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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변신_프란츠 카프카_민음사_17년 84쇄 ] 이게 뭔가? 가슴 아프게도 이해가 간다_240923

아쉽다, 단 하나의 멋진 문장도 얻어내지 못한 소설이다.

 

1912년 11월에 일필휘지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카프카는 폐결핵으로 1924년에 4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친구 딸이 서울에서 결혼을 한다기에 전철에서 읽을 책으로 뽑은게 변신이다. 다들 명작이라고 하는데, 읽어보지를 않았으니, 궁금하기도 했다. 전혀 읽지 않은 것은 아니다. 도입부 두세쪽을 읽다가 흥미가 느껴지지않아서 도서관에서 내려놓고 나온 적이 있었다.

 

주인공의 이름이 재미있다. 잠자. 무슨 뜻인지 궁금하다.

 

잠자는 4인가족의 가장이다. 부모님과 누이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아니다. 게다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을 5년째 갚고 있다. 상인에 고용된 영업사원이다. 벌이가 괜찮아서인지 빚을 갚으며, 하녀를 부리며 생활한다. 묘한 설정이다.

 

어느날 아침 그가 벌레로 변신해서, 가족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포함한 가족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고, 그러면서 그를 점점 포기한다.

 

그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해, 처음에는 신경을 쓰다가 나중에는 무심해지고 만다. 먹든 말든 뭔가를 챙겨줬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는다.

 

벌레로 변신한 그의 방에서 그의 물건들을 빼낸다. 그것들을 다른 가족이 사용하거나 처분해서 돈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나중에는 그의 방이 지저분한 창고로 변해버린다.

 

벌레로 변신한 그를, 가족들 모두 싫어해서 상처를 입혀 쫓아내려고 한다. 가정부가 그들의 집을 떠나서 집안일을 엄마와 누이가 해야했고, 하숙생들이 벌레를 혐오하여 하숙비를 내지 않고 집을 떠났다. 하숙생들이 집을 떠날때, 잠자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누이가 울면서 그를 내보내야 한다고 한다. 아버지는 사과를 던져 상처를 입히기까지 한다.

 

잠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가족의 눈에 띄지 않은채로, 또다시 변신하기를 기대하거나 현재 상태에서 활기차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의 뜻은 가족들에게 전달되지 않고, 가족들의 말만 그에게 전해진다. 가족들의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20세기 초의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시작했고, 짜르와 귀족들의 독재로 90%의 시민들은 삶이 위험한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로 기차가 다니고, 물품이 풍부해지는 등 변화가 많았지만, 자본주의의 과실이 시민들에게 나눠지지 않았다. 도시에서 자기집을 소유한 가정도 이런 가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의 삶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잠시 후 이어진 프롤레타리아 혁명도 관료주의와 스탈린에 의해 변질되었다. 끊임없이 이어도를 꿈꾸지만 쉽게 이르지 못한다.

 

당시 일하는 사람들은 벌레와 같은 처지였을까? 노동자로 살다가 다치거나 아프면 벌레같은 처지가 되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큰병은 치료도 쉽지 않고, 치료비도 많이 들어서 가정경제를 파탄으로 이끄는 위험이 있다. 카프카는 잠자의 어떤 상태를 염두에 둔 것일까?

 

농업의 시대가 저물고 공동체는 거의 파괴되었다. 병든 노인들은 요양병원이라는 새로운 숲속에 고려장되고 있다. 어쩔수 없는 일이다. 병든 노인을 간병하는 일은, 기쁨은 적고 고통만 가득한 일이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고, 고통으로 피폐해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어쩔수없이 고려장되어야 한다. 삶다운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제손으로 삶을 살아낼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벌레처럼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 끝은, 너무도 뻔하다.

 

카프카의 시대를 살았던, 잠자와 같은 병든 노동자.

우리 시대의 생활능력이 없는 연로한 노인.

 

잠자를 떠나보낸후 남은 가족들은 새로운 희망속에 또다른 삶을 꿈꾼다.

오랜 병환을 앓던 부모를 떠나 보낸 장례식장의 모습이 또한 그러했다.

 

가슴 아프게도, 이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