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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아침 그리고 저녁_욘 포세_문학동네_2019 1판 1쇄 ] 어미의 태로부터 세상으로 나오다_240723

아이가 태어나는,

기쁘고 즐거워해야 하는 순간이 뒤집어져,

지리하고 우울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장면을 읽다가 숨이 막힐뻔했다.

 

2023년 노벨문학상을 받았고,

글에 음악이 담기는,

실험문체로 글을 쓴다고 한다.

 

그는,

노르웨이의 해안도시 헤우게순에서 태어나

하르당게르표르에서 성장했다.

 

아버지의 희망과 기대속에 태어난 아이가

갑자기 죽음을 앞에둔 노인으로 등장한다.

아내를 먼저 보낸 노인의 덧없고 끝없는 생각의 반복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어쩌면 숙연해져야 하는데,

포세는 그런것을 기대하지 않는듯하다.

 

'충분히 답답함을 느껴라,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다'고 말한다.

 

요한네스의 태어남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인양,

사람이 태어난 것에 대한 기쁨이 있는듯 없다.

모두가 사룸life과 삶이 축복인것처럼 즐기지만,

올라이는 그렇지 않다는 강력한 허무주의를 발동시킨다.

 

허무주의는 두갈래다.

모든 것을 알기에 개처럼 살아가는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로 가거나,

죽는날까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포도주를 즐기는 에피쿠로스의 길이 있다.

 

이왕이면 에피쿠로스의 길을 가고 싶은데,

개같은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이겨낼 힘'이 필요하다.

 

어쨌거나 허무하다는 결론을 내릴려면,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들을 대부분 알아야 한다.

 

그냥 덧없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난 다음의 허무여야 한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

그러고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15~6쪽)

 

* 태어나다 -> 태나다 : 어미의 태()로부터 세상에 나오다.

 

요한네스가 태어난 날에,

그의 아버지가 아내와 아이의 무사함을 빌면서 생각한 신이,

요한네스의 이웃에 의해서 그대로 반복되어 받아들여진다.

요한네스에게까지. 즉 모든 사람에게.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신들로부터 고귀함을 부여받은

풍요로운 귀족이나 왕족들이 믿는 신들과는,

다른 신들을 믿는 모양이다.

 

필요한 것이 거의 없는 삶,

가슴이 아릿하다.

 

"신이 존재하기는 하겠지, 올라이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너무 멀리있거나 너무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는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17쪽)

 

(중략)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고되게 일해도 그가 집으로 가져올수 있는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중략) 그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믿고 싶은것을 믿게 두었다, 자신이 믿는 신은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구두장이 야코프는 말했었다 (중략) 제가 믿는 신과 진실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신은 이 세상을 위한 신이 아니에요, 그런 신도 세상에 존재하지만,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다른 신들입니다 (중략) 그는 구두장이 야코프와 생각이 같다

 

(중략) 식구들은 잘 버텨냈고 요한네스 자신은 필요한 것이 거의 없었다" (50~2쪽)

 

아내가 떠나버린 세상 :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33쪽)

친구들이 떠나버린 세상 : 모든 것이 같으면서 다르다 

 

살날이 얼마남지 않은 세상이 이럴 것이다. 왜? 굳이 이것을 알려주는 것일까?

 

"어쩐지 모든 것이 다르면서 여느때와 같고, 모든 것이 여느때와 같으면서 동시에 다르다." (58쪽)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문장이다.

일단,

죽음은 아무것도 얻을수 없는 상태이며,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삶이라면,

곧 죽음과 같은 것이라는,

매우 위험한 허무의 표현이다.

 

돌멩이의 존재와 낮잠자는 개와 고양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을 보자.

살아있더라도 세상과 그렇게 많이 소통하지 않는다.

 

존재는 허무하더라도 상관이 없다.

스스로 즐길줄 알면 된다.

 

나의 존재를 위해서

따뜻한 물의 욕조에서 포도주를 즐길줄 알면 된다.

 

"물속으로 던진 루어가 배 밑바닥에서 일미터쯤 아래 멈추더니 맑은 물속에서 꿈쩍않고 더이상 내려가지 않으려했다 (중략) 바다가 더이상 요한네스를 받아주지 않으려 한다" (38쪽)

 

요한네스는 이루지못한 첫사랑을 친구와 함께 길게 회상한다.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답을 듣고, 짧지만 팔짱을 끼고 데이트도 한다. 그리고 가장 맛있는 음식을 그녀에게 선물하고 떠난다.

 

"저기 그런데, 편지 고마워요. 아름다운 편지였고 글씨체도 참 멋졌어요. 표현력이 정말 좋던데요. 그래요 아름다운 편지였어요, 당신이 내게 쓴 편지 말이에요. 그래요 그럼 잘지내요. 그래요 당신도요." (89~91쪽)

 

묘한 일이다. 아내를 늘 그리워하면서도,

가장 친한 친구와 잊지못한 첫사랑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말이 없는 세상으로 떠나는 마지막 날에.

 

다 읽고 나니,

삶의 마지막 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날,

만일 몹시도 지루하고 평범하고 똑같은 하루가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욘 폰세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면, 곧 죽음이라고 경고하는 것도 같다.

 

죽음은 소리없이 다가올 것이다.

느끼지도 못하는 죽음이니,

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일이 없지 않을까?

 

남겨진 가족들이 즐겁게 남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고통이 양념처럼 삶을 풍요롭게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