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하위징아는, 히틀러를 비판하다가 수용소와 시골집에 감금되어 72세에 세상을 마감한다.
안세영의 기자회견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김국장이 겹쳐진다. 삶은 어려운 고비들이 제법 있다. 그 고비들을 만날때마다 열심히 도망을 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중요하고, 김국장이나 하위징아처럼 부딪혀서 죽음에 이를수도 있다. 안세영은 어떻게 될것인가? 그녀의 소망대로 싸우지않고 해결될수 있는 문제일까? 하위징어가 부러운 것은, 죽어도 아쉽지 않을 나이에 그런일에 맞설수 있었기 때문이다. 쉽지않은 일이었겠지만.
놀이하는 사람 호모 루덴스. 뭐 그렇게 긴 설명이 필요할까 싶은데, 단어만 들어도 무릎을 치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400쪽에 달하는 책을 쓸 정도로 할말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간절하기까지 하다. 놀이가 곧 문화라고 주장한다. 하나하나 세어나가는 세마의 접근방식을 쓰지 않았다고 하니, 생각이자 주장이다. 들어보자.
"주최측은 강연때마다 The play element of culture의 of culture를 in culture로 바꾸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거부하면서 of culture를 고집했다.
왜 그렇게 했냐하면 나의 목적은, 여러 문화현상들 중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지위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문화가 어느 정도까지 놀이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 탐구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호모 루덴스를 펴내는 목적이 놀이개념을 문화의 개념과 통합시키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책에서 사용된 놀이라는 용어는 생물현상이 아니라 문화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21쪽 들어가는 글 중에서)
제1장 놀이는 문화현상이다 : 본질과 의미
호모 루덴스를 받아들이면서도, 놀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잘 정리되어있다. 이렇게 잘 정리하면, 뭔가 부딪히는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고, 의미가 거대해지기도 한다. 놀이를 문화로 확장해가기 위한 포석인 모양이다.
"모든 놀이는 무엇인가를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놀이의 본질이 본능에서 나온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에 놀이를 가리켜 의지 혹은 의도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많이 말해버린 것이 된다.
(중략 / 놀이의 특성을 요약하면) 일상 생활의 바깥에서 벌어지고, 진지하지 않은 성격을 갖고 있으며, 독립되어 있는 자유로운 행위이나, 놀이하는 사람을 완벽하게 몰두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물질의 이해와는 상관없는 행위라서 아무런 이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나름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가진 놀이터 내에서, 고정된 규칙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수행된다. 사회집단의 형성을 촉진하고 그 집단은 은밀함 속에 자신들을 감추면서 위장과 기타 수단을 동원하여 평범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있음을 강조한다." (30쪽)
근거는 없지만 그럴듯하다. 놀이는 질서-긴장-기쁨이 있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의례가 놀이에 결합하는 것은, 의례를 축제로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놀이가 문화라는 주장은 무해하다. 굳이 세마science를 이용한 증명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놀이가 문화의 시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기 때문이다. 놀이가 문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게,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일수 있는 멋진 주장이다.
"(인류학자) 프로베니우스에 의하면, 놀이와 재현은 '어떤것'을 표현하는 것인데(놀이를 극으로 만든것이 곧 의례라는것까지 포함하여), 그 어떤 것은 한울universe의 사건에 의하여 '붙들리는 것'을 말한다.
(중략) 하지만 우리는 이와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으며, 놀이 그자체가 1차 의미라고 본다. (중략) 우리는 한울의 사건의 재현이라는 관점을 취하지 아니하고서도, 자연현상에 의한 붙들림에서 시작하여 의례와 공연에 이르는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수 있다.
(중략) 놀이는 처음서부터 질서, 긴장, 운동, 변화, 엄숙, 리듬, 환희 등 놀이의 여러요소들을 갖추고 있었다. (중략 / 원시사회의 놀이와 아이들, 동물들의) 놀이의 형태와 기능은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였고, 목적도 없고 합리성도 없었다. (중략) 놀이가 신성한 행위라는 의미는 그후에 서서히 놀이하기에 스며들었다. 그리하여 의례가 놀이와 결합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놀이가 있었고, 의례는 그 다음에 왔다." (58~9쪽)
좋은 문장이다. 신을 배경으로하여 평화로운 놀이로 삶을 즐기라는 말이다. 즐겁게 노는 것이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놀이가 곧 성스러운 일이라는 말이 될수 있다. 증명한 것은 아니고, 플라톤의 권위에 기댄 하위징어의 주장이지만,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면 되나?
"전쟁에는 놀이도 문화도, 진지한 것이라고 이름붙일만한 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가능한 한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중략) 삶은 놀이처럼 살아야한다. 일정한 게임들을 즐기고, 희생을 바치고, 노래하고 춤춰야한다. 이렇게하면 사람은 신들을 기쁘게 하는것이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것이며, 경기에서 승리하게 될것이다." (62쪽 / 플라톤의 '법률' 중에서)
의례가 놀이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을 사실로써 비교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떨어져나온 고립된 시공간에서 놀이와 의례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의례가 꼭 성전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의례는 성전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근거를 확보할수 없는, 의례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너무 어려우니, 의례는, 더욱 오래된 놀이로부터 형식을 가져왔다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겠는가.
"성사를 위하여 일정공간을 구획하는 것과 순수한 놀이를 위하여 공간을 확보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놀이터, 테니스코트, 장기판, 돌차기 놀이터 등은 그 형태에 있어서 사원이나 마법의 원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중략) 예식의 기원을 말하는데 합리를 거론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놀이와 의례가 본래 같은것이라는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성스러운 장소를 놀이터로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이 없다." (63~4쪽)
신선하다. 종교가 지배계층의 폭력과 손을잡고 공동체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은 종교와 축제의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종교 축제를 놀이처럼 즐겼다는 것이다. 자연을 재현하면서 모두가 속는 척하면서 즐겼다. 그러다가 지배권력이 이를 활용해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 복종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훨씬 그럴싸한 주장이다. 소수만 영리하고, 다수는 어리석을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을 깨버리는 즐거운 상상이다. 기록이 없으니 여전히 근거는 없는 것이고, 축제와 놀이의 형태가 비슷하다는 것, '~인 체하기'를 놀이에서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왠지 밉지않은 주장이다.
"(원시사회의 유령축제에 참가한 남자들) 그들의 입장은 자녀들을 위하여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는 현대의 부모와 비슷했다. 그들은 그것이 가면이라는 것을 알았고, 여자들로부터 감추었다. (중략) 여자들은 말하자면 연극의 코러스였고 놀이 파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중략) 모든 원시종교에는 체하기의 요소가 깃들어 있다 (중략) 원시부족의 사람들은 놀이중의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역할에 몰두하는 훌륭한 배우이다.
(중략) 신성한 행위의 근원은 모든 사람의 믿어주기에 바탕을 둔것이고, 특별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런 믿음을 억지로 유지했다는 것은 오랜 발전단계의 맨마지막에 가서야 나온것이다." (68~70쪽)
그러나, 어린이와 오랜 조상들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프로베니우스와 옌젠은 주장한다. 마주하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대응이 복잡해질수 있다. 축제에서 특별한 행동을 하는 것은, 어린이는 '틀에 박힌 기성품' 개념으로 대응을 하고, 축제에 참여하는 우리의 먼 조상들은 '수천가지 자연현상의 신비'를 재현해야하기 때문이다.
놀이 = 사룸의 자연스런 행위 =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 = 나와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연극 = 의례로 이어져 놀이가 의례로 발전했다. 의례는 특정 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놀이와 의례가, 특정 권력에 의해 차후에 이용되어진다. 특정 권력이라고해서 특별히 우수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타클로스라는 인물과 대면했을때 어린아이는 기성품 개념으로 대응을 하고, 그 덕분에 명료하게 대응의 방법을 찾아나간다. 하지만 원시사회의 주민이 의례와 관련하여 내보이는 새로운 태도는 전혀 다른문제라고 (프로베니우스의 제자)옌젠은 말한다. 원시인은 기성품 개념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환경을 상대해야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나름대로 해석을 가해야 한다. 자연현상의 신비한 신성을 파악하여 그것에 재현의 형태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70~1쪽)
이런 해석에 대해 하위징아는, 아니라고 말한다. 특별한 행위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은, 상상하는 놀이의 기능이고 시의 기능이다. 어떤 의미부여가 아니라는 것이다. 원시인은 언어가 발달하지 못해서 놀이로 표현하는 것일뿐이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해석하려하면 말이 꼬이는데, 지금 내말이 꼬이고 있다.
사자탈을 쓰고 놀이를 하면, 누군가 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힘의 상징이고 권력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위징어는 주장하는 모양이다. 원시시대에 사람과 사자는 공존했고, 흥분상태에서 사자들과 싸웠으며, 승리하면 기뻤고, 누군가를 희생하면 슬프고 두려웠다. 그런 모든 상황을 말(단어)가 아니라 사자놀이로 표현했다. 그런 놀이를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사자를 신으로 받아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일단 이 정도로 하고, 넘어가자.
"원시부족의 심리습관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그 습관을 우리의 용어로 표현하게 된다. (중략) 우리는 원시부족의 종교관을 우리의 논리사고체계에 꿰맞추려 한다. (중략) 원시인은 이 존재와 연기(놀이)를 개념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또 동일성, 이미지, 상징 등의 단어를 알지못했다. 놀이라는 한단어에 이 모든것이 들어가 있었다. 따라서 의례행위를 수행하는 원시인의 심리상태를 가장 가깝게 묘사한 것이 놀이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이해된 놀이의 개념내에서, 믿음과 믿는 체하기의 구분은 사라져버린다. 놀이의 개념은 자연스럽게 성스러움의 개념과 융합한다.
(중략) 신성한 놀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원시인은 어린아이와 시인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다." (72~3쪽)
2장 언어에서 발견되는 놀이개념
2장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러기도 힘들다.
3장 놀이와 경기는 어떻게 문화의 기능을 발휘하나
인내와 집중력을 갖고 읽어야한다. 무슨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놀이로부터 문화가 발생하는 지점이라면, 놀이와 문화는 다르고, 놀이로부터 문화가 발생했다는 의미아닌가?
"놀이로부터 문화가 발생하는 지점" (108쪽)
대립하고 경쟁하는 것이 놀이의 속성이다. 까다로운 요소가 들어있는 놀이를 함께 하다보면, 놀이의 긴장과 불확실성이 높아진다. 이런 까다로운 요소들 - 신체능력, 지성, 기량, 용기, 도덕 등이 놀이를 수준높은 문화로 이끈다.
"함께 놀이하기는 원래 대립 특성을 갖고 있었다. (중략) 대립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쟁 혹은 아곤(경기)의 특징을 띠는 것은 아니다. (중략 / 그렇지만 놀이과정과) 결과의 긴장과 불확실성은, 대립요소가 집단사이의 아곤(경기)의 요소가 될때 더욱 커진다. 이기겠다는 열정때문에 놀이 자체의 경박성은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중략 / 도박과는 달리) 게임이 지식, 기량, 용기, 힘등을 요구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게임이 까다로울수록 관람자의 긴장은 높아진다. (중략) 신체, 지성, 도덕 혹은 정신의 가치 또한 놀이를 문화의 수준으로 들어올린다." (109~111쪽)
생명보험, 즉 보험이 내기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내기는 놀이다. 주식투자를 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내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보험조차도 내기라는 놀이에서 출발했다는 것이, 하위징어의 주장이다. 재미있는 주장이다. 근거를 확인할수 없으니 안타깝지만, 사실 별로 확인하고 싶지도 않다. 내기에서 출발했든, 위험의 배분에서 출발했든,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중세가 끝나갈 무렵 제노바와 앤트워프에 경제밖 성격의 사건들이 미래에 성취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생명보험이 생겨났다. (중략) 여행과 순례의 결과, 잡다한 토지-장소-도시의 탈취 등을 두고서 내기를 걸었다. (중략) 심지어 17세기에 들어와서도 생명보험거래는 내기라고 불렀다." (119쪽)
의례나 축제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경기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신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결과이다. 선한 것이 이기고, 신성한 것이 승리한다. 승리에 대한 찬양은 곧 생존이며 구원이다.
"(경기에서의) 승리는 승리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징하고 또 실현한다. 즉 선량한 힘이 나쁜힘을 누르고 이긴것이며, 동시에 그런 승리를 거둔 그룹의 구원을 의미한다.
(중략) 행운이라는 것은 그안에 신성한 의미를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주사위를 던진 결과는 신의 뜻을 의미하고 결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략) 사람의 눈으로 볼때 와아 happiness, 행운, 운명은 신성의 영역 가까이 있는 것들이다." (124쪽)
탁월함에 대한 칭찬을 싫어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없다. 세상이 야만상태에서 벗어날수록 신체의 미덕에서 마음의 미덕으로, 용기있는 행위에서 관대한 행동으로 미덕의 내용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것도 좋은 일이다. 이런 탁월함이 드러나는 것이 놀이라는 것이고, 명예와 고상함을 지키는 문화가 되었다고 보는 모양이다. 아시아의 겸양의 문화도 허풍떨기나 과시하기의 도치된 형태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는 않는다.
"홀사individual나 사회가 완성을 지향하게 되는 가장 큰 동기는 자신의 탁월함에 대하여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망이다. 남을 칭찬하는 것은 실은 자기자신을 칭찬하려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미덕에 대하여 칭찬을 받고 싶어한다. (중략) 힘과 건강은 신체의 미덕이다. 재치와 현명함은 마음의 미덕이다. (중략) 라틴어 비르투스virtus는 오랫동안 용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으나 기독교 사상이 지배하게 되면서 미덕으로 바뀌었다." (134~6쪽)
제4장 놀이와 법률
윤리도덕에 대한 판단 기준이 생기기 전에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것은, 하나의 경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주장이다. 왕이나 원님 앞에서 각자가 주장을 펼쳐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렸고, 그런 경기가 발전한 것이 법률소송이라는 것이다. 무리한 것처럼 느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현대인은 아무리 법률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다고 해도 정의를 옳음과 따로 떼어놓고서는 생각하지 못한다. 현대인이 볼때 소송을 옳음과 그름에 대한 논쟁이다. (중략) 덜 발달된 문화의 단계로 눈을 돌려보면, 정의와 불의는 승리와 패배 즉, 아곤(경기)의 개념으로 대체되어 버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61쪽)
승리를 위한 말하기 경쟁, 비난하기 경쟁 등 많은 사람의 행위들이, 법률과 신앙의 영역으로 발전되었다. 왠지 신앙은 오래되었고, 법률은 그리 오래되지 않게 느껴진다. 하위징어는 둘의 뿌리가 놀이이며, 주사위 던지기나 저울 달기에서 많이 나오거나 무거운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승리는 곧 신성한 행운으로 받아들여져서 문화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승리하기 위한 갈등은 그자체로 성스럽다. 그런 갈등이 정의와 불의의 개념으로 활성화되면 법률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신성한 힘이라는 긍정 개념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신앙의 영역으로 승화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주된 동인은 놀이이고, 그로부터 후대의 이상이 생겨나온 것이다." (168쪽)
신부를 공개해놓고 남자들이 달리기 경주를 해서 신랑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공정해 보인다. 사라진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그렇게해서 와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매결혼이 사라져버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얼마전까지 꽤 괜찮은 것처럼 보였던 자유연애도, 굉장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하는 문화로 바뀌어가고 있다. 사람은 참 재미있는 동물이다.
"신부를 얻기 위해 달리기 경주를 한다는 생각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중략) 구혼자가 신부를 얻기위해 테스트 당하는 것은 단순히 힘과 용기만은 아니다. 때때로 지식과 재치를 갖추고 있어서 아주 까다로운 질문에도 척척 대답할수 있어야 했다." (169~70쪽)
살인사건을 포함한 모든 다툼들을 드럼축제를 통해 판결한다는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사람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 오랜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만이 어쩌면 살아있는 유일한 근거가 될수 있을 것이다.
에스키모의 놀이(축제)와 판결을 보면, 놀이와 소송이 하나라는, 하나의 문화라는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수밖에 없다.
"(그린란드의) 어떤 에스키모가 누군가에게 불평할 것이 있으면, 그는 그 상대방에게 드럼시합을 하자고 도전한다. 그러면 씨족이나 부족은 화려한 옷을 떨쳐입고 즐거운 기분으로 축제의 대회에 모여든다. 두명의 소송당사자는 번갈아가며 드럼을 치면서 상대방을 향해 야비하고 상스러운 노래를 불러댄다.
(중략) 이러한 경기형식의 법정은 수년간의 기간에 걸쳐 계속되기도 하는데, 이 기간중 양측은 새로운 노래와 비위사실을 생각해낸다.
마침내 구경꾼들은 누가 승자인지 결정한다. 대부분의 경우 판결 즉시 우정이 회복된다. 하지만 때때로 가족전체가 시합의 패배에 수치심을 느끼고 이사를 가기도 한다." (173~4쪽)
견인주의는 굳건하게 참는다는 뜻이고, 금욕주의를 표현하는 말이다. 알렉산더 시기의 제논이 창시한 스토아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같은 시기의 견유학파와도 연결되지 않을까. 플라톤의 이원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신플라톤주의나 세네카와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니체의 아모르 파티(운명애)나 스피노자의 생학과도 연결된다. 날뛰는 말과 개들처럼 욕망에 휘둘리지 말고, 내안의 로고스를 지키는 것이 와아하고 멋진 삶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이 지오다노 부르노까지 연결된다고 하는데,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드럼시합과 포틀래치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수가 없다. 명예와 영광을 얻기 위한 놀이하기에서 승리하기라는 측면에서 그런 모양이다. 포틀래치는 자기재산을 파괴함으로써, 이것들 없이도 살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현한다. 이것을 놀이라고 받아들이는 정신력이야말로 정말 대단하다.
"에스키모의 드럼시합이 포틀래치, 이슬람 도래 이전의 아라비아 허풍시합 (중략) 아이슬란드의 니드상(증오의 노래), 고대 중국의 경기 등과 같이 놀이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176쪽)
"포트래트의 본질이 승리하기임을 알아야 한다. 대립하는 두그룹은 재산이나 권력을 놓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우월성, 즉 영광을 과시하는 것이다. (허풍시합이다 / 중략 / 이슬람종교가 도입되기 전, 아라비아의 무아카라) 낙타의 발을 베어냄으로써 영광의 라이벌전을 벌이다." (128~9쪽)
"고대 중국의 텍스트들에 의하면 대치전은 과장, 모욕, 이타심, 칭찬이 뒤범벅된 혼란스러운 말잔치였다. 그것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싸움이라기보다, 도덕의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싸움 혹은 손상당한 명예들끼리의 충돌이었다. (중략) 명예를 얻기 위한 경쟁은 중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겸양시합이라는 도치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138~140쪽)
5장 놀이와 전쟁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사냥을 위해 싸움게임으로 기술을 익힌다. 어린소년들은 왜 그럴까? 튼튼한 체력을 길러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일까? 요즘은 아이들이 싸우지 않고 큰다. 싸움을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평화를 더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다. 과연 그런가?
어른들의 전쟁은 다르다. 승리는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며, 행운을 거머쥔 것이며, 대의명분의 승리다.
"싸움하기와 놀이하기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존재하면서부터 사람은 전쟁을 '게임'이라고 불러왔다. (중략) 강아지들과 어린소년들은 재미삼아 싸움을 하고 일정한 규칙이 폭력의 정도를 제한한다. 그렇지만 합법폭력의 범위가 반드시 유혈극이나 살인극 이전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중략) 고대사람들은 신성한 타당성의 결정을 얻기위해 전쟁을 했다. 승리와 패배를 신들의 의지를 테스트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중략) 우리가 법이라고 하는 개념은 고대인의 사상속에서는 힘을 의미할수도 있었다. 그힘은 신들의 의지일수도 있고, 당사자의 분명한 우월성일수도 있었다.
(중략) 단 한번의 싸움이 전투전체를 대신하기도 했다. (중략) 승리는 승자의 대의명분을 신들이 선호한다는 표시였고,따라서 그 대의명분은 정당한 것이었다." (179~83쪽)
목적이 복수든 명예이든, 결투는 매우 공정하지 못한 상태로 치러질수밖에 없는데,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어려운 것을 빌미로 하여, 신에 의해 또는 행운에 의해 판결을 내린다는 놀랍게 어리석은 방식이 도입되었다. 심지어는 남과 여가 결투를 벌이기도 했다니 우습기 짝이없다. 그래서 결투도 또한 놀이였고, 결투의 확대판인 전쟁도 놀이라는 의미일까?
"때때로 싸움의 결말이 아주 처참하지만, 사법결투는 놀이의 특성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중략) 중세후반에 들어와 사법결투는 대체로 큰 피해를 입히는 법없이 끝났다. (중략) 홀사간 결투의 의례특성에 따라 싸움을 살해의 목적으로 하는것이 아니라 명예회복의 표시로 보는만큼 유혈사태가 발생하면 곧 정지된다.
(중략) 복수는 자신의 훼손된 명예의식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중략) 디케(정의)는 종종 네메시스(복수)의 모습과 혼용되며, 디케는 또한 티케(행운)과도 동일시된다." (186~8쪽)
전쟁이 놀이의 전통을 이어받으면 상호존중과 경쟁, 승리의 규칙이 지켜지겠지만, 놀이정신이 사라진 전쟁은 야만사회로의 회귀라고 한다. 말이 안된다. 야만의 시대에도 놀이가 있었고, 많은 것이 놀이와 결합되어 있었으니, 야만의 시대가 오히려 더 놀이정신에 충만해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런데, 놀이정신이 없는 이익추구의 전쟁이, 문명이 없는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마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상의 영역이라 기사도정신이라는 허구의 생각이 만들어졌다는 주장인가?
허구나 환상이라도 좋은 생각들은 사람들과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할 것이다. 전쟁놀이가 질서-긴장-기쁨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놀이정신이 모든 사람들의 활동에 영향을 주어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수도 있다. 그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국제사회의 어떤 회원국(국가, 정당, 계급, 교회 등)이 국제법의 구속력을 부정하고, 그들의 이익과 권력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정치행동의 유일한 규범으로 삼는 순간, 저 태고적부터 전해내려오던 놀이의 정신은 사라지고 그와함께 문명의 흔적도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해볼때 놀이정신이 결여되어 있으면 문명은 성립하지 않게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중략) 고대의 상황에서도 비참하고 잔인한 전쟁은 고상한 게임을 현실화시키는데 큰힘을 보태지 못했다. (중략) 영웅의 생활은 명예, 미덕,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이상의 영역에서 놀이되었다(재연되었다)
(중략) 기사도, 충성심, 용기, 자기절제 등이 그런 가치들을 숭상하는 문명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 얘기의 상당부분이 허구요 환상이라고 해도" (200~3쪽)
기사도와 충성심이 놀이정신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좋은 쪽으로 연결하면 그렇다. 그렇지않은 쪽으로 연결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충성심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그 가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어떤 사람, 대의, 사상에 자기자신을 헌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태도는 놀이와 유사한 점이 아주 많다. (중략) 충성심의 정화라할수 있는 기사도정신은 풍성한 수확을 가져왔는데, 진실로 문명의 최초 열매라 할것이다." (205~6쪽)
6장 인식(지식)의 수단이 되는 놀이
일등은 힘이나 행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고대인의 지식은 한울universe의 변화에 관한 지식이다.
"고대인에게 있어서 행위와 모험은 그냥 힘이었지만 지식은 주술의 힘이었다. 고대인들은 모든 특별한 지식을 신성한 지식으로 여겼다. (중략) 무엇을 안다는것은 곧 커미cosmos의 질서 그 자체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었다. (중략) 사물의 질서정연한 운행은 신들에 의해 선포되고 의례에 의해 유지가 되었는데, 이렇게 하는것은 사람의 목숨을 보존하고 또 구원하기 위해서였다." (209~10쪽)
수수께끼라는 말은 수수를 꺾다라는 말에서 나왔을까? 참 재미있는 말이다. 인도네시아에서도 수수께끼놀이를 수수의 이삭이 필때 한다고 한다. 희생제사를 올리면서 수수께끼를 풀어 수확이 잘 나오게 하려는 농업시대의 놀이이며 문화다. 달의 위상변화와 계절의 변화를 묻는 리그베다의 찬가가 '진실을 원하는 물음'에 쉬지 않고 답하려는 사람의 지식놀이에 대한 집착을 잘 드러내준다.
"(커미universe의 지식을 겨루는) 리그베다의 다양한 찬가들은 이런 경쟁을 시로 기록하고 있다. (중략) 이 세상이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왔는지를 누가 알며 누가 감히 그것을 선언할수 있겠는가? (중략) 보름달과 반달은 어디에서 오고 그것들이 속한 해는 서로 연결이 되는가? 계절의 기둥은 어디에서 오는지 말해달라.
(중략) 수수께끼 경기는 결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희생제의의 필수 부분이었다. (중략) 그것은 신들의 손을 비틀어 답을 알아내려는 행위였다. (중략 / 인도네시아 토라자부족의) 축제에서 수수께끼를 내는 시간은 일정하게 정해져있다. 벼가 임신하는 순간에서 시작하여 수확할 때까지이다. 수수께끼의 제기는 당연히 벼이삭의 나옴을 촉진시킨다. (중략) 수수는 원래 토라자족의 주식이었으나 나중에 쌀에 의해 대체되었다." (211~4쪽)
답이 없어서 곤란한 그리스의 질문 아포리아, 답하는 사람을 난관에 빠트리는 질문 딜레마. 어떤 질문이 더 어려운가? 이 대답이 정말로 교묘한 답변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좋은 질문과 그렇지못한 질문들이 섞여있어서, 놀이에도 문화에도 접근하기 쉽지 않다. 그래도 대화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해야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글이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사실에 근접한 답을 할수 있을때까지 공부해야 한다.
"(알렉산더가 알몸의 현자 열명에게 답변을 요구한다) 잘못 대답한 형벌은 죽음이고, 가장 저급한 대답을 한 자가 제일 먼저 죽어야 했다. (중략) 어떤 것이 숫자가 더 많은가? 죽은 자인가, 산 자인가? 어떤 것이 먼저인가? 낮인가, 밤인가? (중략) 누가 가장 엉터리로 대답했는가? 영리한 심판자는 대답했다. 각자 다른 사람보다 더 엉터리로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대왕의 계획을 교묘하게 피해갔고 그리하여 아무도 죽지 않았다.
(중략 / 마하바라타) 마침내 유디스티라가 정령의 질문에 대답하겠다고 나선다. 이렇게하여 질문과 답변의 게임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힌두윤리학의 모든 체계가 다루어진다.
(중략 / '밀린다팡하'라는 빨리어 경전에서) 폐하께서 현명한 사람의 자격으로 나와 대화할 생각이라면 응하겠습니다. 하지만 왕이 자격으로 대화하려 한다면 응하지 않겠습니다. (중략) 현명한 사람은 궁지에 내몰려도 화를 내지않는 반면, 왕들은 화를 냅니다.
(중략 / 시칠리아의 황제가 한 세계에 관한 질문) 무엇이 바다물을 짜게 만드는가? 용암의 유출과 분출은 무엇이 원인인가? 왜 죽은 자의 영혼은 지상으로 되돌아오려 하지 않는가? (중략 / 생학의 질문을 한 황제에게) 젊은 모하메드 생학자philosopher는 황제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폐하의 질문은 어리석고 황당하고 모순되는 것입니다. 황제는 이런 버릇없는 답변을 좋게 받아들였고 (중략) 왕이 아니라 현자의 자격으로 대화했던 것이다." (220~6쪽)
7장 놀이와 시
규칙-긴장-기쁨이 있다면 놀이다. 지금까지도 놀이정신을 지키고 있는 것은 과연, 시 뿐인가?
"고도로 발전된 사회에서는 종교, 세마science, 법, 전쟁, 그리고 정치가 점차 놀이와의 관계를 잃어버리는 반면에, 시의 기능은 여전히 그 원천인 놀이영역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를 창조하는 것은 실상 놀이의 기능이다." (231쪽)
바테스의 뜻이 '헛소리와 신의 지혜'라는 것을 보면, 고대인들도 종교의례나 시가 지혜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근거없는 헛소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증명할수 없는 헛소리이지만 우리들에게 해가 되지않고 그럴듯해 보이니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면, 우리에게 해가 되는 헛소리도 신의 지혜가 되는, 종교와 폭력이 짬짜미를 하게 된다.
"고대시인의 진정한 명칭은 바테스인데, 홀린자, 신에게 매혹된자,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라는 뜻이다. (중략) 꿀술은 현자 크바시르의 피로 준비되었는데, 이 현자는 그 어떤 질문을 받아도 대답하지 못하는 법이 없는, 모든 사람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234쪽)
시의 종류는 많다. 시는 연애시와 충성맹세, 자연에 대한 경탄, 삶의 고통을 노래하는 것들이 특히 많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도 역사의 기록이자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시를 주고받는 것은 놀이의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고, 시를 읊어서 종교의례의 의미를 높이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질서 긴장 기쁨이 잘 녹아있는 시를 짓고, 낭송하며 함께 나누는 것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어른들의 놀이였다면, 시는 놀이다.
"즉흥시를 만들어내는 것은 극동지역에서는 거의 누구나 갖춰야하는 자질이었다. 베이징으로 가는 베트남 사절단의 성공은 때로는 사절단의 즉흥시 제작 능력에 달려있었다. 사절들은 모든 종류의 질문에 계속해서 대꾸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고, 황제나 중국 고위관리들이 적합한 대답을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 내놓는 무수한 난제와 수수께끼의 해답을 알고 있어야 했다. 가히 놀이를 통한 외교였다.
(중략) 수를 헤아리는 기술, 사업에서의 다양한 상품에 대한 지식, 그리고 농업에서의 달력사용은 이런 시의 형태로 가장 간결하게 전해졌다. 때때로 연인들은 문장을 가지고 서로를 시험했다. (중략) 이처럼 시의 형태를 강조하는 것은 과거시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243~4쪽)
엠페도클레스가 시로서 자신의 지식을 표현했다고 한다. 세마의 단어를 연결하여 시처럼 운율을 느끼고 감동을 일으킬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이미 이오니아에서 일어났었던 모양이다. 수식과 더불어 시와 같이 표현하려는 노력이 세마를 우리 모두가 나눠가질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고대 힌두의 수트라나 사스트라, 초기 그리스생학의 작품들 같은 긴문장의 논문들도 모두 시로 되어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신의 지식을 시로 표현했고, 루크레티우스도 엠페도클레스를 따라 그런 방식을 취했다. 시형태에 대한 선호는 효율도 고려했을 것이다. 책이없는 사회는 이런 방식으로 문구를 암기하는 것이 더 쉬웠던 것이다." (245쪽)
8장 신화창조의 요소들
오래전 사람들은 사람과 다른 무엇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보이지않는 그 무엇, 달리보이는 그 무엇도 사람처럼 말하고 욕망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믿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에서는 그렇지않다는 것을 깨달을수 있었겠지만, 그 시기의 구분은 매우 어렵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기원전후 또는 17세기 세마의 시대를 지나면서라고 보아야할까?
인공지능과 사룸공학의 시대에 아직도, 알수없는 힘이 분명히 존재하며, 확실하지 않은일을 해내는 신과같은 존재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신화는 은유가 아니라 인지된것을 직접 묘사한 것이다. 그들은 오래전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무언가에 대해 직접 표현을 하든, 단계를 구분해서 다시 상상을 하든, 그것은 은유이며 즐거운 '생각머리'의 놀이다. 마음의 놀이라고 불러도 좋다.
* 생각머리 = brain = 頭腦
"(은유에 대하여) 사람들은 처음에 무언가 사룸life이 없고 신체가 없는 것을 상상한뒤 그것을 신체, 부분, 열정을 가진 무언가로 표현(의인화)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않다. 인지된것은 처음부터 사룸life과 변화를 가지고 있는것으로 상상되며, 은유는 그것(인지된것)의 일차 표현이며, 나중에 생각된것(사룸이 있는 어떤것으로 생각된것)이 아니다.
(중략) 생각conception은 상상imagination과 동시에 태어난다. 이런 마음의 습관, 살아있는 존재들의 상상의 세계(혹은 살아 움직이는 생각의 세계)를 창조하려는 경향을 가리켜 마음의 놀이 혹은 심리게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261~2쪽)
하위징어의 이런 문장들도 혼란스럽다. 성 프란시스는 어디까지 믿었을까? 사제들이 가난의 천사를 믿지 않았다면, 대천사 가브리엘도 믿지 않았을까? 성모와 예수, 그리고 하느님 중에서 어디까지 믿었던 것일까? 혼란스럽다.
"이런 의인화작업이 얼마만큼 신앙의 태도로부터 나오는지(혹은 그런 태도로 귀착되는지)를 물어보는게 정당하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모든 의인화가 시작부터 끝까지 단지 마음의 놀이가 아닐까하는 질문을 던질수도 있다. 지금과 더 가까운 시대에서 발견되는 사례는 그런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는 그의 신부인 가난을 성스러운 열정과 경건한 기쁨으로 공경했다. 하지만 성 프란시스가 정말로 가난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상의 존재를 믿었는지 정색하고 묻는다는 것은 난처한 일이다. (중략) 성 프란시스가 가난이라는 의인화된 인물과 놀이를 했다고 말하면 가장 타당하리라. 성인의 평생은 순수한 놀이요소와 놀이비유로 가득했고, 이런것들은 성인의 굉장히 매력이 넘치는 부분이기도 하다." (267쪽)
바람과 천둥과 바다를 사람으로 의인화하는 것이나 동물과 사람이 서로 변신한다는 생각은 하나의 생각머리brain의 놀이였다. 이 놀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즐거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고, 어려운 상황을 극복해내기도 한다. 삶에 유리한 상상은 계속되어지고, 사회집단 전체를 통해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의인화로부터 굉장히 벗어나기 힘들다. 어떤 사룸없는 물체를 표현할때 의인화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중략) 의례, 신화, 종교속에서 신이 동물로 변하는 요소는 하나의 놀이태도가 아닐수 없다. 신수동형을 하나의 놀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결코 무모한 주장이 아니다." (269~71쪽)
신화와 은유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서정시로 이야기의 방향을 바꾼다. 시에 대해서는 7장에서 이미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다시 거론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서정시가 지혜와 어리석음이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 모두 걸쳐져있다는 생각은, 모순인듯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진다. 시란 그런것이기 때문이다.
시가 그렇듯이 신화도 말도 안되는 과장과 과대망상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생각머리의 놀이이며, 마음의 놀이다.
"단지 서정시라는 장르만이 아니라, 황홀감을 표현하는 모든 심리를 포함해야 한다. 시 언어의 영역에서 서정의 표현은 논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반면 음악과 춤에 가장 근접해있다. 서정시는 신비스러운 명상, 신탁, 마법의 언어이다. 여기서 시인은 외부로부터 영감을 받는다는 느낌을 강하게 경험하며 또한 최고의 지혜에 가장 가까워질뿐만아니라 어리석음에도 가장 가까워진다." (273쪽)
9장 철학에서 발견되는 놀이형태
소크라테스와 현대 사람들이 말장난으로 사람들을 현혹했던 소피스트들에 대해 하위징어는 애정을 갖고 접근하는 모양이다. 하위징어는 소피스트를, 자신이 연구한 지식을 대중에서 전달하고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로 바라본다. 논쟁이 아고라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마치 현대의 세마가 많은 연구자들의 재현에 의해서 검증받는것과 같다.
"소피스트의 사업은, 자신의 경이로운 지식과 기술의 신비로움을 드러내고, 동시에 공개 경쟁에서 라이벌을 물리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고대사회에서 발견되는 사회놀이의 두가지 중요한 요인이 소피스트에게도 존재하는데, 곧 명예로운 자기선전과 논쟁을 하려는 열망이다.
(중략) 폴리히스토르는 천가지 기술을 가졌고, 기술의 곡예사였으며, 자신이 입은 것은 모두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경제독립자였고 만능천재처럼 올림피아에 몇번이고 나타나 어떠한 주제로도 토론할수 있었으며(미리 준비했지만), 자신에게 어어진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할수 있고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을 결코 찾을수 없다고 주장했다." (279~80쪽)
돈을 받고 자신의 지식을 파는 소피스트들은 대학교수였으며 강연자였다. 강연을 들으며 사람들은 감동하고 웃었고 박수를 보냈으며, 기꺼이 돈을 냈다. 놀라운 일이다. 소크라테스는 왜 돈을 받지 않았을까? 재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고르기아스는 자신의 말재주로 너무나 많은 돈을 벌어 순금으로 만든 자신의 동상을 델포이의 신에게 헌납했다. 프로타고라스처럼 순회하는 소피스트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유명한 소피스트가 도시에 들르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중략) 관중들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적절히 사용된 경구마다 박수갈채를 보내며 웃었다. 이는 순수한 놀이였다.
(중략) 피타고라스는 모든 생학자들과 소피스트들의 맏형인 것이다." (280~1쪽)
일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힘든 부분을 더 쉽게 할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일하고 났더니 뭔가 정리되고 아름다워 보인다, 등등의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지나친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일을 끝내고, 시원한 나무그늘에 앉아서 수박을 쪼개먹으며 일한 것을 돌아보고, 책을 읽고 문제를 풀면서 여가를 즐길수 있을때 뭔가 새로운 것들을 얻어낼수 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마음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은 스콜레(여가)의 결실이며 나라에 봉사하는 것, 즉 전쟁이나 의례가 아닌 나머지 시간은 자유민에게 자유시간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실제로 충분한 여가를 즐겼다." (282쪽)
알렉산더의 이야기말고는 디오게네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이 없는데, 이 이야기도 기억해둘만하다. 이런 문장에 이렇게 즐겁게 답변할수 있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사실 디오게네스는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아리스의 제자들중 하나인 클레아는 (중략) 당신은 나라는 존재가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당신은 사람이 아니다. 이에 디오게네스는 '당신이 그 명제가 참이기를 바란다면, 당신을 먼저 내세울 것이 아니라 나를 먼저 내세워야 할것이다'라고 답변했다 한다." (284쪽)
플라톤과 소크라가 소피스트리에 대해 가지는 반감은 바로 진리에 대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다는 것이다. 놀이는 있지만 진지함이 없으니 헛된 일이다. 그래서야 어디 덕을 갖춘 사람이라 할수 있겠느냐는 강력한 주장이다.
"소크라테스는 궤변법(소피스트리)의 기술이 고의로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며 경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것들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오로지 미묘하고 애매한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 지만을 가르쳐줄 뿐이다. (중략) 이는 누군가가 앉으려고 할때 의자를 빼버리는 행위보다 나을것이 별로 없다'라고 말했다." (285쪽)
생각하고, 생각을 생각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생각끝에 행동하고, 행동을 통해서는 반드시 어떤 결과를 얻게 된다. 그것이 사람과 사회가 발전해온 과정이다. 젊은이들이 생학을 즐기는 것은 행동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기반이기 때문이고, 나이든 사람들이 명예에 머무는 것은, 편협한 생각에 빠져들기 때문이니, 그저 얻은 명예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나을것이다.
"플라톤의 저서에 등장하는 화자들은 스스로 그들의 생학으로의 몰입을 즐거운 놀이라고 생각한다. 청년들은 논쟁하는 것을 즐기고, 노인들은 명예를 추구한다. (중략) 생학은 젊은 시절에 적당히 추구한다면 아름다운 것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몰두하면 사람에게 해로운 것이다." (288쪽)
연구가 부족한 부분은 궤변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고, 연구가 잘된 부분은 최신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었으리라. 지성의 기민함으로, 소피스트들의 활약을 표현하고 싶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욕망보다 돈에 대한 욕망이 강하면, 결국 타락한다는 것을, 고르기아스가 잘 보여주고 있다.
"플라톤은 진리에 대한 추구로, 자신이 도달할수 있는 높이까지 생학의 수준을 끌어오렸지만 미모스(익살극)이라는 경박한 대화의 형식을 취했고, 그런 가벼운 형태는 과거나 현재나 생학의 알맞은 요소이다. 동시에 낮은 단계에서 이것은, 궤변, 속임수와 지성의 기민함으로 발전했다.
(중략) 고르기아스는 진정한 생학에 등을 돌리고 화려한 말과 거짓된 재치를 찬양하고 오용하는데 그의 정신력을 탕진했다." (289쪽)
죽음이란 무엇인가? 사룸의 자취다.
"사룸life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노예, 지나가는 여행자" (295쪽)
소피스트의 놀이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생학은, 중세에 이르러 대학을 만들게 된다. 문자로 축적한 지식이 대학으로 발전할수 있는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기원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에 이미 커다란 도서관이 있었는데, 대학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비슷한 수준의 지성수준에 머물러있던 중세에 대학이 만들어진 것은, 인구의 증가와 소피스트의 활약에 따르는 결과일수도 있겠다.
"11세기 말에 이르자 서양의 신생나라들은 사룸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종합지식을 흡수하려는 갈증이 엄청났다. 이렇나지성의 갈증은 머지않아 중세 문명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중 하나인 대학으로 구체화되었고 또한 스콜라생학에서 가장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295~6쪽)
"(에라스뮈스는) 학문토론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제안이 중요하며 그러한 제안을 도리에 어긋나거나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지식은 본래 논쟁을 불러일으키며, 논쟁은 아곤으로부터 떨어질수 없다. 새로운 정신의 위대한 보물이 등장하던 시기는 대체로 격렬한 논란의 시기였다. (중략 / 17세기에) 사람들은 데카르트나 뉴턴을 지지하거나 반대했고, 모든 것이 새로운 자세를 잡았으나 당파와 파벌은 여전히 존재했다.
10장 예술에서 발견되는 놀이 형태
놀이 = 아곤(경기) = 질서 = 긴장 = 기쁨 = 진지한 문화분야의 발전이라는 동어반복을 통해 놀이가 곧 문화의 고갱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정도면 받아들일만 하다. 그리스 회화가 발전하면서 그림대회가 열렸다고 한다. 그리스의 고수들이 참여했고, 이들 사이의 교류가 일어나게 된 것도 그림대회 때문이었다고 노성두가 밝혀놓았다. 즉 모든 예술에 아곤(경쟁=경기)의 요소가 도입되면서 커다란 발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조형예술에서 이런 손재주, 근면함, 끈질김의 특질이 놀이요소를 막고 있다는 점 이외에 실용 목적이 그런 놀이밖 측면을 더욱 강화한다.
(중략) 고대문화에서 조형예술작품은 주로 의례에서 신성한 중요성을 가진 물체로서 인식되고 기능을 발휘했다. (중략) 의례와 놀이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조형예술작품의 제작과 감상에서 의례의 놀이특질을 자연스럽게 찾아낼수 있다.
(중략) 조형기술의 걸작이나 대표작을 제작하기 위한 경쟁이 건축을 촉진시켰다고 말해볼수 있다. 이것은 성스러운 수수께끼시합이 생학philosophy을 발전시키고, 노래와 시짓기 시합이 시의 발전을 가져온것과 동일한 이치인 것이다." (317~22쪽)
브루넬레스키의 돔 공법을 가지고도 한참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역사의 사례들에선 실제의 유용함이 아곤(경쟁)의 열정을 얼마만큼 압도했는지 결론내기란 불가능하다. 가령 1418년 피렌체시가 성당의 돔을 짓기위해 경쟁에 불붙여 열네명의 경쟁자들 중 브루넬레스키를 수상했을때가 그런 경우이다. 이런 빛나는 작품을 오로지 기능주의의 공로로 돌려버릴수는 없다." (327쪽)
11장 놀이의 관점으로 살펴본 서양문명
하위징어는 수많은 자료들을 나열하기에 앞서서 이야기의 결론을 내려놓고 풀어가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했다. 자신도 어떻게 이것을 알기쉽게 엮어놓아야할지를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시작과 결론부분에 고개가 끄덕여지면, 중간 부분은 그저 읽어나가면 되고, 그중에서 관심이 가는 부분은 더 자세한 자료를 찾아서 하위징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발견하면 된다. 결론은 역시 앞뒤에 스스로 정리해 놓은 것이겠지만 말이다.
"놀이의 경쟁정신은 사회충동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그자체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실질 효소가 되어 삶의 모든 측면에 배어들었다.
(중략) 문명은 초기단계에서 놀이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내릴수 있다. 물론 문명이 자궁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처럼 놀이에서 나왔다는 얘기는 아니다. 문명은 놀이의 정신속에서 놀이의 양태로 생겨나며 결코 놀이를 떠나지 않는다." (329쪽)
경제결정론 - 합리주의 - 공리주의까지 모든 생학을 한순간에 날려버린다. 근거는 없지만, 아마도 놀이로부터 놀이에 의해 사회가 변화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세마scienc와 기술까지도 지나치게 숭배받는다는 생각자체도 매우 어처구니없다. 세마와 기술은 잘 쓰여지도록 관심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분야다. 진보의 시대에 진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엉뚱한 발상이다. 호모 루덴스는, 세마기술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쓰여져야겠다.
"마르크시즘은 경제력과 물질 이익이 역사의 진로를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경제요소를 과대평가하는 태도는 기술의 진보를 숭배하는 심리가 팽배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런 숭배심리는 합리주의와 공리주의의 결과물인데, 이 두사상은 사람으로부터 신비한 의례를 제거하고 사람을 원죄의식과 죄책감으로부터 방면해 주었다. 하지만 사람은 두사상(합리주의와 공리주의)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음과 근시안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못했고, 그런 진부한 패턴(어리석음과 근시안)에 맞춰 세계를 형성해 나갔다.
(중략) 자유주의나 사회주의는 놀이요소에 그 어떤 양분도 제공하지 않았다. (중략) 사실주의, 자연주의, 인상주의 그리고 기타 문학과 미술 사상은 그 이전의 사상들과는 다르게 놀이정신을 배척했다" (364쪽)
12장 현대문명에서 발견되는 놀이요소
현재와 과거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것은 어떤 중요한 차이를 느꼈기 때문이다. 차이의 핵심은 세마기술이다. 증기선 - 기차 - 자동차 - 비행기 - 전화 - 텔리비전 - 무선전화와 인터넷 - 생명공학과 스마트폰 - 인공지능 등 과거와 현재가 구분되는 기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깊이해보지 않아서 그렇지만, 현재가 결코 비좁고 근시안의 세계가 아니라, 현대문명의 발전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것이다. 과거를 정말로 과거로 재빠르게 밀어내 버린다.
"현재라는 아주 비좁고 근시안의 순간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비해, 역사인식이 뚜렷한 사람은 과거의 상당히 많은 부분을 현대로 인식한다." (369쪽)
프로스포츠에 대한 하위징어의 거부감도 대단하다. 대중들은 스포츠하기에서 소외되고, 오로지 박수치고 관전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참여의 방법이야 여러가지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참여할수 있는 아곤에, 프로라는 높은 벽이 쳐짐으로써, 사람들은 스포츠 놀이에서 소외되고 말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놀이집단은 놀이하기가 더이상 놀이가 아닌 사람들을 따로 구분했고, 그들이 놀이정신에서는 열등하지만 기량의 측면에서는 월등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전문선수의 정신은 더이상 순수한 놀이정신이 될수 없었다. 프로에게는 자발성과 무사무욕의 정신이 없었다. (중략) 프로스포츠는 놀이도 진지함도 아니다.
(중략) 고대문화에서 발견되는 위대한 경쟁들은 언제나 신성한 축제의 일부였고, 전체부족의 건강과 복지에 필수인 것이었다. (중략) 예전의 놀이요소는 완전 위축되어 버렸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의 대중의 생각과는 역행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스ㅗ츠를 현대문명의 가장 뚜렷한 놀이요소라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373~4쪽)
하위징어도 혼동스럽지 않았을까? 1장에서 놀이를 정의할때는 어린아이들만의 유치한 놀이는 아니라고 했는데, 브리지 게임이 발달하고 돈벌이로 흐르면서 놀이정신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어려운 논리 전개로 인해 스스로 모순에 빠지고, 놀이는 점점 모호해진다. 운이 따라야 하고, 진지하면서도 쓸데없는 짓이어야하는데, 세상의 놀이는 점점 쓸모있어지고, 사람들이 더불어 즐기기 어려운 놀이들로 발전한다.
"진정한 놀이가 되려면 어른이 동심으로 돌아가 놀이하는 그런 게임이 되어야 한다. 브리지에서 이런 동심을 발견할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게임에서 놀이정신의 미덕은 사라진 것이다." (376쪽)
강대국들에 의해 국제법은 지켜지지 않고, 전쟁이 사리지지 않고 있으며, 힘이 곧 정의라는 것을 매일같이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사람들이 전쟁을 회피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데도, 전쟁광들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고 만다. 그 근거가 슈미트의 생각이다. 나의 앞길을 막아서면, 그것은 적이고, 없애버려야 할 무엇이다.
약한 국가나 집단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실행할 힘이 없는데, 강대국들과 권력집단들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생각을 실천한다. 전쟁과 내분이 마치 필요악인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틀렸다. 그들에게 정치를 맡겨서는 안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또 실패했고, 앞으로도 가끔 실패할 것이다. 그렇지만 평화야말로 진지한 상태임을 아는 사람들이 점점 세력을 넓혀갈 것이다.
"국가들 사이에 적용되는 국제법은 특정한 원칙의 상호인정에 의하여 유지되는데, 그 원칙이 형이상학의 바탕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놀이규칙과 비슷하게 운영된다. (중략) 어떤 나라가 이 합의를 깨버렸는데, 나머지 국가들이 그 위반국을 강제하여 응징할 힘이 없다면, 국제법 체계는 일시에 붕괴될 것이다.
(중략) 국제법은, 명예, 예의, 신의와 성실 등 엄격한 법영역 바깥에 있는 원칙들에 의하여 유지된다.
(중략 / 카를 슈미트는) 평화에서 전쟁으로의 국면전환을 가리켜 '진지한 경우로의 들어감' 이라고 (중략) 이런 끔찍한 사상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또 공언되기도 했다. (중략) 슈미트 이론은, 적을 라이벌이나 상대자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그는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 그래서 파괴해야 마땅한 자이다.
(중략) 나는 '친구와 적' 원칙을 주장하는 슈미트의 야만스럽고 병든 망상을 보고서 사람의 이성이 이처럼 슬프고 희망이 없는 상태로 전락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391~4쪽)
400쪽에 걸친 온갖 사회문화를 다루면서 하위징어는 마지막으로 이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의 활동은 놀이이다.
놀이처럼 규칙 - 긴장 - 기쁨이 있는 활동이 뭇사람을 건강하고 와아하게 발전시켜왔다. 공동체의 번영과 협력을 위해서는 아무런 이익과 목적이 없는, 기쁘고 진지한 놀이로 우리들을 묶어내야 한다. 자유로운 사람들이 언제든지 놀이에 참여하고, 놀이의 기쁨을 언제든 누릴수 있다면, 꿈같은 사회가 된다. 이런 지상낙원이 도래하기는 어렵지만, 놀이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 삶의 사람됨을 가꾸어 나가자. 이런 말씀이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자유와 번영을 누릴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진다면, 아무리 헛된 말일지라도 다시 한번 되새김질해봐야 한다.
늘 이런 질문을 하자.
우리가 하려는 일이, 진지한 의무인가? 아니면 즐거운 놀이인가?
왜 즐겁게 놀지않고, 고통스런 의무를 이행하려 하는가?
"우리는 놀이의 의미를 주제로 삼으면서 모든 사람의 활동이 놀이라고 말하는 생학의 비약을 피하려고 애써왔다. 이제 논의를 마무리 지으려는 마당에 이러한 놀이의 개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중략 / 플라톤은) 전쟁에는 놀이도 문화도, 진지한 것이라고 이름붙일만한 것도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가능한 한 평화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한다. (중략) 사람은 완전히 나쁜 존재는 아니고 약간의 배려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
(중략) 우리가 의지를 발동하여 하려고 하는 일이 진지한 의무인지 아니면 합당한 놀이인가" (397~9쪽)
'사는이야기 >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신분석입문_지그문트 프로이트_돋을새김 2019 ]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든다_240925 (0) | 2024.09.25 |
---|---|
[ 변신_프란츠 카프카_민음사_17년 84쇄 ] 이게 뭔가? 가슴 아프게도 이해가 간다_240923 (0) | 2024.09.23 |
[ 개념원리 확률과 통계_개념원리 수학연구소 ] 꼬리위험 tale risk를 계산할수 있을때까지 천천히 가면 된다_240723 (0) | 2024.07.23 |
[ 아침 그리고 저녁_욘 포세_문학동네_2019 1판 1쇄 ] 어미의 태로부터 세상으로 나오다_240723 (0) | 2024.07.23 |
[ 미적분의 역사_에드워드 Jr_류희찬 옮김_교우사_2012 초판 ] 미적분을 다시 손대다_240723 (0) | 2024.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