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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서재

러셀과 수학의 원리, 로지코믹스_231231 el domingo, treinta y un de diciembre_Воскресенье, тридцать один Декабрь

graphic novel 그림이야기라는 형식이다. 즐거운 우리말을 만들어 쓰자. graphic novel 이라고 쓰고, 그래픽 노블이라고 읽을 정도 수준의 문화를 가진 시민들은 아니다. 우리가. 만화는 일본한자어가 아닐까 의심되고, cartoon은 영어니 우리말로 그림이야기가 좋겠다. 의미 전달이 잘 된다. 소설도 일본한자어이거나 중국어일 가능성이 높아서 쓰지 않으려 한다.

 

어려운 이야기, 어려운 세마 science이야기를 그림으로 쉽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런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쉬울까? 일단 접근이 쉽다. 그림이야기니까.

 

저자는 아포스톨로스. 뭔가 그리스 분위기가 확 살아있는 이름이다. 그리스에 여전히 학문과 예술의 힘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러셀(1872~1970 : 와, 거의 백살까지 살았다)은, 영국 수상을 지낸 할아버지의 집 펨브로크 로지pembroke lodge 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디프테리아로, 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조부모 무릎 위에서 가정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성경공부는 할머니로부터 받았으며, 특히 재미있어 한 것은 수학이었다. 위키백과에는 형인 프랭크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웠다고 했는데, 이 책에는 수학선생님으로부터 '삼각형에서 두개의 밑각이 같으면 두개의 변의 길이도 같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수학의 즐거움을 알았고,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자살충동을 억누를 수 있었다고 한다. 수학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무엇이 있다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으니, 사룸life을 와아happy하게 유지하고 싶다면, 평생이 걸리더라도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이른바 '거대한 사건'은 대체로 비합리성의 측면에서만 거대합니다. 전쟁만큼 비합리성이 거대한 것도 없지요" (37쪽)

 

대중을 움직이려면 논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해야 하고, 감정은 논리와는 다른 세계의 생각이다. 논리가 대중을 지배하게 될때, 어둠에서 깨어나 야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수천년은 지나야 가능한, 거의 무릉도원에 가까운 세상이므로, 절대로 기대해서는 안된다. 야만에서 조금 벗어난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다사에 의하면 논리를 세우고 -> 믿음이 생기면 -> 믿음을 지키기 위한 억압이나 폭력이 생긴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논리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있는데도, 종교와 도그마에 빠지는 것을 보면,

[ 어느날 믿음이 생기고 -> 믿음을 지키기 위한 확증편향이 생기고 -> 논리를 만들고 -> 믿음을 지키기 위한 억압이나 폭력이 생긴다 ] 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거짓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사느니,
진실과 더불어 미치는 쪽을 택하고 싶다  - 버트란드 러셀

사람답게 대충 거짓도 섞어가며,

제정신으로 "진실에 가깝게" 살고 싶다  - 무일

 

그림책이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나, 넘어가기는 쉽다. 넘어가지 않으려고 하다보면 결국 책을 읽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확인해야 한다.

 

러셀은 자살충동을 억누르고 백살 가까이 살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문제의식을 따라가면 우리도 백살을 견딜 수 있는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다. 성과는 필요없다. 자세와 과정이 중요하다. 세마학자scientist도 철학자도 러셀의 자세와는 다르다.

 

"캠브리지에서는 어느 누구도 진짜 수학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수학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본성이라든지, 우리가 수학의 진리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하는 사람이 없어요. (중략) 수학자들도 철학자들이 품은 진리에 대한 열정을 조금이라도 가졌으면 하고 바라요.

 

(중략) 수학자들은 적어도 각자 다른 말은 안하려 애쓰거든요. 그런데 철학자들은 안그래요. 그들은 전부 다 '위대하고', 전부 다 다른 말을 하죠. '철학공부'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생각으로 죽을 끓여서 꾸역꾸역 먹는 것과 다름없어요. (중략 / 정신에 관한 개념들에 대해) 위대한 칸트는 '본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위대한 흄은 '습득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과 물질에 대해, 데카르트는 대립한다고 하고, 스피노자는 대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92~6쪽)

 

러셀의 역설 1(169쪽) : 이발사의 역설(자기언급 self-reference의 역설)

 

이발사가 사는 마을에 다음과 같은 법이 선포되었다.

 

"모든 거주자는 스스로 면도를 하거나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발사는 이 법을 어떻게 해야 지킬 수 있을까?

 

① 스스로 면도를 했다 -> 면도를 한 사람이 이발사다 -> 스스로 면도하는 사람이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았으므로 법을 위반했다.

②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았다 ->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았다 ->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면도를 했으므로 법을 위반했다.

 

③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았다 -> 스스로 면도를 하지 않았다 -> 스스로 면도하지 않은 사람이,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았으니 법을 지켰다.

④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지 않았다 -> 스스로 면도를 했다 -> 이발사에게 면도를 받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면도를 했으니 법을 지켰다.

 

결국 이발사는 어떤 경우에도, 법을 위반하게 되거나, 법을 지키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천재가 반론을 한다. 1, 2는 맞지만 3, 4는 아니라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도 안되고 동의가 되지 않는다.

 

이분법으로 어떤 행동을 살펴보면, 법을 지키거나 법을 지키지 않는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발사의 경우에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법을 어기거나 지키게 된다. 논리가 맞지 않는 역설, 자기언급의 역설, 러셀의 역설이다.

 

러셀의 역설 2(171쪽) : 책의 역설

 

자기를 언급하지 않은 책들을 모두 열거한 목록을 만들어 책으로 내보자.
그 목록은 자기자신을 포함할까요?

 

① 책이(목록에) 자기자신을 포함(열거)한다면 -> 목록에 자기자신이 포함되지 않는다 -> 자신을 언급한 책은 목록에 열거되어 있을 수 없는데, 목록에 열거했으므로 모순이다.

② 책이(목록에) 자기자신을 포함(열거)하지 않는다면 -> 목록에 자기자신이 포함한다 -> 자신을 언급하지 않은 책은 목록에 열거되는데, 자기자신을 열거하지 않았으므로 모순이다. 

 

결국 목록이 자기자신을 포함하든 포함하지 않든, 모순이 발생한다. 논리에 맞지 않는다.

 

러셀의 역설 3(167쪽) : 새의 역설

 

모든 새들의 집합은 새가 아니다.

 

① 새들의 집합 = 종달새, 매, 오리, 새1, 새2, 새3, .......

② 집합의 원소를 끊임없이 나열해도 자기자신인 '새'는 없다. 있을 수가 없다.

③ 새의 집합에 새가 없으니, 새가 아니다.

④ 그러므로 모든 새들의 집합은 새가 아니다.

 

천재와 우주신에 의하면, 이것은 러셀의 역설이 아니다. 자기자신을 언급하는 문장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새들의 집합'은 '집합개념으로서의 새'가 아니다. 개별 새들이 모여 있을 뿐이라고 한다. 결론은 같다.

 

"아름다운 새여,

 너의 다정한 짝이

 보송한 목을 네 목에 감으면서

 돌아온 너를 환영할 집으로 가는구나!" (88쪽 / 퍼시 셸리 <알라스토르> 중에서)

 

러셀의 역설(172쪽) :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자신을 포함할까?

 

자신을 포함하면 ->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는 정의에 위배되므로 ->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의 원소가 아니다 ->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

 

자신을 포함하지 않으면 -> 자신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집합들의 집합"의 원소가 된다 -> 자신을 포함한다.

 

포함하면 포함하지 않고, 포함하지 않으면 포함하는, 이 말도 안되는 역설에서 무너지는 것은 무엇일까?

집합이론일까? 집합이론의 어느 공리가 무너지는 것일까? 부분집합에 대한 공리일까? 칸토어는 집합론을 토대로 무엇을 생각했을까? 무한을 세기 위해, 무한한 원소들을 1:1로 대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틀린 것일까?

 

"(정신병원의 칸토어) 드디어 자유를 얻었고! 그 영국인이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단 말이오." (173쪽)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가능할까?

 

① 가능하다면 -> '자신을 제외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도 가능해야 한다.

② '자신을 제외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이분법으로 생각해보면,

③ 자신을 포함한 집합이라면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고(러셀의 역설),

④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라면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 된다(러셀의 역설).

⑤ 집합은, 자신을 포함하는 집합이거나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이어야 하는데,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⑥ 그러므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정의할 수 없다.

⑦ 그러므로 모든 집합들의 집합은 불가능하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이다.

'모든 집합들의 집합'이 불가능한 것이 왜 구원인가?

 

러셀의 역설을 시작으로 해서, 화이트헤드 - 비트겐쉬타인 - 괴델 - 튜링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를 정리해야 한다.

 

화이트헤드와 러셀

 

"우리의 걸작(수학의 원리)이 대성공을 거두는 꿈을 10년간 꾸었는데, 결과는 그랬다.

 

출판사는 그 원고를 평가해줄 사람을 단 한명도 찾지 못했다는군. 그래서 생각했대.

'돈을 받고 <수학의 원리>를 읽을 사람이 없다면, 당연히 돈을 내고 읽을 사람도 없다'

 

출판사의 생각은 타당했다.

 

그러나 <수학의 원리>가 사상의 세계에 진입해야 한다고 확신한 우리는 우리의 글을 인쇄하기 위해 돈을 내는 굴욕을 감내하기로 했다.

 

(중략) 책이 출판되고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는 '이 사람이 무지막지하게 난해하고 기로호 가득찬 그 2천여쪽을 빠짐없이 읽었구나' 하는 확신이 드는 인물을 단 한명 만났다." (200쪽)

 

* 이타카 Ithaca : 오디세우스 고향. 확실한 논리를 찾는 과정에 대한 은유.

 

"그러니까 자네 말은 그들이 신경증이나 뭐 그런 병에 거리지 않았다면, 논리학을 창조하는데 필요한 열정과 끈기를 갖지 못했을 거라는 얘긴가?

러셀이 1+1=2를 증명하는데 왜 362쪽이 들었는지 에릭에게 한 말 기억나나?

"정말 확실하게 증명하려면"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지.

아마도 러셀만큼 심한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러서라도 확실하게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안할걸세." (206~7쪽)

 

"진정한 빅토리아 시대의 자식인 나는, 모든 사람을 이중인격자로 보는 법을 일찌감치 배웠다.

  한 인격은 순수하기 이를데 없고, 이성을 신조로 삼는 반면에.....

  또다른 인격은 구역질나는 악당이어서 항상 제한없는 쾌락을 추구한다." (235쪽)

 

러셀이 인정했다시피 우리 모두는 이중인격자다. 절대선과 절대악이 없고, 절대지혜와 절대무지도 없다.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면, 경멸하고 멀리하고 증오한다.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잘난체하며 위선을 떤다고. 그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서, 티끌만큼이라도 잘못한 것이 보이면, 달려들어서 물어뜯어버린다.

 

"위선자다. 나쁜 사람보다 더 나쁜 악마다. 다시는 공개발언을 못하도록 매장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악하게 살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악은, 우리 모두를 지옥에 빠뜨린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은밀한 부와 그럴듯한 권력을 누리고 싶은데, 자신들의 악행을 아프게 지적하는 것이 싫다.

 

그리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안다. 그 자신도 악행을 저지르는 이중인격자인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할까? 모두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모두가 착하게 사는, 도달할 수 없는 낙원에 대해. 지침인 북극성은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북극성처럼, 아무도 비난하지 못하고, 누구도 희생되지 않는 '우리의 북극성'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적당히 악행을 저지르는 우리 모두를 위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적정 확률로 멋있게 살자!"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대략 60%(사람마다 달리 설정할 수 있다) 정도는 멋있게 살아야 한다. 멋있게 살지 못하는 40%(사람마다 달리 설정할 수 있다)에 대해서는, 온갖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끄럽게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욕망을 멈출수 없어도 멋지게는 살자.

 

비트겐슈타인과 러셀

 

"모형제작을 계기로 그는 첫번째 중요한 사상에 도달했다. (중략) 실재의 부분 각각이 기호로 대체되는군. 그리고 기호들이 그것들간의 실제 관계에 맞게 재결합하는데, 그 관계는 언어에 의해 매개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모형에 불과합니다. 언어는 실재의 그림입니다. (중략 / 러셀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영국에서 내가 경험한 일들은, '언어는 거짓의 도구'라는 내 견해를 현실에서 입증했다.

 

(중략 / 1차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러셀에게) 우리 젊은이들의 정신을 망쳐놓는 대가로 독일황제에게 얼마를 받나? (중략 / 최전방 관측병의 참호에서) 죽음을 대면하는 순간, 비트겐슈타인은 근본 깨달음에 이르렀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속에 있지않다. (중략 / 한편 러셀은) 싸우는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기소당했고, 법정에 섰다. (중략) 브릭스턴 형무소에서 논리학체계의 전제들을 방어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략) 논리학은 언어의 형식이에요. 철골구조가 건물속에 들어있듯이, 논리학은 언어속에 들어있어요. (중략) '내일 눈이 오거나, 아니면 오지 않는다'라는 진술은 어떤가? 이 진술은 공허한 형식이지만 완벽한 진리야. 맞아요. 하지만 내일의 날씨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진리죠.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20년간 항진명제를 생산하는 기계의 존재를 정당화하려고 비지땀을 흘린 것이었다. (중략) 세마sceince가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해하려면 세계밖으로 한걸음 나가야만 해요! 언어도 없고 생각도 없다면 대체 무얼 어떻게 이해한단 말인가?"(245~65쪽)

 

비트겐슈타인이나 헤겔은 우회하는 것이 맞다.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니, 제대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는 것이 좋다. '수학의 원리'도 우회한다.

 

우회했다면 할말이 있는가? 논리학은 언어속에 있더라도, 증명할수 없는 참인 명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논리에 맞게 말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들어, 한국정치는 40%의 비겁한 대중들의 결정에 의해 움직인다. 그들은 어느편에도 서있지 않다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편을 결정한다. 이런 주장에 대해 천재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정치란 무엇이고,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무엇인가? 어느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것은 신중하게 개별사안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진영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롭게 사안을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윤석열을 만들어내는 것이 40%다. 그들이 비겁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나? 촛불혁명으로 박근혜를 탄핵시켰다. 그때에만 40%가 비겁하지 않은 것인가? 그때도 비겁했다.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세를 따랐을 뿐이다.

 

괴델과 러셀

 

"책 전체에서 나는 그책의 가장 기초가 되는 전제를 명확하게 진술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요? 그 전제가 대체 뭔가요?

[ 모든 참인 논리명제가 참임을 증명하고, 모든 거짓인 논리명제가 거짓임을 증명하기가 이론으로 가능하다 ] 는 것이 그 전제입니다.

 

어떤 것이 참이라는 말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수님은 그 전제를 공리로 내세우시는 겁니까?

아뇨, 그 전제가 논리체계의 본질을 반영한다고 추측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전제를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젊은이의 질문은 나를 풋내기 철학자 시절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내 노력의 중심에 공허가 있음을 아프게 깨닫게 했지요. 평생동안 메우려 애썼지만 메우지 못한 공허!" (277~8쪽)

 

"모든 수학의 진술을 증명할수 있을까? 정확히 말해, 참인 진술이라면 그 진술자체를, 거짓인 진술이라면 그것의 부정을 증명할 수 있을까? (중략) 답이 없는 질문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중략) 끝장이군요. (중략) 괴델의 '불완전성의 정리'는 꿈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289~91쪽) 

 

 

교육과 러셀

 

"논리학은 도구다. 빵을 자를수도, 사람을 죽일수도 있는 칼처럼. 나쁜 달걀로 좋은 오믈렛을 만들수는 없다. (중략) 그릇된 전제에서 출발한 논리는 사형집행인의 하녀가 될 수 있다. 또는 바보와 손발이 척척 맞는 동료가 될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구부러진 인간성'은 어떻게 펼수 있을까요? 본능과 감정과 습관의 해악은 어떻게 없앨수 있을까요? 떠오르는 대답은 하나뿐입니다. 아주 빤한 대답, 바로 교육. 그런데 과연 어떤 유형의 교육이어야 할까요?" (279~81쪽)

 

본능과 감정과 습관의 해악이라. 모두 가지고 있다. 오랜동안 교육을 받았는데도. 그 문제를 알고 있는 러셀조차도 증명할수 없는 참인 명제처럼, 풀지 못하는 문제다. 사람 자체의 문제이기에, 논리학으로 무장해도 결국은 프레게와 같은 인종차별주의자가 나온다. 아니면 정신병자가.

 

평화에 대한 반복된 세뇌교육, '특수한 나'들의 집합인 사회에서 '사람에 대한 존중은 끝이 없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복된 세뇌교육. 공동체에 대한 헌신은 의미가 있다는 반복된 세뇌교육.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된다.

 

다 이루려고 할 필요는 없다. 다 이룰수가 없으니까. 낙원을 자꾸 강요하지 말자. 나에게도 다른사람에게도. 10년단위의 세부교육계획은 계속 점검하고 변화를 주어 나가면 된다. 변화를 줄때, 이야기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결정하고 실행하면 된다. 미진한 부분은 또 10년이 있지 않나. 바위는 흙이 되기 위해 천만년의 태양과 비바람을 맞는다.

 

러셀은 '나쁜 달걀을 좋은 달걀로 바꿀수 있다'는 믿음으로 비컨힐 학교를 세우고 운영했지만, 실패했다. 그 학교에 다니던 러셀의 아들은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고, 손녀는 자살했다. [ 힐베르트의 아들도 정신병원으로 잡혀갔다. ] 교육의 실패로 그들의 자녀들이 불행해진 것이 아니다. 학교는, 교육으로 단숨에 사람을 개조할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때문에 실패했으리라.

 

러셀과 2차대전

 

"나도 라이프니츠와 똑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논리학 문제에서 사람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푸는 완벽한 논리를 발견하겠다는 꿈! (중략) 진리에 이르는 왕도는 없다. (중략) 확실성의 모범인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완벽한 이성으로 확실성에 도달할수 없다면, 하물며 복잡하고 어지러운 사람의 역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중략) 오로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어요." (299~302쪽)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누구도 확실하고 완벽한 답을 내놓을수 없다. 러셀은 평화를 지향한다면서도, 나찌에 맞서 2차대전에 참전해야 한다고도, 참전하지 말자고도 답하지 못했다. 소중한 사룸life들이 스스로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모두가 스스로 선택한 결과인가? 모든 나라에서 징병제를 실시했고, 나치와 일본제국주의는 세계의 적이 되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 적들과 마주하고 싸우다가 희생되었다.

 

앨런 튜링과 폰 노이만

 

러셀의 평생과제가 튜링에 의해서 발전되어지는 모습이 결론이어서 좋았다. 증명할수 없는 것은 그만 접어두고, 약한 토대위에서 하는 것말고, 증명할수 있는 것들을 해보자라는 생각. 그 생각을 실현한 기계. 튜링은 그의 삶을, 적절한 확률로 멋지게 살아냈다.

 

"튜링은 이렇게 말했어요. '좋아. 우리가 모든것을 증명할수는 없어.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증명할수 있는지 알아보자. 그리고 그는 증명을 정의하기 위해 1936년에 어떤 기계를 구상했지요. 그것은 컴퓨터의 특징들을 모두 갖춘 기계였어요! (중략) 스스로 구상한 기계의 초기형태를 이용해 나치의 암호를 해독해냈거든요.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새로운 논리학이었어요." (308쪽)  

 

'통상 지혜가 아니라고 배제되는 부분도, 허용해야 한다'는 아포스톨로스의 말은,

어차피 우리의 언어와 논리, 감성으로는 아직 완전한 지혜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오만하지도 말고', '오판하지 말자'라는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덕도 신공항 부지를 찾았던 이재명이,

증오의 칼날에 맞아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있다.

이 증오는,

허용할 수 없는 지혜에서 나온 것이리라.

 

"복수의 여신들이여,

 당신들의 분노를 느껴본 적없는 남자나 여자라면,

 그는 삶의 진면모를 전혀 모르는 자요.

 

 복수의 여신들이여,

 

 당신들이 아테나보다 더 늙었고,

 따라서 더 지혜로우므로 나는 당신들의 분노를 용인하겠소.

 그러나 오판하지 마시오.

 

 복수의 여신들이여,

 설득을 존중하고

 성스러운 이성의 힘으로 구현한 정의를 존중하시오.

 

 당신들의 지혜로 나의 지혜를 더욱 풍요롭게 해 주시오.

 당신들의 자비로 이 도시를 축복하시오." (314~5쪽)

 

책 제목이 왜 logicomix인가를 생각했다. 설명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뻔한 것이라도 생각해보라는 작가들의 의도로 읽힌다.

 

* logic + co + mix = 논리를 논리에 무심한 실재와 함께 섞었다. 논리는 논리고, 삶은 삶이다.

* 논리의 이상과 결함있고 덧없는 현실이 빚어내는 갈등'에 관한 이야기 : 책날개에서