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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_민태기_위즈덤하우스_23년 10월 초판 4쇄 ] 240702 el martes, dos de julio_Вторник, два Июль

갑오농민전쟁 - 청일전쟁 - 갑오개혁 - 독립협회 - 러일전쟁 - 식민지 - 독립운동 - 미군정 - 분단 - 정부수립 - 한국전쟁.

 

뭘 기억하고 있나? 부패한 세도정치의 끝자락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일제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는 사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실패,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고종의 무능, 청나라의 붕괴와 일제의 발호, 조선이 아니라 민주공화국 건설을 위한 끈질긴 독립운동, 좌우대립, 남북대립, 친일파 득세, 남북전쟁. 참혹한 역사다.

 

민태기의 집필은, 1932년 미시간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문교부 차관 최규남의 글을 발견한데서 출발한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의 교육을 왜곡시켜 제대로된 지식을 갖추는 것조차 방해하였다. 독립이후 75년만에 이 문제가 해결된다. 문이과 구분없는 교육이 실시된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문과-이과 구분이 (중략 / 최규남의 글) 순수한 문과계의 학문만을 학습하여 가지고 교문을 나온 그네들은 자연세마에 아무 교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마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반신불수의 대학 졸업생들이다. (중략) 이와같은 인문계통 졸업생이 사회에 나와서는 정치, 경제, 법률 기타 모든 중요방면에 지도자 격으로 군림하여 이공학부 출신의 기술자를 부리는 지도자의 지위를 점하게 된다." (10~11쪽)

 

1. 1895년 서재필의 귀국

 

1884년 갑신정변. 개화파들의 권력욕이 부른 3일천하의 난장판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욕심에는 조선을 개혁하려는 좋은 마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갑신정변과 그 우국지사들의 마음을 다시한번 살펴봐야할 것이다. 그들이 비록 일본의 군사력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일본에 이익이 되도록 할 생각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변수-서재필.

 

정변 주도세력들은, 개화를 통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기를 희망하였다. 그 방법이 정권을 잡는 것이었으며, 위정척사파와 민비의 외척세력을 제거하여 부정부패세력을 일소하고, 사대주의와 쇄국정치를 끝내는 것이었다. 정변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력이 필요했는데, 자체 군사력은 미미하여 어쩔수없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야했다.

 

정변은 민비와 청군의 힘에 사흘만에 진압되었고, 홍영식은 전사하고 김옥균은 상해에서 암살당하며, 나머지 인물들은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들 중에 서재필이 있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은 정변의 실패로 자결해야했다. 비극이다.

 

서재필은, 일하며 공부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후원자를 만나 고교를 졸업하고, 선교사가 되라는 권고를 뿌리치고, 신학대를 거쳐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된다. 더불어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그리고 1895년 성탄절에 재혼한 부인 뮤리엘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온다. 여기까지도 한편의 영화다.

 

갑신정변후 망명하여 의사가 되어 돌아온 서재필이, 불과 1년 6개월만에 조선에 민주공화국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서재필은 사실 방아쇠에 불과했다. 많은 조선사람들이 조선의 변화를 열망했고, 독립신문 - 강연회 - 협성회 - 만민공동회로 이어지는 계몽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비록 실패했지만, 1884년 갑신정변부터 1895년 갑오농민전쟁, 1899년 독립협회의 해산까지 15년의 격변기는 조선 최후의 내부개혁운동이었다.

 

"혼란한 조선에 도착한 미국시민권자 서재필은 조선왕조를 경멸했고, 개화파에 돌팔매질해대는 조선민중에 실망했다. (중략 / 계몽을 위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최초의 순한글신문이었다. (중략 / 독립문건설을 계기로 같은해) 7월 2일 독립협회로 발전한다. (중략) 몰락하는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중략 / 1897년 11월 /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군주를 죽일수 있다 (중략 / 1897년 7월 배재학당의 졸업식)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에게 논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상대방을 설득하고 청중의 동의를 구하는 토론수업을 시작하였다. (중략 / 1897년초) 대중토론회가 인기를 끌자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조직하고, 만민공동회에서는 안창호가 명연설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중략 / 개혁에 대한 정부의 미진한 자세로 많은 지식인이 참여하였지만) 조선정부는 독립협회를 통제하려 들었고, 여기에 러시아의 견제가 더해지며 시재필이 물러난다. 1898년 5월 14일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윤치호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돌아간다. (중략 / 황국협회와의 충돌을 구실로) 독립협회 해산을 명령하면서 활동은 중단된다. 1899년 1월, 정부의 대규모 검거로 독립협회 간부가 투옥되고 개화파 관료 민영환과 이상재가 파면되었다." (21~30쪽)

 

2. 1902년 안창호와 하와이

 

박명호의 중국인이야기가 몹시 부러웠다. 대격변기에 중국사람들의 뜨거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나라에도 가능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는데, 민태기가 그 초석을 놓았다. 한국인이야기가 만들어질수 있겠다.

 

1902년 12월 민영환은, 한인들을 하와이로 보내는 하와이 이주사업을 시작한다.  한편 독립협회에서 활약하던 안창호는 같은해 10월, 미국 유학을 결심하고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가, 진학을 포기하고 계몽활동과 한인촌 건설에 앞장선다. 두사람의 활동이 미국 전역에 한인공동체를 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공동체는 자금이나 인력면에서 독립운동의 커다란 거점이 되었다.

 

한편,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은 사업가로 성공하면서, 세로쓰기 방식의 이원익 한글타자기를 개발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원익타자기의 작동방식이 정말 궁금하다.

 

"(황진남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학(광산학과)을 자퇴하고 캘리포니아 각지를 돌며 동포들에게 3.1운동을 알렸다. (중략) 서재필은 사재를 털어 필라델피아에 교포들을 모아 독립행사를 열고, 다시 한국문제에 앞장선다. (중략) 그는 결국 60세가 되던 1924년에 파산한다. (중략 / 그런데도) 조선에 전염병이 자주 일어남을 걱정한 그는 세균학, 면역학, 병리학 등을 연구하며 학술지에 몇편의 논문도 출판했다.

 

(중략 / 김규식과 서재필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표로 활동하던) 1919년 응우옌은 파리에 미리 도착해 활동중인 한국대표단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다. (중략) 이 베트남 젊은이는 이름을 호치민으로 바꾸었고, 마침내 베트남을 독립시켰다.

 

(중략)해방될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의 상당부분을 차지한 것은 하와이 노동자들이 일당을 아껴서 모은 돈이었다. 그 총액은 1945년까지 300만달러에 가까운 것으로 추산된다. (중략 / 1954년 15만달러를 기부하여) 그들이 떠난 인천과 정착한 하와이의 첫글자를 따서 인하대학교라고 이름지어졌다." (42~7쪽)

 

서재필에 대해서도 다시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부인은 자결하고, 두살된 아들은 굶어죽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파산하는등 한반도의 역사에 많은 것을 바친 인물이다. 자전거나 타고 다니며 의사로서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던 한량이 결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운형이 암살되기 직전이 1947년 이승만 견제를 위해 미군정이 초청한 서재필이 한국에 도착했다. (중략) 그는 자신이 가르치고 발탁했던 후배 이승만과 대립하게 된다. (중략) 어떻게든 분단은 막아보려던 그는 이승만 계열의 집중포화를 맞게되고, 1948년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자 결국 미국으로 떠나야했다. 세번째 망명이다.

 

(중략 / 서재필의 1949년 3.1절 경축사) 둘이 되면 둘이 다 약해지고 살수가 없을 터이니, 한배속에 든것과 같아서 한쪽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해지는 법이오. (중략) 그에게 한국전쟁은 마지막 타격이었다. (중략 / 서재필의 미국인 친구는)  그가 죽음을 맞이하자 오히려 나는 안도했다. 그만큼 그가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246~9쪽)

 

3. 1919년 상하이 안창호와 황진남

 

나라가 힘이 빠지는 첫째 요인은 부정부패고, 둘째 요인은 분열이다. 부정부패는 씻어내야하지만, 완전히 없앨수 없는 세균같은 문제고, 분열은 필요하되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문제다. 부정부패는 어느 조직에서나 나타나는 문제이므로 큰것부터 처벌해나가면 그 폐해를 크게 줄일수 있다. 분열은,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단점이 있지만,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고, 방향을 잡아 모아지기만 하면, 큰 역량을 발휘할수 있다.

 

19세기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마지막 개혁의 시기가 물건너갔다. 20세기는 독립과 분열의 시기다. 독립을 향한 강력한 의지가 분열로 인한 쇠약을 추스르며, 민주공화국을 향해 조금씩 전진해갔다. 불행하게도 분열은 잘 관리되지 못했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분열은 잘 관리되고 있을까? 역시 쉽지 않은 과제다.

 

20세기 임시정부 분열의 방아쇠는, 슬프게도 레닌의 대한독립지원자금이었다. 독립에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확보했느데, 분열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민족주의 - 상해파 - 이르쿠츠크파를 충돌하게 했다. 역시 돈관리는 쉽지않은 문데다. 돈을 보면, 사람들의 눈이 뒤집힌다. 그게 사람이다.

 

안창호를 따라 파리강화회의에서 활동한 황진남은, 베를린대학(훔볼트대학)에 남아 학업을 이어 가기로 했다. 이동휘와 동행하여 레닌을 만났던 이극로(경제학, 언어학)도 베를린대학에 남았다. 싸움도 중요하고 실력을 키우는 일도 중요하다. 또한, 목숨을 보존하여 실력을 기르는 것이, 난세에 처한 사람의 자세다. 소중한 가족도.

 

아, 황진남 선생님 !

 

"황진남 선생은 학생시절 결혼한 하숙집 딸 프랑스인 아내와 함께 귀국하여 고향인 함흥 의과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8.15 후에 갓난아들과 아내를 미처 동반하지 못하고 단신 남하한 황진남 선생은 일본으로, 프랑스인 아내와 어린 아들은 북한군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시베리아로, 소련으로 몇년동안 끌려다니다가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게되었을 때는 아내는 정신병원에, 아들은 보육시설에 각각 수용될 절망의 상황에 있었다. (중략) 어느날 아침 혼자사는 숙사 침대 위에 누운채 숨을 거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위진록, 고향이 어디십니까 중에서)

 

(중략) 이것이 우린 민족에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소개한 황진남의 마지막 모습이다. 함흥에서 태어나 하와이를 거쳐 캘리포니아대학에 다니다 3.1운동에 감격해 대학을 자퇴하고, 안창호를 따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리고 베를린대학과 파리 소르본대학 유학후 귀국하여 여운형과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항일운동가 황진남은 한국전쟁 때문에 일본으로 갔고 결국 1970년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다.

 

20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황진남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아직 가족이나 후손이 나타나지 않아 훈장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287~90쪽)

 

 

조선의 전력공급체계의 표준을 통일하려는 노력이 결실을 거둬 60헤르츠로 통일되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일본은 당시에 50과 60으로 나뉘어서 현대에까지 이르렀고, 2011년에 동부에서 후쿠시마 원전사태로 전력이 부족해졌을때, 서부에서 동부로 송전을 해줄수가 없었다고 한다.

 

"1920년부터는 이동휘의 무장투쟁론이 설득력을 얻으며, 한인사회당이 임시정부의 다수파가 된다. (중략 /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대승을 거두며 무장투쟁의 성과는 계속되었다. (중략 / 1920년 9월) 금화 200만 루블을 가지고 내전중인 시베리아를 통과할 자신이 없어 1차로 금화 40만 루블만 운반을 시작한다. (중략 / 오해가 쌓이고) 1921년 1월, 이동휘는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해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된다.

 

(중략 / 1921년 6월) 볼셰비키와 진압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대한독립군단을 무력으로 제압하는데, 이것이 자유시참변이다. 대한독립군단 수십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전원 포로가 되었다. (중략) 레닌은 결국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에 해산을 명령하고 남은 금화 140만 루블의 지원을 중지한다.

 

(중략 / 김구는) 이동휘의 심복 김립을 상하이 대로변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 지도체제가 무너지며, 조국을 되찾기도 전에 대한민국은 이미 좌우분열이 시작되었다. (중략) 김철수는 김구에 복수하려는 세력을 끝까지 말렸고, 안창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중략) 고려공산당은 레닌에게 받은돈 일부를 1921년 중국공산당 창당에 지원했다." (54~9쪽)

 

3. 1921년 서울 조선에 등장한 상대성이론

 

갑오농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한반도에는, 시민세력의 성장이 필요했다.

 

1) 부패한 조선의 지배세력을 대체할 새로운 정치권력의 등장 : 민주공화국의 이념을 실현할 민주시민세력

2) 무능력한 조선의 지배세력을 대체할 새로운 생산권력의 등장 : 세마science로 무장한 계몽시민세력

3)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의 지배세력을 대체할 새로운 국제세력의 등장 : 평화를 향한 의지를 실천하는 평화시민세력

 

갑신정변 - 갑오농민전쟁 - 갑오개혁 -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신민회로 이어지는 개혁과 혁명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과정에 아인슈타인이 등장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예루살렘에 히브리대학을 설립하는 것으로 세마인재scientists의 양성을 추진하였고, 화약제조의 핵심원료인 아세톤제조법으로 영국의 승리에 기여한 바이츠만이 이슬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이 사람의 존재에 대한 존중과 진리에 대한 사랑에 기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재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하며 아인슈타인의 기대를 저버렸고, 유대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만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거리낌없이 학살을 저지르고 있다. 헤브루대학도, 하마스로부터 살해당한 이스라엘사람들만을 추모하고 있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의 무고한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결정의 순간에 '나만을 위한 생존기계'에 불과하다.

 

<< Albert Einstein is one of the founders of 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 To him, the university represented a combination of the commitment to his Jewish identity and his belief in the universal values of the pursuit of truth and respect for every human being.

 

대학교는, 진실 추구와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보편가치에 대한 그의 믿음이 결합된 것이었습니다.

 

Prof. Einstein served on the university's first Board of Governors and Academic Council. He delivered the university's inaugural scientific lecture and edited its first collection of scientific papers. His unique relationship with this institution found a lasting expression in the bequest of his literary estate and personal papers to the Hebrew University of Jersualem in his last will and testament. >> (헤브루대학교 홈페이지에서)

 

“I know of no public event which has given me such delight as the proposal to establish a Hebrew University in Jerusalem” (1921년, 아인슈타인)

 

대한민국의 세마연구소 설립을 위한 노력은, 일본제국주의의 탄압과 방해로 해방이후로 미뤄졌고, 내전과 이승만 독재로 갈길을 잡지 못하다가, 무려 40년만에 민비의 묘지를 옮긴 홍릉에 건설되었다. 2024년, 김용관의 발명학회 발족 백년만에, 우리는 세마연구를 죽이려는, '연구는 필요없고, 결과만 가져다쓰면 된다'는 정치세력의 등장을 보게 된다. 대한민국의 앞날이 암울한 이유다.

 

"(1917년 / 상록수의 주인공은) 자연세마를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듯하여 그러케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자부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불상하다.

 

(중략) 1920년 조선교육협회

 

(중략 / 경성공업전문학교는 독립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흡수된다) 1920년  '공우'라는 잡지를 창간해 세마 계몽에 앞장섰다. 이 창간호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조선에 처음 소개된 것이다.

 

(중략 / 1922년 2월, 여자의 선택에 의한 이혼문제를 제기한 나혜석의 오빠) 도쿄공업대학 출신인 나경석은 자신이 알고있던 지식을 총동원하여 상대성이론에 대해 무려 7편에 걸친 시리즈로 상세히 설명한다. (중략) 세마science가 경제체제의 대변혁이나 정치혁명과도 같은 힘을 가진다고 본것이다.

 

(중략) 그는 상대성이론의 핵심인 중력으로 빛이 휘는 현상이 불과 3년전인 1919년 에딩턴의 관측으로 입증된 것을 시작으로, 250년간 이어졌던 에테르 가설이 무너졌다고 선언한다. 이어 시공간의 상대성을, 칸트의 철학과 연결하며 빛의 속도 일정법칙에서, 상대속도에 따라 길이와 시간이 변하는 민코프스키 4차원 공간으로 설명했다. 또한 이러한 변화로 유클리드기하학이 리만기하학으로 대체되었다는 서술도 덧붙인다.

 

(중략 / 경성공업전문학교 1회 졸업생 김용관이 / 연구소설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1924년 설립된 발명학회는 재정부족으로 유명무실 (중략) 1933년 발명학회가 재정비되고 (중략) 우리나라 최초의 세마잡지science megazine를 발간한다. 순식간에 초판이 매진되자

 

(중략 / 1965년) 홍릉에 대한민국 최초의 세마연구소를 설립한다. (중략) 최초의 물리학박사가 되어 서울대학교 총장과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최규남이 준비위원장

(중략)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탠퍼드대학 프레더릭 터먼교수가 자문단장을 맡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터먼보고서'에 기초해 탄생한 '과학원'은 기존의 연구소와 합쳐져 KAIST가 되어 대전으로 이사했고, 남은 홍릉의 연구소는 KIST가 되었다." (69~79쪽)

 

4. 1922년 아인슈타인의 아시아 방문

* 아인슈타인은 싱가포르와 실론, 상하이도 방문했고, 중국과 인도에 대해서도 자료를 남겼다.

 

아인슈타인과 러셀은 1차대전을 반대했고, 일본은 영국과 함께 1차대전의 승전국이 되는 행운을 잡았다. 그런 가운데 러셀이 일본을 방문했었던 모양이다. 아인슈타인과 레닌까지 초청해서 일본의 발전을 추진했던 세력들은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본 전체를 변화시킬 힘은 없었다. 일본의 아이러니다.

 

"1921년 7월 일본의 사회주의 잡지사 가이조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한 버트런드 러셀은 다음 초청인사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주저없이 아인슈타인과 레닌이라고 답했다." (81쪽)

 

최초의 독일유학생 김중세와 황진남이 아인슈타인을 학회에서 만났다는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의 사촌누이로부터 안타까운 눈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황진남에게 아인슈타인의 사촌누이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양이) 당신은 아인슈타인이 누구인지 아시오? (중략) 아, 가여운 양반!

 

(중략) 유대인 배척이 심한 독일이 그를 위하여 특별히 천문대를 창건한 것을 보든지, 독일을 그렇게 배척하든 영국과 전국 각 학교에 독일어 교수를 금지하든 미국이 그를 초청하는 것을 보면, 심지어 독일것이라면 열성으로 증오하는 프랑스까지 그를 초청하야 후대하는 것을 보면, 그의 세마공적이 위대함을 생각할수 있다.

 

(중략) 아인슈타인씨다. 연소한 용모에 단순하고 온공한 태가 분명하며, 너그럽고 검은 두눈은 학자의 위엄을 대하였다는 것보다 미술가의 비장한 기색을 발현한다." (87~9쪽)

 

"아인슈타인 박사가 독일의 대학교수로 받는 월봉은 (중략) 조선인 순사보다도 더욱이 가련치 아니한가 (중략)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중략) 한달이 넘게 지속된 아인슈타인의 일본방문은 이처럼 엄청난 관심속에 진행되엇고, 이제 조선에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은 지식인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인식되었다." (92~3쪽)

 

5. 상대성이론 강연회 : 1923년 조선 전역

 

"도쿄 유학생들은 여름방학 동안 조선전역을 순회하는 강연을 기획한다. 그들의 리더로는 한위건과 이여성이 있었고, 여기에 수학과에 재학중이던 최윤식이 합류했다. (중략) 경성의전 학생으로 시위를 주동했던 한위건은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이다. (중략) 님웨일스의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김산의 라이벌이었던 한위건 역시 중국에서 병사했다(역시 의사였던 부인 이덕요도 중국에서 병을 얻어 사망)

 

(중략 / 만석꾼의 자손으로 17세였던) 이여성은 무장독립기지를 만든다며 집에서 토지문서를 훔쳐 45,000원을 마련해 중국에 간다. 당시 한가마니 가격이 3원정도 (중략) 이여성은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활약하며 해방을 맞았다. 여운형과 같이 좌우합작을 기도했지만 실패하고 월북했으나 얼마뒤 그의 기록이 사라졌는데, 아마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92~104쪽)

 

상대성이론을 주제로 한 강연회는, 물리 - 경제 - 정치를 주제로 한 시국강연이었다. 서재필의 귀국강연회가 만민공동회로 발전하여 민주공화국의 정치체제가 한반도에 소개되었듯이, 이들의 강연회는 한반도의 지식사회를 들끓게 하여 계몽과 독립열기를 키운 모양이다.

 

1) 절대와 상대 : 최윤식

2) 문화운동의 경제 고찰 : 김영식

3) 개성발전과 사회발달 : 한위건

 

 

"(1923년 여름) 상대성이론 강연의 열기는 대단했다. 7월 7일 부산항에 도착한 당일 부산강연(500명), 8일 마산(300명), 9일 진주(800명), 10일 밀양(300명), 공주, 청주, 14일 수원(천명), 15-16일 서울, 17일 인천, 18일 개성(500명), 19일 연백(600명), 20일 해주, 21일 사리원, 22일 평양, 24일 진남포, 25일 정주, 26일 최윤식의 고향 선천이 마지막회로 거의 한달간 조선전역을 달구었다." (99~101쪽)

최윤식, 김영식, 한위건 : 94쪽

 

6. 간토대지진과 우장춘, 베를린의 황진남과 이극로 : 1923년

 

독일의 황진남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의 경제난으로 공부가 힘들어지자 미주한인들에게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쓴다. 24년 2월의 일이다. 교포들이 모금하여 6월에 베를린 유학생 대표에게 전달하는데, 감사편지를 보낸 사람이 이극로다. 호소문을 보낸 황지남은 파리로 갔다.

 

"(1928년 6월) 뉴욕한인청년회 주최로 이극로 박사의 국어강연이 있었다. 이박사는 금년 여름에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학위를 얻고 구국하는 길에 뉴욕에 들렀다. 이박사는 오래전부터 국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여 왔으며 베를린대학에서 4년동안 독일학자들에게 우리말을 소개하며 교수하였다 한다." (122쪽)

 

대종교 - 조선어학회 - 조선말큰사전 - 이희승 국어대사전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가 또 끝난듯하다. 한글을 지키고 우리말을 멋지게 살릴수 있다면 좋겠는데, 시대가 과연 그것을 허락할지 모르겠다. 용광로처럼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다양한 문화가 미래의 힘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글을 지켜나갈 것이다.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 독립운동이었던 것처럼 세계평화운동이 곧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운동이다.

 

"함흥형무소에서 해방을 맞은 이극로는 즉시 조선어학회를 부활시켰고, 중단되었던 사전편찬을 재개한다. 문제는 사라진 원고였다. 일본경찰이 없애버렸다고 절망할즈음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

 

(중략) 재판은 함흥에서 진행되었다. 투옥된 이극로 등은 혹독한 고문에도 끝까지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여 재판은 1945년초까지 이어졌다. 재판이 길어지며 관할법원이 경성고등법원으로 옮겨지자 일제는 증빙자료였던 이 원고를 함흥에서 서울로 이송했다. (중략) 결국 몸이 부서져도 굴복하지않고 재판을 이어간 조선어학회 회원들이 원고를 지켜낸 셈이다. 이극로 등은 감격하며 신속히 '조선말큰사전' 제1권을 1947년에 편찬해낸다. (중략) 이극로는 좌우대결로 빚어진 분단상황을 막아보려고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위해 방북했다가 북에 남았다. 전쟁후에도 작업은 계속 이어져 1957년 6권을 마지막으로 완간되었다." (270~1쪽)

 

7. 브나로드운동과 이태규, 지식인의 좌절

 

여기까지 읽어오다가 아쉬운 기분이 든다. 독립운동과 공부하는 것말고는 뭔가 이야기가 없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기는 하지만, 어떻게 공부하고 무엇이 동력이 되었는지,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등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이태규가 이회창의 큰아버지라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세마학자scientist의 집안에, 논리와 진리가 잘 배어있는 법학자는 왜 나올수 없었는지 아쉬울 뿐이다.

 

"1930년대 전세계로 퍼진 대공황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도 몰려들었다. 지식인 계층도 별볼일 없었고, 유학파 고학력 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났다. 당시 나치의 괴벨스 역시 하이델베르크대학 박사출신 실업자였다. (중략 / 1932년) 이태규는 이런 상황에서 교토제국대학에서 (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략) 이태규는 식민지 시절임에도 교토제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이후 화학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양자화학' 분야에서 세계의 석학으로 성장했다." (141~2쪽)

 

역사를 다른 방향으로 엮어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야구경기를 구경하다가 체포되어 4년여의 옥살이를 했다는 것도 낭만이 넘치는 웃기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여전히 살짝 아쉽기는 하다.

 

"만능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은 1912년 한국 최초의 야구단인 YMCA 야구단을 이끌고 일본원정을 떠나기도 했다. (중략 /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국제경기에 관심을 가졌던 여운형은) 1929년 상하이에서 야구경기를 보던 도중 그를 포위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중략) 1933년 옥살이를 마치고 조선중앙일보 사장이 되었다. 1934년 시인 이상이 문제작 '오감도'를 발표한 신문이 조선중앙일보였다. 이해불가의 작품이라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지만, 15회나 연재될수 있었던 것은 실험과 자유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중략) 손기정이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여운형이 사장를 맡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는 자진휴간했다가 폐간" (149~50쪽)

 

독립운동은 좌우를 가르는 운동이 아니었다. 레닌의 독립자금이 불씨가 되어 분열하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마음은 하나 같았다. 하나된 마음이 하나의 정치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냉전 시대의 유물과 정치인들의 권력욕 때문이었다. 그 모든 역사의 분열이 손정도 목사의 자손들에 의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이었던 손정도 목사의 딸인 손인실은) 1935년 베이징 대회 우승이후 이화여전에 진학해 매년 신기록을 스스로 경신하고 그때만다 신문에 그녀의 근황이 대서특필되었다. (중략) 손정도 목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던 김형직 부부와 친분이 있었다. 손목사는 김형직 부부가 사망하자 그들의 어린 아들을 거두어 키우게 된다. 이 아들이 바로 김일성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손목사의 자녀인 손원일, 손원태, 손인실을 만나게 된다.

 

(중략)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해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에게 맞섰다. (중략) 공병우의 타자기를 도입해 정전 협정문을 한글타자기로 작성하게 만든 사람 역시 손제독이다.

 

(중략) 김일성은 1991년 미국에서 의사로 지내던 손원태와 연락이 되자 평양으로 초청했다. 그후 둘은 매년 평양에서 만났다.

 

(중략) 손원일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손인실은 뉴욕에, 손원태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며 손정도 목사의 세남매는 모두 다른나라에 묻혔다." (150~3쪽)

 

언어학자 이극로는 공병우에게 가로쓰기용 한글타자기를 개발하도록 하고,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인 김두봉과 함께 월북한다. 정전협정을 체결할때, 김두봉은 공병우타자기로 작성된 협정문에 손원일 제독과 함께 자란 김일성이 서명하는 것을 지켜봤다. 한반도의 슬픈 역사다.

 

"해방후 공병우는 이극로의 조언으로 한글 타자기를 완성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중략) 부산으로 피난간 그는 우연히 '공병우를 찾는다'는 광고를 전봇대에서 발견했다. 타자기의 효율성을 너무나 잘알고 있던 해군제독 손원일의 지시였다.

 

(중략) 손원일 제독이후, 공병우 타자기를 공문서에 광범위하게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었고, 한자 입력은 되지않는 타자기 특성상 공문서의 국한문혼용이 한글전용으로 급속히 바뀐다."(270~1쪽)

 

공병우타자기로 작성한 정전협정문

https://youtu.be/wBrLucvWOuc?feature=shared

 

 

8. 양자역학의 도입 : 1934년 과학데이

 

세마에 기초한 사람들의 활동이 나라를 변화발전시킨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인정하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들이 할수 있는 일은, 공부해서 실력을 키우는 한편, 대중들에게 자신들이 공부한 것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생존의 위기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공부라는 벽은 높았다. 인식의 변화까지 일으킬수 있으려면, 대중들 각자가 어느 정도의 공부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일제나 독재의 탄압도 이겨내기 어려운 것이고, 현실 생활의 짐도 쉽게 내려놓기가 어렵다. 천천히 조금씩 나아갈수밖에는 없다. 살육에 바탕을 둔 싸움과 혁명으로는, 무엇을 얻을수 없다. 단번에 얻으려 하지말고 교육과 배움을 통해 천천히 나가야 한다.

 

양자역학에 대한 한국인 최초의 이론물리학 논문을 쓴 도상록은 창씨개명을 하고,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연구에 매진하다가 만주국 신징공업대학의 교수로 부임한다. 반인륜행위를 서슴지않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과학데이 행사가 대한독립의 노력임을 간파하고, 주도자들을 검거하고 과학지식보급회를 해체하였다. 세마의날은 해방후에 복원되었다.

 

"1934년 4월 19일 서울시내는 과학데이라는 행사로 들썩였다. (중략) 한글을 세마science로 설명한 이극로 등 조선 최고의 세마학자들이 (강연자로 참여 / 중략) 그들은 전문가 몇명이 세마science발전을 이끌어갈 것이아니라, 조선사람 모두가 세마를 알도록 보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중략) 도상록은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한 열혈청년이었다. (중략) 1930년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다. (중략) 흥남에서 상대성이론 대중강연에 나선다. 역시나 대성황이었다. (중략) 하루하루 살아가야하는 식민지 노동자의 현실은 상대성이론을 듣고 한가히 시공간의 물리학을 논하고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156~8쪽)

 

9. 우장춘, 이태규, 리승기 : 1937년 교토

 

일본의 깡패들과 함께 민비 시해에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은, 반인륜 친일파라고 할수 있을까? 을미사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고종과 민비는 1890년대 조선의 개혁을 이끌수 있는 위치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틀어쥐고 조선을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다.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그들 자신이지 우리의 역사와 조선의 민중들이 아니었다.

 

우장춘은 씨없는 수박 뿐만이 아니라, 겹꽃 페추니아의 대량번식기술, 이종교배에 의한 유채라는 새로운 종의 합성등을 논문으로 발표하여 세계수준의 명성을 얻는다.

 

"(이태규와 리승기는) 일본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두사람이었지만, 긑까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지 않았다. (중략 / 우장춘은) 육종기술로 대량번식이 가능한 겹꽃 페튜니아 개발에 성공 (중략) 1935년 우장춘의 논문 '종의 합성'이 발표된다 (중략) 다윈의 이론에 다르면 이종교배로 만들어진 새로운 종은 생식능력이 없었다. (중략)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라는 서로다른 종을 교배하는 과정에서 유채같은 새로운 종이 만들어질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이를 학계에서는 우의 삼각형(U's triangle)이라 부른다.

 

(중략) 자신은 일본인 가문의 양자가 되어 자식 모두를 그 가문의 성을 따르도록 했지만, 자신만은 우라는 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179~82쪽)

 

종전후 일본에서 은거하던 우장춘이 귀국한다. 대한민국의 농업기반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그의 역량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일본이 패망하여 일본으로부터 종자수입이 어렵게되자, 한국의 농업기반은 붕괴직전에 이른다. (중략) 한국이 마주한 현실에서 그가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 사람인지를 설득했다. 모금운동을 벌이고, 이승만 정부를 설득해 예산을 확보했으며, 연구소부지를 마련했다.

 

(중략) 아버지 우범선이 강원달에게 부탁해 그의 호적을 조선으로 등록해두었기에 (중략) 우장춘은 재일 조선인을 귀국시키던 수용소로 들어갔다. 여기서 귀국선을 탄 것이다. (중략) 일본에 남은 우장춘 가족의 생계를 위해 100만엔을 보냈다. (중략) 하지만 우박사는 이돈을 가족들에게 한푼도 주지않고 종자를 사고, 서적과 실험기구를 구입하는데 다 써버렸다." (256~8쪽)

 

무와 배추, 감자와 귤 재배가 우장춘의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이 부분들도 자세히 알아둬야 할것이다. 민비를 시해한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이다. 우범선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우장춘의 이복누나인 우희명도 아들 강우창과 함께 피난 (중략) 자기 아들에게도 병역면제를 기회를 주길 원했지만, 우장춘은 정중히 거절했다.

 

(중략) 식량해결을 위해서는 채소, 특히 김치의 주재료인 배추와 무 종자확보가 우선이었다. 종자밭 마련을 위해 1951년 제주를 방문했다. 이곳이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자, 대신 귤 재배를 추진했다. 대체지로 선택된 진도에 1952년부터 배추와 무 종자밭을 가꾸었다. 인민군이 물러간 강원도에는 감자를 키웠다." (259~60쪽)

 

길고 긴 우범선과 우장춘의 이야기가 끝났다. 아버지가 범죄자였어도 우장춘의 공적으로 인해 우장춘은 인정받아야 한다. 아버지와 관계없이 우장춘은 업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놓치거나 미화된 것이 없기를 바랄뿐이다.

 

"(독도문제로 일본인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우장춘은 한국을 원망하지만) 전국각지에서 조의금이 쇄도앴다. 1954년 2월 우박사는 이돈으로 연구소의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을 팠다. 그리고 자유천이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을 세웠다. 자애로운 어머니의 젖과 같은 샘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후 매일아침 이곳에서 세수하고 주변을 정돈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중략 / 김장용으로) 자신의 육종기술로 한국의 토양과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배추품종을 만들려고 했다. 이에더해 고추종자까지 개발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먹는 배추의 조상 '원예1호'의 탄생이다.

 

하지만 세간의 불신은 상당했다. 이때 들고나온 것이 '씨없는 수박시식회'다. (중략 / 일본에서 개발한 씨없는 수박은) 육종학의 위력을 시범으로 보인것이다. 이런 노력끝에 그의 종자들이 퍼지며 한국은 마침내 '씨앗독립'에 성공하게 된다.

 

(중략) 우박사는 '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략) 우장춘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열렸다.아버지 우범선의 묘는 일본에 있지만, 그의 묘지는 수원으로 정해졌다.

 

(중략) 어떠한 정치이념이나 수사보다 세마가 세상을 바꿀수 있다는 것, 이것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273~5쪽) 

 

실크가 고급 스타킹의 원재료였던 모양이다. 조선시대부터 비단을 생산하던 한반도의 기술이 일본의 기술과 합쳐져 일본을 세계최대 실크생산국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해본다. 이또한 반인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조선수탈의 결과였을 것이다.

 

합성섬유 분야에서 세마학자 리승기가 일본 최초로 비날론을 개발한다. 리승기는 반인륜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불만을 터뜨리다가 투옥된 채로 해방을 맞이한다

 

* 비날론 : 카바이드에서 합성해낸 면의 성질에 가까운 합성섬유

 

"(세계 최대 실크생산국 일본) 1937년말 미국 여성들은 실크불매운동으로 일본경제에 충격을 주려고 했다. (중략) 듀퐁의 나일론이 1938년부터 사용되자, 실크가 나일론으로 대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략 / 1939년 리승기는) 일본 최초의 합성섬유 비날론 개발에 성공했다. (중략) 같은해, 듀퐁은 나일론스타킹을 출시하며 대박을 터뜨렸다. 

 

(중략 / 진주만 습격으로) 미국이 원유공급을 끊자 리승기 교수의 비날론 연구는 더욱 군사화되었다. 석유에서 합성하는 나일론과 달리 비날론은 석유가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183~6쪽)

 

확인이 필요한 사실들의 나열인데, 일단 그냥 따라간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들이 다리에 물감을 칠하면서까지 짧은 치마를 입으려했다는 것이고, 여성들의 시위로 듀퐁이 나일론의 독점권을 포기했다는 일이다. 정말 믿거나 말거나이다.

 

"미국은 낙하산 등에 쓰던 실크를 나일론으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나일론이 군수물자가 되자, 1940년대 여성들은 다리에 물감으로 색칠하며 버텼다. (중략 / 일본 패망후) 참다못한 미국의 여성들이 거리로 나서 폭동이 벌어졌다. 이결과 듀퐁은 나일론 독점을 포기한다.

 

한국에 나일론이 들어온 것은 1953년 코오롱이 시작인데, 코오롱은 코리아와 나일론의 합성어다." (186~7쪽)

 

10. 황진남의 귀국 : 1940년 함흥

 

안창호와 흥사단이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는데, 왠일인지 정겹지가 않다. 왜 그럴까? 어쨌든 안창호는 교육계몽을 위해 노력하다가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반인륜범죄집단인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고문을 받아 옥사하였다. 가슴아픈 일이다.

 

독립과 계몽을 위해 노력했던 윤치호와 이광수가 반인륜범죄자로 돌아서자, 이광수를 조롱하는 윤석중의 점잖은 비유가 통쾌하면서도 가슴 아프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만든 흥사단의 국내조직이고, 안창호의 요청으로 이광수 등이 주도한 모임이다. 이들은 무력투쟁이나 이념보다 교육과 계몽을 강조한 온건파였다. (중략) 안창호가 고문으로 1938년 사망했고, 나머지 대부분은 전향서를 써 살아남았다. (중략) 존경받던 지도자 윤치호, 이광수 등의 이런 모습에 모두가 충격을 받았다. 그나마 작은 저항은 '아무일도 하지 않는것'이었다.

 

최규남은 교단에서 쫓겨나 농사를 지었고, 최규남의 처남 채동선 역시 칩거하고 농사에 몰두했다. (중략/ 채동선의 고향은) 최규남과 결혼한 동생 채선엽을 위해 지은 것이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정지용이 월북하자 금지곡이 되었다.

 

(중략 / 윤석중은 학병입대를 권유하러 일본까지 찾아온 이광수에게) 운동회때 말입니다. 다섯바퀴를 도는 시합에 열바퀴를 돌았다고 해서 성적이 올라갈리도 없고, 상이 더 돌아올리도 없지 않겠습니까?" (193~4쪽)

 

 

대종교 - 홍범도 - 김좌진 - 이극로 - 조선어학회 - 한글 - 훈민정음해례본 - 전형필 - 주시경으로 이어지는 긴 연결고리를 깔끔하게 사실로 연결해주고 있다. 뭔가 아쉬우면서도 이런 연결이 민태기의 강점이다.

 

"대종교와 조선어학회는 해방직전까지 가장 극렬하게 일제에 저항했다. (중략) 대종교인이던 김좌진, 홍범도 두 장군의 활약 (이후 / 중략 / 한글운동을) 이끈 주시경이 대종교인이었고, 그들은 조선어학회로 뭉쳤으며 한글교육을 독립투쟁의 중심으로 보았다. (중략)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대종교 간부 대부분이 옥사하면서 대종교의 세력은 크게 위축된다.

 

(중략) 조선어학회가 반일운동을 유지하게 된 계기중 하나는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본'이다. 경북 어느 고택서가에서 발견된 이책의 존재를 알게된 간송 전형필은 무려 1만원이 넘는 거금을 주고 샀다. (중략) 세종대왕이 창살을 보고 ㄱ, ㄴ, ㄷ 등을 만들었다는 둥 엉터리 학설이 있엇지만,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견으로 논쟁은 깔끔하게 정리되고, 한글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때보다 고조되며,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202~3쪽)

 

삶은 길게 바라봐야한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일인것은 맞지만,

사람됨을 벗어나는 짓은 피해야 하고,

사람됨이 짓밟히는데도

참는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피천득과 이희승의 삶을 비교해보고,

사람답게 살다가 죽어야한다.

난날보다 갈날이 훨씬 가깝다.

 

"(반인륜범죄집단 일본제국주의에 공모한 모윤숙의

동생인 독립운동가 모기윤은) 조선인 검사에게

광복이 되었는데,

왜 독립운동가들을 풀어주지 않느냐고 항의해서

네분이 감옥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그분들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살이를 한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이희승

 

(중략) 이희승은 나중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4.19에서 교수시위를 주동하며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낸다.

 

(중략 / 동료교수였던) 피천득은 나중에 이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중략) 그저 인생을 착하고 아름답게는 살려고 했는데,

그게 끝이고,

우리나라는 과거에

저항운동을 꼭 해야할 필요가 여러번 있었어요.

 

근데 그걸 한걸음 나가지 못하고

뒷골목으로 다니면서 한숨이나 쉬고

이렇게 한것이 지금으로서는

한이고 부끄럽고 그렇습니다." (205~6쪽)

 

11. 해방공간의 꿈 : 1945년 서울

 

세계와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변하려면 곱게 변해야지 반인륜행위를 앞장서서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변해라, 사람됨을 유지하면서.

 

"(변절한 임화의 두번째 부인) 지하련은 '결별'을 시작으로 여러 작품을 쏟아냈다. 끊임없이 젠더 정체성을 고민하고 세심한 사유와 날카로운 성찰을 담았다. 하지만 지인들은 변절했다.

 

해방공간은 그녀에게 더욱 충격을 주었다. 반인륜행위를 서슴지않는 친일 변절자는 우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중략) 지하련은 반인륜행위를 서슴지않는 친일파들이 사회주의자로 변신하는 황당함에, 도대체 양심이란게 무엇인지 묻는다." (238쪽)

지하련과 딸 임혜란의 슬픈 최후는 분단의 비극이었다. 잘 살아도 잘 죽기가 어려운 시대였다.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던 임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는 인민군을 따라 도피한다. 이 와중에 전라도 방면으로 갔던 스무살 딸 혜란과 연락이 끊긴다. 퇴로가 차단된 호남쪽 인민군들은 대부분 빨치산이 되어 고립되었다. 이때 임화가 딸을 걱정하며 쓴것이 '너 어느곳에 있느냐'이며, 이 시는 결국 임화의 발목을 잡는다.

 

(중략 / 희생양으로서 박헌영과) 임화는 간첩혐의로 총살되고 시신은 방치되었다. 만주로 피신해있던 지하련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평양으로 갔다. 그녀는 실성한채 남편의 시신을 찾아다녔다. 이것이 지하련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중략)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이념갈등을 해방전후와 연결한 연극 '저물도록 너, 어디 있었니'를 무대에 올렸다 지하련 역할은 배우 손숙이 맡았다." (264~7쪽)

 

여순반란사건으로 좌익동지들을 전부 밀고하고 목숨을 구걸한 박정희가, 남북에서 모두 버려진 박헌영을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 역사는 배배꼬이며 흔들흔들 나아간다. 지하련이 양심이 있냐고 물었던 사람, 반인륜범죄자 친일파 박정희가, 사회주의자로 잠시 가는 길목에, 박헌영이 있었던 모양이다.

 

"(박헌영의 비서였던 박갑동은)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숙청되자 일본으로 망명해 있었다. (중략) 박대통령은 박헌영의 1945년 '8월 테제'가 자신의 인생관을 바꾸었다며 박헌영의 일대기를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해서 유신시대인 1973년 중앙일보에 박헌영의 남로당이야기가 무려 178회에 걸쳐 연재된다." (278쪽)

 

박정희를 감동시켰다는 8월테제가 궁금하여 검색해봤는데, 일부 문안만 찾을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스스로 투쟁한  힘에 의해서라기보다도 진보 민주주의국가 소련⋅영국⋅미국⋅중국 등 연합국 세력에 의하여 실현된 것이다. 즉 세계문제가 해결되는 마당에 따라서 조선 해방은 가능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 있어서는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한개로 분리하여 홀로 또는 부분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즉 세계 전체의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한다는 정도로 국제정치는 발전되었나니 그것은 편협한 국가주의에 대한 국제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오, 2차 세계 대전의 쓰라린 실물 교훈의 덕택이다.

 

이번 반파시스트 반일전쟁과정에 있어서, 조선 전체로 보아 응당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조선의 지주와 민족 부르조아지들이 대체로, 일본 제국주의의 살인 강도와 같은 침략전쟁을 지지하기 때문이었다. 이들 반동세력은 전시 국가 총동원 체제 밑에서 조선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등 일체 근로인민의 의사를 무시하고 잔인무도한 군사제국주의의 탄압을 행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혁명투쟁이 대중과 함께 전개되지 못한 약점이다. 여기에서 우리 조선은 민족의 자기비판을 하여야 할 순간에 이르렀다." (박헌영의 8월테제 중에서) 

 

남승룡에 대해서는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끌렸다. 그런데, 이런 그의 말을 들으니, 끌림의 기운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알았다.

 

"(남승룡은 1947년 보스턴마라톤에서) 까마득한 후배 서윤복이 우승할수 있도록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기꺼이 맡았다. 성적은 12위 (중략) 베를린에서 손기정이 부러웠던건 금메달이 아니라 금메달에만 주어진 꽃다발이었다. 손기정은 그걸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지만 난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번에 선수로 뛴 이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달 기회였고, 또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240~1쪽)

 

12. 한글타자기와 우장춘 : 1953년 판문점

 

대한민국에 최형섭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민태기의 생각으로는 한국 세마와 경제의 발전에 주춧돌을 놓은 것이 최형섭이다. 세마기술이 아니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상품이 없이는 사람의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최형섭은 최지환의 아들이다.

 

"1907년 헤이그특사파견이 일어나자, 구연수는 일진회 회원 300명을 동원해 덕수궁을 둘러싸고 고종의 퇴위를 요구해 관철했다. (중략) 고종의 강제폐위는 군대해산으로 이어졌다. 대한제국 군대는 그냥 물러서지 않았다. 군인들이 봉기하며 일본군과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중략) 경상도 진주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다. 진주의 하급경찰이던 25세의 최지환은 단신으로 진주군영으로 들어가 봉기를 준비하던 지휘관을 감금한다. 진주봉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진압되고, 최지환은 이 공로로 일제의 훈장을 받으며 초고속승진을 했다. (중략)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다. 식민지 조선인이 오를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중략 / 최지환은) 고향진주에서 권번(기생조합)을 만들기도 하고, 당시 섬유산업에 주목해 일본인들과 견직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116~8쪽).

 

"최형섭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다. 군대해산을 주도한 최지환의 아들로 태어나 와세다대학에서 유학 (중략)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고향진주인근 사천공군에 입대한다. (공군에서 장면의 동생인 항공공학자 장극박사의 추천으로) 미네소타에서 금속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중략) 최지환의 친구였고 황진남과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김법린이 2대소장이 되었다. 김법린의 추천으로 1962년 원자력연구소장이 된 최형섭은 탁월한 연구행정능력을 보이며 세마계의 신망을 얻게된다.

 

(중략) 대한민국의 1960~70년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끈 세마발전은 거의 모두 그의 리더십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공로로, 최형섭은 과학기술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276~7쪽)

 

생각날때마다 한장씩 천천히 읽고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자꾸 아쉬움이 남아서 한번에 읽고 정리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읽어내렸다.

 

한반도의 세마기술사를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뛰어난 책이었다.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은 할수 없는 필요한 접근방식이었다. 세마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자극이 되어 보다 풍부한 사료와 자료들을 근거로  더 재미있는 책들이 나왔으면 좋겠다.

 

남북한을 포괄하는 역사의식이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100년도 안되는 역사를 돌아보면 뿌리가 같음이 분명하다. 한나라로 통일되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남북좌우를 아우르는 한반도 세마의 역사를 완성해야 할 시기다. 한반도의 평화가 절실하고, 한배에 타고 있다는 서재필의 이야기가 깊은 울림을 준다.

 

가장 중요한 것, 혁명과 전쟁을 아우르는 한국인이야기를 재미있게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