의 정신' 중에서, 조국의 법고전산책 82쪽)

 

재판관은 사람들의 판단이 감정이나 편견에 치우치 지 않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해주면 된다.

감각으로 판단한다는 말이 거슬리기는 하다.

논고와 변호, 토론을 거친 뒤의 감각을 가지고 판결을 한다면, 받아들일만 하다.

 

"법관의 독립은 존중해야 하지만,

 시민의 재판 참여 없이는 법관이 '법복귀족'이 되는 것을 막기 힘듭니다. 

 

 (중략) 무지한 자는 감각으로 판단하지만, 전문가는 학설과 의견으로 판단한다.

 전자의 판단이 후자의 판단보다 더 믿을 수 있는 안내자이다.

 (중략) 재판관은 유죄판결에 익숙해져 있으므로

 (중략) 보통 사람의 상식이 증거판단을 잘못할 가능성이 더 적다.

 

 (중략) 누구나 그와 동등한 이웃 시민들로부터

 재판받도록 하고 있는 법제는 정말 경탄할 만하다." (법고전산책, 83~85쪽)

 

꼬마는 한나가 문맹이라는 것을 재판장에게 알려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한다.

왜 그랬을까?

 

1) 꼬마는, 한나가 지은 죄를 용서할수 없었다.

2) 꼬마는, 문맹이라는 사실을 모른채함으로써 한나의 품위를 지켜주려 했다.

 

용서하지 못하는 꼬마를 만들어낸 것은, 슐링크의 지나친 죄의식이다. 책의 흐름으로 보면, 그녀는 분명 사람들을 죽이거나 살릴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런 사람도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 슐링크의 생각이다. 한나는 18년을 감옥에 갇힌 것도 모자라 죄의식에 자살하고 만다. 

 

한나의 품위를 지켜주려는 꼬마의 행동은, 어리석었다. 죄는 지었지만, 형평에 문제가 있는 처벌이 미말되었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한나가 제대로 판단할수 없었으면, 꼬마라도 제대로 판단했어야 한다. 

 

"하지만 어른들의 경우에는, 내가 그들에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좋다고 여기고 있는 것보다 더 우위에 두려고 하면 절대 안 된다."

 

 “나중에 가서 그들 스스로가, 그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는 경우에도 말인가요?"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는 지금 행복이 아니라 품위와 자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 넌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그 차이를 잘 알았잖니. 엄마의 말이 늘 옳은 것이, 네겐 별로 마음 편치 않았잖아" (180~1쪽)

 

현대사회를 지탱해주는 법이,

주권자인 시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집행된다는 것을,

아는 시대와 모르던 시대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시대에 시민들은,

왜  선량한 행위를 하면서도 불안에 떨까?

 

"무지의 시대에 사람들은,

  가장 악독한 행위에도 아무런 의구심을 갖지 않는다.

 

  깨달음의 시대에는

  가장 선량한 행위를 하면서도 불안에 떤다." ('법의 정신' 머리말 중에서)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설명하기 어렵고,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 가족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알수 있다. 3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고, 매달 60명의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야 했으면, 뭔가 생각을 하기는 해야 한다. 일개 감시원일지라도. 내가 한나의 입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므로,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수수께끼같은 문장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해명을 요구할수 없다?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일 또는 저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졌어. 그리고 넌 알 거야. 그 누구도 너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누구도 너한테 해명을 요구할 수 없다." (247쪽)

 

포탄으로 불이난 교회에서 살아남은 딸은, 한나를 용서할수 없다. 그녀는 적어도, 죽음에 이르는 어린 소녀들을 잠시나마 보살폈던 한나를 알고 있었다. 한나의 사연을 다 듣고도, 그녀가 문맹이었으므로 화재 당시 책임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도, 딸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가 남긴 모든 유산 대신에 깡통을 챙긴다. 

 

"그래요. 인정받는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그 돈을 한나 슈미츠의 이름으로 입금하셔도 좋아요."
그녀는 그 깡통을 다시 손에 쥐었다. "이 깡통은 제가 갖겠습니다." (270쪽)

 

문맹으로 표현된 무지가, 한나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문맹(무지)에서 벗어나 앎의 상태로 간 한나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었다.

 

한나의 두가지 죄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1) 가스실로 보내야했던 수십명의 어린 소녀들의 문제 

2) 불타는 교회에 갇힌 채 죽음을 맞이하는 300명의 사람들을 방관한 죄


사람은 죄를 지으면 얼마나 많은 벌을 받아야 하는가?  한나는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8년을 감옥에서 보내고도 용서받지 못해서, 자신의 목숨도 바쳐야했다. 매우 가혹한 일이다. 적어도 꼬마로부터는, 이해와 용서를 받아야했다. 꼬마는, 책을 읽고 녹음을 해서 무려 10년 동안이나 보냈다.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뿐만이 아니라 이해와 사랑이었다. 꼬마는 자신의 사랑만을 기억하고, 그의 의무는 다했지만, 이해와 사랑을 보내지는 않았다.

 

내가 한나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

 

한나는, 말하지 않고서는,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도를 알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혔던 것은, 아무리 자신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표현을 해도, 이해받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오히려 그녀의 거짓을 근거로 하여 그녀에 대한 평가와 벌이 내려졌다. 살아서 용서받기를 포기했지만, 가석방을 앞둔 한나에게 충격을 준 말은, 꼬마의 이 말이었다.

 

"당신은 재판 과정에서 언급된 사실들에 대해서 재판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내 말뜻은 우리가 함께 있었던 당시에는, 내가 당신한테 책을 읽어주던 그 당시에는 그 일에 대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느냐는 거예요.”   (247쪽)

 

재판과정에서 한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준 두번째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한나의 진술대로라면, 그녀는 할일은 해야했고, 가여운 소녀들을 위해 자신이 할수 있는 일도 해야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딸조차 그일이 정말 좋은 일이었느냐고 묻는다. 끔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그게 더 좋은 것이었을까요?" (150쪽)

 

* 벽감 : 무언가 좋은 것을 보관하기 위해 벽에 만든 공간

 

슐링크가 단순하면서도 복잡하게 이야기를 엮어놓아서, 단순하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최근 수십년간 유대 이슬라엘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단순하고 분명하게 결론을 내려야겠다.

 

유대인은, 나찌 학살의 피해자였다. 그런 비극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죄없는 사람들을, 유대인 학살하듯이 학살하고 있다. 나찌는 불과 3년이었지만, 그들은 적어도 60년째이다. 스무배가 넘는 무거운 죄를 짓고 있다. 유대인들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것은, 안타깝게도 슐링크와 같은 사람들의 참회와 죄의식이다. 슐링크의 죄의식과 참회가 유대 괴물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학살자들이고, 나찌에서 배운 나찌들이다.

한나는, 유대인 학살자들을 키워낸, 참회하고 반성하는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